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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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다녀왔습니다. 군산 공항 옆에 옥서 삼거리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서 하제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10분도 걸리지 않아 뻘이 가득한 포구가 나옵니다. 하제 포구는 여느 포구와 다릅니다. 한 30년 정도의 시간 여행을 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유달리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어정쩡한 개발이 이루어져 색치에 가까운 원색 간판이 난무하고 횟집이 즐비한 여느 포구와 다릅니다. 소설 속의 오래 된 포구 하나 그 곳에 있습니다.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갯벌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갯벌사이로 작은 물길들이 달리고, 생합과 어류를 파는 아주 작은 가게 들이 몇 개 있습니다. 흰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무슨 무슨 수산이라고 꾸불거리는 막글씨로 간판을 써두었습니다. 햇살이 오래 비치고 짠물기가 스미고 배어 페인트는 자연스럽게 탈색되어 있습니다. 시멘트와 페인트도 고풍스러 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과 낙후의 사이로 어렸을 때의 아늑한 기억이 스물거립니다.
하제에 가면 꽃게 무침을 먹어야 합니다. 꽃게 무침을 파는 집이 그저 서너 집 있습니다. 망설이다 마음이 머무는 아무 집이나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암꽃게의 알과 내장을 다 긁어내어 파 마늘 양파 고추등을 넣고 맵게 주물거려 게딱지에 버무려 올려놓은 것입니다. 게의 진한 맛과 전라도 찡한 손맛이 어우려져 밥 한공기가 언제 먹었는 지 모르게 사라집니다. 하제에 가면 간 김에 생합을 조금 사가지고 와 파 마늘 넣고 시원한 조개탕을 끓이면 그 포구의 맛이 조금은 서울에서도 묻어 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하제의 모습은 곧 이윽고 사라져 갈 풍광일 것입니다. 그 곳에 갈 때 난 과거 속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 다시 현재로 복귀하는 듯 했습니다. 하제는 한 30-40년 전에 우리가 먹었던 삼립 크림빵 같은 곳입니다.
주말에 일부러 찾아 가지는 마세요. 실망할 테니까요. 그저 그 근처를 지나다가 배가 고프면 한 번 물어물어 가 보세요. 아주 작은 시간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크림빵 맛을 보러 간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한 없이 바삐 돌아가는 지금에서 벗어나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 잠시 넋놓고 몸 담그고 싶을 때 잠시 들리는 마음으로. 비오는 날은 과거와 만나기 좋아요. 초라함과 약간의 궁상, 은은한 막막함은 비 오는 날 진해져요. misty water colour 처럼.
"꿈을 이루는 것이 쉽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삶을 생존으로 쉽게 치환하는 사람을 나는 더욱 미워한다 - 어느날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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