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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3일 02시 17분 등록

, 맞다. 어제까지였는데.”

회사의 마감일이었습니다. 그날까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또 깜빡하고 말았군요.

 

순간순간 깜빡하는 일이야 다반사지만 이번에는 큰일을 저질렀습니다. 회사에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첫 달이었는데, 월급이 걸린 문제였지요. 깜빡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회사에서는 월급을 걸었고 나는 여지없이 깜빡하고 만 것이었어요.

마감일까지 작성해서 내면 되는 서류였습니다. 회사 홈페이지에서 2시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거였죠. 회사에 있을 때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업무가 바쁘니, 어차피 12시까지니 집에 가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말 오후 화장실에서 생각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황급히 시도해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주 깜빡합니다. 늘 하던 일은 기억하지만 새로 주어진 일은 잊어버립니다. 약속을 이중으로 잡기도 하고, 대답해 놓은 일도 ? 그랬어?” 입니다. 메모를 해야 겠다 생각하고는 메모하는 걸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일정 노트를 마련해보았지만 들고 다니는 걸 잊어버리니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인상깊게 읽었던 책의 구절이나 영화의 대사도 잊어버립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안간힘을 써서 기억하자.’ 생각하고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어휴 정말.” 이라 내뱉으며 내 머리 한 대 쥐어박으면 괜찮은 정도였으니까요. 이번에는 아닙니다. 한 달의 월급이 간당간당합니다. 서둘러 상사에게 연락을 합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보다고 정말 죄송하다는 대화가 오고갑니다. 설마 첫 달부터 그러겠냐는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상사의 말을 듣고 난 기분이 끔찍합니다. 정말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난 왜 이딴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마감일 밤 나는 집에 조금 늦은 시간에 들어왔고, 씻고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 한 캔을 마셨습니다. 다음날은 주말이라며,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지요. 사무실에서 집에 돌아가서 반드시 해야 해.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 라고 생각했던 일은 내 머릿속을 빠져나가고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런 찝찝함 없이 뿌듯한 하루를 마쳤습니다. “바보 아냐?” 나 정말 바보일까요? 이러다가는 방학 다음 날 학교 가는 학생처럼 휴가에 출근하고, 냉장고에서 리모컨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 월급이 걸린 문제를 잊어버리고 싶겠어요. 상사도 꼭 하세요. 월급 안 나와요.” 그랬는데.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기억해서 꼭 해낼 거였지요. 그러나 나는 잊어버렸고,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린 후 , 맞다.” 라고 했던 일들이 밀려옵니다. 어차피 지난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생각말자고 다짐해도 가라앉는 기분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한 나절을 끙끙거리다가 컴퓨터를 켜서 가지고 싶은 물건을 검색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누가 봐도 꼭 사지 않아도 될 만한 사치품을 선물하기로 한 거죠. 신발 한 켤레를 늘리기로 했습니다. 여차저차 필요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깜빡한 이후로 내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는 잔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진즉에 메모하고 잘 챙겨야지. 정신없이 살더니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잘했다. 잘했어. 넌 어떻게 남의 일도 아니고 자기 일을 그리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집을 뒹굴어도 쉬는 게 아니었고, 엄마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는 그 안에 나는 없었지요. 끊임없는 자책의 한나절이었습니다. 나는 이 시간을 끊어내고 싶었습니다.

뭘 잘했다고?”

잘한 거 없습니다. 자기 할 일도 기억 못해서 월급마저 간당간당하게 만든 행동은 칭찬할 구석을 찾기 힘들지요. 그렇다고 내가 나에게 신발 한 켤레 선물하지 못할 정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큰일을 잊어버렸지만 그래서 결과를 감수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다그치지 않아도 상황이 충분히 나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제 나를 그만 다그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잘 한 거 없다고 편안히 앉지도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깜빡하는 순간에 내 머리를 꽁꽁 쥐어박곤 했습니다. “또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메모를 해야 한다니까.”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내 머리가 쥐어박힌 만큼 내 기억력이 좋아졌다면 이렇게 월급이 걸린 문제를 빼먹지는 않았겠지요.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조금 즐거운 자극을 주기로 한 것이지요. 나에게 선물을 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매일 쥐어 박히면서도 기억 못하는 내가 불쌍하기도 했지요.

 

새 신발을 신는다고 기억력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는 일은 없겠지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 신발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불과 1분 전의 미래는 지금의 나입니다. 나는 나의 미래에 선물을 한 거지요. 지금의 나는 자주 잊어버려 제 일조차 못 챙기는 사람이지만 미래의 나는 아닐겁니다. 내가 지금 큰 사건을 겪으면서 또 다른 내가 되고 있으니까요. 새 신발을 신은 나는 기억을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메모는 잘 하는 사람이 되어갈 겁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메모메모구호를 외칠 테니까요.

 

사람의 기억력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빠른 시간에 잊어버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습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는데 1시간이면 50%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망각의 속도는 점차 느려지긴 하지만 하루 후에는 70%를 잊어버린다고 하니 우리는 기억력이 나쁜 것을 재앙이라 여기지 말고 좋은 것을 기적이라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벼운 건망증쯤이야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때입니다. 애교로 넘겼던 건망증이 월급을 걸고넘어진 순간 나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처럼 나를 비난했습니다. 실수는 작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내가 견뎌야 할 일들이 있겠지만 나의 내일이 오늘과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실수를 한 것도 나이지만 이런 실수를 반복해가며 달라지는 나 역시 나 자신입니다. 오늘 사는 신발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오늘의 실수와 자책을 딛고 일어서서 더 나은 나를 위해 나아갈 나에게 격려하는 의미입니다.

 

나는 과연 월급을 받게 될까요? 그 결과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달이니 경고 차원일거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어디 한 번 맛 좀 봐봐라.” 하며 안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때 나는 엄청난 가격의 명품 신발을 신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 신발의 가격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월급까지 더해지면 그 쯤 되지 않을까요?

 

이미 실수를 저지른 나를 자책하기 보다는 이 실수로 인해서 달라질 나를 기대해 보는건 어떨까요? 작든 크든 실수야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요. 실수를 한 순간 실수한 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보다 이 실수로 커질 나를 기대해 보는 거예요. 오늘의 실수는 내일의 완벽으로 가는 한 걸음이니까요.

 

오늘은 뭘 잊어버리셨나요?

 

IP *.246.7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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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0:50:28 *.252.144.139

루미의 해결책은 언제나 그렇듯 내 예상과는 다르다.

나 같으면 잊어 버리지 않도록 알람을 설정하거나 잘 기억해주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할텐데.

그런데 새 신발을 신고 정말 '메모메모'를 외칠 수 있는거야?

그것마져 까많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 루미야!!!

월급은 챙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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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6:54:43 *.223.2.212

훔.... 뭔가 입력을 해야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니... 별로군.. 


그럼 다음 월급까지 전혀 안나오는거야??? 


다이어리 등 매일 봐야하는 무언가에 빨간펜으로 적어놔. '월급받기'라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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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4 00:02:09 *.166.205.132

정말 어떠한 순간에도 긍정의 생각을 해내는 루미! ㅋㅋ

부디 회사가 월급가지고 장난하지 않기를...

 

오프모임때 못와서 아쉬웠다~!

여름엔 벙개로 뭉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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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0:21:47 *.30.254.21

망각.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 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그러나 무리없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난, 핸폰 알람을 활용합니다..

잊어먹을 만한 시간에 울리게 하는 거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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