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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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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1일 12시 21분 등록
토요일 아침에 감동의 글을 얻었습니다. 그냥 혼자 읽기 아까워서(이미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올려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장영희 교수님은 암으로 투병 중이십니다. 솔직하고 감동적인 글들로 많은 독자들을 갖고 계시지요.
장교수님의 완쾌를 빕니다.


'희망을 너무 크게 얘기했나' 장영희 교수님 샘터6월호 글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있다. 암 투병 등을 극복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그냥 본능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지와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절로 생기는 내공의 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 난, 그렇게 희망을 아주 크게 떠들었다. 여러분이여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에피소드도 인용했다. 두개의 독에 쥐 한 마라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쪽 독에만 바늘 구멍을 뜷는다. 똑같은 조건하에서 ,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어떤 남자를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 라고 표현한 문장이 나온다. 난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난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
아닌 게 아니라 내 발자국 소리는 10미터 밖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 보조기까지, 정그렁 정그렁 찌그덩 찌그덩, 아무리 조용하게 걸으려도 걸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흑백을 가리듯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가리기는 참 힘들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그래도 분명 '나쁜 운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건 아마 지난 2001년 내가 암에 걸린 일일

것이다. 방사선 치료로 완쾌 판정을 받았으나 2004년에 다시 척추로 전이, 거의 2년간 나는 어렵사리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작년 5월 중단했던 '새벽 창가에서'로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 '살아온 기적, '이라는 글에서 썼듯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3년 만에 홀연히'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게 희망의 힘이라고 떠들었다. 내 병은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경력이었다고 쓰기도 했다. 췌장암에서 기적처럼 일어난 스티브 잡스를 흉내 내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삶에 대한 리모델링의 기본적 조건이라고도 썼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대한 생각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돌이켜 보면 난 나의 희망 이야기를 스스로 즐겼다. 미국 사람들은 좋은 일을 크게 말하면 공기 속에 떠다니는 나쁜 혼령이 시샘해서 훼방을 놓는다는 미신을 믿는다. 난 나쁜 혼령이 듣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크게 떠들엇다. 그런데 작년 여름 나는 암이 다시 척추에서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난 다시 나의 싸움터, 병원으로 돌아와 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삶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는데 , 난 저벅저벅 큰 발자국으로 소리 내며 걸었고 , 그래서 나쁜 운명이 깨어난 모양이다.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아드레마이신'이라는 정식 이름보다 '빨간 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항암제, 환자들이 빨간색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 한번 맞으면 눈물도 소변도, 하다못해 땀까지도 빨갛게 나온다는 독한 약, 매캐한 화학물질 냄새와 함께 빨간약이 내 몸에 퍼져갈 때, 최루탄을 맞은 듯 눈이 따가웠다.


그날 밤 문득 잠을 깼다. 난 두려웠다. 죽음을 생각했다. 옆 침대에서는 동생 둘이 한 침대에 비좁게 누워 쌕쌕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 비가 샌 자국인지, 천장 위의 얼룩이 보였다. 그런데 그 얼룩이 미치도록 정겨웠다. 얼룩마저도 정답고 아름다운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을 결국 떠나야 하는구,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겼다. 악착같이 침대 가로막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이 지구에서 날 밀어낼 듯, 어디 흔들어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

이 세상에서 난 그다지 잘나지도 또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은 하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 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 악착같이 내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언젠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비파를 켜면서 언젠가 배가 와서 구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비파로 켜는 음악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차 올라 섬이 잠기고 급기야는 소녀가 앉아 있는 곳까지 와서 찰랑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기가 죽는 것조차 모르고 죽어갈 것입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


그때 난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르는 것이고 그럴 바엔 부르는 게 낫다고, 그리고 희망은 분명 운명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래서 난 그 위대한 힘을 다시 잠시 <샘터> 독자 곁을 떠나 있으려고 한다. 독자들이 함께 그 위대한 힘을 믿고 언젠가는 다시 홀연히 '새벽 창가에서'로 돌아올 장영희를 기다려준다면 참 좋겠다.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IP *.252.1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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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31 18:46:19 *.36.210.11
가끔씩 왜 귀신들은 잡아가야 할 인간들을 안 잡아 가고 놔둬도 괜찮을 듯한 사람을 못 살게 구는지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럴 때면 더불어 신도 내게 마구잡이로 싸잡아 욕을 먹게 된다. 젠장~

귀신도 신도 못 하는 일, 귀신도 신도 놀라게 사람만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앨리스님, 감동적인 글이군요.

'새벽 창가에서' 장영희 님을 손 모아 힘차게 기다리겠습니다. 꼭 다시 돌아와 주십시오. 우리도 당신과 당신의 걸어온 삶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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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정복
2008.05.31 21:20:27 *.72.227.114
장영희님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그 분이 아직도 이렇게 멋지게 살아게시다는 것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꼭 다시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좋은 글을 더 주셨음 희망을 더 주셨음 하고 기원합니다.

좋은 글 앨리스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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