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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00시 21분 등록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슬픔, 모리스부호, 한 잔의 술


나에게 있어 시에게 의미부여를 한다면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슬픔, 가까이 하기엔 먼 그대, 한 잔의 술, 모리스부호 . 아제 한 가지씩 풀어나가려 한다.


1. 슬픔

  1989년 3월 어느 날, 조간신문을 펼쳤다. 사회면 한 귀퉁이에서 “시인 기형도 29세,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지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발견했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었는데도 가슴에서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듯 했다. ‘시인이 요절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난 며칠 동안 우울했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두어 달의 시간이 흘렀나, 기형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나왔다. 그의 사인은 뇌졸중, 그의 시들은 요절을 예감이라도 한 듯 어둡고 우울하고 깊은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서 별 계획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그의 시들은 슬픔의 색채로 내 가슴에 오롯이 잠겼다. 특히 <빈집>이라는 시를 읽고 많이도 울었다. 그의 시는 유언과도 같고, 레퀴엠과도 같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한시미학산책>에서 언급되긴 했지만, 슬픔을 노래한 시인들은 요절하거나 큰 화를 입었다. 어쩌면 자신의 생을 미리 예감했기에 슬픈 시를 자꾸 읊는 것이 아닐까. 말이 씨가 된다고 하니 슬픔 대신 기쁨을 노래해야 할 것같다.

시는 언제나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왔지 기쁨으로 다가온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것은 그 자리에서 한 번 웃고 말면 그만 내 가슴에 깊이 각인 되지 않았다.


 2. 가까이 하기엔 먼 그대

  시인은 천형(天刑)을 받은 사람들이라 한다. 시인들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정화시키는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내린 형벌을 감내하고 쓴 시를 아무렇게나, 쉽게 읽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겐 있다. 행간을 읽지도 않고 음미하지도 않고 눈에 드러난 활자만을 죽죽 읽어버린다는 것은 공들여 쓴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깊게 배여 있다. 그 행간 읽기란 시인의 의도를 알아채는 것이며,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감각의 촉수를 길게 뻗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은밀한 그 무엇을 알아차림이 힘들었다. 시라는 놈과 연애 좀 하고 싶은데 냉정한 시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뿐, 나신(裸身)을 선뜻 보여주지 않았다.

   시인들은 한 단어를 위하여 몇 날 몇 밤을 지새웠을 것이며, 돈도 되지 않고 밥도 되지 않는 시를 끌어안고 피를 토해내듯 썼을 것이다. 소동파는 <적벽부>를 얻기 위해 수레 세대 분의 초고를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오랜 인고 끝에 탄생한 시에 대한 예의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시집 한 권을 읽으려면 장편 소설 한 권을 읽는 만큼의 시간을 들여다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시와 시인에 대한 존경심과 예의차림이 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이번엔 시가 나에게  연애를 걸어오는데, 시에 대한 예의와 존경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뿐이다. 이래저래 시는 ‘가까이 하기엔 먼 그대’가 되어버린다.


3. 한 잔의 술

  나에게 시란 한 잔의 술과 같다. 알코올성분이 혈관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때로는 기쁨과 슬픔을 배가(倍加)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일 아니란 듯이 절하시키기도 한다. 한때 한 잔의 술을 마시듯 슬퍼하기 위해 시를 읽었다.

  결혼과 동시에 조용하고 평온한 고향 경주를 떠나 소란스럽고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서울로 올라왔다. 언제나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고 서울에 닻을 내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서울은 내가 꿈꾼 그런 화려함과 풍요를 안겨주는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서울은 결코 내가 꿈꾸었던 환상의 도시,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신화가 살아숨쉬고, 역사가 있는 내 고향 경주는 시적인 도시였다. 특히 벚꽃으로 뒤덮인 봄밤의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울은 내 마음의 환상과 꿈과 서정적인 풍광을 앗아갔다. 현실과 환상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가벼운 우울증 초기였는지도 모른다. 친구도 없는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동네 카페에 앉아 흘러간 재즈를 듣거나, 하릴 없이 시장통을 돌아다니거나, 방에 앉아 시집을 읽는 것이었다. 신석정의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집은 나의 눈물샘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장석주 시인은 “시를 읽는 것은 내 세포에 새겨진 바코드를 읽는 것”이라 했다. 내 세포엔 슬픔의 바코드가 훨씬 더 많이 새겨진 것일까?

  막차가 좀처럼 오지 않는 것도 슬펐고, 기다리는 것은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슬펐다. 대합실에 앉아 쇠난로에 몸을 녹이는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나를 슬프게 했다. 산다는 것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슬펐다. 인생이란 언젠가는 한 두름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손에 들고 귀향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마냥 슬펐다. 시를 읽으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 흐느껴 우는 행위 그 자체가 멍든 가슴 술로 달래듯 큰 위로가 되었다.

  그때 막연하게 내 우울에 대해 자가진단 내리기를 술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이 망가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도꼭지처럼 졸졸졸 흐르는 내 눈물과 슬픔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4. 모리스 부호

  시란 언어의 농축이요, 함축이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서 읽어내야 하는지 시집을 들고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시는 풀기 어려운 모리스부호요, 난수표와 같은 것이다. 짧은 시 한 편에 인생사가 다 들어있다. 우주천지의 생멸이 다 들어있다.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사랑이 다 들어있다. 무슨 수로 풀어내어 읽는가? 컴퓨터의 알집처럼 풀기 쉽게 장치해 놓은 것도 아니고.

   작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생각대로 풀어서 읽으면 된다고 한다. 아무리 내 마음대로 읽으려 해도 읽혀지지 않는 시인들이  있다. 이름은 김경주, 2년 전부터 좀 가까이 사귀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건만 아직 손도 잡아보지 못했다. 시집 이름부터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범상치 않다. 그들은 분명 안드로메다에서 온 4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외계인일 것 같다. 사고체계가 다른 그들은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감을 나누는지 궁금해진다.

  선가에서 내려오는 선시(禪詩)들 역시나 해독하기 어려운 모리스부호와도 같았다. 깨닫고 나서 부르는 오도송이나 죽음 직전에 읊는 열반송 등은 언어의 뜻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로 다가왔다. 밖으로 표출된 그 뜻을 알았다고 해도 내포하고 있는 몇 척이나 되는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이는 깨닫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선시라 하고, 어떤 이는 키워드 몇 개만 알아도 선시의 향기는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아는 만큼 읽어내는 것이 또 시인 것 같다.

  난 시가 해독하기 어려운 모리스부호와 같아서 매혹적이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은근히 마음에 품어보는 그런 것이다.

 

  

  










IP *.85.24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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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5 08:02:37 *.85.249.182

생각지도 않게

시를 통해 내 인생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시간이 되었다.

시와 좀더 쉽게 내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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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0:48:34 *.51.145.193

감성이 절절하십니다. 슬픔을 공유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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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01:42:46 *.85.249.182

꼭 집어서 '공감 능력'이라는 지적인 언어로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지적 레이스 마무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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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2:32:12 *.200.81.18
한잔의 술이 유독 마음에 와닿네요.

술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이 망가질 것 같은 예감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만나뵈면 왠지 통하는 것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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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01:46:45 *.85.249.182

문학을 하려면 술을 가까이 해야 하고

시를 하려면 술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한 잔의 술도 없이

어떻게 하늘의 달을 따고 별을 딸 수 있겠어요.

모든 예술은 술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저도 펄펄님을 만나면 뭔가 시원스레 소통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멋진 지적 레이스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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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2:32:12 *.200.81.18
한잔의 술이 유독 마음에 와닿네요.

술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이 망가질 것 같은 예감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만나뵈면 왠지 통하는 것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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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5:20:35 *.161.70.32

기형도의 슬픈 죽음 아~

여기서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인의 작품도 함께 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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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01:50:49 *.85.249.182

시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이

기형도 시인과의 관게맺기였던 것 같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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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6:15:08 *.89.208.250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알코올 처럼 스며드는 시의 느낌이 정말 생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만나면 꼭 술 한잔 기울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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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01:37:05 *.85.249.182

똥쟁이님의 칭찬에 몸치가 춤추고 싶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고

친밀감을 두텁게 하는 데는'

술만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술 잔을 들어

지금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건배제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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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02:05:02 *.123.71.120
술!!! 과제가 끝나는 날이면 막내린 무대의 배우처럼 허탈...허전...씁쓸... 술생각나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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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16:35:00 *.85.249.182

그렇죠! 지적레이스가 끝나는 날이면

얼마나 허전할까요?

또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초조할까요?

그때 딱 한잔의 술을 마셔야죠.

 어쩌다 보니 제가 술꾼이 되어버렸네요.

이제부터 이미지 관리 들어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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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15:12:25 *.36.72.193

2010년에 갔던 경주 여행이 생각납니다.

여유있게 보고, 먹고 했었는데...

 

시와 가깝게 지내셨던 지난 날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감도 하고, 배우기도 하며 읽었습니다.

방 안에 앉아 시를 읽는 멋있는 분을 알게 되서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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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16:37:59 *.85.249.182

어덯게 보면 경주는 시같은 도시입니다.

신화가 살아있고, 역사가 있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경주가 빚어내는 풍광들이 시적입니다.

시같은 도시를 떠나 삭막한 서울에 왔으니 향수병에 딱 걸리기 쉽상이지요.

고향 덕택에 멋있는 분이라는 과찬의 말씀도 듣고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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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17:09:58 *.120.78.130

시인은 천형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정민 교수 책의 시마와 오버랩 됩니다 ...

 

시가 한 잔 술이라 ~ 기대되는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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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8 21:10:50 *.154.223.199

시를 읽고 슬픔에 빠져 우는 것이 술이 하듯 멍든 가슴에 위로가 되었다는 구절이 인상깊습니다.

혼자 울 일이 그리 많으셨는가 싶기도 하구요.

딴소리인데요, 저는 글을 읽고 경주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일주일쯤 혼자 여행하고픈 도시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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