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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5일 10시 39분 등록

강영희 저, 『금빛 기쁨의 기억』에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라는 일본적 감상주의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이 나온다.


“야나기는 이것을 쓸쓸한 정감이나 남모르는 정의 세계, 인정이나 마음의 하소연 등으로 표현했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 거기서 우러나는 정서적 아우라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한국 예술에 덮어 씌웠다. (p.80)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인욕(人慾)의 삶에는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벚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겐지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은 이 같은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한눈에 보여준다.

가는 길가에 그 여인의 집이 있었습니다. ‘거친 매축지(埋築地)의 허물어진 곳에서 달마저 쉬어가는 집에 내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라고 하면서 그가 그 집 앞에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전부터 정을 주고받는 사이여서일까 그 사람은 몹시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문 근처의 덧문 밖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동안 달을 쳐다보더군요. 빛이 바랜 국화가 퍽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에 다트듯 지는 단풍들이 과연 슬픔을 느끼게 하는 정경이었습니다.(p.82-83)

일본 국학의 완성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처럼 정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모노노아와레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가 모노노아와레의 전범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겐지이야기』였다. 참고로 덧붙이면 모노노아와레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sadness of things’라고 번역되기도 했다.(p.84)” - 『금빛 기쁨의 기억』중에서.


일본인 특유의 정서라는 모노노아와레의 예로 인용된 『겐지이야기』 중 일부분을 읽고 머리 속에 바로 떠오른 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라는 단편소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6년 반(半)자전적인 『이즈의 무희』를 통해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 소설은 사춘기의 연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그의 초기작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은 『설국(雪國)』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설국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은 실망스러운 것이다. 이 작가, 혹은 이 소설이 어째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이즈의 무희』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짧지만 완결된 구조인 이 단편은 나에게 있어 가장 인상 깊은 일본문학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수 차례 영화화된 것으로 알고 있기에 영화로 된 이 작품을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은밀한 욕망이기도 하다.

다음은 그 대강의 줄거리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인용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스무살의 ‘나’는 고아 기질로 뒤틀린 자신의 성격을 반성하고 그 우울함을 떨치려고 이즈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우연히 유랑극단 일행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극단의 14살짜리 무희 가오루와 정이 든다. 가오루가 보여주는 호감에 고아인 나는 위축되었던 기분이 느긋하게 풀어지고 일그러진 감정도 정화됨을 경험한다.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에 있는 소녀의 가련한 자태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결국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된다. 청춘의 설레임과 비애를 잘 표현한 서정성 짙은 작품이다.

“'기선이 시모다의 항구를 나와 이즈반도의 남단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난간에 기대서 바다 복판의 오오시마를 열띠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희와 헤어진 것이 아득한 옛날인 것같은 심정이었다.
......
내 옆에 소년이 자고 있었다.
가와즈에 있는 공장주의 아들로서 입시 준비차 도쿄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제일고등학교의 제모를 쓰고 있는 나에게 호감을 느낀 듯 했다. 조금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말했다.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뇨. 방금 사람과 헤어지고 오는 길입니다."
......
선실의 램프가 꺼졌다. 배에 실은 생선과 바다의 내음이 물씬거렸다. 껌껌한 속에서 소년의 체온을 따뜻하게 느끼며 나는 눈물이 나오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맑은 물이 되어 버렸고 그것이 주르르 흐르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달콤한 쾌감이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쓸쓸한 정감이나 남모르는 정의 세계 등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동적으로 느낀 것이 과연 일본적 감상주의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정감에서 우러나오는 쓸쓸함이나 슬픔이라는 건 어느 정도 보편적인 정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일본인 특유의 정서라는 '모노노아와레'와 관련하여 도올 김용옥과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사이에 나눈 재미있는 대담이 있다. 도올은 작가 박경리와 지면상으로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대담 중에 이 '모노노아와레'에 대한 특기할만한 언급이 오고 가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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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뼈 속 깊이 야만입니다.”

(도올) 아니,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헤이안 시대 때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깊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모노노아와레' 같은.

“(박경리)아~ 그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에서 말하는 사비니 와비니 하는 따위의 정적인 감상주의를 말하시는군요. 그래 그런건 좀 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하지요. 그러나 그건 일종의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에요. 선이 너무 가늡니다. 너무 미약한 일본 역사의 선이지요.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입니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淺鳴尊,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茶川龍之介), 미시마(三島由紀夫), 카와바다(川端康成)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티시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탈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걔들에겐 호랑이도 없구, 용도 다 뱀으로 변합니다. 난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일본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 연령의,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 일본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두 없구요. 일본은 정말 야만입니다. 걔들한테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주의도 없어요. 걔들이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운운하는 국수주의류 민족주의도 모두 메이지(明治)가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ized savages)이지요.”

(도올)나쯔메 소오세키(夏日漱石, 1867~1916)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나쯔메 소오세키요? 그 사람은 표절작가입니다. 구미(歐米)문학을 표절해 먹은 사람일 뿐입니다. 모리 오오가이(森鷗外, 1862~1922)가 조금 괜찮긴 하지만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다 있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를 못 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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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일본인들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신사참배나 역사왜곡, 독도에 대한 망언 등을 떠 올려 보면 박경리 선생의 말이 백번, 천번 옳은 말이라고 긍정하고 싶어진다. 그들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요, 그들의 역사는 ‘칼의 역사, 야만의 역사’이며, 일본이란 나라는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이라고 조롱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또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 ‘오에 겐자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오겡끼데스까’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이것도 일본적 감상주의에 속하는 것일까?) 등을 생각해보면 차마 그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얘기라고 맞장구 칠 수 만은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학문의 정밀성과 정직성과 정치함에 있어 확실히 뛰어나며 우리에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학문의 축적과 깊이, 그리고 그 아는 만큼의 지식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의 위치와 역량에 걸맞지 않는 속 좁은 짓과 어설픈 눈가림들이 계속된다면, 그들은 분명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은 이래저래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 Note : 만약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야마호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망(大望)』(원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울지 않는 새는 울도록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꾸가와 이에야스 (德川家)' 등 세 명의 개성적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을 읽으면, 일본인이 누구인지 대강,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금빛 기쁨의 기억』에서 말하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順從)’에 따른 수직질서의 전통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들의 혼네(本音, 속 마음)와 다테마에(建前, 겉모습)는 어떠한 형태로 표출되며 그 심리는 무엇인지가 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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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va
2005.06.25 02:14:48 *.229.121.147
솔직한, 조금은 나를 놀래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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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5.06.25 11:12:03 *.229.146.78
그들의 굽혀진 허리 앞쪽 복부에 깊이 감춰진 혐오스러운 야만성은 한가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절대로 가려 질 수 없다.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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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06.26 22:59:22 *.51.66.4
'대망' 꼭 읽어봐야 겠군요.
저는 모노노아와레, 엔까류의 감성이 진저리나게 싫습니다.
영화도 그렇고, 술집도 그렇고
설익은 카레를 먹는 기분이랄까요?
'금빛~ '읽고 더 심해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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