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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6일 20시 03분 등록

이 연세라면 모두가 그러했을법하지만 올해 여든 네 살이신 나의 아버지 역시 인생의 변경邊境에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굽이굽이 넘어오신 분이다. 충청북도의 한 산골에서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사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6세에 한문 서당을 다니시고 8살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계량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1925년생이니까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해 식민지화한 36년(1910~1945) 동안의 통치 속에서 교육을 받으신 것이다. 아홉 살이 되어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졸업하신 후에는 고등과 2년 과정을 더 거치셨다고 한다. 그때에 김천 중학교에 진학을 하려고 과외수업까지 받아가며 열심히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당시 3년 연속으로 하도 가물어서 농사를 다 망치는 바람에 살림이 궁핍하여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나 연명하다시피 하는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그만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으로 징발되어 만주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속이 되었다가 해방을 맞으셨단다. 돌아와 다시 농사일을 거들다가 한 해 후에 어머니를 만나 이듬해인 1947년 4월에 혼인을 하시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1950년에 6.25동란까지 겪으셨으니 청년시절 참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시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어느덧 두 분의 지난한 결혼생활도 회혼례를 넘기었고 맏아들인 큰 오라비도 환갑이 지났으니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온 삶을 떠올릴 때면 세월의 무상함에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들 만하리라.

어머니와 결혼 후 아버지는 순경에 지원해서 근무하셨는데 근무 성적이 좋아서 1년 만에 경사계급장을 달게 되어 주변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셨다며 그때는 당신께서도 남달리 총기가 있으셨다고 은근히 자랑도 잊지 않으신다. 그 후 65세로 정년퇴임에 이르실 때까지 근 40여년을 공직생활에만 임하시며 공식적인 직장생활을 마감하셨다. 마지막 10여년은 소방관이란 직종이 생겨나서 전직하시어 소방서장으로 퇴임을 하시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생활에는 직장생활 동안의 긴장감과 타인을 향한 배려가 항시 배어있다. 내 어려서 아버지는 항상 바쁜 사람의 대명사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집에는 별로 계신 적이 없으시고 명절날이라고 하여도 편히 쉰 적 없이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아니하고 대기하거나 잠시 들어오셨다가 급하게 나가시며 근무에만 여념이 없으셨다. 솔직히 명절에 함께 계셨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늘 비상근무라고 하셨던 기억만 난다. 그 시절에는 정말이지 모두가 다들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그렇게 빡빡하게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는 평생 직장생활에 대해 불만이 없는 사람처럼 긍정적이었고 자부심 또한 대단하셨으며 언제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는 국가기관인 경찰이나 소방관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일러주시곤 하였다. 내 아버지께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라서 나 역시도 긍지가 대단하게 알고 컸건만 요즘에는 경찰관들이 왜 그리 사건과 범죄에 종종 연루되고는 하는지 뉴스를 접할 때마다 못내 안타까워지곤 한다. 어머니는 늘 박봉에 쪼들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남달리 착실하기 때문에 주변머리는 없어도 정년퇴임까지 무사히 마치시고 그로인해 우리 가족이 평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란 걸 상기시켜 주시곤 하였다. 그러나 내 보기에는 엄마가 더 억척으로 살림을 해대는 것이 빤히 보이기도 했으며 엄마의 살림솜씨가 남달리 뛰어나 아버지를 능가함을 익히 알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집안일에는 다소 무관심하더라도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여 공식적인 바깥일을 잘 처리해나가며 무엇보다 성실하기만 하면 삶에 큰 지장 없이 다 잘 살아가게 되어있노라 믿으며 성장했다. 따라서 일도 집안일은 아내인 어머니가 전적으로 도맡아 하고 바깥일은 남편인 아버지가 다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라고 철저히 분리시켜 이해하였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유년시절보다는 성장한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 정년퇴임 전까지는 지방생활이다 뭐다 해서 가족과 떨어져 살기도 했고 직업자체가 항시 비상사태에 대비해 출동준비를 하고 있으니 좀처럼 느긋하게 무엇을 즐긴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니 평생을 쫓기듯 몸 마음 바삐 살아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내겐 그런 모습만 남아있기도 하다.
정년퇴임이후에는 소일꺼리를 찾으며 이것저것 기회가 닿는 대로 벌이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꾸준히 일해 오셨다. 그래도 성실함이 무기이기 때문에 길게 이어지니 결코 적은 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당신 용돈을 벌어 쓰시며 지인들의 대소사에 참여하시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을 도모 하시니 어머니는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해 하신다. 내 입장에서도 백번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일을 놀이삼아 취미삼아 하노라고 스스로 말씀하시곤 하는데 당신 입장에서 보면 옛날에 비하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에 비하면 한가하게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그게 그리 좋을 수가 없고 버스를 타도 재미난다고 하신다. 그러나 요즘 같은 더위에는 힘에 부치실 게다. 집안 환경이 좀 더 넉넉하고 정년퇴임후의 생활에 대해 더 나은 준비를 미리부터 해 놓으셨더라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나마 주어진 상황과 처지에 맞게 마음을 내려놓으시는 것도 방법이라고 터득하셨는지 당신께서는 집에 계시기보다 나가서 활동하는 편이 더 좋다고 하시고 어머니 역시도 그렇다고 하시니 서로 간에 다행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자식 된 입장으로서는 면목 없고 송구하기 그지없다.

이런 아버지가 정년퇴임하신지 2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근무할 때와 다르지 않게 습관은 그대로 이시다. 체력이야 요즘 들어서 부쩍 쇠약해 지셨지만 아직까지도 예전의 일하시던 관행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테면 확실히 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다짐을 한다거나 주의를 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듯 훈계조로 말씀하시고 매사에 따로 상세하게 보고해 올려야만 하는 것인 양 제때에 하나하나 말씀을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업무태만이기라도 한 듯 못마땅해 하시는 것이다. 일일이 메모를 다 해놓으시기 때문에 메모장만 해도 방으로 하나 가득이며 너무 많아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버리는 살림은 없고 날로 쌓여만 가니 짐이 많아서 이사도 못갈 지경이라며 어머니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이 잦다. 그리고 여전히 집안일보다는 남의 사정을 더 먼저 헤아려 보살피고 앞장서며 마치 당신의 일보다는 상대를 우선해 고충을 처리해 주어야 하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처럼 열심인데 식구들에게도 유익한 것이 되기보다 번거로움만 주거나 손해를 끼치게 할 때가 종종 있으니 달갑지 않아 마찰이 생기곤 하지만 여전히 예전의 공적인 일을 처리하던 기세대로 수그러들지 않으신다. 그러니 벌어도 실상은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기보다 남들에게만 늘 같은 수준의 배려를 유지하여 제공하니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태도에 인기가 그만이시다. 하지만 집안일이나 가족을 배려하는 일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 곳곳에 문제가 발생하니 어머니께로부터 타박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훈장 받아가며 일하실 때처럼 여념이 없고 고집스러움도 아성을 잃기 싫은 듯 예전과 같으니 이것이 권위를 유지하고 싶은 직업병의 발로는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식사를 하실 때에도 중요하거나 긴박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하듯 시계를 자주 보시며 시간마다 뉴스는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처럼 만사를 재껴두고 귀를 기울이시며, 주무실 때에도 뉴스를 들어야 한다고 TV를 켜놓으실 때가 허다하다. 외출했다 돌아오시면 마치 보고라도 받듯 별일이 없는지를 필요이상으로 확인하고는 TV부터 켜놓고 무얼 해도 하기 시작하신다. 당신 힘에 부쳐 해결도 못하시고 막상 처리하지도 않으면서도 일상적인 관행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아침이면 기동해야만 하는 순찰대처럼 급하게 서두르고 무얼 하다가도 말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TV를 켜놓아야 안심이다. 어떨 때는 항시 가동되도록 저렇게 켜놓는 것이 부적이나 되는 것처럼 인식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의구심이 들기까지 할 정도다. 가끔씩 큰 TV소리를 줄이거나 불을 끄러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면 금세 뒤척이며 깨시곤 하는데 예전보다 많이 둔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민감하고 깊이 주무시지 못한다. 마치 잠시 새우잠을 청한 듯이 말이다. 또 항시 사람이 드나드는 곳을 향해 문을 조금 열어놓으시곤 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문을 꼭 닫아 놓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들을 감시 받는 듯 불편해 하시며 이따금 다투시곤 한다. 어쩌다 이웃에 도둑이 들어도 쫓아버리기보다 잡아서 잘 잘못을 타일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한번은 당신 연세를 잊으시고 남의 집 좀도둑을 뒤쫓아 가려해서 우리가 말리느라 시껍했다. 하기야 이 정도는 다 해프닝에 지나지 않고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청춘을 받쳐온 이런 직업적 요소와 그 세대들이 격어야 했던 역사적 사건들에 얽힌 모진 삶의 체험으로 인해 일상에서 참 안쓰러운 장면이 종종 목격되고는 한다. 어쩌다 글을 쓰느라 늦게 자는 날이면 영락없이 아버지 방에서 들려오는 괴성을 들을 수가 있다. 아버지는 특히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당시 징용으로 끌려가 겪게 된 일들과 6.25 동란 때 참전 경찰로서 겪은 사건들이 몹시도 두렵고 강하게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가위에 눌리지 않고 잠을 주무시는 날이 없으신 것 같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을 꾸고는 하신다. 물론 가위에 눌리는 꿈의 대부분은 예전의 업무가 가져다준 긴장성 스트레스나 전쟁과 관련해 쫓기는 꿈들이고 당시 전쟁을 치르면서 무척 놀라곤 했던 기억들이 그리도 오래 각인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고 하신다. 폭격이 빗발치는 곳을 피해 달아나거나 인민군들에게 쫓겨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등의 일을 격은 것이 당신으로서 매우 감당하기 힘들었던 가 보다.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전쟁의 상흔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또한 평생을 바치며 해온 직업적 업무가 가져다준 긴장감 등의 동반으로 인해 잠재적 강박과 자주 가위에 눌리는 모습을 대할 때면 마음이 짠하다. 낮이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 복귀하고는 하지만 무심한 심연의 내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혹독한 전쟁을 치르고 계시는 당신 일생의 처절한 기억 저편과 가족을 돌보며 청춘을 받쳐온 일이 가져다주는 야누스적 일면이 오늘도 노인의 밤을 악몽으로 설치게 하는 것이 가슴에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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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7.08 15:01:58 *.169.188.175
아버지의 마음을 반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월이 힘들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끔을 해봅니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술을 의지했는지..

무슨 연유로 자살을 시도했었는지..

그 마음 반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조금이나마 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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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7.09 14:05:07 *.75.127.219
써니아우는 아는가.
이렇게 자랑스럽고 굳건하신 아버지를 두신것을.
그시대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진 세파에 휩쓸리어 제대로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 아버지가 너절한데
좋은 면은 깡그리 잊거나 그냥 당연지사이고
나쁜 면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도 써니씨의 심지를 보면 조금은
그런 훌륭하신 아버지를 담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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