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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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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8시 19분 등록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어제 이사짐 견적을 보고 갔다.
책이 140박스로 계산되어 5톤 2대와 1톤 1대가 와야 한단다.

우리는 거의 5년 단위로 사는 동네를 바꾼다.
가족회의를 거쳐서 살고 싶은 동네를 정하고 가장 설득을 잘하는 사람의 뜻을 따라 집을 고른다. 언제나 좀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흙 벽돌로 지어 만드신, 도심 한복판이면서도 경관이 좋았던 곳에서 오래오래 살았다. 그 집에서 동생 두 명이 태어났고 시집 장가를 다 갔으니 우리가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대학을 다닐 때는 명동 성당 아래에 있던 카톨릭 여학생관에서 4년을 살았으니 잠바차림으로 옆집 나들이를 하신 김 추기경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차담을 하는 기회도 많았었다.

강원도 춘천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나서는  나무가 있고 공기가 맑은 조용한 곳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엔 이렇게 달라진 환경이 무척 좋더니....결국은 도심으로 되돌아왔다.

하고 싶은 얘기는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왜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하느냐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갈 때 선택한 2권의 책이 무엇이었더라? 그때 잠시 나는 무슨 책을 선택할 것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골라내지 못하고,  책들을 솎아내지도 못하고 이삿짐 회사의 사람들만 고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온 집안 식구가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책을 사들고 들어오니 책을 읽는 속도가 당연히 책을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책을 좀 나누려고 하면 아직 그 책과의 인연을 정리하지 못한 탓에 차마 떼어놓지도 못하는 것이다.

3주째 우리에 갇힌듯  책을 읽고 있다. 이렇게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저자의 거죽만 읽던 옛날의 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부모가 골라준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하는 신혼의 밤에  독신주의자였던 사람이 하는 생각들이  이와 비슷할까?  그래도 열심히 살다보면 오경웅의 말처럼 살아가는 동안 천사가 된다는 말을 믿고 참을성 있게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겠지?

재미있는 것은 칼럼이라도 쓸까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리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 뒤죽박죽 들여 놓은 웬 남의 글들이 자꾸 올라오고 유행가 가사들은 원색적인 감정이입으로 정곡을 파고 든다. 마치 유원지에 있는 두더쥐 잡기처럼 망치로 두드리면 또  튀어나오고  누르면 또 나오고... 통제할 수가 없다.

이럴 때 “ 평상심으로 말하듯이 써 보세요.” 누군가 말을 해준다. “고맙습니다.” 우주의 시절 인연이  맞아 든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존재 이유인 자유가 있다.  차별 없는 참사람을 보겠다고 , 그것도 이번 생애에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고 ,지금 있는 그대로 이미 부처의 몸인 자기를 혹독하게 내 몰 필요는 없지. 그래 그래, 이러다가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돌게 될거야. 방랑 삼천리 김삿갓 처럼. 좌삿갓이 되고 말겠어....정말...

그래 잠시 숨을 고르고
이사 가기 전에 익숙한 산책 길과의 결별을 준비하자.

집을 나서서 송시열의 옛집 앞을 지나 과학 고등학교를 지나 아름다운 골목길로 접어들고, 다시 최순우 고택을 지나고 선잠단을 지나고 성북동 성당을 지나고 길상사까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이 길을 홀로 간다.

오월 초파일의 길상사는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커다란 느티나무에 매달린 오색 등불은 하늘을 향해 한참동안 살아있는 기쁨을 감사하게 했었지. 우연히 마주치던 법정스님의 자비로운 눈빛은, 또 우연히 맞닥뜨린 백장선사에 관한 스님의 법문은 정말 감동이었어.....

 이제 곧, 봄이 오면  이번에는 다른 길을 따라 길상사를 찾아가 조용히 선방에 머물면서 선의 숨결을 느껴 보아야겠다.

IP *.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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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9.03.02 10:04:01 *.246.146.19
좌샘의 표현 방식들이 참 맘에 와 닿습니다.
'우리에 갇힌듯'이라니요 ^^;

마지막 한 주 더 잘 보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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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0:05:48 *.255.182.40
역시나... 언제나 조용한 사색의 여운을 풍기는 샘의 글이네요..
테스트때문에 힘드실텐데 바로 다음 날 이사하시네요.
차마 도와드리겠다는 말씀도 못드리겠고. 에공...^^::
샘, 힘내셔서 담주 마무리하시고 이사도 잘하세요~~ 건강 챙기시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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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0:18:23 *.8.27.5
차분하게 사색의 산책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바람따라 자유롭게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감안할 때 지금 이 길도 내 자유 의지로 찾아간 어느 하나의 산책길이겠지요. 힘들면 잠시 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걷다보면 뒤안길 바라보며 나의 보행에 긍지를 느낄 날이 분명 오리라 생각합니다.

힘든 시간 이후의 이사 때 건강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삼거리 주모님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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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0:24:45 *.162.86.59
저희도 언제 이사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사 하게 되면 책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고민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댁의 책분량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살림 규모에 비교하면 결코 적지 않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거든요. 버릴 책과 계속 가져갈 책을 구분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끼고 갈 수도 없고.. 다음 이사 때 정리가 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다음 가실 집은 정하셨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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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9.03.02 13:31:53 *.111.241.42
새 봄, 길상사 가실때 저도 동행케 해 주시어요. 선방의 고요는 방해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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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3:51:37 *.246.196.63
책이 140박스... 대단하십니다... 이 한 구절이 선생님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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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영
2009.03.02 16:18:27 *.124.157.251
과연 삶의 경륜입니다.
삿갓 쓴 무희의 느린동작처럼
내 마음에 고요히 사뿐히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시고
수수하고 봄내음 가득한 향기 남겨두시고 가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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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
2009.03.06 22:18:43 *.232.219.144
와! 멋진 동네에 사시네요~
자주 이사다니면 기분도 새롭고 좋을 것 같은데
이 다음에라도 경숙님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생각만으로도 한결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이느낌!!
정말 따봉(?) 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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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12:01:24 *.43.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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