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김미영
  • 조회 수 2190
  • 댓글 수 8
  • 추천 수 0
2010년 4월 22일 20시 58분 등록
 

 



불임치료를 받으며 어렵게 임신을 한 동생네 부부가 다녀갔다. 입덧이 심해서 잘 먹지 못한다고, 마침 우리 동네 맛집이 TV에 방송되는 걸 보고 겸사겸사 들렀다고 했다. 다행히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제부가 더 좋아했다. 또 뭐가 먹고 싶은지를 물으며 행복을 나누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 들러 차를 마시다가 제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 책…, 왜 읽으세요?” 천 페이지가 넘는 러셀의 ‘서양철학사’였다. 난 버릇처럼 어리바리가 되었다. 결국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동생네 부부가 다녀간 날, 내 글을 사는 곳에서 피드백을 주었다. 드라마작가처럼 써 보라고 했다. 솔깃했다. 부부갈등을 좀 더 강조해서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길게 쓰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싸움이 흥미로운 주제인가? 막장 드라마에 중독된 탓인가? 순간 나는 멍했다. 내 글이 거기서 거기인 일상을 다루는 한계인 까닭이다. 주사위 같은 나는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면이 제한되어 있다. 나름 다양하지만 ‘싸움’은 내 분야가 아니다. 게다가 부부싸움은 더더욱 젬병이다. 오히려 피하기 대장이다. 나는 싸울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돌아보기도 싫은 걸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기 싫었다. 동생네 부부처럼 서로 행복을 나누는 거라면 모를까, 둘이 같이 싸우고서, 아니 툭하면 일방적으로 당하고서 왜 허구한 날 나만 들여다보나. 나는 이제 그 짓거리 멈추고 싶다. 덕분에 내 글은 또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다시 보내달라는 그 글, 나는 아직도 쓰지 못했다. 삶이 따라가지 못하는 글쓰기, 글쓰기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책읽기 앞에서 나는 또 제자리걸음이다. 읽으면 뭐하나 하면서 머리를 처박고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싸울 줄 모르는 내가 그나마 선택한 자신과의 싸움, 나의 일상은 우끼고 자빠졌다. 먹고 자고 싸고 섹스 하는, 소나 말도 하는 것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찾는, 어쩌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매일 지친다. 물 위에선 고고한 척 우아 떨지만 물 밑에선 오두방정을 떨며 발을 젓는 백조처럼, 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만 꼭꼭 숨고 싶어진다. 그래서 숨는다. 엉덩이를 다 까놓은 채 대가리를 처박고 숨은 척을 하는 토끼처럼, 내 안으로 머리만 숨긴다. 그러다 잠이 든다. 이런 젠장.


‘꿈꾸기’가 꿈인가. 어쩌면 내가 찾는 나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뭔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려질 수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알려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엔 질 것이 뻔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 다 나의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면 쉽게 살아갈 수 있으련만, 난 오늘도 내 안에 머리를 처박고 숨어서 잠이 든다. 꿈속에서는 제부의 물음이 여전히 계속된다. “그런데 이 책…, 왜 읽으세요?” 나는 언제쯤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싶기는 한 건가.



201022019726750.png


IP *.210.111.178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10.04.23 07:50:58 *.72.153.43
언니 힘내요. 내가 꼭 안아줄께요.
{{{미영언니}}}

전에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잠들기 전에 누워서.
'전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내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열심히 살께요.
그렇지만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눈 뜨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뜬다면...'
지금은 이런 기도 무서워서 못해요. 언니는 용감해요.
{{{{미영언니}}}}
프로필 이미지
명석
2010.04.23 08:10:47 *.251.137.86
아직은 아니라네, 그대여.
조금 피곤하기만 해도  와락 겁이 나는 그 때가 온다네, 머지않아.
이러다 정말 내일 아침에 눈뜨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 싶은거지
좀 더 시간이 있을 때 성큼성큼 걸어보아야 한다네, 그래서.
너무 오랜 시간을 몽상에 빠져 있었지, 나는.
계획은 없이 기대만 있었어
그 많은 젊음과 기회를 모두 허비하고
기울기 시작한 오후에 애쓰는 재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발만 일찍 출발했어도 좋았을 걸 그랬다 싶을 때가 많다네.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4.24 09:51:34 *.210.111.178
아잉~ 고마워라~ emoticon
프로필 이미지
명석
2010.04.23 08:44:53 *.251.137.86
나도 동감이에요, 미영씨.
꽁트나 단편소설 처럼 써 보기를 권하고 싶네요.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일에 커다란 기회가 있다고 봐요.
누구나 천차만별의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다른 부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동질감이나 위안 혹은 관음증적 재미를 주는 거지요.
아직 모호할 지 몰라도
누구나 이렇게 시작할 거에요.
박혜란의 '소파전쟁'을 포함, 비슷한 소재의 콩트나 드라마집을 찾아 보면서
한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만 모방해서 써 보기를!!
미영씨에게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해요.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4.24 09:53:32 *.210.111.178
그럴까요?
뭐가 막 지나가는 건가요?
잡아볼까요?
네! 해볼게요.
뭐, 하죠, 뭐. ㅎㅎ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4.24 14:45:11 *.210.111.178
한 선생님, 해봤어요.
밥 얘기 해봤는데 재밌네요.
쫌 더 가볼게요.
감사해요. ^^;
프로필 이미지
신진철
2010.04.27 07:21:33 *.186.57.251
그녀 생각만 하면...눈만 생각난다.
눈이 크---은 그녀,
많이 울 것 같다.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4.30 09:02:29 *.210.111.178
많이 웃기도 한답니당! emoticon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42 안아주세요 file [3] 이은미 2010.04.19 2256
1241 [칼럼 7]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2] 신진철 2010.04.19 2345
1240 칼럼따라하기-3<너희 밭을 갈아라> [3] 청강경수기 2010.04.19 1936
1239 워킹맘의 아이말 채집놀이(5)_동화책 만들기<2회> file [2] 동건친구 2010.04.19 2072
1238 사각형은 감옥이다 [4] 신진철 2010.04.20 2131
1237 괜찮은 하루 [2] 동건친구 2010.04.20 2000
1236 쓸만한 것은 시밖에 없었다 [7] 신진철 2010.04.20 1861
1235 딸기밭 사진편지 23 / 2분, 번쩍 사로잡기 file 지금 2010.04.21 2073
1234 살다보니! [1] 지효철 2010.04.21 2032
1233 박노진의 맛있는 경영(2) - 한정식이 뜨고 있다 [1] 박노진 2010.04.21 2733
1232 워킹맘의 아이말 채집놀이(6)_동화로 철학하기 [1] 동건친구 2010.04.21 1964
1231 [오리날다] 그래도, ♡♡해. [2] 김미영 2010.04.22 2497
» [오리날다] 어렵다, 사는 거 file [8] 김미영 2010.04.22 2190
1229 딸기밭 사진편지 24 / 4월 안부 file [1] 지금 2010.04.22 2109
1228 칼럼따라하기4<나에게 신화란 무엇인가?>-밀린숙제 청강경수기 2010.04.23 1994
1227 팔빠진 금연구역 신진철 2010.04.23 2083
1226 딸기밭 사진편지 25 / 사랑법 file 지금 2010.04.24 2117
1225 [오리날다] 밥이 뭐길래 file [2] 김미영 2010.04.24 2324
1224 [노래]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그냥 한 번 올려 봤어요 ^^ [3] 김지현 2010.04.25 2534
1223 딸기밭 사진편지 26 / 경주도 봄 file 지금 2010.04.25 2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