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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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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8일 23시 08분 등록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의 아침은 늘 출근 준비로 분주하다.
세수하고 머리감기. 면도하기. 드라이하기. 로션 바르기. 옷 입기. 넥타이 매기. 아침 먹기. 화장실 가기. 양치하기. 지갑과 핸드폰 챙기기. 그리고 출발하기.
정해진 순서대로 하나하나 해나가야 때 맞춰 집밖으로 나설 수 있다. ‘10분 일찍 챙기면 10분 일찍 출발하겠네?’라는 당연한 논리가 이 시간에는 정말이지 대단한 사치이다. 직장인과 고등학생은 알 것이다.

그런 아침 시간에, 한 차례 지연되면 반드시 지각으로 이어지는 작업공정을 무시하고, 나는 오늘 작은 사치를 하나 부렸다. 그 대상은 바로 전기 면도기.

이놈이 오늘따라 유난히 힘없이 돌아가는 소리를 낸다. 한번쯤 털어줘야 할 타이밍이 된 모양이다. 뚜껑을 열고 탈탈 털고 있는데, 어라? 면도기 깊숙한 곳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사실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이 시간대라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신문지를 가져다 펴놓고 퍼질러 앉아 면도기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한번 스윽 쳐다보면 답이 나온다. 몇 군데만 떼어보니 금새 칼날 부분까지 완벽하게 분해되어 놓였다. 깨끗이 털어 내고 다시 조립해서 돌리니 소리가 기똥차다. 내 기분도 기똥차다.
이런, 10분이나 잡아먹었다. 이로써 오늘은 별 수 없이 지각이다. 지각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지각이다.

이러한 비교적 귀여운 ‘삼천포 빠지기’가 내 일상에는 종종 생긴다. 그 대상은 대부분 ‘고장난’ OOO이다. 가장 흔한 것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컴퓨터나 전산기기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고장난 낌새가 느껴지면 이미 달려가 앉아 있다. 가끔 리모컨도 고치고 문짝도 고치고 신발도 고친다. 이것 저것 해보며 고쳐가는 과정도 재미있고 고쳐 내고 나서의 뿌듯함은 정말이지 나만 안다.
이러다 보면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는 것들도 종종 있다. 부품이 상했거나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잘 몰라서 못 고치는 것들이 있으면 슬슬 부아가 치민다. 이럴 때는 전문가를 불러다가 시키고 나는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가 고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이런 습성은 업무를 함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나 불합리한 업무 행태를 보거나 구멍 뚫린 업무영역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꼭 손을 봐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얘기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내가 내성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설치고 다녔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생각한 것의 반도 채 얘기하지 못한다.

고장난 것 고쳐놓기. 잘못된 것 바로잡기. 불편한 것 개선하기. 불합리한 것 시정하기. 나는 이러한 것들에 유난히 집착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일부러 신경을 쓰지도 않지만, 그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개 남의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내 눈에는 턱턱 튀어 나와 잘 보인다. 아마 이것이 나의 재능 중 하나일 것이다. MBTI에도 나타나지 않고, Strength Finder에도 보이지 않던, 내가 생활에서 발견해낸 또 하나의 내 모습, '고치기 재능'.

단, 주의할 점.
재미있고 신난다고 무작정 바꿔놓지는 말지어다.
아니면 옳음에 대한 확신이 설만큼 충분히 보고 듣고 배울 것. 특히 사람에 관한 일은 더욱 그리 할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이 모두 옳을 거라고 누가 그러든?
IP *.148.1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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