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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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곽복록 옮김, 동서문화사 147~ 453
1. 저자에 대하여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의 풍문
니체와 관련된 문장, 단어로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루 살로메와의 연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었다’ 이다. 검색을 하니 그와 관련된 단어로 니힐리즘, 아포리즘, 실존주의가 뜬다. 나는 모르는 외래어. 어떤 철학자나 예술가가 미쳐버렸고, 정신병에서 회복되지 못했다면 그의 철학이나 책, 예술의 값이 떨어지나? 이렇게 그의 건강으로 자신의 직업을 증명해야 하는 부류가 있긴 하다. 루 살로메는 소를 향해 흔들던 천으로 해 입은 붉은 치마에 머리에 양귀비 꽃을 꽂은 남미 카르멘이나, 로댕전에서 본 아름다운 등을 가진 조각으로 남은 그의 애인이자 제자였던 까미유 끌로델처럼 강렬하게 매혹적인 냄새가 나는 이름이다.
쉰여섯 그의 데드마스크를 본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석고로 뜨다니 이건 누구 생각이었을까? 음식을 먹거나 말을 할 때 불편했겠다 싶을 만큼 수염이 길다. 슈나우저 같으다. 죄송합니다.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는 후기 10년간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의 정신은 붕괴되었다. 마흔일곱부터 쉰여섯의 기간이다. 그 동안에도 그는 생각을 하고 책을 저술했을까? 마지막 책 <우상의 황혼>이 1889년에 나왔다. 그러지 못했나 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비극의 탄생(1872), 다피트 슈트라우스, 고백자이면서 저술가(1873),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1874),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1874), 바이로이트에서의 리하르트 바그너(1876),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80), 서광(1881), 화려한 지혜(1882), 짜라투스트라(1885),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 니체 대 바그너(1888), 바그너의 경우(1888), 안티그리스도(1888), 이 사람을 보라(1888), 우상의 황혼(1889)
호구조사, 태어날 즈음의 공기
독일 작센주 리첸 근교의 뢰켄에서 1844년에 태어나서 1900에 돌아갔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부모 모두 목사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남동생은 어려서 돌아갔고,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후일 루와 연애를 할 때 니체와 3명이서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여동생은 니체가 병원에 있거나 사후에 저서 출간 관련해 관여한 이력이 있다. 니체는 혼자 살거나 여동생과 살거나 아파서 병원에 있거나 그랬다. 아버지가 4세 때 돌아 갔다. 어머니는 그가 53세때, 정신이 한참 아파 병원에 입원중일 때 돌아갔다. 장학금을 얻어서 기숙제 명문 김나지움 크로프슈토크나에 들어갔다. 피히테도 공부한 이 김나지움은 독일 인문주의의 정신에 의거해서 그리스어, 라틴어의 엄격한 교육을 했다. 여기에서의 고대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니체가 태어나 김나지움(중고등학교시기겠다)에 다니며 성장하는 동안의 독일의 지적 상황은 이랬단다. 괴테시대 이후의 신인문주의, 점차로 위기에 빠지는 프로테스탄트 신학, 과학에까지 대두하였던 19세기의 대표적 사상경향으로서의 역사주의가 어슬렁거렸다. 뭔 소린가 모르겄다. 이것 보다 좀 더 원경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헤겔로 대표되는 장대한 정치ㆍ사회사상으로서의 독일관념론 체계가 대두하는 산업사회 앞에서 붕괴한 것 둘째는 1848년의 혁명에 좌절해서 계몽사상을 실현할 수 없었던 시민층이, 새로운 세계관 기준을 구했다는 거다.(이 혁명은 뭔 혁명이다냐? 나는 산업혁명하고 종교개혁만 아는데.....쩔쩔쩔 뻘뻘뻘) 남의 나라 옛날 이야기려니 듣는다. 신은 죽었다고 한 게 니체인가 쇼펜하우어인가 헤깔리는 나에겐 아리까리하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헌 책방에 서서 홀린 듯 읽었다는 걸 보면 쇼펜하우어가 니체에 앞선다는 걸 알 수 있다. 암튼 소년 프리드리히 니체가 우리의 초고~중고등학교 과정인 김나지움을 졸업하며 잔뼈가 굵어지고 목소리가 남성다워지는 동안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정치적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유행했다고 이해한다. 쇼펜하우어는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면서 페시미즘이었단다. 페시미즘은 비관론인가. 바그너는 니체에게 대리아버지 역할까지 한 듯 한데 그는 작곡가이지? 니체의 사상형성은 이런 19세기 독일시민사회의 지적상황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얼렁뚱땅.
4살 때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하는 양부들 리츨, 쇼펜하우어, 바그너
1864년 20살 니체는 본 대학에 들어간다. 당초는 어머니의 희망도 있어서 신학을 공부했다. 곧바로 고전문헌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스승인 리츨(Friedrich Ritschl, 1806~76)의 전임을 따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라이프치히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고, 바그너를 만났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니체는 우연히 고서점에서 발견하고, 표제에 대한 직감적인 관심에서 구입하고, 매료되어서 하룻밤에 다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주목을 끈 것은 우리들의 생이 <살려는 의지>의 에고이즘이라는 페시미스틱한 세계관과, 구제로서의 예술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다. 또한 어느 살롱에서는 라이프치히 방문 중인 바그너와 알게 되어서,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에 공명한 그의 예술사상이나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계획에 심취한다. 이렇게 해서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 바그너의 음악, 그리고 점차로 형성되고 있는 비인문주의적인 독자적인 그리스관, 이 3자의 통합이 젊은 니체가 뜻하는 바였다.
1869년 니체는 그 수재성을 인정받아서 학위취득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초빙되었다. 이때가 약관 24세였다.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바젤에서는 부르크하르트를 만났다. 그는 르네상스를 그려서 유명해졌다. 또 그리스 문화를 단순한 이성의 밝음이 아니라, 정념의 심연으로 보는 노석학이었다.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존경심은 파란만장한 그의 인간관계에서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다. 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니체도 간호병으로서 종군했다. 병으로 제대했다.
스위스 바젤대학 천재 교수, 디오니소스를 꿈꾸고 독일 문화를 말하는 논문을 쓰다. - 초기
바젤대학에 근무하던 시기에 처녀작 『비극의 탄생』(1872)을 썼다.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의 두 개의 유명한 개념을 축으로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성립, 융성, 몰락을 그렸다. 아폴론은 꿈의 신이면서 꿈에서 본 빛나는 형상의 신이었다. 형상의 규격바름, 지성의 예민함이 통하는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도취, 광연, 생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정념과 솟아오르는 환희의 신이다. 또 생존의 고뇌가 그대로 환희로 승화하는 미의 상징이기도 하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 코러스들이 디오니소스의 도취의 노래이며, 역사적으로도 거기에 비극의 기원을 둔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는 자칫하면 단순한 수성(獸性)에 빠지기 쉽고, 아폴론은 메마른 지성의 불모로 퇴화하기 쉽다. 양자의 투쟁에서 앗티카 비극 같은 조화가 달성되며, 그리스인 본래적 페시미즘이 미에 의해서 구제된다고 니체는 논했다. 이 책의 끝 부분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붕괴되었던 그리스비극의 세계가 바그너의 악극에 의해서 재래할 것을 바라고 있다. 과거의 재해석에 의해서 현대문화의 창조를 지향하는 매우 실천적인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기성 학계의 심한 반발을 초래했고, 니체는 사실상 아카데미즘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세상의 무이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니체는 1873년부터 76년에 걸쳐서 네 개의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했다. 제1논문 『다피트 슈트라우스, 고백자이면서 저술가』(1873) 에서는 보불전쟁의 승리가 그대로 독일문화의 승리라고 생각한 시민층의 대변자가 나온다.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라고 제목붙인 제2논문(1874)에서는 사실을 전색할 뿐 사상이 결여된 역사주의가 병으로 진단되고 있다. 제3논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1874) 및 제4논문 『바이로이트에서의 리하르트 바그너』(1876)에서는 스승으로 존경한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가진 시대적 의의가 주장된다. 당시 바그너는 스위스의 <네 개의 주의 호수> 주변에 가족과 삶을 구축해서, 『니베룬그의 지환』의 완성에 몰두하고, 자주 방문하는 니체와의 <별의우정>이 깊어졌다. 76년 바이로이트의 축제 극장 초연 작품으로 『니베룬그의 지환』의 상연이 황제 임석하에 행하여졌다. 니체도 당연히 초대되었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문화국민>이라는 자부심에 취한 추악한 독일 시민층과 타협하고, 그들을 추종하는 바그너의 모습이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적 중세적인 것을 독일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속하려는 바그너의 모습을 혐오했다. 니체는 곧바로 시골의 보양지로 숨어 버렸다. 이로서 바그너와의 우정은 결렬되었다. 여기까지가 통상 니체 사상 발전의 초기라고 한다.
1876년 겨울, 니체는 병으로 대학을 쉰다. 친구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여성해방론자 마이젠부크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거기서 이후 사색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중해 세계와 라틴적 문화풍토를 접하게 되었다. 그의 철학 스타일이 되는 잠언(단상)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잠언을 정리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80)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세상에 냈다. 중기의 비판적 사상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위대하다고 한 예술가나 종교가의 인간적인 측면을 폭로해서, 기성 우상의 폭로심리학적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잠언은 독일어로서도 “매운” 문장으로 쓰여져 있다. 그가 루터 이후의 독일어의 최대의 작가로 자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바그너와의 결렬이 영향을 주어 편두통과 기타 병이 점차로 악화되었다. 79년에는 대학을 그만둔다. 그 후 10년간은 여름에는 주로 알프스의 엔가딘 지방, 겨울에는 지중해 주변의 휴양지 등,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표류하는 생활을 했다. 철학적 산문을 꾸준히 썼다.
81년에는 『서광』, 82년에는 『화려한 지혜』가 계속 나왔다. 모두 잠언집이다. 『서광』에서는 권력감정을 분석했다. 유럽적 가치관의 근저에 잠재하는 허무주의와 <힘에 대한 의지>라는 후기 관심의 맹아가 보인다. 『화려한 지혜』에는 비판적 해체에 수반하는 페시미즘에서 회복하고 있음이 청량하게 보인다. 이 시기인 81년, 니체는 스위스 알프스의 실버프라나 호반에 머물렀다. 영겁회귀, <힘에 대한 의지>, 우주와 역사의 변동은 영원히 자기회귀를 계속하는 순간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을 얻었다.
니체의 여름 소낙비 루 살로메
루 살로메와의 연애는 1882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의 인생에 비하면 여름 소나기처럼 꽤나 짧은 일인데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스캔들’은 흐미로우므로 좀 오래 회자되는 듯 하다. 바젤대학의 교수였던 이의 애인이 루 살로메였고, 1남:1녀의 독점적인 관계를 좋아하지 않아 3각 플라토닉 러브라인 결성하자고 루 살로메가 주장해서 어부지리인지 멀쩡히 잘 있다가 등 터진 새우 격인지, 직장동료 니체가 포섭발탁되었다. 니체가 그들 사이의 일종의 계약 연애 룰을 깨트리고 루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실험은 종결되었다. 루는 첫번째 남자와 동거했다.
니체 후기 사상의 대변자 짜라투스트라
살로메와의 불행한 연애가 지나간 후 다음해 초, 제네바 근교의 포르토피노에서 『짜라투스트라』를 착상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폭풍 같은” 느낌으로 제1부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제4부(1885)까지 쓰여졌다. 제4부에는 출판자가 붙지 않아서 사비로 내야 할 정도로 세간에서 무시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독일어로 짜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했다. 산에서 내려온 주인공이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영겁회귀의 사상에 도달한다. 두려움을 견디면서 이 사상을 고지할 수 있게 되는 <위대한 정오>가 도래할 때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 가장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적 표현, 풍부한 비유로 『비극의 탄생』과 함께 가장 유명해진 니체의 작품이다. 『짜라투스트라』로 후기의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후기에는 <힘에 대한 의지>, 허무주의, 초인, 영겁회귀, <가치의 전환> 등 중심적 사상과 연관된 서술을 지향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가한 잠언이 쓰여졌다.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 『우상의 황혼』(1889), 『니체 대 바그너』(1888 탈고), 『바그너의 경우』(1888), 『안티그리스도』(1888 탈고), 그리고 자전적 저작 『이 사람을 보라(1888 탈고) 등이 그런 작품군이다. 니체는 유럽의 형이상학, 즉 그리스도교적ㆍ플라톤적 이념과 가치관을 무(無)의 위에 세워진 누각이며, 기본적으로는 허무주의의 표현이라고 논파했다. 종래의 가치의 전환을 <힘에 대한 의지>와 영겁회귀로 수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처녀작 『비극의 탄생』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를 대신하는 디오니소스의 미와 힘을 가치의 원천으로 하려는 시도다.
철학적 면과 함께 니체의 잠언에는 독일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 몽테뉴, 모차르트, 하이네 등 경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찬사가 들어있다. 이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또 그가 바그너의 대극에 위치하는 남국적 음악으로서 사랑한 비제, 날카로운 후각으로 발견한 모파상, 발작 등 프랑스의 작가들, 그리고 최말년에 강하게 관심을 가진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잠언이나 편지를 보면, 니체가 19세기의 사상적 위기를 온 몸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잊혀진, 붕괴된 10년, 마흔일곱부터 쉰여섯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이후에는 사상계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가끔 찾아오는 사람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독감을 더하는 경우가 많았다. 87~88년경에 프랑스의 테누가 호의적인 평가를 보이고, 덴마크의 G.M. 브란데스가 강의에 거론해서, 다시 주목을 받을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후인 89년 1월 니체는 토리노의 거리에서 발광하였다. 발광 후에는 누이와 모친에게 이끌려서 그림자 같은 생활을 보냈다. 190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캐스트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나는 세 가지가 궁금했다. 미쳐버린 사람의 철학은 값어치가 떨어지는 지, 루 살로메는 어떤 여자인지, 그리고 잘 읽히지 않아 졸음과 아랫배 간지럼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을 유발하는 니체를 도대체 뭣 하러 읽으라고 하는 건지. 글쎄다. 이 글쎄다를 선명히 하기 위해 니체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은 당분간 없다. 융이 니체를 읽기를 겁을 낸 건 자기가 니체처럼 취급될까봐였다고 했지. 이거야 말로 호모포비아적인 선입관이다. 나의 결론은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한 건 그 사람의 아픈 개인사인 거고, 그렇다고 그의 철학이 가치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 모든 것은 인류의 유산이다. 루 살로메는 지금으로 보면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남녀관계를 실험한 걸로 보인다. 한 남자 니체의 인생에서 그녀가 주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래 회자된 건 스캔들과 사랑의 특징 때문인 듯 하다. 니체가 루에게 버림 받아서 정신병원에 가게 된 건 아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받아적는 듯 활발히 저작활동을 했다. 반면 루는 반짝 하고 말지 않았나? 외로움 속에서도 니체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대단히 영웅스런 투쟁이었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전체 5부다. 1번 ‘생존의 목적을 일깨우는 교사’부터 383번 ‘에필로그’까지 제목을 붙이고 그 제목에 대한 니체의 상념 또는 고려를 적어놓았다. 어떤 것은 한 줄짜리 경구이고 어떤 것은 한 페이지부터 세 페이지에 이른 긴 글이고, 어떤 것은 시의 형태다. 이건 아마도 시시때때로 써둔 메모를 체계 상관없이 종합해서 낸 형태인 듯 하다. 잡다구리하다. 그래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풍부하다.
2) 장점과 보완점
니체의 글쓰기를 유혹적인 글쓰기라고 했단다. 그 말이 맞다. 그의 글로 읽어본 게 이 책 한 권이므로 함부로 말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가장 큰 장점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뜻이 무엇이든 문장 자체가 감칠맛이 날 때가 많았다.
자기 생각을 적어놓았다. 정답을 찾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권위자의 의견이나 생각을 인용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맞든 틀리든, 남이 비판을 하든 말든 일단 자신의 생각을 계속 펼쳐나갔다. 이런 정신의 독립성이 나는 커다란 장점이라고 본다.
보완점이라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거다. 밑도 끝도 없이 마구 펼쳐진다. 보완할 수 있을까? 보완할 필요가 있을까?
2) 감동적인 장절
(1) 신은 죽었다는 것의 뜻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들, 니체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것 같다.
108 새로운 투쟁
259 붓다가 죽은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 세기 동안 동굴 안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했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이기에 분명 앞으로도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온갖 동굴이 존재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계속 신의 그림자를 정복해야만 한다!
125 광인
281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광장에 나와 ‘나는 신을 찾노라’고 계속 고함쳤다는 저 고아인의 이야기를 그대는 들은 적이 없는가.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어 없어지기라도 했나 보군’ 한 사람이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어버렸다 보지’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아니면 숨어 버렸단 말인가?’ 신은 우리를 겁내는가? 배를 타고 가 버렸단 말인가. 떠나 버렸단 말인가?' 그들은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비웃었다.
광인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사셨느냐고?’그는 소리쳤다.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281 대낮에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을까? 신을 매장하는 자들이 소란 피우는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는가? 신의 사체가 부패되는 냄새가 나고 있지 않은가? 신도 역시 부패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282 여기에서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자기의 등불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등불은 산산조각 나고 불은 꺼져 버렸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중도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에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 역시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이 행위는 아직 인간들에게는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욱 멀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짓을 했던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 광인은 그날 여러 곳의 교회에 뛰어들어 자신의 ‘신의 영혼 진혼곡’을 불렀다고 한다. 교회 밖으로 끌려 나와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다음과 같은 말만 계속했다고 한다. ‘이 교회들이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고통 또는 고통의 의미를 알고 있던 철학자 니체
19 악
191 하늘높이 자라려는 나무가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이익과 반대, 증오, 질투, 의심, 냉혹, 탐욕, 횡포 등등은, 덕의 위대한 성장에 거의 반드시 필요한, 저 알맞은 환경의 구성 성분이 아닐까? 약한 천성의 인간을 쓰러뜨리는 독은 강자에게는 강장제이며, 강자는 또한 그것을 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312 나의 개
346 나는 내 고통에 ‘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다른 모든 개처럼 똑같이 영리하고 위안이 되고, 부끄럼을 모르며 주제넘게 나서 대지만 충직하다. 나는 그 개를 꾸짖을 수 있고, 기분이 나쁠 때면 그 개에게 풀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개와 하인 그리고 부인에게 하듯이
315 최후의 시간에 대하여
347 폭풍은 나의 위험이다. 올리버 크롬웰이 자신의 폭풍 때문에 파멸했던 것처럼, 나도 나를 몰락시킬 폭풍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바람을 맞아 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싫증나고 지쳐 버린 등불처럼 홀로 다 탄 등화가 되어 꺼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어이없이 다 타 버리지 않기 위해서 내 스스로 바람을 불러 꺼야만 할 것인가?
316 예언적 인간
그대들은 예언자적인 인간이 고뇌에 가득 찬 인간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에게 아름다운 ‘신의 선물’이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갖고 싶어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를 통해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한다. 동물은 대기와 구름 속 전기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겠는가? 우리는 동물 가운데 몇몇 종들이 날씨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원숭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유럽에서도 이를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동물원에서만이 아니라 예컨대 지브롤터로 여행하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그들을 예언자로 만든다는 점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접근 중인 구름의 영향 아래서는 강한 양전기가 갑자기 음전기로 변한다. 이렇게 날씨 변화가 일어날 때, 이러한 동물들은 마치 적이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행동하며 방어나 도망칠 준비를 한다. 대개는 어딘가에 숨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나쁜 날씨를 날씨가 아니라, 그들이 한 발 앞서 느끼고 있는 적의 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322 비유
350 모든 별이 순환 궤도 위에서 움직인다고 보는 사상가들은 가장 심오한 사상가가 아니다. 자기 내면을 마치 끝없는 우주 공간을 보듯이 들여다보며 그 내면에 은하수를 간직한 자는, 누구든지 또한 모든 은하수가 얼마나 불규칙한지를 알고 있다. 이들은 현존재의 혼돈과 미궁 속 깊숙한 곳으로 인간을 안내한다.
378 그리고 다시 맑아질 것이다.
424 영혼이 너그럽고 풍요로운 우리는 길가의 공동 우물처럼 우리의 물을 길으러 오는 누구의 손도 거부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우리는 거절하고 싶다 한들 거절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탁하고 더럽고 어둡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 가장 시대적인 것들을 우리 안에 던져 넣고, 시대의 부정한 새들이 오물을 떨어뜨리고 어린아이들이 그 허섭쓰레기들을 쑤셔 두고, 피로에 지친 나그네가 우리 곁에서 쉬면서 그 크고 작은 고통을 우리 안에 던져 넣는데 우리는 이를 막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가 했던 대로 해 나갈 것이다.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깊으며,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맑아질 것이다.
326 영혼의 의사와 고통
351 내가 보기엔 고통이나 불행에 대해서 인간들은 언제나 과장해서 말하는 듯 하다. 마치 이러한 과장이 중요한 처세술이나 되는 것처럼. 반면에 인간들은 고통을 줄여 주는 한없이 많은 방법 예컨대 마취,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온갖 의도와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많은 종류의 자존심과 동감 등이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고의로 침묵한다.
(3) 음악을 좋아한 니체를 드러내는 구절이 재미있었다. 심지어 사랑도 음악에게서 배우려 한 구절이 있었다. 애교와 글을 연애로 배웠다는 표현을 들은 적 있다 니체 말고 다른 데서. 니체가 주는 간지럼증을 견디기 위해 니체가 권고하는 대로 고전음악을 틀어놓고 <즐거운 지식>을 읽었다.
106 매개자로서의 음악
258 개혁가는 대답했다. ‘나는 묘목이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의 교설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려면,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신봉을 받아야 한다. 그 나무가 그 묘목의 본성과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폭풍, 회의, 벌레, 악의가 필요하다. 만일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그것은 베여 쓰러져도 상관없다. 그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새싹은 뿌리 채 뽑힐지언정 논박되지는 않는다.’
(4) 작가였던 니체
92 산문과 시
244 산문의 대가들은 거의 항상 시인들이었다. 공공연하게든 우연 중에든 또는 단지 ‘침실’에서 만이든 간에 -는 사실에 주목하라. 실제로 사람들은 좋은 시를 마주 대했을 때에만 좋은 산문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문은 시에 대한 끊임없는 우아한 전쟁이기에
시를 일용할 양식에 섞어 비타민과 함께 상용, 장복해야 하는 이유로구나.
97 작가의 수다스러움에 관하여
247 분노에서 나오는 수다스러움이 있다. 이것은 쇼펜하우어나 루터에게서 자주 접하게 된다. 칸트처럼 개념적 공식들의 풍부한 저장량 때문에 수다스럽게 되는 사람도 있다. 동일한 내용에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부여하는 기쁨으로 인한 수다스러움이 있다 .몽테뉴에게서 발견되는 수다스러움이다. 악의에 찬 인물들의 수다스러움도 있다. 현대의 저작을 읽는 자는 누구나 여기서 두 명의 작가를 떠올리리라. 좋은 말과 언어형식에 대한 쾌락으로부터 나오는 수다스러움, 이것은 괴테의 산문에서는 드문 것도 아니다. 감정의 소음과 혼란스러움과 깊은 쾌감을 느끼는 수다스러움도 있다. 이를테면 칼라일의 그것이다.
98 셰익스피어를 찬미하며
247 영혼의 독립성 -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은 그것을 위해 가장 친한 친구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친구가 누구보다 명예로운 인간, 세계에 빛을 더해 주는 인물, 비길 데 없는 천재일지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위대한 영혼의 자유를 위협한다면 말이다.
72 어머니들
228 동물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인간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동물에게 암컷은 생산적인 존재이다. 그들에게 부성애란 없다. 단지 사랑하는 이의 자식들에게 대한 사랑과 같은 것, 또 그 자식들에 대한 친밀감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암컷은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지배욕을 만족시키려 한다. 자식들은 재산이며, 일거리이며, 말 상대가 되는 거리낌 없는 존재인 셈이다. 이 모두를 종합한 것이 모성애이다. 그것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쏟는 사랑과 비교할 만하다. 임
신은 여성을 더욱 온화하게, 더욱 기대감에 부풀게, 더욱 조심스럽게, 더욱 순종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임신도 여성적인 성격에 가까운 명상적인 성격을 낳는다. 그것은 남성성을 지닌 어머니이다. - 그리고 동물의 경우 아름다운 성은 수컷이다.
54 나의 독자에게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장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이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내 책을 소화하면
나와도 사이가 좋아질 터!
298 탄식
337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낚아챘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손에 닿자마자 서투른 말(언어)로 그것을 재빨리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그 통찰은 무미건조한 말에 부딪히자 마자 바싹 말라 죽은 채, 말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그렇게 행복한 느낌을 받았는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5) 자기 생각,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살라고 니체가 나를 선동한다.
32 바람직하지 않은 제자
201 “이 두 청년은 대책 없는 자들이다” 예전의 소크라테스처럼 청년들을 ‘타락’시켰던 어느 철학자는 불쾌한 기분으로 부르짖는다. “그들은 나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제자이다. 이 중 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하질 못한다. 또 한 사람은 어떤 일에나 ‘적당히 하자’고 말한다. 그들이 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첫 번째 제자는 너무나도 많은 고민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사고방식은 전투적인 혼을, 고통을 주려는 의지를, 거부의 즐거움을, 견고한 피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자는 결국 외상이나 내상 때문에 쇠약해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그가 대변하는 여러 사항 중 중용을 골라 그 모든 사항을 범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런 제자는 적에게나 주고 싶다.
212 51 진리감각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봅시다‘ 나는 이러한 응답을 허락하는 모든 회의를 찬미한다. 반면에 시험이 허락되지 않는 어떤 사물, 어떤 물음에 관해서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 진리감각‘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는 진리를 위한 용기가 권리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327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성은 움직이기 어렵고 둔중하고 우울하고 삐걱거리는 기계이다. 그들은 이 기계를 움직여 잘 생각하려고 할 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 그들에게 잘 생각하는 것이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이 사랑스러운 동물인 인간은 잘 생각할 때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진지하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 생각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이 진지한 동물들의 ’즐거운 지식‘에 대한 편견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것이 편견임을 입증해 보자.
330 박수갈채
사상가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박수갈채만 확신한다면, 갈채도 박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 자기 자신의 박수갈채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찬성이나 온갖 종류의 칭찬 없이 견딜 수 있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7 나를 따르라. 너 자신을 따르라.
나의 방식과 말에 유혹되어
나를 따르고 나를 추종하는가
오직 너 자신만을 충실히 따르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 156
33 고독한 자
추종하는 것도 앞장 서는 것도 싫다.
복종, 아니, 지배, 그것도 아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남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자만이 타인을 지도할 수 있다.
자신을 이끄는 것조차 나는 싫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숲이나 바다의 동물처럼
한동안 나를 잊는 것
외딴 섬에서 행복한 망상에 잠겨 앉아 있는 것
이윽고 멀리서부터 나를 불러들여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로 유혹하는 것 - 162
295 단기적 습관
336 반면에 나는 지속적인 습관을 싫어한다. 마치 폭군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지속적인 습관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사태에서 나는 내 신변의 공기가 나를 짓눌러 오는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관직이나 똑같은 인간들과 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 고정된 주거, 변함없는 건강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사실 나는 나의 모든 비참과 질병, 내가 지닌 불완전한 모든 것에 감사하다. 이런 것들이 내가 지속적인 습관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많은 뒷문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280 지식 추구자를 위한 건물
아마도 곧 우리는 큰 도시에 특히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색을 위한 조용하고 넓게 펼쳐진 장소이다. 날씨가 안 좋거나 햇볕이 지나치다 싶은 때를 위해 높은 천장과 길게 벋은 회랑이 있는 곳, 호객 소리나 마차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곳, 매우 숙연한 분위기 때문에 성직자조차도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없는 곳, 요컨대 전체적으로 자기성찰과 속세 이탈의 숭고함을 표현하는 건물과 환경이다.
교회가 사색의 독점권을 쥐고 있던 시대, 묵상생활이 항상 종교생활이어야만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실제로 교회가 세운 모든 것은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건축물이 그 r회적 특징을 벗어버린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건축물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이 건물들이 말하는 언어는 너무 웅변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내게는 이것들이 신의 집이며, 어떤 영적 세계와 소통하는 호사스러운 기념비로서 여겨진다. 그러한 환경에서 우리 무신론자들이 우리의 사상을 생각하기란 너무 괴롭다. 이들 홀이나 정원에서 산책할 때, 우리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돌이나 초목으로 바꿔 우리 자신 안으로 선택하기를 바란다.
289 승선하라
저마다 살아가고 사고하는 그 나름의 방식에 관한 전반적이고 철학적인 시인(是認)이 각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특히 따뜻함과 축복, 비옥함을 내려 주는 태양처럼 철학적 시인을 경험한다. 철학적 시인은 그를 칭찬과 비난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며, 행복과 선한 의지를 느끼고, 자기만족적이며 부유하고 자유분방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것은 끊임없이 악을 선으로 바꾸고, 모든 힘을 꽃피워 열매 맺게 하며, 슬픔과 분함의 크고 작은 잡초마저도 도대체 돋아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결국에는 누군가가 외친다. 오, 그런 새로운 태양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나는 얼마나 바랐는가! 알인도 불행한 자도, 예외적 인간도 모두 자신의 철학, 정당한 권리, 햇빛을 가져야만 한다.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지금가지 오랫동안 인류가 이런 교만한 생각, 즉 동정을 베풀고 실행해 왔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를 포기하고 잊어야 한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영혼의 고백도, 마술도, 죄의 용서도 아니다. 새로운 정의다. 새로운 해결책이다. 새로운 철학자다. 도덕의 지구 역시 둥글다. 도덕의 지구 역시 양 극점이 있다. 양 극점의 사람들 역시 생존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발견해야 할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 아니 하나가 아니라 많은 세계가! 승선하라. 철학자들이여.
14 용감한 사람
아교로 붙인 우정보다는
차라리 완벽한 적의가 낫다 - 158
16 위로
산을 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오르기만 하라 - 158
새로운 바다로 - 449
저편으로 나는 가련다. 이제 믿을 것은
나 자신과 내 실력 뿐
눈 앞에 열린 저 아득한 바다 끝으로
나는 내 배를 띄운다.
모든 것은 더욱더 새롭게 나를 비춘다.
시간도 공간도 잠으로 감싸 안는 정오
오직 너의 눈동자만이 두렵게
나를 응시한다. 너, 끝없는 영원이여!
304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둔다.
341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나는 싫어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저 자신을 극복해라’ 반면에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해서 하도록 하고, 밤은 밤대로 그것을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그리고 그 일을 되도록 잘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선동하는 도덕이다.
(6) 선입견,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유
1. 생존을 일깨우는 교사
173 우리는 보통 근시안적 안목으로 이웃을 유익한 인간과 유해한 인간, 선한 자와 악한 자 따위로 깔끔하게 분류해 버렸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전체를 본다면 우리는 이에 곧 회의를 느끼고 결국은 그 방식을 포기할 것이다. 가장 유해한 인간조차 종족의 보존에는 가장 유익한 인간일 지 모른다. 오래 전에 황폐해지거나 타락했을 본능을, 그는 자기 자신에게 혹은 그의 영향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보존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증오, 악의 어린 희열, 약탈욕, 지배욕, 기타 모든 악이라 불리는 것, 그런 본능들은 종족 보존을 위한 놀랄만한 경제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물론 그것은 너무 비싸고 소비적이며 전체적으로 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경제지만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류를 유지하여 왔다.
13 권력 감정에 대하여
186 기쁨이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뿐이다. 먼저 우리의 권력을 좀더 느끼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고통을 준다. 쾌락보다는 항상 원인을 묻는다. 그러나 쾌락은 자기 만족에 그칠 뿐, 뒤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14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
187 소유욕과 사랑, 이 두 단어는 우리에게 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 같은 충동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즉 한쪽은 이미 소유한 자 - 그 소유의 충동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고, 이제는 그 소유물을 보살피는 위치에 있는 자 - 의 관점에서 폄하되는 호칭이며, 다른 한쪽은 만족에 이르지 못하고 갈망하는 자의 관점에서 당연히 ‘선한 것’으로 찬양되는 이름일 수 있는 것이다.
187 일반적으로 신기한 것을 구하려는 저 모든 충동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낡은 것,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에 점차 권태를 느끼며 다시 다른 것에 손길을 뻗친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생활한 뒤에는 더 이상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먼 해변이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은 소유됨으로써 대개 시시해진다.
188 소유의 충동이 가장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에서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를 무조건 독점하고자 한다. 그는 상대의 마음과 육체에 대한 절대권을 요구한다. 자기 혼자만 사랑받기를 원하며, 상대에게 최고의 존재로 임하려 들고, 상대를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하나의 귀중품과 행복과 쾌락에 사로잡혀 그 밖의 모든 세상을 배제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사랑하는 자가 다른 모든 연적들을 몰락시키고 실패하게 하여 마치 모든 ‘정복자’와 착취자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이기주의자처럼 자신의 보물을 지키는 용이 되려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결국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져 어떠한 희생도 치를 수 있고, 모든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슨 이익도 무시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 성애의 이런 난폭한 소유욕이나 부정이 모든 시대에 걸쳐 그토록 찬미되고 신성화되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사람들이 이러한 성애로부터 에고이즘의 반대라고 생각되는 사랑의 개념을 끌어낸다. - 사랑은 분명 에고이즘의 가장 솔직한 표현일텐데 - 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6 다리를 건너서
189 자기 감정에 대하여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위장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상냥하고 달콤하거나 또는 몽상적이고 고조된 감정을 지적당하면, 그것을 알아챈 사람에게 갑자기 증오심을 품기 때문이다. 마치 소중한 비밀을 들킨 것처럼 말이다.
38 폭발적인 인간
204 젊은이들이 얼마나 폭발하고 싶어 하는 지를 생각하면, 그들이 전혀 기호도 없이 대충 결정해서 이런저런 일에 뛰어드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그 일을 둘러싼 열정의 광경이다. 즉 불타는 도화선의 광경이지 일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솜씨 좋은 유혹자는 그 일에 뛰어들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노력 없이도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폭발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기술을 알고 있다. 이유를 늘어놓아 보았자, 이 화약통을 손에 넣을 수는 없다.
197 그러니까 조심하라!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 이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즐기는 일도 없다. - 그 비밀의 내용과 더불어 - 303
205 필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필요는 대개 발명의 결과일 뿐이다. - 304
206 비가 올 때
비가 오고 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많은 근심을 껴안은 채, 그 근심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함께 떼지어 있다. 그리하여 저마다 남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고, 날씨가 나빠도 그 자신만은 비참한 만족감을 누리려 한다. 그것, 바로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가난함이다.
+ 동정에 대한 것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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