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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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화장품회사는 디자이너에게 서체제작을 의뢰한다. 화장품에 어울리는 글꼴을 개발해 달라는 내용이다. 화장품 품질이 평준화 되었다면,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는 디자인과 마켓팅뿐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화장품 케이스와 포장 개발에도 디자이너가 적극 참여한다.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다. 세미나는 제목이었고, 의뢰한 작업에 대한 중간보고 자리다. 회사 담당자는 물론, 담당 디자이너가 작업과정을 이야기한다. 디자이너 중에는 한글 디자인의 대가大家, 안상수 선생님도 있었다.
지금은 정보디자인 시대다. 서체개발을 위해선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대충 안다. 안상수 선생님이 작업을 했을 때는, 80년대 초로서 이런 인식이 없었다. 지금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한글 디자인은 사명감 없이는 할 수가 없다. 사명감을 가지고, 원칙과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철학이 있는 행동이다. 철학이 있다는 것은 생각이 있다는 말이다. 이유가 있기에 어려워도 나아간다. 어렵다고 철학을 져버리면, 덩달아 타인에 대한 신용도 무너진다. 철학 있게 산다는 것은, 보다 멀리 보기다. 더 큰 가치를 위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감수한다. 안상수 선생님은 작업도 하시고, 강단에도 선다. 디자이너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높다. 철학 있게 살았기에, 그 혜택을 누린다.
만족지연 능력이란, 더 큰 가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힘이다. 마시멜로 실험이 대표적인 예다. 마시멜로 하나를 어린이 앞에 놓는다. 15분간 먹고싶은 욕구를 참으면, 마시멜로 하나를 더 준다는 내용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낼름 먹는다. 물론 참아내는 아이도 있다. 주위를 딴곳으로 분산시키며, 자신을 잘 이끌어간다. 공익을 위하거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낸다면 철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철수 교수는 회사를 매각하라는, 외국기업의 제안을 일언지하 거절한다. 이런 덕목은 그가 원칙과 철학,공익을 위한 삶에 얼마나 훈련되었는지 보여준다.
글씨 하나를 놓고, 식물 줄기 같다는 둥, 처녀들이 수다 떠는 모습같다는 둥....글자의 삐침 하나, 획 하나에 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조건을 모두 만족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사항이 있다. 문자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필수다. 아무리 이뻐도, 가독성이 떨어진다면 틀린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실용성과 심미적인 조건, 둘 다 만족시키는 작업이다. 핸드폰은 기능도 중요하지만, 이뻐야 한다. 여러 요소를 염두하고,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디자인은 설득이다. 그냥 예뻐서...라든지, 느낌이 좋아서 라는 답변은 있을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디자인은 감각적이지만, 무엇 하나 이유가 없는 것이 없다. 디자인은 논리적인 작업이다. 의뢰인은 작업물에 가차없이 질문을 퍼부으며, 디자이너는 그에 맞는 답변을 할 수 있어야한다. 디자이너에게는 디자인 감각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안상수 선생님은 '제 다움'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한글 디자이너인 만큼, 순한국만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제 다움'이란, 아이덴터티identity, 정체성이다. 본질이다. 디자인이란, 본질을 파악해서,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다.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는 부모다. '육아'또한 디자인이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아이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의 특성을 살펴서, 어울리는 일을 찾아준다. 육아의 목적은 아이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굿 타이밍'의 저자, 신완선은 의사결정에 대해서 이야기다. 내 생각에 의사결정은 일찍 하는 것이 좋다. 구글은 '얼른 실패하라'고 했다. 나쁜 의사결정도 일찍하는 편이 낫다. 진로도 일찍 정하고, 결혼도 일찍하고, 아이도 일찍 낳는 편이 좋다. 이것 저것 하다가, 나이만 들어버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 취직하기도 힘들다. 결혼을 일찍하면, 자리 잡기 위한 노력도 일찍 시작한다. 아이가 장성해서 대학이나 결혼등 목돈이 들어갈 때, 정년퇴직한다면 낭패다. 가장 좋은 의사결정은 일찍 내린 결정이고, 의사결정이 늦을수록 선택의 범위도 적어진다. 저자도, 어린 시절 부터 해당 분야의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가 되고 싶다면, 의사를 만나게 해준다. 천재 소년 송유근의 아버지는 이런 면에서 훌륭한 디자이너다. 그는 아이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천부된 재능을 싹트게 도와주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은 '제 다움', 본질에서 시작한다. 글쓰기도 디자인이다. 주제가 있고, 그에 맞는 논리를 펴간다.
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할 지 질문하는, 학문이다. 본질을 파고들어야 하고, 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논리가 필요하다. '철학한다'는 이야기는 요즘으로 치자면 '디자인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애플의 아이폰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예약 판매만 6만대였다. 아이폰은 혁신적인 상품이다. 발상도, 비지니스 모델도 참신하다. 정작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애플의 철학에 있다.
'단순함과 절제.'
애플은 되도록이면, 줄이고 생략할려고 애쓴다. 장자의 위무위爲無爲(하지 않음을 하다)를 실천할려고 애쓴다. 하드웨어의 외관도 뛰어나지만, OS의 인터페이스 또한 배려가 깊다. 사용자가 쉽고 빠르게 정보에 접근하도록 설계했다. 읽기 쉬운 글은,쓰기 어렵다. 단순하고 쉬운 인터페이스도 만들기 어렵다.
젊은 시절 스티븐 잡스는, '선禪'에 심취한다. 이런 성향은 그의 삶뿐만 아니라,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고,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일이다. 아이맥, 아이파드, 아이폰, 아이패드는 한결같이 그 존재만으로 무게감을 갖는다. 목적이 뚜렷하며 모든 요소는 목적으로 향한다. 애플에게 있어, 제품은 중력이 모이는 정점頂點이다. 애플의 사원은 모두 그 정점을 향해 달린다. 잡스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소비자가 사는 것은 아이폰이 아니라, 잡스의 철학과 열정이다. 아이폰은 상징에 불과하다. 고객과 잡스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아이폰을 소유함으로써 잡스와 닮고 싶은 것이다. 자신도 그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애플의 제품군은 기능과 디자인 외에도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다. 사연은 이야기이며, 디자인이고, 콘텐츠며, 철학이다.
아이패드가 발표되는 동시에, 중국 광둥성 선전시 화창베이에선 짝퉁 아이패드가 나온다. 이곳은 한국의 용산, 일본의 아키하바라같은 곳이다. 중국 짝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서, 리얼타임으로 오리지널과 동시에 출시된다. 가격이 정품의 절반밖에 안하지만, 사지 않는다. A/S가 문제가 아니라, 짝퉁에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업데이트 되지 않는 제품을 소비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플레이스테이션 이나, 엑스박스 같은 게임기가 성공할려면 관련 타이틀이 풍부해야 한다. 이제 여기에 '철학'까지 필요하다. 제품의 제작의도와 과정까지 소비자는 알고 싶어한다.
닌텐도는 세계불황 속에서도, 최고 매출을 기록한다. 생필품도 아닌, 게임기가 올린 개가는 눈부시다. 닌텐도DS와 Wii는 발상 자체가 독특하다. 어른들과 여성들까지 게임기로 끌어들였다. 기존 파이에서 나누어 먹기가 아닌, 새롭게 판을 짰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성공하면, 파급 효과가 크다. 매니아층이 먼저 열광하고,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일반인도 참여하거나, 구매한다. 애플, 닌텐도 모두 새롭게 판짜기로, 성공했다. 밥 한끼가 아쉬운 상황에서도, 애플과 닌텐도는 선전했다. 소비자는 세상을 달리 볼려는 그들의 용기를 산다.
나에게 철학이란, 디자인이다. 본질을 찾아서 풍성하게 만들기다. 길을 터주고, 꽃을 피우게 도와준다. 배려이며 친절이고, 따듯함이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는 '나'다.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어울리는 길을 선택해야 하고, 경력을 쌓아가야 하며,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나를 디자인하기 위해선, 나의 본질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여기서 주위할 것이 있다. 본질을 찾는다고, 나를 직접 파헤치는 행위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찾았다고 해도,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는 별개다. 부딪힘으로써 나는 분명해진다.
조건이 충족된 디자인 상황이란 없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예산은 항상 부족하다.인생 자체가 부족한 것 투성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량이다. 이럴 때는 디자인이 경영이다. 경영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상의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일본 만화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일을 잘했다. 만화 장면에 따라서, 필요한 셀의 양도 다르다. 그에게 맡기면, 제작비를 절감하거나, 더 질 높은 작품이 나온다.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면, 경영을 잘한 것이고 휼륭한 디자인이다.
난 장사한다. 여행사에서 시작해서, 교육 기획을 했다가, 지금까지 왔다. 내게 남은 패가 장사 밖에 없었다. 천직이라고 생각하게끔 내 의식을 디자인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헛돌기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최적화 시키기 위해서 내 마음을 바꾸어야한다.
의식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얼마나 썼는 지 모르겠다. 쓰고나면, 내 일이 좋아졌다. 글쓰기로 날뛰는 망나니를 길들인다. 망나니는 논리적이지 못하고,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한다. 마음에 안들면 그만둔다. 망나니를 나의 본심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망나니에게 몇번 휘둘리고 나면, 망나니의 실체가 보인다. 계속 휘둘리면, 어리석다. 망나니를 보았다면, 죽인다. 이젠 '난 무엇을 해야하는가? 뭐해 먹고 살아야 하는가?'는 질문에서 해방이다. 이 질문으로 오랫동안 끙끙댔다.
예전 드라마에서 보았다. 주인공은 비법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 알고보니 항상 타박했던 자기 삼촌이 그렇게도 찾아해매던 그 사람이다. 장사하면서 글 썼는데, 장사하면서 글쓰기가 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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