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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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숲은 충북 괴산 사오랑마을 언저리에 있습니다. 사오랑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십대의 청년(?)층이
두터운 편입니다. 하지만 여느 농산촌과 크게 다르지 않아 주민 대부분이 칠팔십대의 노인입니다. 따라서 요즘 같은 농한기에 경로당은 어르신들로 가득합니다. 경로당의
하루는 어르신들의 느린 수다와 민화투 두드리는 소리, 크고 작은 웃음 소리로 채워지고 멀어집니다.
열흘 전쯤 나는 노인회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상의를 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은 때마침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했습니다. 점심 때가 다된 시간이었습니다. 읍내 어르신 계신 곳으로 찾아 뵙겠다 했습니다. 해도 바뀌었으니
국밥 한 그릇 대접하면서 상의를 드리고, 댁으로 되돌아오시는 길을 나의 차로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르신은 늘 그러하셨듯이 그날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어르신은 읍내 갈비탕집 앞에 서 계셨습니다. 동생은 대학을 나오고 고위 공직자 생활까지 한 후 귀향하여 군수를 역임하고 있지만, 장남으로 태어난 어르신은 가업을 이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습니다. 학교를
많이 다닐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르신은 몇 해 전 책을 한 권 내셨습니다. 물론 비매품이고 읍내 인쇄소에 맡긴 자비 출판의 책이지만, 당신의
칠순에 즈음하여 일생을 품어온 기억과 사유를 한문과 우리글로 질박하게 담아낸 책입니다. 제게도 그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읽는 내내 깊은 존경심을 갖게 했습니다. 아,
촌로의 삶에 담긴 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주변에 대한 깊은 애정… 어찌 제왕의 삶을 이에 견줄까…!
어르신은 갈비탕 두 그릇을 주문하시면서 바지춤에서 돈을 꺼내
얼른 계산을 치르셨습니다. 만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극구
새해가 되었고 숲학교 일이 본격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니 작은 격려라고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한 해 농사를
지어 얼마 되지 않는 수입으로 다시 이듬 해를 사시는 농촌 노인들의 주머니가 얼마나 얇은지를 알기에 참으로 송구스럽고 또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나는 어르신께 노인회 어르신들이 가진 귀한 경험을 나누어주십사
청했습니다. 촌로들에게 무슨 쓸만한 경험이 있고 그것이 또한 어떻게 귀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떠나시면 이어지지 못할 소중한 경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시냐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우선 여우숲 장독대에 나무 울타리와 사립문을 만들고 싶은데 그것을 할 수 있는 청년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나는 장독대 외곽에 나뭇가지를 추려 울타리를 세우고,
그 울타리 안팎에 개나리나 탱자나무를 심을 계획이었습니다. “그거라면 우리가 잘 할 수
있지!” 해주실 수 있는지, 비용은 얼마면 되는지, 젊은 우리는 무엇을 도우면 좋을지… 다른 어르신들과 상의하여 알려주십사
청했습니다. 목수형제 중에 형이 어르신들을 모시고 숲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여우숲 입구의 장독대 근처에는 나뭇가지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며칠 뒤면 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생기고 사립문도 설 것입니다. 형 목수는 말합니다. “놀랐고 참 좋았습니다. 어르신들이 얼마나 즐거워하시는지, 서로 유년과 청년시절을 추억하시며 아이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에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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