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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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여행 첫날
자정즈음부터 열두시간을 내리 날아왔는데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니 고작 6시. 돌아갈 때 고스란히 토해내야하는 6시간이지만 우선은 횡재한 느낌.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나니 왠지 조금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또 1시간 25분을 더 날아 아테네 스파타에 있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공항에 도착했다. 햇살 죽였다. 그리스의 작열하는 태양을 제일 반가워한 것은 아마 모자였을 거다. 흥분해서 사 올 때는 언제고 집으로 들인 그날부터 과연 쓸 수 있을까하는 의심의 눈길속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버린 양산모자. 하지만 이런 태양 아래서라면 존재 자체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공간이동으로 인한 신분의 수직상승, 이럴 땐 억울해하지 말고 기뻐하면 되는거야. 알았니? 모자군!
멋진 관광버스에 올라 베테랑 가이드 순자언니의 안내를 받으며 첫 번째 목적지 델피로 향하는 길엔 말로만 듣던 마라톤 평원도 있었고, 제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은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왕국 테베도 보였으며, 델피의 아폴론 신전을 지은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으로 유명하다는 리바디아도 지났다. 그리스에 온지 30년이 넘었다는 순자언니의 착착 감기는 목소리를 타고 수천년전 이 땅을 무대로 울고 웃었던 신화속 주인공들의 심장박동이 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3시간쯤 달리자 델피에 도착했다. 고대 그리스 신탁의 중심지로 아폴론 신의 신탁이 주로 행해진 델피는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믿음으로 건설된 도시란다. 뜨거운 태양아래 번들거리는 대리석 바닥, 드문드문 세워진 기둥과 돌무더기로만 보이던 그곳은 가이드 언니의 설명과 함께 신전도 되고 극장도 되었다. 델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건축물의 조각을 모아 놓았다는 박물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몰랐다면 그저 돌조각 철조각에 불과한 물건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신탁을 내리는 태양신도 되고 피티안 게임에 출전한 마부도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보이는 물질을 규정하고 있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그 누구도 델피 유적지의 실제모습을 본 적이 없을 테니 오늘날 전해오는 이야기는 누군가가 누군가로부터 또 그 누군가가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의 종합판이겠지?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는 납득되지 않은 부분은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가며 전체의 이야기를 완성해 왔을 것이다. 허구로 실제를 증명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이 신화속에서 누려온 자부심과 당당함도 결국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구라의 힘이라는 말 아닌가?
신화와 역사와 현재를 넘나들며 내 존재의 유물을 발굴하려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존재는 희뿌연 안개속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저 먼 곳으로 달아나버리는 '나'를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 열심히 탐험을 계속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델피에 와서 알게 되었다. 주워 모은 파편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체에 대한 그림 속에서 의미를 배정받지 못한다면 애써 발굴한 유물도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존재에 대한 조감도를 가진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제 슬슬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기왕 하는 것 아름답고 희망찬 이야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처음엔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색깔이 운명의 빛깔을 결정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도 하지 못 하겠다 한다면 진지하게 묻고 싶다. 너 정말 스스로를 사랑하긴 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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