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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6일 07시 19분 등록

다녀오겠습니다.”

하니를 태운 어린이집 차가 멀어집니다.

다녀오마.”

엄마가 문화센터에 갑니다.

나는 집에 있습니다.

내가 평범한 전업주부라면 다른 이들을 밖으로 보낸 후 맞이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을 거예요. 두 다리를 쭉 뻗고 티비 리모컨을 손에 쥐었겠지요. 나 역시 엄마처럼 문화센터에 나가 뭔가를 배우겠다며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럴 입장이 아닙니다.

집이 이사를 하면서 다니던 직장을 정리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하나 할 일이 없겠냐며 걱정도 안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걱정해야 했던가봅니다. 예전엔 학원 강사를 했는데 주요 과목이 아니라 경력을 이어갈 방법도 없습니다. 자리가 많지 않거든요. 구하는 곳을 찾는 것부터 힘든 일이었지요. 다른 일을 하자니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뭐 대기업에 들어가 성공가도를 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딸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벌자는 것 뿐인데 쉽지 않네요. 몇 군데 이력서를 넣고, 미끄러지다보니 석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까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하루는 일로 바쁜 하루만큼 피곤합니다. 하루 중 어느 일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혹시나 연락이 왔는데 받지 못할까봐 휴대폰을 떼어 놓지도 못합니다. 머릿속으로는 언제 어디에 이력서를 냈는지를 더듬어 보며 연락이 올만한 예상 날짜를 잡습니다. 할 일 없이 티비를 돌리다 아무 할 일없는 상황에 짜증도 나지요. 아침이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 보고 퇴근 무렵이면 기대 크기 만큼의 실망이 돌아오는 날입니다. 하루가 지날때마다 자신감은 절반으로 부러집니다.

 

찌개를 끓입니다.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접시에 담아냅니다. 물 한 컵까지 가지런히 세팅하고 식사를 합니다. 혼자 먹는 점심입니다. 밥이 먹고 싶었습니다.

 

혼자 하는 식사는 초라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아이가 있을 때는 계란프라이라도 하곤 했지만 혼자서는 그럴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를 마시거나 과자를 몇 개 먹곤 했지요. 식사를 한다는 느낌보다는 한끼를 때운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걸 이상하다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습니다. 점점 기운 빠져 가는 내가 불쌍히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어봅니다.

우리는 밥값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밥을 먹을 자격이라는 의미지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말처럼 놀고 있는 녀석은 자격도 없는 주제에 먹을 것을 탐한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밥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무엇이든 우리를 유지해 줄 만큼의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라도 이를 필요로 합니다. 식사는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입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이지요.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식사는 의무가 됩니다.

 

많은 백수들의 구직 조건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들의 바람은 한 가지입니다. 일을 하고 싶다 것이 그것이지요.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하여 그들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일을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밥값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계속되는 거절에 휘청거리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지요. 아직도 거절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기에 우리는 더욱 든든히 먹어 두어야 합니다.

식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자연이 주는 약간의 물과 햇빛만으로 자신을 키울 수 있지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아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숨쉬는 생명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온 몸을 던져 우리에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나누어 줍니다. 밥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생명에게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생명으로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나는 또 다른 생명을 위해 나의 생명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미의 몸 속에서 탯줄을 통해 전해오는 양분을 공급받으며 태어난 우리는 생명에게 빚을 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연장됩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살리려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다 해도 이는 변치 않을 사실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누군가가 빌려준 생명이며 우리는 이 안에 나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과 다른 생명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부과받습니다. 오늘 밥을 먹은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이를 갚을 것인지.

 

밥을 든든히 먹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살아 있기에 밥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이것에는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일이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유지하고 나의 생명을 다른 생명을 위해 사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준 모든 것들에 대한 보답이겠지요. 꼭 거창할 필요도 없는 듯 합니다. 오늘 우리 집 앞의 쓰레기 하나를 주워도 다른 생명에 대한 배려 아니던가요. 옆의 사람을 웃게 해도, 꽃에 물을 주어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오늘 당신은 무엇을 드셨나요? 그리고 무엇을 하셨나요?

IP *.246.7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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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6 21:28:48 *.154.223.199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하루는 일로 바쁜 하루만큼 피곤합니다.

---> 이 말이 철렁 했습니다.  

 

밥은 맛 있으셨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 밥은 해먹고 민낯으로 전력질주 했는데도 간당간당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뒷 머리에 머리 한 가닥이 삐죽 솟아올라 있었어요.

한심합니다. 이럴 때 다른 사람에 대해 허세를 부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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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30 02:33:57 *.70.30.76

바쁜게 감사라는 시점이 있는 듯 합니다.

방학 때 우리는 개학을 기다리잖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런가봅니다. 아님 사회화 인가요? ㅋㅋ

마지막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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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6 23:45:08 *.166.205.132

'딸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자는 것 뿐'

이 정도도 받쳐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원망스럽구나.

 

그래도 새롭게 일을 시작했고, 매일 글을 쓰는 투 잡의 생활을 하고 있잖니.

네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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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30 02:41:32 *.70.30.76

만약 내가 더 잘 벌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겠지요?

나는 나의 운을 만나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에

때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세상은 때로 작은 소망이 전부가 될 때도 있는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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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10:17:43 *.252.144.139

루미야, 요즘은 밥값 잘 하고 있니?

밥값하기 쉬운 세상이 아닌데 난 네가 밥값하겠다고 열심히 출근하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

거기다 칼럼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올리고 있지 않느냐.

너는 꼭 책을 낼 것이다.

이리하는데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지.

루미야, 밥 잘 챙겨먹고 열심히 밥값하러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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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30 02:46:35 *.70.30.76

언니 밥값하기 힘들어요^^

하나씩 흘리고 하나씩 빼먹고 그래요.

다른 이들은 직장 다니는 생활을 하는데 나는 직장을 다니고 글을 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또 직장을 열심히 해야 하는 듯 해요.

하나에 소홀하고 하나에 열중하기는 또 쉬운 까닭이지요.

나의 최선을 다하고 나의 중심을 잡는 게 요즘 저의 화두예요.

그게 언니가 어느 날 느낀 하루는 아닌지, 감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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