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자유

주제와

  • 이선이
  • 조회 수 2560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6월 4일 16시 22분 등록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땐

맨드라미 빨강 비로

앞마당을 쓸어라



윤석중의 동요집<초생달> 박문출판사 1946



이 시집은 8.15해방 직후에 나왔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왜정 치하에서 씌여진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의 동시평론집을 샀다.

나는 평론을 따분해 하지만, 그분의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라는 이 책을 두근거리며 기다려서 주문했다.

철저히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치열하게 논한 이 평론집의 초반부를 읽었는데..

시와 시정신에 대한 이분의 시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분은 이름난 시인의 동시보다는

이를테면 이런 시



[조그만 구름]



조그만 구름아,

어서 빨리 갈라고 하면 뭘 하노?

평생 가 봐도 너의 집은 없다.

몇며칠 굶고 가도 반 한 숟갈 안 준단다. (1970.11.8)


칭찬하시고 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의 글쓰기 모작에 대해서도 반성하는 글을 비평하기 전에 쓰셔서 또한 놀라웠다.

p195 이후,

4.
다음에 어떤 작품에 감동하거나 심취한 상태에서 모작이 씌어지는 예를 나 자신의 작품으로 얘기해 보자.

밤새도록 눈이 내려 쌓여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주여! 이렇게 밝고 빛나는 아침엔
땅 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없게 하소서.
어둔 방에 앉아 떨고 있는 가족들이
없게 하소서.
길을 가는 나그네도 이 아침엔
따뜻한 집에서 쉬게 하시고,
날마다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모진 매를 맞던 가축들도 그들의 마구간에서
배불리 먹고 누워 있게 하소서.

<눈 온 아침의 기도>의 앞부분

20년 전에 쓴 이 졸작이 프란시스 잠(Francis Jammes 1868-1938)에 심취한 상태에서 씌어진 모작이라고, 나는 지금 반성하고 있다. 여기 아무리 나 자신의 심정이 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하더라도,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지 못한 값싼 심정을 잠의 시 모양을 빌어 토로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것을 모작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독자들은 혹 반문할지 모른다. 그럼, 모작이 아닌 것을 쓰는 동시인들이 얼마나 될 것이냐, 하고. 그렇다. 조금이라도 엄격하게 따진다고 하면 우리 동시의 현재 상황에서는 모작 아닌 작품이 차라리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모작을 쓰지 않는 사람, 곧 진정한 시인은 정말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국한할 문제일까. 내 글과 졸시들은 그속에 배어 있는 내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과연, 나는 어떤가.. ) 더구나 특정한 작품의 모델도 없이 다만 상식화된 동시적인 것을 찾아 씀으로써 작자도 깨닫지 못하는 모작이 되어 버리는 셋째 번의 부류는 정말 그 예가 많다고 본다.
가령 '겨울 밤'이니 '시골 밤'이니 하는 제목의 동시를 이따금 대하는데, 이런 작품을 보면 그 소재와 시상이 너무나 유사함에 놀라게 된다.

5.
모작이 범람하는 요인을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규명해 보는 것이 매우 긴요할 터이지만, 지면 관계도 있어 여기서는 문학적 측면에서만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구나 그런 글이 잉태되는 데에는 사회 문화적인 덩이들이 개인정신세계와 생활가운데 영향을 끼치고 작가들은 그러한 사회문화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작품의 건강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로구나. )문학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 한정해서 볼 때, 이런 현상은 결국 작가들의 정신 타락에서 오는 매너리즘(mannerism)의 말기적 증상이다. 매너리즘의 상태가 상당한 기간을 두고 계속되어도 작가 · 시인들이 크게 각성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 가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 있을 때, 그런 상태는 점점 더 병적인 징후를 드러내어 모작이 성행하고, 모작이 또 오래 성행하는 곳에 드디어 표절작마저 횡행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동시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인 것이다.
우리 동시가 오랫동안 동심천사주의에 묶여 어린애들의 어리광이나 재롱을 흉내내는 짝짜꿍 동요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때, 그런 풍조속에서의 모작은 대개 제재와 주제의 빈곤에서 오는 무의식적 행위였다. 그런데 최근 일부 동시인들이 어떤 경향의 성인시를 모방하여 동시에서 의미성을 배제하고 공허한 말의 수공적 기교만을 주장하면서 이를 '현대 동시'라 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아동문학의 독자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있는 폐쇄적 취미로서, 과거의 짝짜꿍 동시보다 한층 더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무의미한 말장난의 이런 작품이 동시의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씌어질 것인지 모르지만, 다만 한 가지 불을 보는 것보다 더 명확한 사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수공적 기교에 의존하는 만큼 멀지 않아 의식적 모작 행위가 성행하여 이런 작품이 온통 모작의 판으로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벌써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결국 공연히 신기함을 좇는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의 매너리즘을 타개하는 새로운 방법도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그 자체가 매너리즘의 말기적 경화 현상의 병적 변태의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토록 깊은 수렁에 빠져(비단, 글이 아니라 일은 어떤가. 일의 진정한 건강성.. 어제 네이버뉴스에서 직장인들의 대부분이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와 사회적 위치 때문이라는 조사결과.. 어딘서한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작가들이 일이 그런 것처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생기없어지는 것..사무실 내 책상이라고 주어진 그 자리에서의 나.. 시간도둑이 되어 종이인형이 되어 라는 참으로 나약하고 표현, 늘 지적받는 수동적인 자세 그리고 나자신도 식상해버린 방어적인 검은 말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휴가를 낸 새벽 고민고민.. 아침새소리 유월의 보석 앵두열매가 밤새내린 비에 떨어져 있는 화단 아래서 만난 반가움과 삶에의 의욕이 태양대신 솟는 듯 마음이 뜬다. 태양셀전지보다도 효과적으로 제 잎과 꽃 열매에 빛을 축척해온 나무들이 쉼없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해나가는 자취들.. 어린싹과 또다시 돌아온 봄에 핀 꽃자리는 열매자리가 되는 듯 하더니 가을 겨울 그자리가 무슨 자리인가고 생각해보니 빛자리였다. 다음 성장을 위해 열매 짓고 ..다시 나아갈 하늘 가지를 키우고.. 그들은 지칠 줄 모른다. 그들이 하늘바람과 구름, 비와 눈, 이슬과 흙에 대한 감각들은 늘 깨어있으며.. 변덕스런 날씨를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맞추고 또 적응하면서 개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지구온난화를 걱정할 줄 모르나 그때에도 이들은 제 가지를 뻗칠 빛하늘자락 찾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있는 상태를 개선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함정에 빠져 있는 자가 스스로 천국에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의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동시가 빠져 있는 비시적(非詩的) 함정을 자각하는 데서 참된 동시의 길은 열릴 것이다.
여기 동시인들이 시를 자각하는 하나의 창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곧 아동들이 쓰고 있는 시의 세계다. 많은 동시인들이 통풍이 안 되는 심리적 밀실에 스스로를 감금해 놓고 수없이 울궈먹은 낡은 제재와 퇴색한 언어를 주무르고 뒤척이고 있을 때, 그래도 시를 얻지 못하고 닮은꼴만 만들어 참담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은 어떤 세계에 살면서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가 살펴보자


[솔 넘어가는 소리]

안동매기에서
솔을 빈다.
짝닥닥 하고
넘어간다.
빌 지기는 설설거다가
넘어갈라 할 지기는
짝닥닥거다가
따에까지 댈 때는
콰당탕건다.
내가
멀리 있어도
창기는 것 같다.
소나무 앞에 있는
참나무도
엄침이 큰 게
소나무에 칭기서
불거진다.

권상출(경북 안동 대곡 분교 3학년 1969.10.4)


* 빈다 : 벤다. *빌 지기는 : 벨 적에는
* 설설거다가 : 설설 하는 소리가 나다가
* 콰당탕건다 : 콰당탕한다 * 칭기는 : 치이는
* 엄침이 큰 게 : 엄청나게 큰 게. * 불거진다 : 부러진다.

하필 이런 아동시를 들어 보이는 것은 동시인들이 외계의 사물과는 격리된 암실에서 혼자 무엇을 상상하는 경우에서만이 동심의 시가 이뤄진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폐된 심리 세계에서 죽은 말만을 만지고 있다 보니 남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또 그래서 비슷한 모조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시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사람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어마나 날카로운 감각이 필요하고 심정의 투입이 필요하고 상상을 필요로 하는가, 또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가, 그리하여 이런 수련이 마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되는 데생을 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이다. (묘사라는 것이 이런 과정일 것이다. 묘사 그것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림 그리는 이들이 사랑의 대상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는 것처럼.)
이 작품은 아동시에서 사실적인 작품의 성공한 본보기로 든 것이 아니다.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그리려고 하는 경우에도 주관과 상상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것, 우리가 모작적 세계나 획일적 세계에서 탈피하는 데 있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객관 세계와 차단(여기서 이 단어를 만나니 이제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업무가 차단가 카타로크보고 견적내고 실행예산편성하는 거라 그런것인지)된 시인의 기분이나 손끝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상상의 원천을 제공하는 그 객관 세계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다.(기초 전기와 물리학책을 겨우 조금 보았을 때의 그 공상과 상상이 나를 들뜨게 한것은 이유가 있는 거구나.)이러한 객관 세계를 진실하게 파악하려고 하여 쓰는 시에는 결코 모작이란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 그루 나무가 넘어지는 것을 소년의 눈을 통해 그린 것이 이만큼 생생한 느낌이 드는데, 하물며 복잡 미묘한 인간과 사회의 온갖 모습을 그리는 데 있어서랴.




[미루나무]

미루나무 큰 놈이
대장질한다.
큰 미루나무가 일렁일렁하며
자기 몸을 흔드니
작은 미루나무들도 몸을 흔든다.
큰 미루나무가 안 흔드니
작은 것도 안 흔든다.
참 터구배끼 안 되나. (1969.5.3)

*터구배끼 : 터구밖에. 바보밖에.

이성윤(경북 안동 대곡분교 3학년)

같은 나무를 보고 쓴 것이지만 여기서는 작자의 상상이 한층 크게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날카로운 비판 의식에 연결되고 있다. 미루나무는 단순한 완상의 대상으로 그려진 풍치도 아니고, 관조의 눈으로 파악된 경물도 아니다. 그런 모조품이나 되기 쉬운, 굳어 버린 어른들 세계의 죽은 사물이 아니다. 지극히 개성적으로 파악된 살아 있는 나무가 되어 있다. 한 어린이의 삶의 세계에 들어옴으로써 미루나무는 비로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상상이란 이와 같이 삶의 세계에서 촉발될 때 비로서 그 진실성이 보장된다는 것은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이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양스럽게 보여질 수 있는가, 곧 모조품이 만들어지거나 획일적인 것으로 떨어질 염려가 전혀 없는, 싱싱하고 풍요한 아동의 마음과 삶의 세계를 여기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다른 곳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또 한 번 들어본다.


[내 무거운 책가방]

내 몸집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산수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 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 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김대영(서울 공덕 초등학교 5학년) - 문학사상 1975년 1월

이 작품에 대해서 소설가 박완서(1931~) 씨가 한 말에 의하면, 동화고 동시고
도무지 시시하다고 읽지 않던 막내아이가 이 작품을 보더니 눈을 빛내며 무릎까지 치면서 두 번 세 번 읽고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증언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작품이 아이들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아이들의 가장 절실한 생활 문제를 그들의 친근한 일상어로 표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시절의 국민학교를 떠올리는 분들은 이 시에 공감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아이답지 못한 좀 지나친 표현이 있어 순수한 아동의 작품임을 의심하게 하기도 하나,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아이들이 그처럼 감동으로 읽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감동하는 것은 반드시 반항적인 마음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솔직한 그들의 일상, 어린들이 시로 써 보여 주지 않던 그들의 절실한 생활이 과감하게 씌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아동문학에서, 동시에서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고 버럼받았던 것이 아동의 생활 세계였던 것이다.
아동문학인 동시가 아동의 생활 세계를 외면하고 있었다면 참으로 괴이하다 할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앞 장에서 몇 가지 동시에 유행된 유형 같은 것은 들었지만, 그 유형들이 '시골 겨울밤' '산골 아이' '시골 정거장'과 같이 한결같이 산골이니 시골이니 하는 접두사가 붙어 있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고 있는 동시인들이 자기와 연결된 존재로서의 아동의 세계, 날마다 목격하고 있는 살아 있는 아동의 세계는 모른 척하고, 그것을 비켜서 눈앞에 없는 것, 옛날의 것을 그리워하여 찾고 헤매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아동문학 작가로서 결코 건전한 태도라 할 수 없다. 제것이 아닌 것,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불건전한 동시인들의 태도는 생활 속에 살면서 시를 쓰는 아이들의 태도와는 전혀 상반되어 있다. 동시인들이 무하한 감동의 원천이 되는, 진짜 동시의 세계는 텅 비워 놓고 그림자 따라 허?틤
IP *.193.194.22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6.05 12:45:33 *.36.210.11
다음에 다시 또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글.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