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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11시 4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밸에 대하여

 

1904 3 26 미국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출생,

1987 10 31 호놀룰루에서 사망(83)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 취득. 이 대학에서 그는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품게되어 콜롬비아대학으로 편입함. 그곳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배우는 한편, 육상선수로도 활약. 특히 0.5마일 레이스에서는 콜롬비아 대학뿐만 아니라 뉴욕시의 기록을 깼는데 그것은 당시의 세계기록에 불과 0.5초 뒤지는 기록임. 재즈밴드에 들어가 섹스폰을 연주하기도 함. 1924년 처음으로 유럽여행길 선상에서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됨. 대학원에서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7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 특히 파리 대학과 뮌휀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 1929년 미국으로 돌아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남. 당시 대공황으로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5년동안 칩거하며 독서와 습작에 몰두. 1934년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 38년간 새러 로렌스 대학에서 신화를 가르쳤다. 1938년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

 

저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49년 그의 대표작.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함. [신의 가면] 4부작 1959~1968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972   [신화의 이미지]1974 [세계신화지도] 25  1983~1989

 

캠벨의 가족은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였다.  캠벨이 열다섯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던 코네티컷주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탐독.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나 제의를 공부.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 그 신화에 어릴 때 수녀선생님에게 들은것과 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 비교신화학에 입문하게 된다. 부모님의 별장이 델라웨어 인디언들의 거주 지역 숲속에 있었던 것이 이 방면에서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카톨릭 신앙과의 충돌은 훗날 학문적인 연구를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뮌헨시절 무렵부터 캠벨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귀국후에는 사람들에게 공언하기에 이름. 미국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였으나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고해하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 특히 카톨릭가정에서 성장한 배경으로 보아 가족 및 친지등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용기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됨. 기독교의 선민사상과 배타성의 의문이 인디언 신화나 불교사상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되었을 것임. 만년에는 다른 종교보다 불교에서 본인의 이상에 가까운 것을 발견, 달마대사의 초상을 걸어두기도 했다고. 불교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정종교에 묶이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했을 것임. 캠벨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한다.

 

미국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 1988 이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사후에 방영된 프로임. 켐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 본 텍스트는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 오늘날까지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음.

 

그의 80회 생일에 1000여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파티에 참가했다고 하니 학식과 인품을 이야기해주는 대목으로 느껴진다. 캠벨의 사후 그의 아내와 뜻있는 사람들이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음.

 

루카스 감독은 저자가 쓴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을 읽고서 감동하여 ‘스타워즈’를 구상했고 캠벨을 찾아가 도움말을 구했다. ‘스타워즈’는 영웅의 탄생과 수난, 아버지와의 만남이란 동서양 신화의 공통분모에 SF 상상력과 특수효과를 입혀서 세계적으로 성공했다.

 

 

출처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민음사/이윤기옮김

 

         http://www.myfaith.co.kr/book-2/campbell.html   

         http://kin.naver.com/open100/print.nhn 

          http://www.movieweek.co.kr/article/article_print.html

Daum백과사전/위키백과/]

http://cafe.daum.net/114m/Risq/106?docid=1FQ5J|Risq|106|20081118173304&q=%C1%B6%BC%C1%C4%B7%BA%A7%C0%C7%C0%FA%BC%AD

http://nshopping.naver.com/shoppingBar/go.php?mn=%BE%CB%B6%F3%B5%F2&url=http%3A%2F%2Fwww.aladdin.co.kr%3Fpartner%3Dnaver

 

 

개인적 평가

 

이 책의 목적은<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고 저자는 말한다. 인류의 심성에 대한 근본적, 보편적 관심에 치중하여 상사성相似性을 이해하고 인류의 상호이해를 위한 기폭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리했다고도 이야기한다. 베다 경의 말을 인용하여<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저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의미이다. 종교가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특정 종교를 취하지 않음은 개인적 기질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 듯하다. 혹 나이와도 연관이 있을까? 사람들은 언제 종교가 필요해지는 것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진리와 만나는 일. 역사이전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종교적 필요에 의하여 변형된 그 변형의 근원을 알알 있을 것 같은 key. 비교신화학자 조셉캠벨 신화의 힘으로 처음 접한 저자는 비종교적 인간인 나에게는 막연했던 생각을 엉크러져있는 실타래의 끝을 잡은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이 등장하는 무대면 모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읽다가 어…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또는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어진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인류의 상호이해라는 단어의 의미도 조금 알아진다. .허무맹랑이라는 프레임으로 있던 영역을 프레임의 변형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어준 글이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재미삼아 귀를 귀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경구집(老子警句集)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코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3p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느 하챦은 동화책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권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4p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신 의학에서 떠오른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萬神殿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5p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지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16p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二元一體이원일체 상황 dual unit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틉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유아는, [좋은 것], 혹은 어머니의[정상적인]속성인 옆에 있고, 먹여주고, 보호해 주는 대상에서 애정을 쏟는 한편,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도 돌린다. 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포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50년전에 성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이디포스 콤플렉스로 지적한 바 있다.  -17p

 

다행스러운 것은 정신 신경증 환자가 아닌  한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성적 충동을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18p

 

많은 사람이 저 자신과 어머니가 짝이 되는 꿈을 꾸었거니와 이에 개념치 않는 자, 그 팔자가 순탄하리라. _어젯밤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가슴을 찌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꿈은 바뀌어 아버지와 여행길에 오르는 듯했는데, 나는 그때 몹시 행복했습니다.  -18p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여려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못한 태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使臣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견,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0P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監視眼감시안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을 관장하는 원시림 聖所성소의 呪醫주의, 즉 고대비법 전수자나 영혼에 관한 현대의 名人명인이며, 秘方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현자wise old man의 역할과 같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21P

 

       양자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던 어느 교수님, 향후에는 양의사, 한의사보다 샤먼이 더 사람의 병을 잘 고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수업중에 지나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2P

 

신화와 제의의 주요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러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倒錯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나타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23P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시고 있는가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다. 24P

 

정신 분석가들이 등장하여 가면 쓰고 푸닥거리하던 무당이나 할레하던 요술사의, 고금을 꿰뚫는 지혜와 가르침을 다시 외쳐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뱀에 물리는 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득한 옛 비의의 상징이, 여기에서 해방되는 순간에 놓인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24P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轉化전화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25P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일 뿐이다. 25P

 

발명이란 참으로 요사한 것, 미궁을 완성한 다이달로스는 입구를 찾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왕비가 낳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도 이 안에 갇혔다.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의 세력원 안의 정복당한 나라에서 공물로 실려온 실아 있는 선남 선녀를 먹고 살았다. 27P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神命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匠人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를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28P

 

勸力亡者권력망자(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28P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산 속에는 적막조차 없이

마른 천둥만 우르릉거리고

산 속에는 고독조차 없는데

갈라진 흙담 문간에

비웃으며 으르렁대는 시뻘건 얼굴들 29P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숚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P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회고주의)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미래주의)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여신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29P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detachment] [변용trang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30P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챦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因果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한달음에 쳐들어가 C. G, 융의 소위 [원형 심상 原型心象]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0p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규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다른 모습으로 우리게에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2p

 

조그맣고 단단한 집들이 늘어선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지나며 거대한 도시 위쪽 변두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는 게 재미었었습니다. 나는 하수도로 톻하는 듯한, 몹시 질퍽거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오두막집들 사이로 걷다가 조그만 강을 하나 발견했는데, 강은 나와 포장된 길이 있는 좀 높고 단단한 땅 사이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보기에도 상쾌한, 풀 위를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물 밑으로 살랑거리는 풀이 보였습니다. 건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집으로 달려가 배를 빌릴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거기에 있던 남자는 물론 나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조그만 나무 상자를 하나 내와 강가에다 띄웠는데, 순간나는 그 상자를 닫으면 건너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한 일은 다 겪었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에게 후하게 값을 치르고 싶었습니다. 33p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놀라운 것은 이 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신화 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미 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입구가 보이는 하수도, 그 다음에는 풀 위로 흐르는 맑은 강의 횡단, 결정적인 순간의 조력자 출현, 강줄기 건너편에 있는, 높고 탄탄한 땅(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지상의 낙원)이 모든 것은 영혼의 고귀한 모험을 다룬 경탄할 만한 노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다. 은밀한 부름에 귀를 기울리고, 그 길을 따르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고 외로운 횡단여행,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꿈꿈꾸는 사람은 조그만 상자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다. 이 꿈에서 이 상자는 천마선이나 다리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이것은 여가수 자신의 특별한 재능이나 미덕을 상징하는 것인데, 여가수는 바로 이 두 가지에 힘입어 세상의 물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더 이사아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그 상자의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판도라 상자의 일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 판도라의 상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신들의 선물인데, 이 안에는 존재의 고통과 축복의 씨앗뿐만 아니라 미덕과 희망까지도 들어 있다. 이 상자의 도움으로 꿈꾸는 사람은 강을 건너 반대편 강 언덕에 이른다.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발견과 자아발전을 피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6~37p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챦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37p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38P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亞麻아마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 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가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8-39P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백작은 이 예언적인 말을, 현대적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정신적 義絶의절을 그린 소설의 서두로 삼았다. 39P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 엔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39p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0p

 

현대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한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비극은 신들이 파국을 맞은 대신전에서는 물론, 채찍에 찢긴 얼굴들이 들어앉은 평범한 가정에서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며 흥미 본위인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거기에는 마왕에의 공포를 덜어줄 천국, 내세의 천국, 보상에 대한 핑계 대신 오직 자궁에서 하릴 없이 튀어나온 생명을 받아 먹어치우는 無爲무위의 공허, 절대적인 어둠이 있을 뿐이다. 41~42P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 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42P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과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43

 

미순이, 우리집 막내 이름이다. 딸이 없으니 암놈으로 사자고 해서 지난해 4.13생으로 우리집 식구가 된 아이 이름이다. 이름은 내가 지었다. 너무 촌스럽다고 타박이다. 이름은 부르기 쉬우면 되는거지. 형원아…미순이는 예전에는 뭐였을까? 엄마! 전생 같은 건 없어.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이런다. 그래도 미순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예쁜 요정이 변신한건 아닐까 싶다. 낮은 탁자에 올려져 있는 나의 사물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두발로 서서 쳐다만 본다. 보면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43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地上的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살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磨損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여느 때에는 막막한 물질로 뒤덮인 생명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게 타오르던 불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한다. 저 무서운 단죄의 손길은, 그제서야 우리들 마음속의 불멸하는 우주의 그림자로 비친다.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4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 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

 

사랑과 죽음의 신 카마 마라(迦摩摩羅)가 다가왔다. 46

 

만상을 지키는 신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미래의 부처는 나무 아래서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마라는 그를 공격하여 정신을 흐트러놓으려 했다. 돌개 바람, 바위, 천둥과 불길, 연기를 뿜는 날이 선 무기, 불덩어리, 뜨거운 재, 끓는 진흙, 따가운 모래와 칠흑 어둠 등으로 적대자는 구도자를 공격했으나, 이 많은 공격 무기들은 고타마의 成道성도의 법력에 의해 천상의 꽃과 티끌로 화했다. 이렇게 되자 마라는 세 딸, 즉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었으나 尊者존자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아니했다. 마침내 신은 그 부동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은 자기라고 주장하면서 날카로운 원반을 던져, 자기를 옹위하던 군대가 암산처럼 그에게로 무너지게 했다. 그러나 미래의 부처는 한 손을 움직여 손가락 끝을 대지에 갖다 댐으로써 땅의 여신에게 거기 앉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려 했다. 땅의 여신은 수백, 수천, 수십만이 포효하는 소리로 이를 확인하니 적대자는 미래의 부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군대가 물러갔고, 세계의 모든 신들은 꽃가지를 뿌렸다.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因果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46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 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보리수)아래에 부처와 십자가 나무(구원의 나무)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世界樹)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산은 세계의 배꼽 World Navel, 혹은 세계 축 World Axis의 이미지다.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시키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교 예술의 불상에 나타나 있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이레 동안 고타마(이제는 정각을 얻은부터)至福지복에 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고, 이레 동안 그는 일어선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정각을 얻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으며, 이레 동안 그는 서 있던 자리와 앉아 있던 자리를 서성거렸고, 이레 동안 그는 신들이 만든 정자에 거하면서 인연과 해탈의 원리를 반추했으며, 이레 동안 수자타가 금 그릇에 우유죽을 가져왔던 그 나무 밑에 앉아서 열반의 법열에 대한 교의를 묵상했다. 그가 다른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폭풍이 이레 동안이나 휘몰아쳤으나 뱀의 왕이 뿌리에서 나와 넓은 덮개로 부처를 가려주었다. 부처는 이윽고 이레 동안 네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얻은 소식을 남들에게 전할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도리를 전파하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正道정도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48

 

구약성서는 이와 비교가 될 만한 행적을 모세의 이야기에다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온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갔고 하느님은 산에서 그를 불렀다. 하느님은 그에게 십계명 석판 Tables of the Law를 주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라고 했다.  49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50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50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핟.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핟.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神的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준재를 발견하고 肉化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

 

이 둘 (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 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顯現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일한 생명력의 세 단계에 걸친 압축을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풍성한 수확은 신의 은총의 표적이다. 신의 은총은 영혼의 양식이다 58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62

 

요루발란드(서 아프리카)의 익살스러운 신 에드슈이야기에 잘 나타나있다. 어느 날, 이 기묘한 신은 두 뙈기의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그는 양쪽 밭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농부를 보고 이 둘을 좀 골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한쪽은 붉은 색, 다른 한쪽은 흰색, 앞은 초록색, 뒤는 검은색인 모자를 썼다. 이 네가지 빛깔은 세계의 네 방향을 나타내는 빛깔이다. 즉 에드슈는 중심, 즉 세계의 축, 혹은 세계의 배꼽의 화신이었다. 평소에 서로 친하던 두 농부는 집과 마을로 돌아갔는데, 마을에서 한 농부가 다른 농부에게 “자네 오늘 흰 모자를 쓰고 지나가던 노인을 보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농부는 “무슨 소린가, 모자는 붉은색이었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 말에 첫 번째 농부가 나무랐다. “천만에, 흰색이었네” 그러나 두번째 농부는 주장했다. “내 이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다”  64

 

연암 박지원 이야기하면서 짝짝이 가죽신을 신고 말 타는 이야기 정민교수 해주셨는데…내용이 똑같다. 참으로 신기하다.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Departure

 

공주님 옷, 공주님 진주와 보석, 공주님 금관은 나는 싫어요. 공주님, 저를 보살펴주시고, 저를 친구나 짝궁으로 삼아주시고, 공주님의 예쁜 식탁 옆에 앉게 해주시고, 공주님의 황금 접시로 먹고, 공주님의 예쁜 그릇으로 마시게 해 주시고, 공주님의 예쁜 침대에 함께 자게 해 주시면….이것만 약속하시면 내려가서 공주님의 황금 공을 가져다 드리지요.  70

 

“오냐, 그래. 내 공만 찾아준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약속하지” 그러나 공주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건방진 개구리가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거야, 물가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놀기나 하지. , 인간의 친구가 되겠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이야?)

개구리는 약속을 받아내자 머리부터 첨벙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왔는데, 어느 새 공을 물고 나와 풀밭에다 던졌다. 공주는 그 곳을 집어 들고 종종걸음으로 내달았다. 뒤에서 개구리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공주님. 저도 데리고 가셔야죠. 저는 그렇게 빨리는 못 뛰어요”

하지만 공주 뒤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주는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때쯤 다시 샘 속으로 돌아갔을 불쌍한 개구리를 까맣게 잊고 말았더라.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71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번째 조짐이다. 71

 

기적같이 등장하는 개구리의 존재는 [전령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72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산속, 큰 나무 아래, 샘가…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챦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72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水精수정이며, 트리톤Triton이며, 물의 수호신들이 사는 우화에 나오는 용궁의 진주며, 지하의 도깨비 나라를 밝히는 보석이며, 뱀처럼 땅을 괴고, 땅을 감싸는 不死불사의 바다에 있는 불씨며, 불명의 밤을 꽃피우는 별이다. 용이 지키는 금 덩어리며,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금단의 능금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告知者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다산성의 상진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74~75

 

고슴도치를 잡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는데도 땅에서 너무 높이 올라간 게 무서워 소녀는 내려올 생각은 못하고 자꾸만 올라갔다. 아래서 보면 조그만 점 하나로 보일 만한 높이까지 올라간 소녀는 고슴도치와 함께 마침내 하늘에 이르렀다.  76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77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오니, 생의 의미는 느끼지못한다. 이때, 어떤 힘에 대한 일련의 조짐이 나타난다. 77

 

부왕(왕통을 지켜야 한다는 편견이 사로잡힌)은 아들에게 세 채의 궁전과 4만명의 무희를 내려 세상 잡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했다. 그러나 부왕의 이런 조치는 오히려 그 시기를 빨리 익게 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그 시기를 빨리 익게 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육체적 쾌략에 진력을 내고, 다른 경험에 목말라했기 때문이었다.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맞추어 나타났다. 78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重心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80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

예수의 길을 두렵게 여겨라,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 임이다.  82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밤과 낮으로

나는 도망쳤다. 세월의 綠門녹문으로

나는 내 마음을 피신시켰다. 미궁의 미로 속으로

눈물 속에서, 웃음을 참으며 나는 그로부터 몸을 숨겼다.  82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83

 

, 사랑스럽되 눈멀고 약한 자여

내가 바로 그대가 찾던 그이니라!

나를 몰아내던 그대는, 그대 내부로부터 사랑까지 몰아내었다.  83

신은 희망에 차서 달렸고, 처녀는 공포에 질려서 달렸다.  84

 

내맘과 네맘이 중간 즈음에서 비슷한 속도로 와서 만나면 좋으련만, 희망과 공포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

 

나는 간다만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땅에서 나를 기다려야 하리라.  86

 

주저한다고 다 길을 읽은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87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라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도 요가수련의 기본적인 원리다. 서양의 창조적인 정신도 이런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특정 요구에 따라 정확하게 기술될 수는 없다. 오히려 특정 사상에의 반응을 교묘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거부하되, 내적인 공허를 기다리는 미지의 요구에 심층적으로, 고도로 , 그리고 풍부하게 응하는 것이다. 일종의 주어진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파업 혹은 폐기라고나 할까. 87

 

변형의 힘은 문제를 새로운 磁場자장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이 자장에서 문제는 어느 한 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88

 

남 하는 짓 하며 살고 아내를 얻으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한 것이다. 88

 

여자를 일러 물으니 대답하겠노라

내 일찍이 여자의 글에서 명문을 대한 바 없고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누어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89

 

여자에 등을 돌려야 알라 신을 돈독히 섬길 수 있고

여자에게 고삐를 잡히는 사내는 물거품이 된 희망으로 벌금을 문다. 여자는 요상한 새 노리개를

찾을 때면 사내를 구박하게 마련이니, 사내는 하릴 없는 학문에 천 년 세월을 허송 세월하는구나…. 89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 놓아라. 네 손은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95

 

꽃가루는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믿어지는 심적 에너지의 상징이다. 이 꽃가루는 의식에서 약령을 몰아내고, 삶의 상징적인 길을 알아내는 데 널리 쓰인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 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97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을 나타난다.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 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에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선 성령이다.  97

 

팔찌 없는 그 손목

가랑비에 젖은 채 소매에서 나와 있네  103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더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국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05

 

하나 오텐토트족의 도깨비에는 [하이 우리 Hai Uri]가 있는데, 이 도깨비는 가시덤불을 만나면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타넘어 버린다.  106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 만약 사라에게 지면, 이 괴물은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 반수의 괴물[<이상한 것>이란 뜻인 <치루위>라고 불리어진다]이 이기면 진 사람은 죽음을 당한다.  106

 

미지의 땅 (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 libido와 부친 살해의 데스트루도 destrudo,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107

 

초자연적인 신부가 다 그렇듯이 남편이 혹 부부간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예절을 무시하고 변덕을 부리면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108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

 

오무기 태자는 다섯 차례의 공격에 실패, 다섯 군데가 붙은 채 도깨비의 몸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태자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한편, 도깨비는 도깨비대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는 필시 인간이라기보다는 사자, 아니 귀인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범인은 아니다. 나 같은 도깨비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었는데도 떨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 길목을 지킨 지 오랜데도 이 같은 자와 대적하긴 처음이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도깨비는 감히 잡아먹을 생각은 못하고 태자에게 물어보았다.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태자가 이 물음에 대답했다.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117-118

 

벼락 vajra은 속세의 허망한 현실을 분쇄하는 부처의 영적인 힘(불멸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佛畵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다. 절대자 the Absolute, 혹은 다이부다(提阿佛陀 )가 티베트상징에서는 Vajra-Dhara 즉 금강고金剛納를 쥔 사람 金剛手으로 표상된다. 118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

 

굉장한 숲과 큰 강과 높은 고원을 보았다. 한쪽에는 바위가 많았는데 여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건설하고 있었다. 개도 많았고, 가축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코끼리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 122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 괴수들 손에 접근부터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3

 

2. 입문  Initiation

나는 땅에 누워 있는 반 마리의 말을 보았다. 날개가 하나밖에 없어서 말은 일어나려고 애쓰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137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39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총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43

 

우리의 심상이 기억해 낸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1)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을 받을 까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도 있고,

(2)    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도 있으며,

(3)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싦어하는 어머니도 있고

(4)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거세콤플렉스)바라던 어머니이긴 하나 가까이해서는 안 될 어머니도 있다(오이디포스 콤플렉스)

 

따라서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것에 숨어 있다가 때로는 엄청남 힘을 행사하는 <나쁜>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148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153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53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 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4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56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157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든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여기에 광의의 술어로 공식화시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理想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59-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이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물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60

 

이 세상 만사가 나에겐 진부하고, 짜증스럽고, 무익한 허섭스레기로 보이는 구나, 싫구나, 참으로 싫구나, 자라서 씨앗을 맺을 이 잡초투성이의 뜰이 자연 안에서 무성한 이 잡초가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 싫구나.  161

 

왕비를 차지했을 때 오이디프스가 맛보았던 순진한 기쁨이, 그 왕비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심한 정신적 고뇌로 바뀐다.  161

 

자기의 시체 같은 육신을 조심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순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그대 육체를 토해내듯)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162

 

고래로부터 인간의 적이었던 마귀가 어린 베르나르에게 그런 천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동정을 빼앗고자 함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어느 날 악마의 꼬임에 빠져 젊은 여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심히 얼굴을 붉히고 얼음이 뜨는 연못 속으로 들어가 뼈마디가 얼 때까지 참회했다. 또 한번은 잠이 들어 있는데 젊은 여인이 발가벗고 침대로 들어왔다. 여자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베르나르는 아무 말 없이 침대를 내주고는 침대 한 귀퉁이로 돌아누워 다시 잠을 잤다. 한동안 베르나르를 애무하던 여자는, 웬만한 일로는 부끄러워할 줄 몰랐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일어나 줄행랑을 놓았다. 자신이 한 짓이 두렵고, 그 젊은이가 너무나 고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64

 

수도원의 두꺼운 벽 안이라고 해서, 외딴 광야라고 해서 여성이라는 존재로부터 온전하다고는 볼 수 없다. 165

 

눈을 못 돌리게 하는 둔부와 손길을 기다리는 가슴을 가진 이런 유의 허깨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은자들을 애먹이는 준재로 알려져 있다.  165

 

약속의 땅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광야에는 불길 같은 飛蛇비사가 득시글거린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아직까지 우리 앞길을 막고 우리 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는 놈은 없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는 사자의 소굴과 표범의 산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끔찍한 마귀떼도 있다….우리는 마귀의 무대이며 마귀의 목표이기도 한 이 땅, 시온을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가 도둑무리와 은거하고 있는 이 땅의 초라한 나그네다.  166

 

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169

 

뱀의 권능은 신비스러운 신의 창조 에너지다.  169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려니, 오고 가는 형상(그리고 육신 역시)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 데 무엇이 두려우랴? 聖事성사의 불가사의(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혹은 부처의 명상이라는 미덕에 의해 괄목할 만한 효력을 내는)원시적인 호부나 액막이의 보호력,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조력자는 화살이나, 불꽃이나, 홍수가 사실은 보기보다는 무섭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자위 수단이다.   170

 

태양을 지고 들어온 사나이는 등에서 태양을 내려, 그 방 서쪽 벽에 박힌 말뚝에다 걸고는 몇 차례 흔들자 틀라 틀라 틀라 틀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그는 나이 든 여자에게 돌아서서 노기띤 음성으로 물었다. 172

 

포이보스의 마차를 타고 가던 피에톤 여기 잠들다.

비록 실패했으되, 그 용기는 아주 가상하지 않은가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 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儀式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178

 

벌거숭이 오스트레일리아 야만인들이 미개해 보일지 몰라도, 이 유서 깊은 정신적 유산의 체계를 오늘날까지 상속시킨 그들의 상징적인 의식과 그 의식에 광범위한 흔적이 인도양 젗고 땅과 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우리 문화권으로 여기는 고대 문화 중심지의 유습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183-184

 

어떤 방법으로, 어떤 지역에서, 갖가지 고대 문명의 신화적, 문화적 패턴이 이 지구의 구석까지 전파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단언하거니와 우리 문화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소위 <원시문화>自生的자생적인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시 문화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대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풍토 그리고 다른 종족에 의해 발전한 풍습이 어느 지역에서 채용, 변질, 형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4

 

오늘 태어나는 자는, 장사하러 가면 강도를 만나 털릴 것이다. 오늘 아기를 배는 여자는 밴 아기와 함께 죽을 것이다. 오늘 밭을 가는 자가 있으면, 그 곡식은 여물지 못할 것이다. 밀림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자의 밥이 될 것이다. 죽음은 이 우주적인 저주를 내리고는 휴식에 들었다. 186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다시 나타났다. 수행원들이 아름다운 쪽을 씻고 향유를 바른 다음 기름으로 문질러 주었다. 이 일이 끝나자 죽음은 복을 내렸다. ‘오늘 태어나는 자는 재물의 복을 받을 것이다. 오늘 아기를 배는 여자는 천수를 누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오늘 태어나는 아기는 시장으로 보내라. 장님과 상담을 벌일 듯하니 마땅히 봉을 잡을 것이다. 밀림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냥이 순조로우리라, 내가 복을 내렸으니 코끼리가 걸릴지도 모른다.  187

 

<코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191

 

티베트, 중국, 일본의 大乘佛敎대승블교에서 가장 영험이 있는 분으로 믿어지고 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연꽃을 들고 다니는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이다. 이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라고 불린다. 티베트의 <祈禱具기도구>와 징소리에 맞추어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되는 기도인<옴 마니 밧 메 홈(妙法蓮花, 즉 연화 속에 보석이 있다)>도 그 보살을 향한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嘉納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반 세계를 왕래하며, 그를 필요로 하는 중생, 기도하는 중생에게 나타난다. 그는 말이 둘인 인간의 모습을 비롯, 팔이 넷, 여섯, 열둘, 혹은 천개<千手觀音>인 초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왼손에는 늘 이 세상이라는 연화(蓮花, Lotus)를 들고 있다.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196

 

극동의 불교 사원에는 예외 없이 이 관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은 凡人범인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왜냐하면 관음이 세운 맹세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세상을 버티는 심오한 직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198

 

아프리카 및 멜라네시아의 조상 이미지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아버지의 수염 그리고 성기가 합쳐진 형상으로 나타난다. 203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머리를 자르는 습속이 있는 사회(가령 뉴기니아에서 처럼)에서는 단순한 복수전이 아닌, 머리 자체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204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고 싶은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聖都성도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종족, 교회, 국가, 계층)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 이교도,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聖戰성전의 기치가 오른다(양심에 거리끼기는커녕 경건하게 예배라도 드리는 기분으로 기치를 올리는 것이다) 205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206

 

六界육계 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素因소인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209

 

신이 종족적, 인종적, 국가적, 혹은 분파적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다. 그러나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212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213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三毒을 끈다>는 뜻이다. 213

 

불교의 八正道팔정도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正見정견,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正思惟정사유, 진실한 지혜로 口業구업을 닦는 正語정어,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正業정업,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正明정명, 꾸준히 매진하는 正精進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正念정념,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正精정정이다.  215

 

,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215

 

형상은 빈 것 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216

 

네 종류의 자비로운 동물, 즉 봉황, 일각수, 거북이, 그리고 용이 성역에서 가까운 聖山성산의 버들숲, 대숲,오얏나무숲의 안개 속을 노니는 그림이다. 218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無情物)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222

 

이것은 너의 육체다. 이 목판과 너는 한 몸이다. 이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지 말라, 不然불연이면 너는 고통받으리라  230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른아닌 만병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231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하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248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神性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249

 

인격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어느 환자의 삶의 에너지로부터 끌어낸 허구적인 꿈이 그러하듯이 지상적인 것이든 천상적인 것이든 이 세상의 모든 형체는 불가해한 신비, 즉 원자를 조립하고 별들의 궤도를 통제하는 권능을 가진 우주적 힘을 반영한다  250

 

3. 귀환 Return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6

 

카리드웬에겐 거대한 주전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기에다 과학과 영감을 넣어 끓이려 했다. 요술책의 도움을 빌려 카리드웬은 주전자에다 이 두가지 혼합물인 시켜먼 덩어리를 놓고 불 위에 얹어 1년간 끓이면, 영감의 진국이 딱 세 방울 나오게 되어 있었다.  258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269

 

동지는 태양의 귀환하는 순간, 혹은 재생하는 순간이다. 동지에 집 안에다 나무를 장식하는 풍습은 현대 독일어로는 여성 명사인 <태양 Sonne>을 섬기던 게르만 이교도들 제사에서 유래한 유쾌한 풍습이다.  277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0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끊없는 세계일 뿐이다.  288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 놓는다.  289

왕이 장정의 목 위에 타고 양다리를 어깨로 내리면, 왕을 목에 올린 장정은 두 손으로 왕의 발을 받쳤다.  289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 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294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우주을 상징하는 인물의 혈통 및 능력은 의미론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역사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304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는 이러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305

 

베다(經典)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布施)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리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306

 

無碍的무애적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雲水行却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는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假裝가장한,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306

,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이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307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의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가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 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07-308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 없고, 시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 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변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이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 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재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 날 수 있다.  308

 

바다에서 무엇을 건져왔느냐고 물었다. 엘핀은, 물고기보다 나은 것을 건져왔노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귀드노가 물었다. “시인입니다” 엘핀이 대답했다. 귀드노가 다시 물었다. “그것이 너에게 득될 바가 무엇이냐?” 이번엔 아기가 대답했다. “시인의 득될 바를 어찌 물고기에 견주겠습니까?  310

 

엘핀의 으뜸가는 시인이나, 원래 내고향은 여름 별이 빛나는 곳입니다. 이드노와 하이닌은 나를 일러 메르딘이라고 하나, 열왕은 나를 일러 탈리에신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311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이 것이다.) 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313

 

4. 열쇠 The Keys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전(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는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使者).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317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떄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고대의 흔적은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게 보통이다.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위적이든, 우연히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이러저런한 이유에서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무의미하게 되거나, 때로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부수적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318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진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작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319-.320

 

성령이라는 남성적인 불에 영적으로 응감된 여성적인 물은, 모든 신화의 심상적 체계에 익히 알려져 있는, 기독교식 변형의 물 water of transformation이다. 이 의식은 힌두교의 링감으로 상징되는 비의인 세계와 남성을 생성, 재상시키는 근원적인 작용으로서의 신성한 결혼의 변형이다. 이 세례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며, 그 표면을 휘젓는 것은 밤바다로 열린 문턱을 넘는 것을 뜻한다. 물이 머리에 뿌려지는 순간 아기는 상징적으로 그 여행을 경험한다. 이때 아기를 인도하는 것은 사제와 대부모다. 이 여행의 목적은 부모와 함께 영원한 자아 eternal self, 성령 the spirit of god 그리고 은총의 모태 womb of grace를 방문하는 데 있다. 이 상징적 행위가 끝나면 아기는 다시 육신의 양친에게로 되돌아온다. 321-322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느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한다. 322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C. G. , 빌헬름 슈테켈, 오토 랑크, 카알아브라함, 게자 로하임,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 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서로 다른 것이긴 하나, 상당히 공통적인 원리 체계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향으로 수렴된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가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6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Emanations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C.G , 빌혤름 슈테켈, 오토 랑크, 카알 아브라함, 게자 로하임,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학설은 각자 서로 다른 것이긴 하나, 상당히 공통적인 원리 체계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향으로 수렴된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넌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있다. 325-326

 

기담을 통해 인간 행동의 의식 패턴을 이루는 무의식적 욕망, 공포, 그리고 긴장은 상징적 표현을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말로 하자면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걔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의 수수께끼 관해 지금까지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26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331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332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즈테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4(, , 공기, )가 각 세계의 주기를 끝맺는다. 즉 물의 시기는 홍수로, 흙은 지진으로, 공기는 바람으로, 그리고 현재의 주기는 불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333

 

하강 기간의 다섯번째 바퀴살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는 기원전 522년에 시작되어 21천년간 계속된다. 이 시기에는 쟈이나 구세주가 태어나지 않고 쟈이나의 영원한 종교는 점차 사라진다. 이 시기는 악이 발호하는 시대다. 가장 큰 인간도 7완척(3.5미터)를 넘지 못하고, 가장 오래 사는 인간의 수명도 125년을 넘지 못한다. 인간의 갈비뼈는 고작해야 60. 이 시대의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고, 공정하지 못하며, 난폭하고, 탐욕스럽고, 자만심이 강하며, 욕심이 많다.  336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339

 

오래된 이 중에서도 오래된 이는, 항상 옆 얼굴로만 나타난다.  즉 저쪽 면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옆 얼굴인 것이다. 이 얼굴은 <마크로프로소포스 Makroprosopos>, <거대한 얼굴>이라고 불린다. 세계는 그의 흰 수염 가닥으로부터 나아간다.  341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342

 

懷妊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348

 

대지 위에 떠 있는 대기

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

그리고 달이 생겨났다.

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

이어 태양잉 생겨났다.

달과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349

 

하늘과 땅과 대기 아래 있는 그는 꾸며진 존재다

마음과 생명의 모든 숨결 또한 마찬가지다

사물을 <영혼>으로 아는 자는 그뿐. 다른 말은 해서 무엇하랴?

그는 불사에 이르는 교량이다  356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싸움의 화근을 불러일으켰다.

그대는 사악한 간계로 내 아버지인 신들을 모략했다.

그대의 무리를 무장시키고, 그대 무기를 들어라.

나서라! 그대와 내가 싸움터에서 만나자   363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화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66

 

바다에서 5년간 그는 기류했다.

5년을 기다리고, 6년을 기다리고,

7년을 기다리고, 8년을 기다렸다.

바다 표면에서

이름 모를 곶에서

황무지에 가까운,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서

뭍에 오르자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팔베개를 베고 쉬었다.

달빛에 장미도 보았다

상쾌한 태양빛도 즐거웠다.  380

 

날이 밝자, 마사시는 낳기 시작했다. 마사시는 풀을 낳았다. 마사시는 덤불을 낳았다. 마사시는 나무를 낳았다. 마사시는 온 땅에 풀과 덤불과 나무가 가득 차기까지 출산을 멈추지 않았다. 385

 

날이 밝자 모롱고는 낳기 시작했다. 첫날 모롱고는 닭, , 염소를 낳았다. 이뜰째 되는 날 므우에트시는 다시 모롱고와 잤다. 다음날 아침 모롱고는 일란드 영양과 가축을 낳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므우에트시는 모롱고와 잤다. 다음날 아침 모롱고는 처음에는 사내아이들을, 이어서는 딸 아이들을 낳았다. 아침에 태어난 아이들이, 저녁 무렵에는 장성했다.  386

 

나흘째 되는 날 밤 므우에트시는 또 모롱고와 자려 했다. 그러나 천둥이 치면서 마오리가 말했다. “그만 두어아, 너는 곧 죽을 몸이다” 므우에트시는 무서웠다. 천둥이 잠잠해졌다. 그러자 모롱고가 므우에트시에게 말했다. “문을 만들어, 오두막 입구를 당아버립시다. 그러면 마오리도,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은 나와 잘 수 있습니다”

므우에트시는 문을 만들었다. 그는 이 문을 닫아 오두막 입구를 막았다. 므우에트시는 모롱고와 잤다. 므우에트시는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므우에트시는 잠을 깨었다. 그는 모롱고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았다. 날이 새자 모롱고는 낳기 시작했다. 모롱고는 사자와 표범과 뱀과 전갈을 낳았다. 마오리가 그것을 보았다. 마오리는 므우에트시에게 내 너에게 경고하지 않더냐 하고 말했다. 387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388

 

우연히 삼킨 잎사귀 한 장, 호도 한 알, 아니면 바람 한 점이, 만반의 준비가 끝난 자궁안에서는 생명으로 잉태할 수 있다. 잉태하는 능력은 도처에 널려있다. 종작없는 생각, 혹은 시대의 숙명이 구세주인 영웅이나 세계를 파멸시키는 악마를 잉태케 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393

 

초기 牛頭蛇身우두사신의 문화 영웅은 자연계의 창조 능력을 타고났다. 그의 형상이 초자연적인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그러나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년과 용기로 仙藥선약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400

 

그의 입 안에는 三界삼계인 우주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양어머니는 홀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아들을 삼계의 주재자라고 생각하다니, 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러자 모든 것은 그녀의 생각에서 뻐져나가고 말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양어머니는 하릴없이 아이를 안고는 집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411

 

그의 존재의 심연에서 분출하여, 즉흥적으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것이었다.  416

 

산 것은 모두 짝으로 있어 새끼를 치는데 저만은 혼잡니다. 이제 길을 떠나 아내될 만한 동류를 찾고자 합니다. 동류들과 겨루어 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도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들과 사위어 그들 식으로 살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원컨대 저를 축복하소서, 저의 기도를 가납하소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아룁니다.  421

 

그는 위험하다는 소문이 있는 길을 택했다. 그가 길을 가는데 문득 일진광풍이 몰아치며 마침내 그를 거대한 물고기의 입으로 처넣었다. 이 물고기는 무엇이든 삼키는 괴물로, 그 바람도 결국 그 물고기가 빨아들이는 기운이었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그는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423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잉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춮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미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428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434

 

내가 동, , , , 어느 한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땅은 내 몸이다.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모든 곳에 두루 잇다. 내가, 땅 및, 하늘 위, 아니면 계절 속에, 바다 저쪽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내 몸이다. 지하 세계, 하늘, 계절, 바다가 모두 내 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無所不在무소부재하다.  438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끊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0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규정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이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실재는 생과 사만 있다는 의미가 관계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내게는 생각의 깊이를 달리하는 말이다

 

자아는 여기에서 불타 버린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마른 잎처럼 육신은 세계를 떠다니되 영혼은 이미 다시 없는 천복의 바다로 해소된 뒤다.  443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443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45

 

아난다여, 수고스럽지만 내 자리를 저 沙羅雙樹사라쌍수 아래에다,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도록 마련해 다오. 피곤해서 좀 눕고 싶구나  454

 

우리 삶이란 햇볕에 몸을 덥히는 것 같은 것이지요.  460

 

이제 우리는 그대에 대한 추억도 잊게 되겠지요. 그대는 빛도 창도 없는 그곳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돌아올 수도 떠날 수도 없어요. 돌아온다는 건 생각도 하지 말아요. 이승에 남긴 그대의 자식 손자가 있지만, 그대는 알지 못하지요. 그들이 이 세상 삶의 수고를 어떻게 치러낼지, 우리 역시 머지않아 당신이 있는 그곳에 가게 될 겁니다.  461

 

형제가 서로 싸워 서로를 쓰러뜨리고

자매의 자식들이 집안을 더럽힌다

어려워라 매음굴이 되는 이 세상

도끼시대, 칼의 시대, 방패가 부서지고

바람 시대, 늑대 시대, 세상이 무너진다

인간은 하나도 살아남을 길이 없다.  470

 

무화과 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473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0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의 민주적 이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발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깊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토해 낸 신기원을 예고하는 숙명적인 선언처럼, <신들은 모두 죽은>것이다.  483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잇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는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88

 

2.       내가 저자라면

 

목차 및 전체적 뼈대에 대하여

 

머리말

프롤로그

 

원질신화_신화와 꿈/비극과 희극/영웅과신/세계의 배꼽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영웅에의 소명/소명의 거부/초자연적인 조력/첫 관문의 통과/고래의 배

제2장        입문  시련의 길/여신과의 만남/유혹자로서의 여성/아버지와의 화해/신격화/홍익

제3장        귀환  귀환의 거부/불가사의한 탈출/외부로부터의 구조/귀환 관문의 통과/두 셰계의               

            스승/삶의 자유

제4장        열쇠

 

제2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유출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우주의 순환/허공에서_공간/공간의 내부에서_생명/하나에서 여럿으로/창조의 민화

제2장        처녀의 잉태  어머니우주/운명적 모태/구세주를 낳는 자궁/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최초의 영웅과 인간/인간적인 영웅의 어린시절/전사로서의 영웅/애인으로서의 영웅/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구세주로서의 영웅/성자로서의 영웅/영웅의 죽음

제4장        소멸   소우주의 끝/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변신 자재자/신하, 제의, 명상의 기능/오늘날의 영웅

 

세계 각국의 신화, 전설들에 심리학적인 비교분석을 통해 근본적인 공통점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영웅의 모험 분석/신화의 내용안에서 우주의 발생학적인 순환/ 현대사회에 신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구조를 가지고 있다.

 

1부는 영웅의 모험은 분리-입문-귀환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영웅은 모험이 시작될 때 운명이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다른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입문의 단계에서 영웅은 시련의 길을 지난다. 마지막 단계에서 원래의 세계로 귀환한다.

 

2부는 우주의 탄생-분화-소멸의 구조로 설명한다. 세계는 처녀 잉태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인간적인 세계로 구체화된다. 우주의 순환은 초월적 존재에서 인간인 영웅의 손으로 넘어오고 영웅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은 현대사회와 신화에 관한 부분이다. 경계선에 갇힌 국가가 아닌 지구가 하나의 사회인 오늘날 전체 사회질서의 진화가 필요한 때이다.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를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있다라는 명제…

21세기 시장주의의 팽배가 불러오고 있는 위태로움. 붕괴직전을 감지되어지는 사회. 소수의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지구. 충분히 연구되고 깊은 고민이 되어야 하는 내용이 신화라는 프레임을 통하여 표현되어 있다.

 

감동적 장절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 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儀式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178

 

자식에 대한 관대함은 요즘의 일만은 아닌 듯 하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활동, 그리고 부모와 자녀. 불변하는 관계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되어지는 일인가보다. 부모가 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부분이다. 아버니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관계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생활하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멀리서 찾을 일도 아니다. 한 신문 기획기사. ‘누가 우리 아이들 지켜줄 것인가라고 하는데 기사의 제목은 너무 선정적이다. 내 자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는 두고 다른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우리 아이들에 내 자식은 예외다. 단편적인 것만 카메라에 담는다. 선정적인 기사를 뽑는다. 잘 못 끼워진 단추의 맨 밑자락을 살펴볼 생각을 안 한다. 나부터 내 자식부터 살펴볼 일이다. 제일 어려운 일이니 그것부터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부모 스스로 어디를 보고 달려가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방향을 틀어야 하지 않을까

 

불교의 八正道팔정도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正見정견,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正思惟정사유, 진실한 지혜로 口業구업을 닦는 正語정어,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正業정업,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正明정명, 꾸준히 매진하는 正精進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正念정념,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正精정정이다.  215

 

종교적인 접근은 뒤로 하고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바르다는 것

늘 마음에 새기며 살고픈 꿈이다.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6

 

취하는 것과 놓는 것, 늘 취하는 것에 맞추어진 삶은 헉헉거리다, 가속도가 붙어버려서 달리는 자전거에 올라탄 사람처름 패달을 밟아야 하는 삶이다. 속도를 줄여 멈추어 설 일이다. 일단 멈추어본다. 그리고 탈것을 다시 탈지, 아니면 두 다리로 걸을지를 결정할 일이다. 나는 이제 두 다리로 걷기로 했다. 보폭을 빨리 할지 천천히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가끔 급하면 뛰기는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뭔가 탈것을 타지는 않을 작정이다. 걸으면서 봄이면 꽃과 새싹도 보고 여름이면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수다도 떨면서 가을과 겨울을 차분이 맞을 것이다. 

 

보완점

 

1948년에 쓰여진 책이다. 환갑이 넘는 시간이다. 한세기 이후의 상황을 예언이라도 하는듯한 신화와 사회에 관한 에필로그가 인상적이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이야기한다. 지구 전체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본다. 버블의 중심에 들어서 있음이 보인다. 언제 꺼질지가 관건이지 싶다. 영악한 사고로 버블의 시간을 연장하리라…우주적인 관점으로 보면 티끌만한 먼지에도 못 미치는 시간 일텐데…에필로그부분의 보완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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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06:35:28 *.154.223.199

길수형님에게는 조셉캠벨의 이 책이 종교에 대한 프레임을 주는군요.^^ 그런 책 만나게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축하할 것도 많습니다. 더불어 새 식구 생기심도 축하드려요. 이름 이쁘기만 하구만요) 사람이 언제 종교가 필요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찰해보면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더 명상적으로 되는 듯 합니다. 향후 양의사와 한의사보다 샤면이 병을 더 잘 고치리라는 양자의학 선생님이 뭐하는 분이신가 궁금했습니다.  길수형님은 조제하는 약초 엑기스, 또는 연결하는 그런 제작자의 생산물을 통해 사람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신 듯 합니다. 형님도 치유자의 아우라가 쫌 있다고 하면 제가 너무 널 뛰는 듯도 합니다만. 암튼 저한테는 그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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