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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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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7일 09시 02분 등록

 

일찍이 접하지 못한 화두 격의 질문, 생각은 난데 없다. 일하다 말고 느닷없이 먼 산을 보고, 앉으나 서나 똥쌀 때나 밥 먹을 때나 이 어색한 질문, 떠나질 않는다. 사무실 책상에 나는 누구인가작게 적어놓고 잠시 쉬고 오니 팀장님께서 불러 심각하게 되묻는다. “너 요즈음 무슨 일 있니?”.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로 머리를 감싼다. 그러다 퍼뜩 든 생각, 삼천배를 할까, 하다 보면 나 자신이 보이지 않으려나. 아서라. 밀려오는 답답함에 다시 풀이 죽는다.

 

러시아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시호테 알린 산맥 주변에 거주했던 토착 주민 데르수 우잘라는 별과 달을 묻는 문명인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재미있다.

 

별이 뭔가?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

 

이것은 매우 명쾌한 답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머리를 쥐어 뜯는 나를 보고 데르수는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 답할 것 같다. “너는 너지.”

 

 

우리는 미지와 무한에 대한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하나의 작은 우주로써 특별한 것은 맞지만 특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스피노자는 약한 지성과 강한 상상력으로 인해 미신과 공포가 생겨난다고 말하였다. 더 이상 알 수 없고 모르는 것에 대해 필요 이상의 상상력으로 그 대상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자신을 직시하고 좀 더 깊이 탐색하는데 몰두해야 한다. 데르수는 사물을 바로본 것이다. 시원(始原)의 시선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겠는가. 어줍잖은 상상력으로 우주인 아이덴티티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자. 나의 존재를 알기 위해 45억년 전 생물의 기원까지 찾아 올라가고, 시간을 만유인력으로 잡아 당겨 지금의 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득하고 희미하다. ‘45억년은 둘째 치고 우주또한 이미 몇 차례 생겼다 사라진 다음이 지금이니, 그 스케일을 가늠하기에는 생은 너무 눈물겹다.

 

 

나는 나의 존재 이유가 먹고, 마시고, 오르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나의 사명이자 나의 아이덴티티다. 사소한 일을 사명으로 확장하는 느낌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언어로 치환하면 이것은 자유나 다름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언어로 다시 쓴다면 먹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마시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 그리고 일해야 오를 수 있고 쓰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도 일을 할 때 가능해 진다. 틀리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 믿고 있다.

 

일은 나에게 이렇게 중요하다. 아무 일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일로 규정 되어진 이후에는 또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를 깊이 알지 못하면 아무 일이나 하게 된다. 내 안의 홍심으로 다가서기를 게을리 하면 남이 꾸는 꿈에 헌신하는 하게 된다. 결국, 나를 깊이 알고 탐색하는 것은 나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리하면 나는 로서 늙어 죽을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내 일은 내가 누구임을 증명한다. 나의 사명은 먹고, 마시고, 오르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내 사명이 나의 일이 되었으면 한다. 그 중 오르고, 쓰는 것이 내가 죽을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것을 위한 임시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직장인의 삶은 내 자유의 잠재태인 것이다.

 

 

그래서다. 바로 이 임시가 주는 물리적, 정신적 긴장감은 스스로 자기가 현실보다 강하다고 중얼거리게 한다. 현실극복증후군이라 할 만한 이 강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스스로 벼랑 끝으로 몰아 넣는 독종의 페르소나를 선사하기도 했다. 지구의 용마루를 오르겠다고 박박 우겨 밤마다 허파가 터질 때까지 달렸다. 회사에서는 업무보고를 끝까지 마친 후 화장실로 달려가 흐르는 코피를 무표정하게 닦았다. 그래야 비장하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지긋지긋한 훈련에 자신을 구겨 넣는 냉혈한의 면모도 있는 것이다.

 

미화하자면 비 갠 뒤의 들풀냄새, 백양/물참/자작/편백의 나무냄새를 좋아하고 높은 바위에나 산다는 솜다리(에델바이스)를 보기 위해 힘들게 수직의 바위를 꾸역꾸역 올라가는 알피니스트 정도쯤 될까. 이것이 나의 일이 되고 나의 믿음이 되었으면 한다. 그 믿음이 현실이 되기 위한 디테일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항상 아둔하단 소릴 듣는다. 그러나 나는 오른다. 그것이 나답게 사는 길이라 믿고 있다.

 

 

한 가지를 더 보태자. 그래 쓰고가 남았다. 채워지지 않는 생명의 연원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해답이 책에 있으려니 했는데 게을러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니다. 그 답은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니다. ‘왜 사냐?’ 는 질문은 바람에 쓸려갈 덧없는 것들이나 하는 것이고 저절로 태어나 비루한 생을 살아내는 70억의 각 사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무지한 것인지 알고 있다. 침묵으로 일관해야 할, ‘말하여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반항이다. 이런 무지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른 뒤 수 많은 길에 대한 단상을 통해 인생의 길과 물리적인 길의 연계성, 그 겹쳐지는 성질 속에 일어나는 역사와 장삼이사들의 삶을 조악한 자신의 글로 안아 주고픈 어설픈 작가라고 지리멸렬하게 설명하는 어리석음까지 갖추게 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통근버스 안의 시간이다. 새벽의 통근버스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간간히 들리는 코고는 소리는 버스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야릇한 하모니를 선사한다. 이 시간은 하루 중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간섭을 끊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때 나는 주로 책을 읽는다. 어두우면 불을 밝혀가며 읽는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지만 생각의 나래는 2천 년을 넘나든다. 퇴근할 때의 통근버스는 모두가 하루 종일 기진한 몸을 누인다. 내 뼈도 가장 흐물흐물 거리는 때라 맥을 추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온 종일 서로의 관계가 저인망이 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사무실에 비하면 하늘하늘 날아가는 연기와 같은 자유를 느낀다. 한시의 생취를 느끼며 말이다. 어설픈 작가가 미네랄을 캐는 시간이다. 바로 이 미네랄은 써 내려갈 때의 물리적 손이 신의 영감으로 인도할 수 있는 네비게이션이 되지 않겠는가. 기반 없고 어설픈 작가이기에 그리 믿고 있다.

 

 

더하여,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그 철학을 아래와 같이 딸 자식의 이름에 남겨 두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알면서도 한 우주에게 타인으로부터 평생 불려질 이름을 나를 위해 지었던 것이다. 받게 될 운명의 골을 같이 걸어갈 수 있는지를 몇 차례 반문하고는, 그리 했다. 딸 자식 이름의 발문이지만 이것은 나에게 요구하는 나의 철학이다. 그 발문으로 이 글을 마친다.

 

듣는다는 사태는 자의적 행위가 될 수 없다. 세상을 둘러싼 소리, 음성, 말 또는 듣기 싫은 소음이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순간, 들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두 귀가 열려있는 한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잘 들어 알아차리고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가 남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하고 싶은 얘기와 말들로 넘쳐난다. ‘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세상이며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름하여 世聆’, ‘세상을 들어 인간을 깨우친다라는 거창한 의미 속에는 타자성(他者性)이라는 함의가 녹아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실존시켜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타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입신하여 양명하는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깨달음의 부재인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그 외소한 우주 속에서 외치는 작은 이야기들을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너는 타인이 불러주는 너의 이름의 뜻을 깊이 새겨 을 행복과 감사로 살아가라.”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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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11:53:03 *.154.223.199

장재용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말씀에 ㅋㅋ ㅋ 웃었습니다.

근데 장재용님은 백양나무, 물참나무, 자작나무, 편백나무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으세요? 저는 그 나무들도 구분 못하는데요.

'오르고...' 부분에서 장재용님이 산사나이에 장거리러너가 아니실까 짐작해봅니다.

세령낭자의 이름의 뜻이 아름답습니다.  

참 이 레이스는 징하게 달달달달달달달 볶으면서도 남다른 재미가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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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12:27:25 *.123.71.120

삼천배라는 소리에..귀가 쫑끗, 두 눈이 번쩍!!

삼천배 해보셨구나...ㅎㅎㅎㅎ

언제 같이 해요.^^ 저는 기도도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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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13:31:38 *.166.160.151

삼천배, 오르고....산을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산 좋아합니다.

이번 겨울에 설악산갔다가 엄청고생했지만요...

무엇인가 가슴뛰는 일중에 공통점이 있는 분을 만나는 건 기쁜일입니다.

삼천배까지 하면서 고민할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제생각...다리많이 아프니까 하는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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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19:27:40 *.33.136.150

'세상을 들어 인간을 깨우친다.'라는 뜻이 마음을 크게 울립니다. 

글을 읽으면서 어떤 책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출퇴근 길에 자신에 대한 묘사도 재밌게 읽었어요. 

내 뼈도 가장 흐물흐물 거리는 때라 맥을 추지 못하는 시간이다

이 부분은 저도 아는 시간 같아서 공감을.. ^^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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