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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12시 19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1) 저자에 대한 기록

 

  Joseph Campbell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 가슴에 천복이 들어오다

죠셉 캠벨은 1904년 3월 26일에 미국 뉴욕 시에서 전형적인 중산계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캠벨이라는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였다. 캠벨이 열다섯 살에 입학해서 3년 뒤에 우등으로 졸업한 코네티컷 주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일생동안 계속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캠벨의 관심은 여섯 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팔로 빌이 분장한 위풍당당한 연방 기병대장을 동경했지만, 캠벨은 오히려 토벌되는 인디언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품었다. 그 때부터 그는 뉴욕자연사 박물관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나 제의를 공부하고 인디언에 대한 책을 방대하게 읽었다.

 

□ 학문의 시작
캠벨은 1921년에 명문 다트리머 칼리지에 진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품게 되어,1922년에 콜롬비아 대학으로 편입했다. 그는 그곳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수학했다. 그는 1924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선상에서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한 캠벨은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위논문으로 특별 장학금을 받아 1927년부터 파리대학9소르본대학에 2년간 유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파리 대학에서는 아서왕 전설의 권위자 밑에서 로망스어,중세프랑스어,프로방스어,라틴어 등을 전공하는 한편, 제임스 조이스의 <유리시스(Ulysses)>와 같은 새로운 문학이나 피카소, 브라크 등의 그림에도 깊은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유학은 1년으로 끝내고, 1928년에는 뮌헨 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섭취했다.
 
□ 종교관의 변화
뮌헨 시절에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 무렵부터 캠벨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귀국 후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미국 사회이지만,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가 "나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라고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은 배교로 간주되었고 친척이나 사회에 대한 오만불손한 도전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의 행동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캠벨은 기독교가 설교하는 자연정복 사상과 배타성(선민사상이나 교파간의 교의 대립 등)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화적인 상징을 사실처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품었고, 그것에 대신 되어야 할 것을 인디언 신화나 불교 사상에서 발견했다. 그는 "토마 복음서"에 큰 공감을 느껴 단테 등 많은 마음의 여행자를 찬양하고 일부 카톨릭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서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에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자택 서재에 달마대사 초상을 걸어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끝없는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설사 자신의 신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 용기 있게 천복 따르기
캠벨은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작정이었지만, 경제 사정 때문에 1년 뒤에 귀국했다. 미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가의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이었다. 캠벨은 이력서를 수십 통이나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값싼 작은 집을 빌려 극빈 속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Voyna i Mir)]를 원문으로 읽기 위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kandes)]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 시기가 캠벨이 그의 가슴에 들어 천복을 진심으로 따른 기간이다. 용기있게 결단하고 빛을 향한 어둠의 시간을 묵묵히 견딘(물론 자신은 너무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지만) 캠벨은 이 시기 이후  도약한다.
그는 1933년에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어학을 가르치면서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에 그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으며 그후 38년 동안 그곳에서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42년에 침머의 소개로 융 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불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 그의 사랑과 마지막
1938년에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3학년생이었던 하와이 출신의 진 애드먼과 열애에 빠져 결혼했다.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애드먼은 뒤에 일류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지프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에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학식뿐만 아니라 인품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의 80회 생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 파티에 참가했다고 한다.

출처: Naver 지식인, 과학세대

 
2) 개인적 평가

 
천복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천복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깨달음에 바로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따라 주어야만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장 행동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 혹은 남들의 시선 때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눈치만 보는 사람들, 수도 없다.
만약, 캠벨이 경제 공황 시기에 현실을 훌훌 털어 버리고 가슴 속 천복이 이끄는 대로 ‘우드스톡’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천복을 버리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리고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 끝까지 주저했다면. 그는 지금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까?
내게 있어 캠벨은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비교신학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깨달음에 즉각 반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리고 그 용기를 책임지는 성실함과 집중력을 가진 영웅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뼈대에 대한 평가

 

빌 모이어스는 '신화의 힘'을 통해 조셉 캠벨의 세계인 '신화'와 조셉캠벨 그 자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고 있다.

 

대담을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이기에 잘 짜여진 글처럼 이야기의 흐름이 한결 같을 순 없지만,  각 챕터에서

질문과 답으로 이어지는 둘의 하모니를 잘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알려주고 싶은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빌 모이어스와 조셉 캠벨. 이 둘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세계를 확립한 대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럼 여기서 '신화의 힘'의 목차를 살펴보자.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챕터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충실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목차에서 이 책 전체가 가지는 주제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즉, 주제들이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조셉 캠벨의 세계가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이 각각 처럼 보이는 주제들을 조금만 손보고 순서를 조정해 그에 따라 내용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캠벨의 신화세계에 대해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은

조셉캡벨 세계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2) 감동적이었던 장절

 

모이어스: 삶은 어차피 고통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는 것인데도요?
캠벨: ‘고통과 더불어’라고 할 게 아니라 ‘특정한 고통과 더불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요. 이 세상 누가 고통을 끊어보았답니까? 언제, 어디에서 그런 삶을 살아보았답니까?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청춘 시절에 당한 불상사 때문에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던 어떤 여자에게서 희한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여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의 고통은 기왕에 지은 죄에 대한 징벌, 혹은 장치 지을 죄를 경계하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안겼지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발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나는 이 말을 하고는 약간 창피한 느낌에 시달리면서 속으로, “진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 따위 말을 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나라는 인간에게 고통의 기억이라고는 고작 치통의 기억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나의 말을 듣고 이 여자는 정말 고통을 자기 삶의 스승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어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경험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 된 이야깁니다만, 나는 아직도 이 여자와 교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와는 아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요.
모이어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던 것이군요?
캠벨: 그래요. 내 눈으로 확실히 봤어요.
모이어스: 선생님의 이른바 신화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까?
캠벨: 설명하기가 약간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그 여자에게, 고통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비롯되게 했다. 이런 믿음을 갖게 했어요.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 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또한 그만큼 큽니다.
      앞에서 말한 내 여자 친구는 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3) 보완점

 

평설에서 지적한 보완점 이외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보완설명이 절실하다. 

두 대가의 대화를 정리한 책이기 때문에 그 대화의 넓이와 깊이가 아찔했다. 생소한 지명, 상징, 부족, 사상가 등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는 데도 글의 흐름이 끊길까 찾아보지 않고 읽어 내려갔는데 만일 이러한 것들을  바로바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마음의 물음표 때문에 들었던 죄책감 없이 훨씬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신화와 현대 세계
P.25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캠벨: “(p.25)그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신화와 고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오늘날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 후) (P.26)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의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로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이어스: (P.28)‘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캠벨: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몹시 힘이 드는 삶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캠벨: (P.29) ... 거기에 그런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하는 젊은이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됩니다.

모이어스: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캠벨: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조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모이어스: 그러니까 신화가 그 실마리라는 것이지요?
캠벨: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P.30)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캠벨: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하실 수 있었습니까?
캠벨: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삶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 자기 종교과 고나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자, 결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혼이 뭐지요? (P.31)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再會]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삶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모이어스: 제대로 된 상대하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까?
캠벨: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P.32)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까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P.33)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서 ‘도(道)’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모이어스: (P.33)그렇다면 결혼과 자기가 자기 것을 주장하는 사고방식은 온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겠군요?
캠벨: 이 ‘자리’야말로 신화적 이미지입니다. 추월적인 선(善)의 영역에 들기 위해 희생기키는 가시적인 실재가 바로 그것이지요.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캠벨: (P.34)그게 바로 의례(儀禮)의 잔재랍니다.

모이어스:(P.35)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P.36)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EH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캠벨: 범죄가 많은 또 하나의 까닭은 이 미국에는 에토스(윤리적 겨레 정신)가 없다는 것이지요. -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도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모이어스: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군요.
캠벨: 정리되지 않은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캠벨: (P.39)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준재의 불변하는 핵(核)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캠벨: (P.41)신화는 문학과 예술이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과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맞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2)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3)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의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해요. 구시대의 종교는 다른 연령층, 다른 족속, 다른 가치 체계, 다른 우주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제는 역사와도 발이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P.46)나는, 의식과 에너지(氣)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무르이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두움이 될만한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P.47)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선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켐벨: (P.78) 시애틀 추장의 명문(名文)의 해답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붇어 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명 우리 자식들을 먹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름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르쳐 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아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wires)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리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P.83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석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모이어스: (P.85)그렇다면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캠벨: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事象)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P.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림된 인도 <<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옮긴이)>>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대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7) 내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모이어스: (P.87) 꿈꾸는 시간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캠벨: 잠들어서,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의 조건과, 그 조건과 관련된 우리 현세적 삶의 현장을 꿈꾸게 되는 시간을 말하지요. -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꿈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시험에 붙을 것이냐” 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꿈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꿈은 순전히 개인적인 꿈입니다. 다음에는, 시험에 붙느냐 마느냐가 그저 개인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게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너머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이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原型的)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개인적인 단계와,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의 본보기가 되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단계)는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죽음과 직면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 않나요? 이와 관련된 꿈은 표준이 되는 신비라고 할 수 있어요.

(p.88)
모이어스: 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캠벨: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거을 배울 수 있지요.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캠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다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면,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조셉캠벨

P.242
캠벨:  힌두 경전에는, “위험한 길은 이러하니, 면도날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건 중세문학에도 등장하는 모티프입니다. 아더왕 전설에서, 기사 랜설럿이 포로가 되어 있는 귀네비어를 구하러 가는데, 이때 랜설럿은 맨손, 맨발로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다리 아래로는 급류가 흐릅니다.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런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을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95
모이어스: 모든 신화가, 고통은 삶의 본직적인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까? 고통에서 놓여날 방법은 없다고 합니까?
캠벨: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모이어스: 그렇게 해탈하면 우리의 삶이.......
캠벨: 조화롭고, 중심이 온전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고통도 해소되는 것인가요?
캠벨:  그렇고 말고요.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하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모이어스: 자비가 고통을 해소시킨다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캠벨: 물론 자비는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그래요...... 해소시킵니다.
모이어스: 삶은 어차피 고통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는 것인데도요?
캠벨: ‘고통과 더불어’라고 할 게 아니라 ‘특정한 고통과 더불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요. 이 세상 누가 고통을 끊어보았답니까? 언제, 어디에서 그런 삶을 살아보았답니까?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청춘 시절에 당한 불상사 때문에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던 어떤 여자에게서 희한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여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의 고통은 기왕에 지은 죄에 대한 징벌, 혹은 장치 지을 죄를 경계하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안겼지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발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나는 이 말을 하고는 약간 창피한 느낌에 시달리면서 속으로, “진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 따위 말을 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나라는 인간에게 고통의 기억이라고는 고작 치통의 기억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나의 말을 듣고 이 여자는 정말 고통을 자기 삶의 스승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어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경험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 된 이야깁니다만, 나는 아직도 이 여자와 교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와는 아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요.
모이어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던 것이군요?
캠벨: 그래요. 내 눈으로 확실히 봤어요.
모이어스: 선생님의 이른바 신화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까?
캠벨: 설명하기가 약간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그 여자에게, 고통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비롯되게 했다. 이런 믿음을 갖게 했어요.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 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또한 그만큼 큽니다.
      앞에서 말한 내 여자 친구는 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를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P.392
캠벨: ‘만달라(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작용하게 합니다. 가령 아주 정교한 불교 만달라를 보며 중심에 힘의 근원이자 깨달음의 근원인 신이 있습니다. 주변 이미지는 그 신의 드러남[顯現], 혹은 그 신이 지니는 빛의 측면이지요.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 체계를 명상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 두 체계의 자리를 정하고 다음에는 자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토해봅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한 자리에 모으는 훈련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모이어스: 중심을 찾아 자기 마음을 거기에다 두자는 것이겠지요.
캠벨: 그렇습니다. 중심에 두자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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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9:11:08 *.163.164.152

이런!!

 

힘내세요.

 

마감은 생명선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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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2:36:46 *.128.69.77

선배님, 생명이 10년은 단축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수명단축하는 일 없도록 해야겠다는 맘.

천번 만번 먹는  하루였습니다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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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3:25:08 *.114.49.161

나라짱, 수고하셨어요.^^  짝짝짝, 오늘 고기 드세요.

(고기고기고기! 아, 비오는 날은 부침갠가? 그럼 메뉴 급 수정^^ 암튼 좋아하는 음식으로다)  

저는 이번에도 1초 전에 슬라이딩 세이브 ㅠㅠ 다시 해서 첨부를 해야하지 않겠나 하고 있어요.

게다가 변신이야기 읽기도 초반이라는. 징징징 (나이값도 못하고 이래도 되나? 징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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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4:28:17 *.128.69.77

콩두언니~ 아... 힘들어요 ㅜㅠ

어제 3시간 그제 2시간 자고...

연짱으로 회의 3개 끝낸 지금 쓰러질 것 같습니다.

진짜 부침개가 아니라 고기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고기먹고 오늘 저녁부터는 변신이야기 가열차게 읽어야지...

언닌 초반? 난 이제 시작.. 징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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