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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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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7일 11시 46분 등록
1

‘ 삶이라는 보따리...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열었을 때 무엇을 끄집어내고 어떻게 사용하는 가만 다를 뿐이다.‘

나는 철학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훌륭한 학자도 무예의 대가도 아니다.
그저 통념상 사회적으로 열등한, 몸으로 떼우는 일을 하고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적으로 열등한, 하층부류에 속하는
운동을 가르치는 코치였다.


그래도 그러한 통념, 선입견과 조금은 다른 차이가 있다면
나의 환경이 내게 ‘가치’라는 것을 통속적인 것들과 달리하게 하였으며
그것이 내게 주어진 조그마한 삶에 의미부여를 원하고
그러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살려고
남들보다 조금은 더 노력했던 것일 것이다.


어느날,
제한적으로 살았던 세계 속에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외로워졌던 삶은
대립과 협동의 모순에 찬 세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게 됨으로서
해소되었다.

헤매이던 세상 속에서 만난
많은 스승들과 현자들의 지식들이 보탬을 주어
내가 세계를 제한적으로 구분 짓고
보이지 않는 관계들을 부정하던 우매한 삶에서 해방되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망가져가던 삶이 명확해졌다.
나의 세계는 확장되고 인과의 체계가 눈에 들어 왔다.

2.

‘그가 나를 향해 달려들자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칼을 뽑자 그는 멈칫거렸지만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칼을 버리고 돌아서자 그가 의아해 했지만 전의는 사라졌다’


인간행동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해나 인문학적인 지혜에 대한 노력은
검을 다루는 기술적인 사고와 상대를 다루는 전술적인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그것은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소중한 체득이다.


검은 나의 마음과 몸을 통해서 길러진
사고와 습관에 의해 손을 통해 움직여진다.
기술적 행동을 이끄는 몸은
공간 속에서 기능적으로 제한 받고
전술적 사고들은
경기의 규칙과 심판의 판단과 상대의 능력을 고려하며
판단되고 선택되어진다.

검을 다루는 행동은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경우에
행동들은 전제와 가정을 근거로 이루어져 있다.
팔을 뻗고 몸을 빼고 발을 내 딛는 움직임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만약’ 과 ‘그렇다면’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움직이고 있을 때이다.

거기에 마주보는 누군가가 있어서 상대적일 때
때(timing)와 간격(interval and distance)과 속도(tempo)에
생생한 의미가 발생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 라는...

상대적인 모든 움직임을 지배하는 것은 과제 목표(task :goal target)다.
상대적인 것들의 적절함(equilibrium)은 목표설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왜?’ 는 과제목표설정을 결정하는 근원이다.

승리, 만족, 자기실현 아니면 물질적 보상, 그것이 무엇이든
목표의 설정은 상대와 자신의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 앞의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3

당신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이요?
‘nothing... but everything’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Kingdom of Haven’ 중에서
십자군과 회교도가 예루살렘을 놓고 처절한 전투 끝에 휴전을 할 때
십자군 영주가 묻는 질문에 회교도 군주 살리딘의 대답이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내가 최고지 ? 대한민국 최고지?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I am nothing more than nothing'

최고란 제한적인 영역 내에서 최상위 값이다. 그러나 영역이 확장되고 수준이 달라지면 더 이상은 최고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수치는 영역의 확장이나 수준이 달라져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때론 특이값으로 전체값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so, I'm nothing more than nothing but I can do anything!

4

자신의 세계 밖으로...


‘한순간의 몸놀림 속에 자신의 역사가 있고
나비의 날개 짓이 폭풍을 일으키듯
세계가 거대하게 연동하며 움직이고 있다면
세상에 대해 결코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날,
세상이 내가 다루는 작은 검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다루는 법을 가르친 사람의 문제를 논하는 된 이유이며
세계에 대한 작은 통찰 때문이었다.

세상을 살다간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강렬한 비판과 분노와 적개심이 끓고
한탄과 무기력한 방관이 뒤를 따르고 난 뒤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이루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기대하는 사실에 대한
소박한 스스로의 삶을 향한
애착의 몸부림이었다.



4.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렇다면 새로운 질서는...


‘ 행복은 가치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원래 있는 게 아니고 만들어진 것이다.‘


목표의 설정을 지배하는 것은 가치다.
가치는 상황적 사고와 그에 따른 신체의 행동들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통합하는 정신의 원리다.


유감스럽게도 과학적인 방법론은 가치중립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목적을 잃어버린 도구의 사용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과학적 방법론은 목적의 쓰임을
가치를 지닌 인간에게 양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적인 방법론이 제공한
인간에 대한 정교한 이해와 정보들은
그것이 어떠한 목표라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게 됐다.
정교한 system , 유효한 check list,
치밀한 비교분석, 예측과 통제 가능한 결과
그러나 그것이 달성하고자 하는 사람의 옳고 그름과
행복과 불행을 구분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행복과 불행의 차이를,
그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너무 많이 벌려놓았다.

나아가
자연의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물리적인 개인이 존재하는 시간은
세월이라는 일년과 월의 단위에서
시간이라는 초 단위로 더 빠르고 짧게 변했고,
세계화와 고층빌딩과 우주선은 공간을 더 높고 넓게 확장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터넷과 핸드폰,
네트워킹과 관계의 다층다중적 진행을 통해
개인의 활동은 더 복잡하고 치열해졌다.


5

사람이 희망하는 것은 ...


본질이 결코 변하지 않는 속성이라면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검을 다루던 나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행복 찾기라면
사회정의, 교육이념, 국가의 정체성, 조직과 리더들의 신념
그것들로부터
나는 결코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지지도 않으며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보다 더 많은 다수의 합의나 힘 있는 소수에 의해서
신념이 더불어 지켜질 때 구현되어 지는 것이다.


검을 다루기 위한 나의 모든 몸놀림과 사유가
상대에 의존한다는 것을 이해하듯이
내가 배우고 이해하려던 모든 지식의 완성은
경쟁하는 상대와의
대립적인 협력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을 잘 다루고 잘 이해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면
상대적으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내가 속한 세계와 질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직은 시스템에 합당한가?
다수들은 정당한 합의를 거치고 있는가?
개인들은 규칙을 지키고 있는가?

통합적으로
때(timing)와 간격(interval and distance)과 속도(tempo)는 적절한가?


6.

편안한 승차감 같은 더불어 사는 삶...


‘지키되 개선해 나아가는 것...’


인간행동에 있어서 메카니즘적인 측면에서,
움직임에 대해 가속을 가하는 것
즉 힘을 더하는 것은 쉽지만 감속은 상당한 기술을 요구한다.
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힘이 부치면
연쇄적으로 팔과 어깨와 양다리와 전신에 힘이 들어가고
이빨까지 물게 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과부하가 걸린 무거운 물건을 내려 놓으려고 하면
상당한 힘의 조절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발등을 깨기 쉽다.
과부하가 걸린 공격동작을 조율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다가가야 하는 젊은 날에는
속도 조절보다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리는 열정과 도전이 필요하다.
따지고 재다보면 폼만 잡다 끝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나이든 삶은 내재된 힘을 품고
유연하고 느긋하게 움직일 때 폼이 난다.
운 좋게 무임승차로 겉 멋만 들린 사람도 있겠지만
종착역을 확인하고 플랫폼을 나서
환승 주차장을 걸어가는
여유 있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제 나이 들어 생과 존재의 의미라는 목표에 근접해 있다.
아득한 목표는 점점 축약되고 뚜렷해진다.
이제는 힘과 속도의 가중이 아니라
힘의 방향과 강도의 조절이다.
과속이나 부적절한 타이밍의 제동은
나를 궤도를 벗어나 위험 속에
놓이게 할지도 모른다.

지난날 눈여겨 보아두고 들어 둔
스승들의 지혜는
예기치 않은 패인 웅덩이나
튀어나온 과속방지턱으로 인한
사고나 고장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지를 향한 브리핑을 듣고
엔진을 정비하고 탱크엔 기름이 가득하다.
남은 것은 발차 시간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여행이 더불어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으로 인해 졸리운 승차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7. Forget & Forgive

'내가 웃자 그가 따라 웃었다,‘ 아니
‘내가 웃고 싶은 것처럼 그도 웃고 싶었을 것이다.’


가치란 행동(메카니즘)을 결정하지만 행동(메카니즘)이 아니다.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론의 목적이지만
그것이 남용과 편협으로 부정적 가치를 조장할 수 있다.

상처뿐인 영광, 물질적 풍요속의 비만, 권태로운 자유, 메마른 탁월함,

검을 잘 다루는 것이 곧 옳은 것은 아니다.


가치란 과학적인 방법론의 선택을 결정하여
인간과 세계를 구동시키고 조절하는 최후의 안정장치여야 한다.
그러한 가치란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함께 지키려고 하는 더불어 사는 삶 속에 숨쉴 수 있다.

사랑, 존경심, 관용, 궁휼히 여기는 것,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다 같이 지키고 있는 보편적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


내가 배운 마지막 교훈은
정말로 미웠던 상대가 나의 삶을 이끄는 협력지라는
모순에 대한 깨달음이다.
나아가 긍정적으로 더불어 사는 미래란
지혜 있는 통찰과 한 걸음만 앞서가는 현명함으로부터 생기며
두려움과 거절이 아닌 존중과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 믿음, 더불어 사는 것.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은 삶을 건전하고 바람직하게 사는 것이다.



"어제 길 위에 눈이 내렸다,

오늘 길을 나서는데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보이는 것들은 모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



IP *.75.166.98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6.12.27 19:55:20 *.70.72.121
아무것도 아니게 모든 것 일 수 있는, 졸음겨운 승차감을 찾아 헤매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그림자
2007.01.11 13:25:11 *.77.91.92
4항 중복.. 7...협력지-> 협력자(?)... 잘못 된 것만 보이는 것은 습관과 목적, 내 존재가치의 발현입니다... 뜨겁지만 놓아버릴 수 없는 감자... 망가져 가는 아니 이미 망가져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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