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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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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9일 17시 40분 등록
칼의 노래
김훈
장군의 칼, 또 하나의 자신

“이순신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칼은 온전히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 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강금실 전 장관의 이 글은 내가 ‘칼의 노래’를 처음 대하게 된 계기이자 ‘칼의 노래’에 줄곧 이어져 내려오는 이순신 장군을 잘 표현한 글이라 생각한다. 무엇이던 그 사람을 상징하며 그것으로 잘 설명되는 것이 있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할 때 마다 큰 칼을 옆에 차고 달 밝은 밤에도 잠 못드는 시름이 절로 느껴진다. 이러한 외로운 장군의 옆을 지켜주며 그의 공의 기원이자 근심의 시작이 되었던 칼의 노래, 칼의 울림이야 말로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칼의 공명은 바로 그 주인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산섬 달 밝은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칼의 울림, 그 냉정함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냉정한 칼의 울림이 떠나질 않았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표현된 장군의 면모가 더 나를 무겁게 하였다. 우리가 영웅을 대할 때는 아무도 범접 할 수 없는 범인이 아닌 초인의 모습일 때가 더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짧은 단문의 힘있는 문장은 다른 생각의 군더더기가 들어갈 수 없이 장군의 기개에 빠져들게 하였던 것이다. 문장 속에서 되살아난 장군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아직도 침범당하고 무너지는 후손에게 냉정하고 준엄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칼의 노래’가 말하는 이순신의 칼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一揮掃蕩 血染山河)’ ‘죽음을 받아내는 것이자 죽음 내어주는’ 것이다. “타인을 베는 칼은 순정한 칼이 아니다. 이때 이미 칼은 칼로서 베어지지 않는 생의 더러운 역사에 묶여있다. 순정한 칼이 진정으로 벨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칼의 도덕성은 그렇게 엄하고 비극적인 것이다”라고 남재일씨는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피의 울림, 그 뜨거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구나' 라는 검명의 장군의 칼은 그러한 피가 강산을 물들일 때마다 뜨겁게 포효한다. 장군이 가진 인간적인 모습이 그러하다. 사랑스런 막내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적은 철수함으로써 세상의 무의미를 내 눈앞에서 완성해 보이려는 듯 했다.- 자전거 여행, 김훈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두려움’이나 다른 표현으로 가두어 두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우리와 같이 마음 아파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을 극복하고 장군이 될 수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책을 덮으면 어떤 말들은 이것이 이순신의 것인지 아니면 작가 김훈의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처럼 소설적 자전이며 또한 허구의 내용도 닮고 있는 이 책의 뛰어난 구성은 차가운 날씨에 몰입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글은 바로 한자한자 원고에 쓰고 또 철저한 고증과 상상을 섞은 작가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그의 이러한 칼과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글 속에 생생히 살아난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자는 무릇 사무친 바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사무침은 이런 좋은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기록을 통해 꾸준히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온 장군의 준엄한 정신과 작가의 깊은 통찰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칼이나 펜이나 결국 같은 겁니다. 나아가 무기나 악기도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소설로 악기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칼의 노래’를 쓸 때 현충사에 가서 하루종일 칼을 쳐다봤듯 요즘 서초동 국악원 내 악기박물관에 가서 종일 놀다옵니다. 그 중에 향비파라는 악기는 아무도 연주법을 모릅니다. 악기는 떨림과 울림으로 구성되죠. 떨림이 있으려면 인간의 손이 현을 튕겨야 하는 법입니다. 악기의 공명통은 그 떨림을 울리게 합니다. 울림은 인간 몸의 확장이고 연장인 셈이죠. 악기의 울림엔 인간의 몸과 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칼을 들어 적을 벨 때 몸의 확장으로 상대방을 벤다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악기나 무기나 모두 ‘나’를 통해 울림과 죽임을 가능케 하는 ‘같은 작동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사물의 내면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죠."
IP *.14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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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12.09 18:50:25 *.118.67.206
그렇죠.
우린 그렇게 장군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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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5.12.12 11:20:25 *.75.166.109
칼은 힘의 상징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두려움'을 잉태하고 있다.
칼은 생명이 없으며 사고하지 않는다.
칼은 다루는 자의 생각과 뜻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방법이자 수단으로서 도구일 뿐이다.
칼날을 세우는 것은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의 강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타인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사소한 갈등과 대립을 잠재우기 위해서이다.
칼은 살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칼의 수양과 수행은 자신의 땀으로서 타인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칼이 갖는 비극의 시작은 휘두르는 자의 도덕성 이전에 무모하게 칼을 내어 준자의 무책임성때문이다.
칼은 무력의 상징이자 인간 본능의 충실한 수호자다.
때때로 그것은 붓으로, 과학문명의 도구로 위장하고
더 많은 살인과 잔인함으로 세상을 비극과 혼란으로 이끈다.

칼의 수행은 손에 쥐여진 칼을 능히 다루기 위함이 아니라
내밀한 마음 속에 숨겨진 유혹과 그릇된 욕망을 다루기 위함이다.
진정으로 칼을 능히 다루는 자는
칼을 손에 들지 않는다.
마음 속에, 눈길 속에,언행 속에,
항상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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