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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7일 11시 43분 등록

서양의 지혜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지음, 정광섭 옮김, 동서문화사, 1989.10.10

 

1. ‘사랑, 지식, 연민의 철학자(저자에 대하여)

russell.JPG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핵무기 반대 시위에 나선 89세의 러셀(왼쪽)과 그의 아내.
러셀은 사회운동가의 모습으로 폭력과 분쟁 해결에 앞장섰고,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회복을 호소했다.

 

사랑에 대한 갈구 (longing for love), 지식에 대한 탐구 (search for knowledge),

인간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 (unbearable pity for suffering of mankind)’

 

사랑과 지식과 인류애로 점철된 한 철학자의 인생이 있다. 권위를 우스워했고 여인을 사랑했으며 지식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전 인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오래 전 읽었던 그의 자서전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내가 스스로 물어보는 자기검열의 순간에 항상 내 앞에 떡 버티고 있던 사람이었다.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그와 근접한 시기에 살아서 그와 함께 호흡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그는 그의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즈에서 태어났고, 97세에 거기에서 사망했다.

러셀은 1900년대 초반 "이상주의 반대운동"을 일으켰으며, 그의 선배 프레게, 동료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의 선두 논리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함께, principia mathematica를 저술했으며, 이는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닦고자 한 시도이다. 그의 철학 에세이 "on denothing" "철학의 패러다임" 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저술은 논리학, 수학, 집합론, 언어학 철학 중에서도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러셀은 당시의 반전 운동가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히틀러에 대한 반대 운동과, 스탈린주의자,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했으며,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1950, 러셀은 "인본주의와 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의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를 부탁하는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밀은 러셀의 탄생 이후 얼마 안 가 사망하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년기, 조부모의 양육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유년기의 대부분 동안 러셀은 할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의 돌봄을 받았다.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의 지지자였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적 정의 (Social Justice)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Pembroke Lodge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했으며, 버트런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고독

러셀의 사춘기 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Frank 는 러셀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다.

 

대학 시절과 초기 활동

러셀은 1890 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G.E. Moore와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화이트헤드와 친분을 맺는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케임브리지의 wrangler 1893년에 졸업하고 1895 Fellow가 된다.

러셀은 1896,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1937년 이곳에서 다시 '권력의 과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는 1902 Sidney Webb, Beatrice Webb 에 의해 세워진 Fabian society coefficients dining club 안의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며, 러셀은 그를 천재이며,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된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918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logical atomism의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 활동

1차 세계대전 중 러셀은 몇 안 되는 전쟁 반대론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며,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 받는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 이라는 낙인이 찍힌 킹 제임스판 성서를 기념품으로 간직한다.

러셀은 1919년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이 대학에서 1926 Tarner Lecturer 로 활동하다, 1944-1949년 까지 Fellow 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미국이 영국편으로 참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며, 1918 9월 석방된다.

 

2차대전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1940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자신의 시각을 바꾸게 된다. 1943년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활동

이후 1944년 귀국하여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서양철학사’, 기독교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정치·교육·인생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 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 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학문적 업적, 분석철학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 받는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 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다.

 

논리와 수리 철학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콰인은 러셀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러셀의 첫 수학에 관한 책은 기하학기초론에 관한 에세이 (1897) 이다. 이 작품은 칸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자신의 책이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스키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칸트의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최초의 작업에 대해 거의 중요성 없다는 평가를 했다.

그는 또한 1+1을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서를 나열해 보자.

 

  • 1912. 철학이란 무엇인가(권오석 역, 2008) / 철학의 문제들(박영태 역, 2000)
  • 1916.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이순희 역, 2010)
  • 1919. 수리철학의 기초
  • 1922. 러셀 북경에 가다(이순희 역, 2009)
  • 1925. 상대성 이론의 참뜻(김영대 역, 1997)
  • 1925. 나는 믿는다
  • 1926. 러셀의 자녀교육론
  • 1927.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재황 역, 1996)
  • 1928.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김경숙 역, 2008)
  • 1929.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김영철 역, 1997)
  • 1930. 행복의 정복 / 러셀의 행복론(황문수 역, 2001)
  • 1935. 게으름에 대한 찬양(송은경 역, 1997)
  • 1935. 종교와 과학(김이선 역, 2011)
  • 런던 통신 1931-35(송은경 역)
  • 1938. 권력 (안정효 역, 2003)
  • 1940. 의미와 진리의 탐구(임병수 역, 1990)
  • 1945.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역)
  • 1948. 인간과 그 밖의 것들(송은경 역, 2005)
  • 1949. 권위와 개인(이종익 역, 1997)
  • 1950. 반속적 에세이
  • 1959.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곽강제역, 2008)
  • 1959. 서양의 지혜
  • 1961. 사실과 허구의 교차로(고정식 역, 1993)
  • 1961. 인류에게 내일은 있는가(고정식 역, 1991)
  • 19511969. 러셀 자서전(송은경 역, 2003)
  • 1969. 러셀의 철학노트(최혁순 역, 1990)

 

 

2. ‘서양의 지혜(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이 책의 목적은 그런 건망증을 거스르는 데 있다. 서양 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와 우리를 맺어주는 유대를 단절하면서 철학 사상을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p. 12)

 

□ 칸트는 논박되는 것보다 오해를 받는 것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철학자를 무시하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p. 12)

 

프롤로그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철학을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과학은 어떤 해답을 주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은 점쟁이가 이미 준비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탐구하고 때때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과업이다. (p. 15)

 

Ü 철학의 존재 이유, 끊임 없이 생각하는 것. 존재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

 

□ 어려운 문제를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철학을 다루는 방법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p. 16)

 

Ü 살다 죽을 인간, 그 필멸의 운명이지만 진보를 거듭해 나가는 것, 그것은 철학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주와 사물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을 찾아가는 인간의 눈물 겨운 노력이 결국 삶을 살아갈 만한 도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은 그리스인 발명한 것이다. 둑이 터진 것 같은 이 지적 활동을 낳은 어머니, 곧 그리스 문명의 발흥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눈부신 사건 중의 하나이다. (p. 18)

 

Ü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인 것을

 

□ 결국, 그리스인의 성격에 두 가지 면,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과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세계를 변혁시킬 수가 있었다.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p. 23)

 

Ü 인간을 배반하지 않는 예측가능성과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예측불가능성.

 

□ 그리스 철학의 바탕에 있는 근본 사상은 로고스이다. 이것은 특히 말과 규칙을 뜻한다. (p. 24)

 

□ 선악의 이원론과 조화와 부조화의 이원론. 정신과 물질의 문제가 있고 자유와 필연의 문제가 있다. 게다가 사물이 하나냐 많으냐, 단일이냐, 복합이냐에 대한 우주론적 문제가 있고 마지막으로 혼돈과 질서, 무한과 유한의 이원론이 있다. (p. 26)

 

□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이 시작되었다. (p. 27)

 

□ 자세히 보면 마치 공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의 물질이 여러 가지 집합 상태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p. 29)

 

Ü 지구내의 모든 물질의 질량과 에너지가 순환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두가 하나의 시스템 안에 무엇으로 인식한 최초의 사유가 아니었겠는가.

 

에서 김용규 선생은 말했다. 만물의 궁극적 요소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를 무한한 것. 곧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무한의 물질이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세계가 생기고 결국은 그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p. 30)

 

□ 우리의 어족들이 우리와 같은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p. 31)

 

Ü 햐 이거 맞는 말이다. 그들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달라서 그렇지 얼마나 욕을 해대고 있겠는가.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 (p. 32)

 

Ü 과연 생각해 봄직한 문제를 가지고 철학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밀레토스학파는 어떠한 종교 운동과도 전혀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모두 당시에 풍미하던 종교적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그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이다. (p. 33)

 

Ü 그러므로 그리스 철학이 나는 기독교 철학이나 (어짜피 거기서 파생되었지만은) 어떤 철학적 사유보다 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신이 있다면 말이다.

 

수학자가 삼각형에 대한 정리를 증명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딘가에 그린 그 어떤 도형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도형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확립된 정리는 무조건적이어서 어느 때나 들어맞는다.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이에 반하여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겉치레뿐이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이라고 보는 관점까지 거의 다다랐다. 이것이야말로 피타고라스 학설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 후 이런 생각이 줄곧 신학은 물론 철학 사상까지도 지배했다. (p. 38~39)

 

Ü 관념이 실재를 지배한 이 삼각형의 사건, 사유는 매우 오랫동안 인간의 사고를 지배했다. 기독교의 수태고지, 부활 개념도 이와 같은 사념에서 출발하지 않았겠는가. 플라톤이 기하학을 모르는 자를 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러한 관념에 기초한 이데아를 그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념의 공리가 이데아를 믿게 하는 교리이자 도구였으니 말이다.

 

□ 아낙시만드로스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로 다투는 대립물들은 무한한 것으로 돌아가 서로 침범하던 것을 보상한다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조화의 관념을 낳았다.

실제 세계는 대립하는 경향을 조절해서 평형을 회복한다. 대립물끼리의 다툼의 배후에는 규칙에 따라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하나의 조화가 있는데 이것이 곧 세계다. (p. 40)

 

Ü 이것은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 만물은 불의 교환물이며 불은 만물의 교환물이다. 이는 물건이 황금의 교환물이고 황금이 물건의 교환물인 것과 전적으로 같다. (p. 41)

 

□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에 의해 우리는 대립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한 상태에 있는 서로 다른 본질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이런 의미를 내포하는 말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선과 악은 하나이다라는 말이다. (p. 42)

 

Ü 그렇다. 홍수의 물과 오아시스의 물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물이다. 테러리스트와 독립투사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사람 다른 시각일 수 있다.

 

□ 많은 것을 배워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p. 45)

 

Ü 그런 사람 많다.

 

□ 우리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대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과오를 범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것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반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단순히 그것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이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의 전반적인 경향이다. (p. 47~48)

 

Ü , , 무한자에서 결국 세계를 만드는 근거는 존재라는 인식이 태동한다. 물리적 질료에서 정신적 인식으로 세계는 확장된다. 이데아의 초기적 형태라 할 만하다.

 

□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불변의 소립자들 빌려온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끊임없는 운동에 대한 관념을 가져온다. (p. 50)

 

□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눈총을 받았고 바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p. 58)

 

Ü tv에 나와 나 정치와 사회에는 관심없어요 하며 짐짓 점잖을 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일 게다. 바보.

 

□ 아시아에서 신으로 여겨지는 법률이 지배자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법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 58)

 

Ü 굉장히 진보적 사유이지 않은가. 존경이다.

 

□ 정치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결국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p. 66)

 

Ü 이 번역은 정말 매끄럽지 못하다. ‘정치를 무시하는 암시로 번역하면 될 것을. 어쨌든 피타고라스는 정치인들을 개무시한 철학자였다. 멋지지 않은가.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정확한 도형은 그릴 수 없다. 현실의 그 어떤 도형도 마음 속 이미지의 충실한 모사일 뿐이다. 이것이 후기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 가운데 하나인 그 유명한 이데아 이론의 요지다. (p. 68)

 

Ü 누군가 얘기하지 않았나. 서양 2천 년의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다라고. 그 플라톤이 여기서 출발한다.

 

□ 이 견해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의 하나의 조화이며 영혼은 육체의 잘 정돈된 상태의 함수이다. 육체의 조직이 무너지면 육체는 분해되고 영혼도 분해된다. 우리는 영혼을 악기의 현으로 보고 육체를 현으로 둘러싸인 몸통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p. 68)

 

□ 우리 주위의 변화하는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 근거 자체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설명의 본질이다. (p. 78)

 

□ 세계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은 원자의 재배열 때문이다. (p. 79)

 

□ 원자론은 자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영혼의 새로운 이론을 낳았다.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혼 구성 요소는 다른 원자보다 훨씬 정교하고 육체의 모든 부분에 배분되어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죽음이란 해체를 의미하며 개인의 불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나중에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이 수용했다. 삶의 목적인 행복은 영혼의 균형된 상태에 있다. (p. 82)

 

Ü 유한한 삶의 최대의 행복을 누리자는 주의.

 

제2장     아테네

 

□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야유한 것 (p. 91)

 

Ü andre bonard 의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잠시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자연의 신비를 파헤치겠다는 주장과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들거나 당황하게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적인 대화 방식, 입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경이적인 아이러니의 외투 속에 슬그머니 숨겨둔 대단한 학식 등과 더불어 아테나이 주민들에게는 유쾌한 마법사 같은 인물로 통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무대에서 신교육의 폐해를 고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그걸 웃음거리로 만들어보겠다고 작정했다. 온갖 부류의 지식인을 상징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을 선택했다.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시민 법정에 끌려 나온 자는 분명 아리스토파네의 소크라테스였다. 시민 판관들의 머릿속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 너무도 뚜렷이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들은 재판정에 서 있는 소크라테스가 극중 인물과는 다른 소크라테스임을 깨닫지 못했다.’

 

□ 그는 갑자기 아무데서 멈추어 서고 때로는 계속해서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겼다. (p. 91)

 

Ü 니체가 갈구했던 철학자의 이상적 삶이다.

 

□ 우정이란 무엇인가. 라케스에서 용기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들 의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이들 의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p. 92)

 

Ü 잘 물을 줄 아는 자는 삶을 잘 살아가는 자다.

 

□ 소크라테스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으며 아는 것은 무한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p. 93)

 

Ü 융은 우리가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무한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융은 말한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 자기처럼 자신이 지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 95)

 

Ü 소크라테스가 성인인 이유다.

 

□ 철학자란 진리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미술 수집가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라 할 수 없다. 철학자는 미 자체를 사랑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눈이 깨어 있다. (p. 105)

 

□ 우리가 철학을 모른다면 우리는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림자, 즉 사물의 가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자라면 이성과 진리라는 햇빛이 비치는 바깥쪽의 물체를 보게 된다. 이것이 실재이다. 우리에게 진리와 아는 힘을 주는 이 빛은 선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p. 107)

 

Ü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실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존재 너머의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는 항상 인간 너머의 그것을 지향한다.

 

□ 이 대화편에서는 이상국가의 수립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론이란 이름이 붙었다. (p. 112)

 

□ 관리자의 사회경제적 생활은 엄중한 공산주의여야 한다. (p. 113)

 

Ü 동의 한다.

 

□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 목적은 철 없는 군주를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중요한 도시의 문제를 관리하기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사람으로 기르는 데 있었다. (p. 115)

 

Ü 국가론은 이상적 국가의 모습보다는 군주 지침서에 가깝다는 말인가.

 

□ 법률은 결국 철인왕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법의 통제하에서 한 사람의 지배체제와 다수의 지배체제를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제시한다. (p. 116)

 

□ 로마인은 그리스인만큼 독창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도시 국가의 지나친 개인주의는 갖고 있지 않았다. (p. 118)

 

□ 철학이란 원래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친구의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p. 119)

 

Ü 프랑스 철학자 g. 소렐의 말이다. 무슨 의미일까.

 

□ 우리는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법에 따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정치 지배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세계가 재기불능의 전멸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이 질문은 중요해진다. (p. 125)

 

□ 사실이 가설의 결과와 일치하지 않으면 그 가설은 타파되고 무엇인가 다른 가설을 시도해야 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가설 자체가 여전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p. 127)

 

□ 우리는 정신이란 기억의 인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 오류는 현재의 감각을 그릇된 인상과 결부시켜서 생기는지도 모른다. (p. 132)

 

Ü 기억의 인상과의 괴리, 정신이 가진 오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 운동은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운동이지 정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비 존재는 존재와 같은 수준에 있다.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p. 137)

 

Ü 아래 대화를 보자

 

러시아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시호테 알린 산맥 주변에 거주했던 토착 주민 데르수 우잘라는 별과 달을 묻는 문명인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재미있다.

 

별이 뭔가?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

 

□ 플라톤도 수를 형상으로 보았다. 형상은 분명히 합할 수가 없다. (p. 141)

 

□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플라톤을 비판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 145)

 

□ 형이상학이란 문자 그대로는 물리학의 뒤라는 뜻일 뿐이다. 본편이 이와 같은 제명을 얻은 것은 초기 편찬자가 저서들을 배열할 때 이것을 물리학 뒤에 놓았기 때문이다. (p. 146)

 

Ü 거창한 함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 동방의 천문학자는 현상을 기록하는 일에 만족한 반면, 그리스의 사상가는 현상을 만족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p. 150)

 

□ 모든 인간은 이성적이다. 유아도 인간이다. 따라서 유아도 이성적이다. (p. 151)

 

Ü 실제로 잘못된 전제에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제가 옳으면 옳게 이끌어낸 그 어떤 결론도 옳다는 것이다. (저자)

 

□ 수학은 최고의 위치에 있다. 천문학은 수학 다음이다. 천문학이 관찰하는 운동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 154)

 

□ 가능성과 합목적성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생물학자는 어떻게 해서 하나의 씨가 식물이나 동물로 성장하는지의 의문에 직면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도토리는 도토리 나무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도토리를 하나의 나무로 변하게 하는 것은 자기 실현의 경향일 것이다. (p. 160)

 

□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대상이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서 공간과 시간에 위치와 같은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p. 163)

 

Ü 이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예가 있을까.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 하나의 선의 어느 두 점 사이에는 또 다른 점이 있고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간의 어느 두 순간 사이에도 또 다른 순간이 있다.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은 연속적이며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 이 전후 관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의 역설의 설명한다. (p. 166)

 

□ 그는 플라톤에게서 삼분설 을 빌려온다. 그는 식물적 영혼, 감각적 영혼, 이성적 영혼에 대해 말한다. (p. 167)

 

Ü 이것은 자연의 사다리라는 아이디어일 것이고 존재의 사다리로 이어지는 사념의 교두보가 된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듯 최고의 존재로서 부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에게는 더 큰 존재를 부여하고 어떤 사물에게는 더 작은 존재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존재들의 자연 본성을 계층으로 질서 지어 놓았다.’

 

□ 정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우리는 정직이라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과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의 중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p. 169)

 

□ 사물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다. 이용 가치와 교환 가치 (p. 172)

 

□ 아리스토텔레스는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정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p. 173)

 

Ü 사회주의적 발상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근본정신일 지 모른다.

 

□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체제를 오랫동안 개관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정체란 부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없지도 않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같이 우세한 중류 계급을 갖는 국가가 가장 좋으며 가장 안정되어 있다. (p. 174)

 

Ü 어느 정도를 넘어선 부는 인간에게 독이 되고 무지막지한 가난은 인간에게서 기품을 앗아간다. 

 

□ 기원전 4세기 말경, 수학 활동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간다. 이 도시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것인데 급속히 지중해 연안의 주된 상업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동방국들에 대한 문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서방과 바빌로니아 및 페르시아에서 문화를 들여오는 접촉점이 되었다. 대규모의 유대인 사회가 이룩되자 알렉산드리아는 급속도로 헬레니즘화되었다. (p. 179~180)

 

Ü 역대 제국의 모습은 모든 변방들을 포괄하고 안아주는 다양성의 포용력에 달려있었다.

 

□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사람. (p. 182)

 

제3장     헬레니즘

 

□ 기원전 334년부터 324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젊은 정복자의 손에 넘어 갔다. (p. 189)

 

□ 과학적 연구의 중심지는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새로운 도시 중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이면서 전세계의 학자와 저술가가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p. 191)

 

a b인 경우에 b a가 아니므로 이 진술은 틀릴 수 밖에 없다. (p. 192)

 

Ü 카를 융은 이와 같은 등가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사유다.

 

그런데도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격앙시켰던 것은 a=b, b=c이면 a=c가 된다는 그런 공식이었다. 확정된 정의에 의한다면 a b와 다른 것을 가리키므로 별개의 것이며 b와 똑같이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C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등식을 다루는 경우에는 a=a, b=b 등으로 말해지는 것인데 a=b는 즉각 거짓말이나 속임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 디오게네스 : 햇볕이 가리지 않게 거기서 물러나 주시오

알렉산더 :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p. 193)

 

기회가 사라졌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고 즐길 때는 즐기지만 운명의 장난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가르침이 이와 같이 발전해서 시니컬 cynical이라는 말이 저 불명예스러운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p. 194)

 

□ 에피쿠로스에게 최선의 선은 쾌락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선한 삶은 불가능하다. 문제의 쾌락에는 정신적 쾌락은 물론 육체적 쾌락도 들어간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을 관조하는 것이다. (p. 197)

 

□ 영혼도 일종의 특별한 물질이며 그 분자는 육체의 구성원자와 섞여 있었다. 감각이란 대상에서 나온 것이 영혼의 원자와 서로 충돌한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크게 반대했지만 신의 존재는 인정했다. (p. 199)

 

Ü 에피쿠로스와 나는 닮아 있다. 오버인가어떠리.

 

□ 세네카는 기원전 4년 무렵의 태생으로 로마에서 사는 에스파냐계의 부유한 집안 사람이었다. (p. 204)

 

□ 그리스는 세계의 지적 작업장이었으나 자유 독립 국가로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한편, 그리스의 문화 전통은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해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서양 문명에 남겼다. (p. 207)

 

□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이 지역의 중요한 강대국은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였다. 둘 다 제1, 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3세기 중에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p. 208)

 

□ 문화적으로 로마는 거의 차용 문화였다. 로마 세계의 기술, 미술, 건축, 문학, 철학은 상당히 솜씨 있게 그리스의 훌륭한 표본을 모방하고 있다. (p. 210)

 

Ü 로마는 그리스의 아류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의 영향은 지대하다 하겠으나 로마는 그리스를 닮으려 애쓰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제 생긴 대로 화끈하게 융화와 창조를 병행했으리라. 로마에서

 

그리스는 국가가 멸망했지만 문화 영역에서는 로마인 정복자를 정복했다. 유럽인이 프랑스어를 사용한 것과 같이 로마인은 그리스어로 말했다. (p. 211)

 

□ 한편, 헬레니즘 문화의 비 그리스적 요소는 시간과 함께 강해져 갔다. 메소포타미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방으로 스며든 종교적 영향은 커다란 통합적 기운을 낳았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교가 결국 최고의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p. 211)

 

□ 로마가 해낸 최고의 역할은 자기 문화보다 오래되고 뛰어난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 행정관의 조직력과 제국의 사회적 단결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달성되었다. (p. 212)

 

시대의 무질서를 앞에 두고 밝고 침착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거나 더할 나위 없는 강인한 사람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감각 세계와 그 비참함을 비실재로 보는 이데아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운명을 체념하게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p. 215)

 

철학의 시작은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일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탐구와 조사라는 일반 개념도 서양 철학을 형성한 그리스인의 위대한 발명 가운데 하나이다. (p. 218)

 

□ 그리스인 탐구자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해야만 했다. 새로운 화법도 만들어 내야 했고 전문 용어도 일상 회화의 재료에서 따와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때로는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 서툴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이 필요한 도구를 만들 때 그 도구에 맞는 표현을 먼저 더듬어 찾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p. 219)

 

Ü 그리스인은 인류의 창조자다.

 

□ 로마인의 손에 들어오면 그리스의 지적 유산도 그다지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 되지 못한다. (p. 220)

 

Ü 나는 로마의 이런 터프함이 좋다. 거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솔직한 모습 말이다.

 

4장 초기 그리스도교

 

□ 서방을 지배하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와 동방의 종교가 섞인 혼합종교를 어느 정도 포함한 유대에서 나온 것이다. (p. 224)

 

Ü 서양의 고유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보면 종교든 생활양식이든 서양만의 것, 동양만의 것은 없다.

 

□ 그는 질투하는 신이어서 자기 종족이 자기 이외의 신들을 받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p. 225)

 

□ 그들은 단호히 자기들의 신 이외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바치라는 예수의 조언은 유대인의 이런 고집의 전형적인 한 예이다. 언뜻 보면 타협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신과 황제의 동일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p. 228)

 

□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이 고대의 예언자가 알려준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그들은 사악하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유대교 배척주의는 그리스도교적 열정의 훌륭한 형태가 되었다. (p. 231)

 

□ 마르크스주의자는 제도적인 그리스도교에 동의하지 않고 종교를 사람들의 아편이라 하며 (p. 232)

 

Ü 신의 가면으로 인민들의 착취를 정당화 시킨다는 것?

 

□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의 가톨릭교의 신학적 뼈대는 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개혁된 종교의 지도 원리도 그가 만들었다. 루터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 사제였다. (p. 234)

 

Ü 그리스도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분은 막대하다.

 

□ 암브로시우스는 펜을 들었다. 황제는 신을 섬길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시민이 병사로서 황제를 섬길 의무가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황제에게 상기시키려고 했다. 넌지시 하는 말이었지만 이것은 신의 것은 신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라는 예수의 요망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었다. (p. 235)

 

□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의 창조주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 세상 바깥쪽에 있는 신이다. 이 신은 시간을 초월한 영혼으로 인과율도 역사적 발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을 때 세계와 함께 시간도 창조했다. 우리는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p. 241)

 

Ü 신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과 구별하여 철학자 김용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철학적인 문제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가? 한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시대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가?

사회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에는 그 어떤 상호 작용이 있다. 철학사를 보는 관점은 대부분의 의문이 이전에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과거에 현명한 해답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p. 246)

 

Ü 질문 좋다.

 

532년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사원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의 손에 들어갈 때까지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었다. (p. 249)

 

Ü 나는 보았다.

 

□ 우리는 중세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새로운 사실 두 가지를 언급해야겠다. 첫째는 서쪽에 수도원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로마 교황권의 권력과 권위가 중대했다는 것이다. (p. 250)

 

제4장     스콜라 철학

 

□ 역사를 분할해서 일정한 구획으로 끼워넣으려는 시도는 매우 인위적이다. 이와 같은 구분에는 별로 의존할 것이 못 된다. 기껏해야 그것은 그 시대에 우세했던 전체적인 특징을 몇 가지 가르쳐 주는 정도이다. (p. 256)

 

Ü 묶어서 흐리게 하고 개별성과 특수성을 묻어 버린다. 역사가 역사이지 못하게 한다.

 

□ 유럽이 전체적으로 쇠퇴해 가고 있었을 때, 아일랜드의 문화는 번창했다. (p. 262)

 

Ü 제임스 조이스의 조국이다.

 

□ 신은 무에서 사물을 만들어 내며 모든 인식을 초월한다. 따라서 신은 그 어떤 사물도 아닌 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하네스는 특수하게 물적 존재를 인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반대했다. (p. 266)

 

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유물론에 가깝다.

 

□ 회교 시대는 마호메트가 622년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간 헤지라부터 계산된다. 632년에 그가 죽은 뒤 아라비아인의 정복은 불과 1세기 만에 세계를 일변시켰다. (p. 270)

 

Ü 성전이라 불리는 어처구니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데 문명 충돌의 개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전보다는 인도적이었다.

 

□ 마호메트가 선언한 새로운 종교는 몇 가지 점에서 신약성서에 첨가된 신비주의를 떨쳐 버린 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일신교로 돌아갔다. 정복은 거의 종교적 의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p. 271)

 

마호메트의 사위 아리가 661년에 죽은 이후에 신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시아파는 아리에 충성을 바치는 소수파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은 한 사람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은 이 소수파에 속하며 그들의 영향력에 의해 왕조도 아바스 왕조에 밀려 대체되고 이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p. 272)

 

13세기 내내 몽고가 침입해 왔는데도 높은 예술 수준을 유지했다. (p. 273)

 

□ 바르바로사 (p. 276)

 

Ü 바르바로스인은 이방인의 언어를 비하한 표현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품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황폐함과 인본주의의 풍요로움을 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하여 역사가 키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민족과 국가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의 스승이 이방인과 가까이 하고 있는 그를 꾸짖자 그는 말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스승의 의견에 저항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인이거나 바르바로스인 것은 절대 천성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믿는다. 이 문제에 있어서 출생과 혈연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문화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기원전 5세기 말엽에서 4세기로 이어지는 무렵에 태동한 민족주의 이전 시대에 인본주의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세대였다.’ (그리스인 이야기 중에서)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개가를 올린 세기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위에 확립하려고 했다. (p. 282)

 

□ 신에서 시작해서 이데아를 지나 제일 아래의 특수 존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 조직이 있을 것이다. 보편적 개념에서 특수적 개념으로 가는 (p. 285)

 

Ü 존재의 사다리를 말하고 있다.

 

□ 신앙은 합리적 지식을 추구하기 이전부터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추리할 수 있기 전부터 믿어야 한다. 이성의 진리는 자율적이지만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계시의 문제기 때문이다. (p. 286)

 

□ 아퀴나스에게 신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다. 유한한 사물은 단지 우연히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의존하며 이 어떤 것이 바로 신이다. (p. 287)

 

Ü 그러나 아퀴나스가 말년에 집전하다 우연한 사건 이후 절필과 묵언으로 일관한 것이 나는 상당히 의아하다. 그 계시적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본질이란 전적으로 가능한 것이며 존재란 전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p. 288)

 

□ 신의 존재 증명 (p. 288)

 

Ü 철학자 김용규의 에서 소개된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 가운데 다섯번 째를 소개한다.

 

a) 세상의 모든 자연적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각각의 목적 때문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b) 그런데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깨달은 어떤 존재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면 과녁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c)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적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르네상스까지 철학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퀴나스의 번역 덕분이다. 그러나 그때 배척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나 아퀴나스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잘 알지도 못하고 형이상학적 사고를 사용했던 일부 습성이었다. (p. 290)

 

□ 신학은 신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는 이상 이미 합리적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로 인도되는 신념이다. (p. 293)

 

Ü 급진적이다. 둔스다.

 

□ 논증과 증명은 철학에 속하고 신학과 철학은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p. 293)

 

□ 우리의 이성으로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다. 신과 신의 여러 속성에 대한 신념은 신앙에 의한 것이다. (p. 297)

 

Ü 급진적이다. 오컴이다.

 

□ 신곡을 썼을 당시 중세는 실제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침내 전성기를 지나친 하나의 세계를 개관한다. (p. 298)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세계 공통어는 프랑스어 (p. 299)

 

□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신을 생각해 보려 했다. 교황권은 사상가와 학자에 대한 도덕적 정신적 지배력을 잃었다. (p. 302)

 

Ü 세상에 수많은 개인들이 드디어 나오게 되는 순간이다.

 

□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스인의 윤리적 사고방식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비형이상학적이다. 헬레니즘 시대, 특히 스토아주의의 경우에는 세상을 체념하면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윤리학으로 스며들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초기 그리스도교 각파에 전해졌다. 그러나 요컨대 그리스 철학은 신학적인 문제에 부딪히지 않았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세속적이었다. (p. 307)

 

Ü 그리스는 자유가 연상되며 그리스도교는 억압이 연상된다. 그리스가 인간 원형에 가깝다.

 

그리스도교도는 지상의 삶을 소중한 내세의 준비로 보고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선천적인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인간을 정화시키기 위해 부과된 시련이라고 보았다. (p. 307)

 

Ü 위정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사상 즉 국가 대중의 죄의식을 심어주고 종교에 따르면 구원받는 이 획기적 발명품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을 터. 예수가 메시아이든 아니든 이들 위정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장 근대 철학의 융성

 

□ 중세의 쇠퇴기에서 17세기의 거대한 파도에 이르는 과도기에 중대한 움직임 네 가지

1. 15, 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2. 인간의 관심사가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감에 따라 생겨난 휴머니즘

3. 휴머니즘 운동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됨

4. 과학과 이성의 진보 (p. 312~314)

 

□ 과학적 연구가 진보해서 생긴 사고 방식은 본질적으로 부활한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이다. (P. 314)

 

현대 공업의 커다란 진보는 많은 머리와 손의 협력에 달려 있으며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자기 힘이 무한하게 보인다. 이 모든 계획이 인간의 노력을 수반하고 인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자칫 잊기가 쉽다. 이 영역에서 현대 세계는 한도를 넘을 염려가 다분히 있다. (P. 315)

 

Ü 이미 넘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러셀 사후 이 지경이 된 지구면을 보지 못해 그는 모른다.

 

□ 중세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의 특징

1. 활자를 사용하는 인쇄기의 발명

인쇄술은 낡은 권위를 뒤집어 엎는 데 도움을 주었다.

 

Ü 교회와 성직자, 위정자, 지도세력들의 지적 권위주의는 발 붙일 때가 없어졌다.

 

2. 나침반과 선박기술의 발달

15세기부터 인간은 성난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탐험가들은 새로운 육지와 항로를 찾아 대양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중세의 인간에게는 정해진 직분이 있었다. 별은 그 궤도를 달리는 것이 직분이고 사람은 태어나면서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는 것이 직분이었다. 이 즐거운 그림은 르네상스로 무너졌다. 인간은 그 능력과 창의성에 자신감이 넘쳤고 무대의 중앙에 선다. (p. 317)

 

Ü 멋지다. 그 세계

 

□ 이탈리아에는 지나간 시대의 상징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 (p. 319)

 

Ü 르네상스의 거름이었다.

 

□ 권력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무자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선하냐 악하냐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며 (p. 323)

 

Ü 마키아벨리가 현대의 사람이라면 분명 성공했을 터.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이야기했듯 생각이 없는 것도 죄다.

 

□ 종교적 신념이 진심이든 아니든 국가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응집력을 얻기만 하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일이다. (p. 324)

 

편의상 도덕률에 따를 것을 요구 받지 않는다면 지배자는 이것을 파기해도 좋다. 실제로 권력에 머물고 싶다면 파기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동시에 지배자는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이 표리부동한 행동에 의해서만 비로소 지배자는 자기 지위를 유지할 수가 있다. (p. 325)

 

Ü 군주론은 이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 모어는 사물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면 공동의 복지를 존중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고 여긴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재물을 소유하고 있으면 재물의 차이에 따라 서로 불평등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유토피아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근본적 사상이다. (p. 330)

 

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모두 소개할 순 없다. 저자는 한 페이지 전반에 걸쳐 설명해 놓았다. 가슴에 들어오는 사상이 있고 요즈음과 맞지 않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나는 모어의 유토피아가 지금도 유효한 생각임을 지지한다.

 

□ 루터는 면죄부를 판다는 천한 행동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도덕적 고통을 주었다. (p. 333)

 

□ 예수의 가르침과 현존 사회 질서 사이에 중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p. 334)

 

Ü 민중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 프로테스탄트라는 말 자체는 1529년에 황제가 보름스 의회의 조항을 재도입하려던 황제의 기도에 항의하여 개혁파 종교를 지지하는 사람이 낸 호소에서 나온 말이다. (p. 334)

 

□ 종교재판소는 수 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과학적 연구를 교묘하게 뭉개왔다. (p. 346)

 

Ü 지금도 우리는 중세의 종교재판소에 해당하는 국가 권력을 볼 수 있다. 각종 윤리를 심의한다는 명목으로 어이없는 잣대를 대중에게 들이대는 꼴을 보자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 (p. 346)

 

□ 과학적 활동의 이 엄청난 폭발력에 이어 그에 상응하는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서유럽은 약 3세기 동안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과학 혁명과 함께 그리스 정신은 다시 정당한 명예를 회복했다. (p. 347)

 

Ü 과학이 곧 권력인가. 미개를 벗어나지 못한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 근본적으로 이 새로운 수단은 실제 조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다. (p. 350)

 

Ü 이천 년 간 그리스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고대 그리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가.

 

감정의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은 평등하며 저마다 남을 희생시켜 자기를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만인과 만인이 겨루는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고 홉스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불쾌한 악몽을 벗어나려고 단결하고 자기들의 권력을 중앙의 권위에 위탁한다. 이것이 이 저서의 제 2부의 주제이다.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경쟁적이므로 인위적 합의 내지는 계약을 하게 되며 이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고른 그 어떤 권위에 복종하는 것에 동의한다. 일단 이와 같은 방식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반역할 권리는 없다. (p. 354~355)

 

Ü 리바이어던의 골자다.

 

□ 공화국은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인, 리바이어던과 같은 것이다. 리바이어던은 인간보다 크고 강하고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신과 같은 존재이다. (p. 355)

 

Ü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렇게 표현했구나. 일견 동의할 수 있다.

 

□ 어느 날 평소보다 더 추워져서 데카르트는 어느 오두막으로 들어가 타일을 바른 아궁이 옆에 앉았다. 적당히 몸이 따뜻해졌을 때 그는 명상을 시작했는데 그날 그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분명히 마음 속에 떠올렸다. (p. 356)

 

Ü 邯鄲之夢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아궁이에서 밥 익는 사이의 생을 모두 관조한 꿈.

 

□ 오감의 증언은 불확실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수학은 의문의 여지는 없으나 역시 수학까지도 의심해야 한다. 신이 우리를 일관되게 헤매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의심하는 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하나의 생각하는 존재며 자연적 실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육체와도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제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이르러 본질적으로는 그 존재론적 증명을 되풀이한다. (p. 359~360)

 

Ü 여전히 나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 데카르트가 교수를 권유 받고 거절한 이유는 이랬다.

나는 젊은 사람들의 교육에 전념하게 되면 철학 연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기존 종교를 뒤집어엎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계 내에서 철학을 할 자유를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p. 365)

 

□ 정신의 본성은 사물을 우발적으로 보지 않고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일이 잘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신과 또는 같은 말이지만 세계와 하나가 된다. (p. 369)

 

그 어떤 잔학 행위도 영원한 형상 아래에서는 결코 무자비하지 않다 (p. 370)

 

□ 신은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창조된 존재로서 세계를 완전히 알 수가 없다. (p. 379)

 

□ 비코는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완전히 알 수 있지만 실재와는 관련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만든 것이지만 실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p. 381)

 

7장 영국 경험론

 

□ 왕권 신수설의 부정과 함께 사람들이 자기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었고 따라서 이제 교육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7세기의 자유주의는 분명히 그 이름처럼 자유 해방의 힘이었다. (p. 390)

 

Ü 장막에 쌓여 대중의 우매함을 조장한 왕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절대적 권력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지적 수준의 향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개인주의라는 이론은 대체적으로 합리론적 이론이며 이성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p. 391)

 

Ü 르네상스부터 내려온 인본주의, 휴머니즘은 서양 대중에게 개인주의의 뿌리를 심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공식은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이제 서양의 대중들은 개인적 존재에 의존하는 삶의 양식을 배태하기 시작한다.

 

□ 정신은 한 장의 백지와 같다. 여기에 정신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경험이다. 이들 내용을 로크는 매우 넓은 뜻의 말을 빌려 관념이라고 부른다. (p. 395)

 

Ü 로크가 말하는 관념은 경험에 기댄 정신이다.

 

□ 로크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더욱 강했다. 앙시엥 레짐( 체제)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적 압제는 영국의 자유주의 원리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과학 분야에서도 뉴턴적 관념이 낡은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밀어냈다. (p. 401)

 

Ü 대륙의 관념론이 태동한다.

 

□ 버클리는 시각은 외적인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이라고 그는 말했다. 촉각은 감각의 관념으로서 정신 안에 있지만 물적인 대상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p. 405)

 

Ü 일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보다라는 한자어를 굳이 들이대자면 에 가깝겠다. , 現보다는 말이다.

 

경험하는 것은 경험할 때의 일로 그 밖의 어떤 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사물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뜻을 형성하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경험적인 관점에서 서면 실재는 경험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p. 406)

 

Ü 얼핏 이해하기 힘들지만 경험이 곧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겠다. 경험론의 진수다.

 

□ 사람은 그 정신으로 지각하지만 지각할 때 정신을 관찰하면서 정신 근처를 맴돌지는 않는다. (p. 410)

 

Ü 유물론에 가까운 것은 영국의 경험론이다.  

 

□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도 없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는 가능한 경험의 범위와 같다. (p. 414)

 

Ü 흄의 경험론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질료가 물, 불에서 시작해 무한자, 존재, 경험, 관념에까지 이르렀다.

 

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 계몽운동의 힘은 크게 1789년 대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p. 426)

 

□ 낭만주의 운동과 계몽 운동의 관계는 어느 면에서 아폴로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상기시켜 준다.

 

Ü 인간의 쾌락과 해방을 가치에 둔 운동. 나는 아무래도 디오니소스적이며 에피쿠로스적인 모양이다. 금욕과 절제보다는 그들이 끌린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낭만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산업 노동자의 정당한 애로는 그 후에 올바르게 처리되었지만 낭만적 노동자라는 관점은 지금도 정치상에 남아 있다. (p. 427)

 

Ü 인간의 삶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정치체제가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지만 그람시의 말처럼 이성으로 낙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정치적 인간의 숙명일게다. 현재까지 인간이 세상에 내놓은 정치사상 중 가장 진보된 개념을 나는 마르크스적 사회주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능사라 생각지는 않는다.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공동체로 나아가려는 노력은 계속되겠지만 후퇴하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그람시의 말이 힘겹게 내 안에서 헐떡임을 느낀다.

 

□ 국가는 그 어떤 의작 부여된 대규모적인 개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p. 428)

 

□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낭만주의 운동은 하나의 영향을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 이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착수하고 있는 문제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머리를 돌리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게 했다는 것이다. (p. 429)

 

Ü 이 낭만주의적 사조야 말로 인민의 아편이겠다. 바이런이 낭만주의자라는 것은 슬픈 일이다.

 

□ 볼테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 430)

 

□ 마르크스는 정신은 육체 조직의 부산물이라 했다.

 

Ü 관념적 사고를 최대한 멀리한 마르크스는 기독교와 담을 쌓았던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다.

 

유물론자는 당당히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 어떤 형체나 형태의 종교든 해로운 정교한 거짓이라고 여기고 무지한 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지배자와 성직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퍼뜨리고 장려한 것이라고 보았다. (p. 432)

 

Ü 일견 동의한다.

 

□ 이성의 신격화 (p. 432)

 

Ü 理神論적 인간. 기독교에서는 곧 바로 이단의 처형을 받을

 

□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방식은 신의 존재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런 지식은 이성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본다. (p. 435)

 

Ü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이겠다. 신은 인간의 입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전체적으로 사회에 위임할 때 개인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는다. (p. 436)

 

Ü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권리라는 것을 빵과 같이 누가 먹으면 자기에게는 없어지는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가. 사회에는 사회의 권리가 있고 개인에게는 개인의 권리가 있다. 좋은 말 있지 않은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로 신의 것은 신에게로

 

□ 칸트의 명제 (p. 439)

 

Ü 철학자 김용규는 그의 책 에서 칸트의 명제에 대해 이 책보다 더욱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용한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 Vs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경험적으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것. 분석판단. Vs ‘이 사과는 빨갛다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빨간지 파란지 알 수 없는 것. 종합판단

 

□ 지식이란 적극적 지성이며 이 점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심각할 정도로 불평등하다. (p. 442)

 

□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여기에서도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가까운 것을 도입하고 있다. 그때까지 윤리학이 항상 의지는 외적 영향에 지배된다고 단정했다면 칸트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의지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p. 445)

 

Ü 근대의 모든 개인은 칸트에게 부채의식을 느껴야 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를 논증으로 확립한다는 것은 이론적 이성의 범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한 일이 있었다. 순수이성의 사변 활동은 신의 존재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는 한다. (p. 447)

 

□ 변증법의 근원은 칸트의 범주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칸트는 각 그룹의 제3의 것은 서로 대립하는 1 2를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단일성은 어떤 의미에서 복수성의 반대임에 반하여 총체성은 다수의 단위를 포함하며 이것이 처음의 두 관념을 하나로 결합한다.

독일의 관념철학은 헤겔의 손에서 최종적인 체계적 모양을 갖추었다. (p. 452)

 

□ 어떤 사람이 항상 벽돌담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벽돌이 두개골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완고하다고 말할 수 있어도 자유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자유는 환상을 갖는 것보다도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이며 필연적인 작용을 파악하는 일이다. (p. 456)

 

Ü 환상은 환상으로 끝내고 자유는 현실로부터 시작하자. 자유의 개념은 행복의 개념과 유사하다. 어떤 일을 하는 과정 중에 느껴지는 감정이 행복이라면 행복은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자유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 국민은 싸울 일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약체가 되어 퇴폐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헤겔은 여기서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의견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p. 457)

 

Ü 칸트의 세계 연방 개념과 정 반대의 생각이다.

 

□ 처음에 하나의 진술이 있고 다음에 이것이 반대 진술의 대립을 받아 마지막에 이 두 개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의 복합체가 된다. (P. 459)

 

Ü 변증법의 가장 기본 되는 메커니즘을 말하고 있다.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닥쳐오지 않으면 날지 않는다. (p. 463)

 

Ü 헤겔은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 키에르케고르는 의지를 이성 앞에 놓고 인간이 너무 과학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외부에서 사물에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키에르케고르는 하나의 상태를 안에서 파악하는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을 인정한다. 그는 우리가 과학적으로 인간에 접근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친다고 느끼고 있다. 개인의 특수한 감정은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p. 469)

 

Ü 인간의 개별성은 철학이 설명할 수가 없다.

 

□ 키에르케고르는 신앙과 이성을 분리한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은 우주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과학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낭만주의 최고 원리와도 일치한다. (p. 470)

 

□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를 철저하게 악으로 보고 삶에 고통이 반드시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에게 지식이란 헤겔처럼 자유의 원천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다. (p. 473)

 

Ü 대가의 의견들이 분분하다. 어디에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전적으로 따를 수 없다.

 

□ 우리의 고통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의지의 작용이다. 의지를 속이면 우리는 결국 열반, 즉 무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p. 474)

 

Ü 쇼펜하우어는 불교적 신화가 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지라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탐, , 치의 욕심을 제어하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생각과 같다.

 

어둡고 열정적인 디오니소스적 성향은 인간 존재에 있는 비극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 올림푸스의 80만의 신들은 인간의 삶에서 적적함을 제거해 주는 일종의 조용한 환상이다. 이것은 아폴로적 영혼의 경향에서 생긴다. 그리스 비극을 디오니소스적 욕구의 아폴로적 승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476)

 

니체에 의하면 자유인은 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인간형이다. (p. 478)

 

Ü 나는 니체가 진정한 휴머니스트라 생각한다.

 

9장 공리주의 이후

 

19세기의 중엽까지 광대한 철도망이 유럽과 북미로 뻗었고 범선도 기선으로 대체되었다. (p. 483)

 

□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리카도의 노동가치설, 이것을 받아들인 인물이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목표는 폭력적 수단으로 현존 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일이다. (p. 484)

 

Ü 인터네셔널은 이와 같은 피의 혁명을 근거로 태동한다.

 

□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격언, 벤담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은 자기에게 가능한 최대의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행복은 쾌락과 같은 뜻이다. 법의 기능은 누구나 자기의 최대 쾌락을 구할 때 다른 삶의 그것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보증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Ü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내야 한다.

 

그는 현재의 희생 도덕은 지배 계급이 자기 손으로 가진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부과하고 있는 정교한 속임수라고 주장한다. (p. 489)

 

Ü 동의 한다. 교육시스템과 사회 제도 대부분은 기득권에 해가 되는 것은 거의 없다.

 

□ 멜서스의 인구론, 찰스 다윈은 여기에서 자연도태의 원리와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을 얻었다. 유기체의 증가율의 기하학적 속도와 이에 이어 일어나는 경쟁을 논할 때,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멜서스의 이론을 동식물의 세계 전체에 다양하게 적용한 것이다. 이 경우, 식량의 인공적 증가도 신중한 결혼 자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p. 495)

 

Ü 다윈의 진화론의 요지를 철학자 김용규는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 사회주의에 철학적 바탕을 주는 일은 마르크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이 점에서 그의 경제학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바탕으로 했고 철학적 논의의 수단은 헤겔의 변증법을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하나의 발판이 되어 여러 가지 이론을 낳고 이 이론들이 결국 한층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p. 497)

 

Ü 마르크스도 리카도의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구나.

 

사람은 자기 봉급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며 이 잉여 가치는 자본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빼앗아간다. 이런 식으로 노동은 착취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산업 규모에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손과 대량의 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는 생산 체계와 전체로서의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이 생산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 (p. 499)

 

Ü 이것이 사회적 문제라면 자본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와의 경쟁구도가 시대를 바꾸진 못한다는 말이겠다. 크게 보면 노동자는 리바이어던에 자발적 복종을 맺은 개인이며 이것은 크게 정치적 사회계약의 기반이 되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의 해석 방법은 철저하게 헤겔적이다. 헤겔이 볼 때 역사 진로는 절대자를 향해 노력하는 정신의 점차적 자기 실현이다. 마르크스는 정신 대신에 생산 양식을 놓고 절대자 대신에 계급이 없는 사회를 놓는다. 일정한 생산 조직은 이윽고 이 조직과 결부된 각종 사회 계급 사이에 내부적 긴장을 낳게 된다. 변증법적 투쟁이 취하는 형식은 계급 투쟁이다. 이 싸움은 사회주의하에서 계급이 없는 사회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p. 499)

 

Ü자본론을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간절하다. 빌려만 놓고 보지는 못했는데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야겠다. 사회를 계급 투쟁이라 인식한 마르크스의 관점에 나는 뜻을 같이 한다. 진부한 20세기 학문으로 박제된 사회주의적 계급 투쟁의식이 나는 여전히 이 사회에 흐르는 도도한 체제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서 계급이라는 것을 떼어낼 수 있을까.

 

□ 그러나 마르크스의 잘못은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더 가난해져서 마지막에는 이 모순의 변증법적 긴장이 높아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결과가 된다고 가정한 점에 있었다. (p. 504)

 

Ü 자본의 위정자들과 기득권자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 혁명을 억제하는 장치들을 고안해서 마련해 놓았다. 근면을 애써 조장하는 대출제도와 기계적 삶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등

 

□ 콩트는 사회가 최초의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실증적 단계로 옮겨가며 이 단계에서 역사 과정이 생겨나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는 견해를 채택하고 있다. (p. 506)

 

□ 콩트는 사회학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는 역사의 진행이기 때문이다. (p. 507)

 

□ 합리론자의 이론은 물질적인 것을 희생하고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성격상 낙천적이며 단일성을 구하고 실험을 무시하고 반성을 조장한다. 경험적 이론은 물질적인 세계에 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비관주의적이고 세계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고안보다도 실험을 좋아했다. (p. 515)

 

□ 프레게는 순수하게 논리학적인 개념에 의해서 수를 정의하면서 이 과업을 수행했다. 그의 정의는 화이트헤드와 내가 수학원리에서 준 정의와 거의 같다. (p. 521)

 

10장 현대철학

 

19세기 지적 생활의 또 다른 특징은 예술과 과학이 단절되었다는 점 (p. 529)

 

오늘날까지 세계를 전적인 파멸로부터 구조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세계의 지배자들이 끊임없이 무능했다는 점에 있다. (p. 530)

 

□ 그리스인이 전란시대에 저지른 가장 흉악한 범죄 중에 하나는 기껏해야 올리브 나무를 잘라 쓰러뜨리는 정도였다. 우리 시대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p. 532)

 

□ 베르그송은 예술가가 그 어떤 창작 충동에 몰려 행동으로 옮기는 것처럼 자연계에 작용하는 삶의 힘도 마찬가지이다. 진화에 의한 변화는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특징을 지향하는 끈질긴 창작 충동을 통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지능이 본능을 능가하는 동물이 되었다. 인간의 지능은 본능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말았다. 지능이 스스로 자기 개념적인 속박을 세계에 강요하여 왜곡된 세계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을 해방의 힘으로 보는 합리론의 이론에서 매우 먼 거리를 온 것이다. (p. 542)

 

Ü 본능에 충실한 인간, 어떻게 하면 그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당면한 이 많은 제약들을 뚫고 어떻게 본능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과학이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에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점. (p. 552)

 

수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움직였던 지도적 관념은 진보의 관념이었다. (p. 552)

 

Ü 그런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대표를 스스로 추대하는가. 대중의 무지는 그 추대가 진보적 관념이라 생각하게 했는가. 그 관념을 생각하게 한 사회적 시스템은 위정자들의 것인데 위정자들의 궁극의 목적은 대중의 우매함을 통한 사회적 진보를 막아내는 것인가.

 

□ 마르크스주의는 유연성이 결여된 채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유토피아적인 관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19세기의 유물이다. (p. 553)

 

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정부 자체가 각종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 문제에 대한 전반적 태도에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p. 554)

 

전 세기처럼 사물을 장기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동시에 국가의 활동이 이전에는 개인의 것이었던 행동의 자유를 심하게 빼앗게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업 국가는 경제 생활이 복잡해져 여러 가지 사회 불안을 쉽게 느꼈다. 중세에 비하면 현대 사회는 훨씬 안정성이 없다. 따라서 국가를 뒤엎을 수 있는 세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불가피한 변동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중화하기 위해 그 어떤 균형 세력을 제공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경제 문제상의 국가 행동이 따른다. 셋째, 독립적으로 이룬 안정감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국가가 공공 사업을 제공함으로써 이것을 메우고 있다. 이들 변화는 한 날의 정치 조직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그것은 원래 문명 기술에 좌우된다. (p. 558)

 

Ü 여기서 말하는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은 다양성으로 대체될 수 있겠다. 이것은 건강한 것이다. 두 번째에서 얘기한 것은 거대해진 기업에 대한 규제와 국가간의 무역 불균형으로 야기된 보호 무역이 예가 될 수 있겠다.

 

□ 야스퍼는 자아는 자신을 넘으려고 노력하면서 제3의 존재, 즉 이전의 두 별종을 동시에 포함하는 초월적인 자체 존재에 적응시킨다고 했다. (p. 561)

 

□ 경험을 뛰어넘는 곳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p. 567)

 

□ 실증주의 입장의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철학적 사고를 횡설수설이라며 거부한다는 점이다. 검증 가능성 이론 자체가 철학적인 하나의 학설이기 때문이다. (p. 569)

 

□ 우리가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앞에 아무것도 없는 시작을 구한다는 것은 둥근 사각형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일단 이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지한다. 그런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다. (p. 572)

 

Ü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좋다. 그에 대한 호감이 그의 철학을 모두 이해하고 난 다음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이 나를 그에게로 단번에 잡아 끌었다.

 

맺는 말

 

□ 지식의 습득 외에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자기 것이 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한 숙고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p. 575)

 

□ 자연 자체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자연은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명제를 공식화하면서 오류에 빠진다. (p. 577)

 

□ 인간의 또 하나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행동하는 일이다. 인간은 주로 사회적 본성 때문에 윤리적 문제에 직면한다. 과학은 어떻게 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인간에게 가르칠 수 있다. 과학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갑의 목적보다도 오히려 을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p. 578)

 

□ 이웃에게 잔학 행위를 하는 것이 나쁜 이유는 무엇인지, 그 과학적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p. 579)

 

□ 자신의 의견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상관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때 전반적인 윤리적 원리처럼 보인 것이 실은 한 조각의 특별한 항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참다운 윤리적 원리는 특정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 579~580)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보류시키는 자유를 주는 일이다.

관용은 탐구가 왕성하게 되는 사회에서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탐구자를 진리가 이끄는 대로 가게 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위대한 추진자이다. 이 정도까지라면 누구나 여기서 문제가 되어 있는 선에 공헌할 수 있다.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p. 581)

 

 

3. ‘늙은 앙가주망이 이야기하는 지혜(내가 저자라면)

번역이 좋은 책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다. 오타와 부자연스러운 번역으로 인해 이 책의 내용 5할이 나에게 평가절하 되었다. 번역은 중요하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고 충실해야 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가독성과 이해력을 높여주는 데 공헌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형편 없다. 읽는 내내 영어의 원문을 직역한 듯한 투의 우리말에 대한 거북스러움이 러셀의 통찰을 가려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통찰은 날카롭다.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고 현대의 철학과 미술까지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보물이다. 더구나 이런 통사적 철학사에서 이런 깊이 있는 개별 철학자의 사고 개념까지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은 러셀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러셀 이후의 철학사를 공부하고 철학에 관심이 가졌던 사람이라면 그에게 부채의식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는 철학사를 써놓고 집에서 뒹굴 대지 않았다. 내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공동체 아픔에 대한 참여다. 아픔에 대한 치유가 아니라 단지 그는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반전, 평화 시위에 이 늙은 앙가주망은 그곳이 어디든 참여 했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철학자와 철학의 개념들을 통사한다. 그 출발은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와 비트겐슈타인에 까지 이른다. 이 방대한 작업을 기획하는 것 조차 인간으로서 어렵기 짝이 없는 작업이겠거니와 그 내용의 알곡을 보면 이 늙은 학자가 얼마나 공부하는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겠다. 구성은 매우 좋다. 통사적 철학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구성 체계를 하고 있다.

 

, 나는 영국의 경험론이 나오면서부터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난해했고 칸트는 언제나 어려운 개념들만 쏟아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가 가진 철학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조금 알기 쉽게 그리고 대중이 읽어낼 수 있는 용어와 풀이가 있었으면 하는 작은 아쉬움은 남는다. chapter 마다 내어 놓은 제목에 대해서는 그리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내용과 전문성으로 굳이 제목으로 매혹해야 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고 전문적인 분야로 이런 통사적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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