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 조회 수 319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서양의 지혜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사, 1989년
■ 저자에 대하여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
귀족 가문에서 탄생, '고아'라는 이른 시련이 찾아오다.
1872년 5월 18일 웨일스 트렐렉, 앰벌리
자작과 앨더리 가문의 스탠리 남작 2세의 딸 캐서린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앰벌리 경은 총리를 2번 역임하고 러셀 백작 1세가 되었던 존 러셀 경의 셋째 아들이었다. 러셀의 양친에게는 젊은
나이에 비운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1874년 디프테리아로
병사했으며, 18개월 뒤 아버지도 죽었다. 아버지 앰벌리
자작은 철저한 자유사상가였기에 무신론자에게 러셀과 당시 10세였던 형 프랭크의 후견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친족회의결과, 러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두 아들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으며, 결국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는
독실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청교도였으며 엄격한 개인적 양심과 정확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었다.
러셀의 확실한 지식에
대한 동경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섯 살 때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듣고, 땅바닥에 구멍을 파서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나가는가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러한
지식의 대한 열망은 신앙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지만, 수학과 역사,
문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러셀은 일반학교에는
가지 않고, 줄곧 가정교사를 통해 혼자 교육받았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처럼 소년 러셀은 이 고독을 이겨냈다. 이 고독한 체험이 그의
지적인 발달을 돕게 되었다.
2.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 친구와
동반자를 만나며 희망에 넘치다.
1890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형이상학자 J. M. E. 맥태거트를 만나면서 몇 년 동안 관념론자가 되었다. 1894년
윤리학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
같은 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건 피어솔 스미스 작가의 동생이자 진보적 사상을 가진 필라델피아 출신의 퀘이커교도 앨리스와 결혼했다. 다음 2년 동안 미국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 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처음 출간한 책은 정통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쓴 <독일 사회민주주의, 1896)였다. 1914년에 노동당에 가입할 때까지는 자유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기하학의 토대에 관한 소론>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다.
3.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지식인이 되어 옥고를 치르다.
그는 자신이 지닌 확고한 신념과 세계관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글로 담아내어 관심을 지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에게서 천재의 오만함이나 귀족의 도도함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나 글이 경박하거나 얄팍한 것 역시 아니었다. 논리학과 수학기초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저술이자 러셀의 주저 중 하나로 평가되는 <수학의 원리>의 방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시기에도 그는 사회적 문제를 멀리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한 일로 인해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에서도 해고되었으며
1918년에는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수리철학 입문, 1919)을 썼으며 <정신 분석>을 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러셀은 도라 블랙을
만나 1920년 그녀와 함께 중국을 방문했고, 1921년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1920년에는 소련을
방문했고 같은 해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후에 스탈린주의라 불린 많은 측면을 예언·비난한 소련정권에 대한 뚜렷한 비판서였다.
4.
70세, 불행한 경제 환경에서 <서양철학사>를 내다.
1927년에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레그래프 하우스'에서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도라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다. 1931년
형 프랭크가 죽자 러셀은 백작작위를 이어받아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1934년 <자유와 조직>, 1937년에는 <앰벌리 페이퍼스>를 출판했다. 이 2권의 책은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1936년 러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1938~39년 미국에서 강의한
뒤 뉴욕에 있는 시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버트런드 러셀사건'으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5년 동안 강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 가난에서 벗어났으나 1943년 이 계약마저 취소되었다. 이때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서양철학사, 1945)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곧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겸 펠로로 임명되었다. 그 후 15년 동안
러셀은 빠르게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번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5.
세계평화운동의 상징으로 추앙 받다.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하고 미국인 이디스 핀치와 결혼한 1952년경부터 러셀은 점차 기성 권위층의 미움을 산 반면 전세계의
젊은 층과 좌익계열에게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54년
BBC 방송을 통해 '인간의 위험'이란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해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방송강연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러셀-아이슈타인 성명', 동서양 과학자들의 퍼그워시 회의로서, 마침내는 1958년에 시작된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러셀은 핵무장 반대운동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사임하고 더욱 투쟁적인 '10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대규모의 시민불복종 운동을
일으킨다는 공식목표를 내걸었고, 1961년 러셀은 아내와 함께 직접 대규모 연좌농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로 감형되었다.
1963년 <버틀런드 러셀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핵 폐기 운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 조사, 인도.중국 국경 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많은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6. 이 시대 영원한 휴머니스트로 기억되다.
러셀의 인생관은 인간애와 측은한 정으로 넘쳐 있었다. 세계에 초연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귀족으로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움직이며 인생을 추구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서전>을 집필, 전3권을 출간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중과의 소통을 고민했던 거장의 지적 정열과 인류를 향한 애정을 담았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뿐 아니라 과학, 역사, 교육,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7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여 그가 다루지 않은 주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2월 2일 밤, 러셀은 웨일스의 자택에서 인플루엔자 때문에 오랫동안 빛나던 생애를 마감하였다.
"사랑에 대한 갈구(longing for love), 지식에 대한
탐구(search for knowledge), 인간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unbearable pity for suffering of mankind)" -러셀의 좌우명-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 내가 저자라면
버트런트 러셀의 책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때였다.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보았다. 그 책을 읽을 때만해도 그가 철학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사람들의 삶에 행복과 사랑이 가득하기리 바라는 문학가로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지만, 이번에 <서양의 지혜>를 읽고 나서야 비로서 그가 철학자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연애를 시작했던 나는 <행복의 정복>에서 보았던 삶의 지혜들을 편지에 담아서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가 연상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런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한 애정을 가지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이 내 머리 속에 속속 들어왔다. 나에게는 최고의 행복 지침서였다.
<서양의 지혜>는 철학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일까? 이해가 되지 않은 책장들이 많았다. 그나마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는 인물과 장소와 문서의 삽화가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결국, 맨 뒷장에 나오는 '버트런트 러셀의 생애와 사상'을 보고, 비로서 나는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니체의 <즐거운 지식> 또한 그의 생애를 읽고 나서 한결 읽기가 수월해졌듯이 말이다. 다음 번에 꼭 그의 <자서전>을 읽어 보리라.
<서양의 지혜>는 소크라테스이전, 아테네, 헬레니즘, 초기 그리스도교, 스콜라철학, 근대 철학의 융성,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공리주의 이후, 현대철학으로 되어 있다. 이전에 출판한 900쪽 분량의 <서양철학사>에는 관념론적 철학에 비판적인 내용 담은 것에 비하면, 이 책에서는 주관적인 견해를 절제하고, 객관적인 철학 역사서술에 비중을 두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정도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어울릴만한 책이다. 다른 버트런드 러셀의 책을 보더라도 이렇게 흐름이 끊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에게 철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는 탓이라고 생각된다. 김동리 선생님이 어느 문학 강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나라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쓰고 있는데, 단지 이야기는 풀어가는 것이지, 사람들이 공감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철학이 부족하다. 앙꼬없는 진빵을 만들고 있는 느낌이다. 좀 더 철학에 대한 많은 공부가 필요한 시기다.
내가 저자라면, 좀 더 대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철학 책을 만들고 싶다. 각 장 별로 서두에 그 시대의 주류 철학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각 철학자 별로 생애와 사상을 간단히 정리하는 순서로 구성하면 어떨까? 그리고, 철학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세부적인 사상들을 담아가는 순서로 이어간다면 서양 철학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스콜라 철학' 장에서 스콜라 철학에 대한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을 간단히 정리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12 서양 철학은 모두 그리스 철학이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와 우리를 맺어주는
유대를 단절하면서 철학 사상을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12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는
철학사가 전적으로 해설적이어서,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저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설에 어느 정도의 비판을 더해서, 철학상의
논의가 어떻게 나아갔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프롤로그
16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철학을 다루는 방법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23 그리스 비극에서는 강력한 정감과 열정에 뒤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늘 동정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하나의 카타르시스, 즉 정서의 세척이라고 한 말은 옳다. 결국 그리스인의 성격에 두 가지 면, 즉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과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세계를 변혁시킬 수가 있었다.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23 동방에서는 신비적인 요소가 최고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이와 같은 신비적 요소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유는 과학적인 이오니학파(=밀레토스학파)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맑은 심정만으로는,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지적 혁명을 일으킬 수가 없다. 필요한 것은 진리와 미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이다. 오르페우스의 영향은 바로 이런 개념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이 삶의 한 방도였다. 그리스어로 ‘사색’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무엇인가 ‘보고 돌아다닌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헤로도토스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열정적이지만 냉정한 호기심, 즉 탐구에 쏟은 강한 호기심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에게 사상 유례 없는 지위를 부여했던 것이다.
24 이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가장 원시적인 수준에서도 그 어떤 조직이 따르는데, 여기에서 질서의 관념이 나온다.
26 그리스 사상에서 이와 같은 구별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는 것은, 선악의 이원론과, 조화와 부조화의 이원론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매우 생생한 가상과 실재의 이원론이 잇다. 이와 더불어 정신과 물질의 문제가 있고, 자유와 필연의 문제가 있다. 게다가 사물이 하나냐 많으냐, 단일이냐 복합이냐에 대한 우주론적 문제가 있고, 마지막으로 혼돈과 질서, 무한과 유한의 이원론이 있다.
29 대지도 또한 하나의 물이 응결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마치 공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의 물질이 여러 가지 집합상태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32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
38~39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이에 반하여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겉치레뿐이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이라고 보는 관점까지 거의 다다랐다. 이것이야말로 피타고라스 학설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 후 이런 생각이 줄곧 신학은 물론 철학 사상까지도 지배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념에는 오르페우스교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최대의 신은 아폴로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 이 아폴로적 성격이 유럽의 합리주의 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를 구별해 주기 때문이다.
41 석유 램프의 불꽃은 어떤 고정된 대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안에 기름이 올라와서 연료는 불꽃으로 변하고, 그을음은 불꽃에서 생겨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런 교환 과정을 거치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무엇도 동일하지 않다. “자네는 두 번 다시 똑 같은 강물에 뛰어들 수 없다.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44 지혜를 쟁취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사물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공식은 대립물의 조화를 뜻하며, 사람들은 이것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공식을 듣기 전이나 일단 들은 뒤에도 파악할 수가 없다. 만물은 이 공식에 따랄 일어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51 그는 이 물질들을 사물의 ‘뿌리’라고 불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에 이들을 원소라고 했다. 이것은 물, 공기, 불, 흙으로 구성된 유명한 4원소 이론인데, 이는 약 2000년 동안 화학을 지배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자연의 맹위를 이야기할 때 쓰는 일상어에는 이 이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실로 이 이론은 두 개의 상반된 물질, 즉 습기와 건조 및 열기와 냉기의 바탕이 된다.
57 시칠리아 섬에서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의 강력한 페니키아의 도시와 인접해 있었다. 카르타고인들도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그리스 침입에 호응하여 기원전 480년에 이 섬을 유린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시라쿠사의 광대한 자원과 전제 군주 게라의 지휘권은 이 시도를 영원히 좌절 시켰는데, 본토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 대왕에게 정복당할 위험을 영원히 막은 것과 같았다.
기원전 5세기 동안에 아테네인이 코린트를 차차 잠식한 것이 분명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화점이 되었지만, 아테네를 항복시킨 것은 처참한 시라쿠사 전투였다.
59 아폴로의 숭배에는 정화 의식과 결부된 윤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아폴로신은 피톤에 승리할 때의 독기를 씻어야 했고, 이제 신은 피로 더럽혀진 인간들에게도 희망을 약속했다.
64 아낙사고라스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분할된 것이 아니며. 손도끼로 서로 절단한 것도 아니다”고 말하며 “모든 사물에는 ‘누스’이외의 모든 것의 일부가 들어 있고, 일부에는 ‘누스’를 가진 것도 몇 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누스’, 즉 지성이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갈등에 대체되는 적극적 원리이다. 그것은 매우 드물고 미묘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실체로 여격지고 있다. ‘누스’는 섞인 것이 없는 순수한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실체와는 다르다. 사물을 움직이는 것은 ‘누스’이며, ‘누스’를 가지고 잇느냐의 여부에 따라 생물과 무생물로 나뉜다.
67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무리수의 ‘무리’라는 말이, 피타고라스에게는 이성을 빼앗긴, 아니 측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76 화살의 역설이 있다. 어떤 순간에도 날고 있는 화살은 자기와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며, 따라서 그 화살은 정지하고 잇다. 이것은 운동이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잇는 데 반해, 이 앞의 역설은 운동이 언제나 실제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제논은 피타고라스이 불연속량의 이론을 타파하고, 연속 이론의 기출로 세웠다. 이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연속하는 구체 이론을 옹호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80 원자가 영원히 운동을 한다는 생각은 평평한 지표에 안개가 진하게 끼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햇빛 속에 날아다니는 먼지를 관찰하면서 암시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은 우리가 조밀하게 채워진 분자 덩어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실제 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원자론이 단순히 뜻밖의 행운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근대에 와서 돌턴이 원자론을 부활시켰을 때, 그는 이 문제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견해를 잘 알고 있었으며, 화학물질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자신의 관찰을 원자론이 설명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83 궤변론자들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식은 시시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쓸모 잇는 의견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그 어떤 진리가 있다. 실제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성공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정반대이다. 궤변론자들이 견실한 습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자기 성찰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84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는 존재하는 것의 척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이다.” 이와 같이 각자의 의견은 그 자신에게는 진리이며, 서로 다른 의견은 진리에서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궤변론자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85 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부터 철학 일반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면서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관대해 보이는 철학자들을 해롭지 않은 바보, 또는 꿈을 꾸듯 걸어다니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괴짜로 취급하거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적 사고는 기존 습관이나 관습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날 철학자는 전통과 인습을 뒤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과 견해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 비타협자로서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이런 처사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신념이 의심받으면, 불안을 느끼고 증오와 적의를 갖고 반발하게 마련이다.
제2장 아테네
91 우리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곧잘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갑자기 아무데서 멈추어 서고, 때로는 계속해서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겼다. 동시에 그는 몸이 튼튼했다.
91 전쟁 때나 평상시에나 소크라테스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흉한 꼴을 하고 있었고, 몸을 치장하는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고리는 너덜너덜하고, 구겨지고, 늘 맨발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그는 절제했고, 육체에 대한 놀랄 만한 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막상 마시게 되면 동료들이 모두 취해서 쓰러져도 그만은 비틀거리지 않고 마실 수가 있었다.
92 소크라테스는 과학적 사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선’이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눈에 잘 띄는데, 우리는 거기서도 그가 윤리 용어를 정의하는 데 고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르미데스>에서는 주용이란 무엇인가, <리시스>에서는 우정이란 무엇인가, <라케스>에서는 용기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들 의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이들 의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92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알고만 있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원인은 단 한 가지 무지에 있다. 그러므로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선’은 지식이다. ‘선’과 지식의 연관성을 줄곧 그리스 사상의 특징이었다. 기독교 윤리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인데, 이것은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95 결국, 그는 신탁의 뜻을 이해했다. 신만이 현명하며, 삶의 지혜는 쓸모없는 것이며, 자기처럼 자신이 지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혜자인 체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이 때문에 그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신탁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려 애썼다.
97 서양에서 사변적인 추리가 번창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 그림자가 배경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철학사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아마도 고금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실질적이었다. 그들의 가치와 관련해서 말하지 않았던 철학적 문제는 거의 없고, 오늘날 아테네 철학을 무시하면서 독창적인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탐구해야 한다.
98 그러나 이 기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갑자기 꺽이고 말았다. 이 무서운 정치적 음모와 원한은 이 젊은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정당 정치의 틀 안에서는 자신의 독립심과 성실함을 오래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 후 플라톤은 마침내 철학에 헌신하게 된다.
99 올바른 과제는 학생에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습관을 붙이게 해서 모든 문제와 관련된 규범과 기준을 이해 시키는 일이다.
100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이성의 빛에 비추어, 혼자서 사물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일이었다.
100 초기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학생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거의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아카데미에 출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 선생은 노트를 준비하지 않고 강의했다고 한다. 세미나나 토론 그룹에서 학생이 풀도록 문제만을 제시한 것이 상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대화편은 문학적인 색채를 띤 철학서로, 학생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널리 교육을 받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널리 교육을 받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한 번도 교과서를 쓰지 않았고, 항상 자기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세계는 너무 복잡해서 이것을 짜맞추어 미리 생각한 학문적 틀에 끼워넣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1 디온은 플라톤을 시라쿠사로 초청하여 디오니시오스의 기량을 시험하고 그럴 박식한 사람으로 양성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모험에 성공을 거둘 승산은 가장 잘 된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은 해보겠다고 동의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분명히 디온에 대한 우정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아카데미의 평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02~103 실제로 철학적인 저서가 깊이 있기 위해서는 문체가 난해하고 서툴러야 한다는, 거의 전통에 가까운 생각이 여기저기에 깔려 있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되면, 철학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뒤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 시대에 교육받은 아테네인이 대화편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철학적 중요성을 한눈으로 알아봤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보다는 수학을 모르는 아마추어가 미분기하학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수학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대부분이 철학자들이 쓴 난해한 철학서를 읽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플라톤의 저서는 읽을 수 있다.
105 철학자란 진리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미술 수집가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라 할 수 없다. 철학자는 미 자체를 사랑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눈이 깨어 있다.
105 미술 애호가가 의견만을 갖는 대신, 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에는 대상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존재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말대로 무이다. 지식은 고정되고 확실한 것, 즉 오류가 없는 진리이다. 한편 의견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의견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므로 의견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므로 의견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둘 다에 해당된다.
106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함께 해석해서 자기의 ‘이데아’ 또는 ‘형상’의 이론을 만들어 냈는데, 이 이론은 초기의 두 사상가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그리스어의 ‘이데아’는 ‘그림’이나 ‘형상’이라는 뜻이다.
106~107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들고 있다. 철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동굴 안에 잡혀 있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사슬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몸을 돌릴 수가 없다. 그들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들 앞에는 밋밋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들은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이 벽면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와 그들과 불 사이에 있는 물체의 그림자를 본다. 그들에게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 그림자가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한 사람이 족쇄를 벗어던지고 동굴 입구 쪽으로 더듬어간다. 거기서 비로소 그는 햇빛이 현실 세계의 생생한 물체 위에 빛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동굴 안으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의 칙칙한 모습, 즉 단순히 그림자의 세계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햇빛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시야는 그 빛의 영향으로 희미해져서 이번에는 그림자를 보기가 이전보다 더 어렵다. 그는 햇빛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그들에게 제시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가 이전보다도 더 바보처럼 보여 그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우리가 철학을 모른다면, 우리는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림자, 즉 사물의 가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자라면, 이성과 진리라는 햇빛에 비치는 바깥쪽의 물체를 보게 된다. 이것이 실재이다. 우리에게 진리와 아는 힘을 주는 이 빛은 ‘선’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117 그러므로 플라톤까지도 그 정치적 고찰에 어떤 편협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도 보통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자의식적 우월감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문화의 의심받지 않는 탁월성에서 생기는 당연한 생각인지는 결정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126 권위에 관한 문제에서 그의 태도가 모순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회피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타협을 거부했기 대문에 그는 박해를 받고 자유사상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최후는 서양 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파이돈>에 그려져 잇다. 대화편에 나오는 논의는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집중한다.
153 간단하지만, 이것이 삼단논법 이론의 요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식 명제로 이루어진 삼단논법, 즉 ‘~이다’ 대신에 ‘~일지도 모른다’나 ‘~이어야 한다’를 포함하는 진술도 다루었다.
163 공간과 시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는 현대의 관점과 공통된 점이 다분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대상이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서 공간과 시간에 위치와 같은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따라서 공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167 윤리적 문제는 우리가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을 때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목적을 이성적 영혼의 행복에 두고, 이것 또한 이것대로 연속적으로 덕에 의해 움직이는 자주적 이성 활동의 삶을 암시해 준다고 보았다.
175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모방이다. 그의 분류는 우선 음악과 무용과 현대적 의미에서의 시를 한 묶음으로 놓고, 그 밖의 것에 그림과 조각을 분리한다. 모방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가 서로 구별된다.
177 작품이 너무 길면 정신이 둔해지고, 너무 짧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177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카타르시스’를 뜻하는데, 자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 영혼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에는 치료적인 의도가 있다. 이 용어는 의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177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비극 작품의 여러 가지 면을 검토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 플롯이 없으면 연극은 있을 수 없다. 인물은 플롯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인물이 플롯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능한 인물이 플롯 안에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제3장 헬레니즘
189 그는 일개 정복자가 아니라 개척자이기도 했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간곳은 어디에서나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고 그리스 방식으로 경영했다. 이들 그리스적 삶의 중심에서 본래의 그리스나 마케도니아의 식민자들이 그 땅의 사람들과 융합해 갔다. 알렉산더는 아케도니아인에게 아시아 여인과의 결혼을 권고하고, 자기도 주저하지 않고 실천했다. 그는 페르시아 왕녀를 두 사람이나 아내로 삼았다.
191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새로운 도시 중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이면서 전세계의 학자와 저술가가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도 얼마 동안은 대도서관의 사서 주임이었다. 유클리드도 수학을 가르쳤고, 아폴로니오스도 마친가지였고, 아르키메데스도 이곳에서 배웠다.
193 마케도니아 청년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햇볕이 가리지 않게 거시서 물러나 주시오”가 그의 대답이었다. 알렉산더는 뼈저리게 깨달아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197 에피쿠로스에게 최선의 선은 쾌락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선한 삶은 불가능하다. 문제의 쾌락에는 정신적 쾌락은 물론 육체적 쾌락도 들어간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을 관조하는 것이며, 그 어떤 것도 그 이상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삶은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향한다 해도 자유다.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의 관조의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육체적 삶은 대개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신적 쾌락의 유일한 이점이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 서서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데 신중하다.
198 에피쿠로스학파라는 말이 사치스러운 삶의 대명사가 된 것은 에피쿠로스가 같은 시대의 스토아학파나 그 후계자에게서 욕을 많이 얻어 먹었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가릋ㅁ을 심한 유물론적인 관점이라 해서 멸시하고 있었다. 이 점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실제로는 검소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만큼 매우 큰 오해라 할 수 있다.
199 영혼도 일종의 특별한 물질이며, 그 분자는 육체의 구성원자와 섞여 있었다. 감각이란 대상에서 나온 것이 영혼의 원자와 서로 충돌한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죽음이 일어나면, 영혼의 원자는 육체와의 연관을 잃고 산산히 흩어져 원자로 살아남기는 하지만, 이미 감각 능력은 없다.
199 신은 상벌 어느 것도 내리지는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쾌락 중에서도 최고의 ‘선’, 즉 흩어지지 않는 평형 상태에 이르기 위해 사려와 절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200 헬레니즘 시대에 번창한 철학 운동에서 가장 번성한 것은 스토아학파이다. 스토아학파는 아테네의 몇몇 위대한 학파에 비하면 모국 그리스 토양에 그다지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방에서, 나중에는 서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 중에 몇 사람을 끌어들였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키프로스 섬 태생의 페니키아인으로, 그의 이름은 제논이었다.
200~201 스토아학파의 학설은 윤리설로서 고전 시대의 여러 학설과 대비하면, 엄격하기만 하고 약간 특색이 없는 규율이다. 그러나 가르침으로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보다는 널리 신봉되었다. 행동하는 지식을 최고의 선으로 강조하는 플라톤 학설이 아마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203 제1의 재물은 덕으로, 이것은 세계와 하나가 되어 사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세계와 하나다라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의 의지를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융합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207 그리스는 세계의 지적 작업장이었으나, 자유 독립 국가로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한편, 그리스의 문화 전통은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해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서양 문명에 남겼다. 중동은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헬레니즘화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가 그리스 유산의 전수자가 되었다.
208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이 지역의 중요한 강대국은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였다. 둘 다 제1차,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를 3세기 중에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에스파냐도 이들 작전 중에 병합되었다. 2세기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정복되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146년 카르타고 시의 완전한 붕괴로 끝났다. 같은 해에 코린트도 로마군에게 완전히 정복당했다. 이와 같이 폭정만큼이나 가차 없는 파괴행위는 이례적 이어서 당시에도 후세와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그 시대는 급속히 야만 상태로 되돌아갔다.
210 그로부터 불과 100년 후, 로마시는 고트족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과거 문화 유산의 몇 가지는 살아 남았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 정식 국교로 승격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침입자가 개종자가 되어 교회는 어느 정도 그리스 문명의 지식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이와는 다른 운명이었다. 거기에서는 침입 회교도가 자기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그들의 문화를 통해서 그리스의 전통을 서쪽으로 전했다.
210~211 그리스는 그리스대로 국가는 멸망했지만, 문화 영역에서는 로마인 정복자를 정복했다. 최근까지 교육을 받은 유럽인이 프랑스어를 사용한 것과 같이 교육을 받은 로마인은 그리스어로 말했다. 아테네의 아카데미는 로마 귀족의 자제들을 끌어들였다. 키케로도 그곳의 학생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가 모범이 되어 갔는데, 많은 점에서 로마의 성과는 표본으로서의 그리스를 간신히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로마의 철학은 독창적이 사상이 없다는 점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220 그리스인의 실패가 뛰어난 지력에서 생긴 일종의 자만심 때문이었다고 하면, 로마인은 상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런 둔한 정신은 여러 방식 중에서도 제정시대의 기념비적 건축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 정신과 로마 정신의 차이는 그리스의 신전과 후기 로마의 바실리카 회당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의 손에 들어오면, 그리스의 지적 유산도 그다지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 되지 못한다.
220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본질적으로 계몽과 해방의 운동이다. 정신을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스 철학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 수단은 로고스이며, 그 동경은 ‘선’의 형상화에 지식을 추구하려고 한 일이다. 사심을 떠난 탐구 자체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라 여기고, 종교적 신비보다도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선한 삶에 이른다는 것이다. 탐구의 전통과 함께 거기에는 감상적이 아닌 일종의 밝은 인생관이 있다.
220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신선미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들어서고, 약간 자의식적인 스토아주의가 보급되면서 어느 정도 상실되었다. 그런데도 서양 문명의 지적 틀 속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그리스 사상가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4장 초기 그리스도교
223 황제가 한편으로는 신의 대표자로서 교황,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두 권력으로 바뀜에 따라서, 그 밖에도 숨은 이원적 대립 관계가 몇 가지 겉으로 나타났다.
224 서방을 지배하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와 동방의 종교가 섞인 혼합종교를 어느 정도 포함한 유대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교도 신은 백성을 선택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종교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두 종교는 모두 신의 천지 창조에서 시작하여 무엇인가 성스러운 종국으로 나아간다는 같은 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시아는 누구고, 메시아는 무엇을 이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몇 가지 있었다.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앞으로 그들에게 지상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나사렛의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고 있었다.
225 후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는 모두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적인 내세운 관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그리스의 이론은 철학적이고 누구나가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데 반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대한 관념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이 관념은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악인은 지옥의 불로 떨어진다며 그 속에 인과응보의 요소를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225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종족의 지상 운명을 인도하는 존재였다. 그는 질투하는 신이어서 자기 종족이 자기 이외의 신들을 받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26~227 유대인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부터이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돌아간 사람들은 비교적 시시한 신정정치 국가로서 살아 남았다. 알렉산더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아시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의 싸움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그럭저럭 면목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인구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 그들의 종교는 완전히 헬레니즘화 되었다. 따라서 헤브라이어 성서도 그리스로 번역되어 구약성서의 원형인 셉투아긴타가 나왔다.
228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의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 교도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도처럼 적어도 원칙적으로 겸양의 습관을 들이는 것과는 달리, 유대 교도는 전체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거만했다. 이와 같은 점은 고전시대의 그리스인과 흡사했다. 그들은 단호히 자기들의 신 이외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바치라는 예수의 조언은 유대인의 이런 고비의 전형적인 한 예이다. 언뜻 보면 타협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신과 황제의 동일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229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 때와 마찬가지로, 정통 신앙은 한층 엄격해졌다. 1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전적으로 서로 다른 대립 종교로 대치하게 되었다. 서방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 배척 감정을 무섭게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유대인은 그때부터 사회의 변두리에 살면서 19세기 해방에 이를 때까지 박해와 착취를 당했다.
230 그리스도교는 신자 한 사람이 자진해서 신도수를 늘리지 않았다면, 비정통족 유대인의 한 종파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이자 그리스도 교도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이런 외적 장애를 제거하여 그리스도교를 누구나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23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과 가톨릭교의 신학과 형이상학에 사고를 집중했다.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의 가톨릭교의 신의 신학적 뼈대는 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개혁된 종교의 지도원리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다. 루터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 사제였다.
235 황제가 이교도 편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움직임을 막기 위해, 암브로시우스는 펜을 들었다. 황제는 신을 섬길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시민이 병사로서 황제를 섬길 의무가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황제에게 상기시키려고 했다. 넌지시 하는 말이었지만 이것은 신의 것은 신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예수의 요망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었다.
238 죄의식은 구약성서 초기에는 국민적 결함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차차 개인의 오점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러한 역점의 변화는 중대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일이 있는 사람은 개개의 그리스도 교도였다. 개인적인 면을 강조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로테스탄스 신학의 선구자다.
23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중한 일은 주로 신학에 관한 것이었다. 철학 문제에 관계되어 있을 때도, 그의 목적은 무엇보아도 성서의 가르침과 플라톤학파의 철학적 유산을 화해시키는 데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호교론적 전통의 선구자다. 그런데도 그의 철학적 사고는 그것대로 흥미있으며, 그가 치밀한 사상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241 그리스인의 관점은 당연히 범신으로 끝난다. 이 범신론에 입각하면, 신은 세계다. 이와 같은 사상의 경향은 어느 시대에서나 신비주의적 편향이 강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 견해를 가진 가장 유명한 대표적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다.
241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의 창조주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 세상 바깥쪽에 있는 신이다. 이 신은 시간을 초월한 영혼으로 인과율도 역사적 발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을 때, 세계와 함께 시간도 창조했다. 우리는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24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세 겹의 현재이다. 현재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현재는 진실로 있는 오직 하나뿐이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서 살아 있고, 미래는 현재의 기대로서 살아 있다. 이 이론에는 나름대로의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 성격을 인간의 정신적 경험의 일부로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창조된 존재로서 정신적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244 보에티우스는 선하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을 따른다. 그의 윤리학에 대한 가르침은 대체로 스토아적이고, 그의 형이상학은 곧장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각 구절의 어조에는 범신론적인 점이 있고, 따라서 그는 악을 비현실로 보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신은 선한 성질과 동일시되고, 그 어떤 악도 저지르지 않으며, 신은 전능하므로 악은 틀림없이 공허하다.
245 해답은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이중적이다. 인간이 전통의 소산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선 사람들은 그가 자랄 때의 주위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나중에 그들의 생활 방식은 의식적으로나 맹종적으로 충실하게 지켜온 이 전통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다. 한편, 전통은 이런 식으로 시간에 묶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방식을 몸에 지니고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말하자면 표면 아래에서 이글거리다 새로운 지지를 얻으면 다시 바람을 타서 타오르는 것이다.
249 유스티니우스는 충실한 정통파 신앙인이었다. 그의 치세 초기인 529년, 그는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폐쇄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것은 아카데미가 고대 전통의 마지막 본거지로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아카데미의 가르침은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의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532년, 콘스탄티노스플의 성소피아 사원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의 손에 들어갈 때까지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었다.
254 로마 가톨릭교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그레고리우스는 불굴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마음이 약간 좁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제국이 지나치는 면이 있어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합치하거나, 이에 반대하면 위태롭다고 여겨지면 이를 눈감아주었다.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사람에 비하면, 그는 허울 좋은 기회주의자였다.
제5장 스콜라 철학
257 철학이 교회와 실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고찰하고 있는 시대에, 교황권과 세속의 권력이 나오게 된 그 주된 발전 추세를 대충 그려볼 필요가 있다. 교황이 서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정치 상황이 진공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257 성직자들은 학문의 흔적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특권 집단이 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다툼 끝에, 유럽은 비교적 안정된 시대로 들어갔으며, 이때 성직자들이 학교를 세워 이를 경영했다. 스콜라 철학은 르네상스까지 아무런 경쟁 상대가 없었다.
264~265 요하네스의 실재론은 그의 철학서 <자연의 구분에 대해서>분명히 나와 있다. 그는 사물이 창조하느냐 아니냐, 또는 창조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연’의 사중적 구별을 인정한다. 첫째는 창조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이것은 분명히 신이다. 둘째는 창조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이 항목 아래에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의미로 이데아가 있고, 이것은 특수한 것을 창조하고 신에 의해 창조되며, 특수한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 셋째는 공간과 시간에 있는 사물로, 창조되지만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창조하지 않고 창조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원의 한 바퀴 돌아 만물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로서의 신으로 되돌아 간다. 이런 뜻에서, 신은 자신의 목적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265 그의 삼위 일체론은, 플로티노스와 다르지 않다. 신의 존재는 사물의 존재에 나타나며, 신의 지혜는 사물의 질서에 나타나고 신의 생명은 사물의 운동에 나타난다. 이들은 저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해당된다. 이데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데아는 ‘로고스’를 만들어 성령이라는 매개를 통해 특수한 것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독립된 물적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신은 무에서 사물을 만들어내며, 모든 인식을 초월한다. 따라서 신은 그 어떤 사물도 아닌 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267 그러나 일단 권위의 맛을 알면, 일반적으로 좀처럼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유리한 지위에 선 사람들에게 지침이 될 강력하고 유력한 도덕적 전통이 없으면, 그들은 딴 생각을 하며 남의 돈을 착복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돈을 받고 교회의 공직을 주는 일은 이와 같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재물과 권력을 주는 근원이 되었다.
271 마호메트가 선언한 새로운 종교는 몇 가지 점에서 신약 성서에 첨가된 신비주의를 떨쳐 버린 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일신교로 돌아갔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그도 우상을 금했으나, 그들과 달리 포도주의 사용까지 금했다. 이슬람교의 금지령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272 마호메트의 사위 아리가 661년에 죽은 이후에 신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시아파는 아리에 충성을 바치는 소수파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은 한 사람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은 이 소수파에 속하며, 그들의 영향력에 의해 왕조도 아바스 왕조에 밀려 대체되고, 이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273 이슬람교 사상가들은 이들 양쪽 자료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논리학과 철학을 고대인의 과학적 유산과 함께 배웠다. 페르시아 최대의 이슬람교 철학자는 아비케나였다.
282 그때까지 성직자가 철학적 영감을 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찾아냈다고 한다면,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개가를 올린 세기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위에 확립하려고 했다.
284 한편, <신학대전>의 위대한 체계는 지적 노력의 기념비이다. 서로 다른 견지가 언제나 분명하고 공정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을 볼 때 토마스는 철저하고 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점은 스승을 포함해서 그 어떤 선배한테도 지지 않을 정도이다. 같은 시대 사람들은 그를 ‘천사 같은 박사’라고 불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구자이자 지도자이기도 했다.
287 아퀴나스에게 신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다. 유한한 사물은 단지 우연히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의존하며, 이 어떤 것이 바로 신이다. 스콜라 철학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본질과 존재라는 말로 표현된다. 사물의 본질이란 그것의 성질, 즉 사물의 본성이다. 존재는 사물이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명사이다. 이들 명사는 본질도 존재도 독립적일 수 없다는 뜻에서 추상적이다.
287 우리는 사물이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하는 일반적인 경험의 사실에서 시작하지만, 이것은 사물의 존재가 전문적인 뜻에서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런 사물은 때때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논증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사물이 자기 존재를 자신에게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신이다.
288 아퀴나스의 본질과 존재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과 현실성의 이론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본질이란 전적으로 가능한 것이며, 존재란 전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한한 사물에는 언제나 이들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런 활동은 유한한 대상이 어떤 것이 되었는지 간에 다른 그 무엇인가로부터 나와야 한다.
292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쓰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번역은 불확실했고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중요하지만, 그 밖에도 똑같이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특히 수학을 몰랐다.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의존하기 보다 실험에 의존해야 한다. 베이컨은 스콜라 철학의 변증법적 연역 방법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론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설득시키려면 실험이라는 시련을 견뎌야 한다.
298 아마도 가장 위대한 중세의 종합적인 사고는 단테의 저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신곡>을 썼을 당시, 중세는 실제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침내 전성기를 지나친 하나의 세계를 개관해 볼 수 있다.
299 단테는 드물게 서유럽 문학에서 위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그의 자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를 만인의 문학적 수단으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서 처음으로 천차만별인 지방 사투리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이 역할을 해 온 것 라틴어뿐이었지만, 이제 이탈리아어가 문예 작품의 수단이 되었다.
307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물려받은 개인의 무거운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들도 지상의 삶이 신들의 마음에 따라서 짓눌릴 수도 잇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범한 나쁜 짓에 대한 정당한 운명이라고는 절대로 볼 수 없었다. 결국 그리스인에게는 속죄나 구원과 같은 문제는 전혀 없었다.
310 가능한 한 종교의 교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스콜라 철학은 가끔 비상한 창의성과 예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런 과업이 거둔 원대한 결과는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이어받아 후세에게 전해 준 언어적 도구를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이 이룩한 과업 가운데 아마도 가장 귀중한 일일 것이다. 반면 스콜라 철학의 결함은 경험적 탐구에 충분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312 르네상스가 직접적으로 인생관 전반에 영향을 준 데 반해, 휴머니즘 운동은 사상가와 학자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제6장 근대철학의 융성
319 이탈리아에는 지나간 시대의 상징을 직접 만져볼 수 잇는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은 알프스 이북 지방에서 일어난 운동보다 더 넓은 발판을 얻을 수가 있었다.
320 르네상스 운동의 선두주자는 피렌체이다. 아테네 이외의 그 어느 곳도 이 정도로 균형을 이룬 예술가나 사상가를 낳은 곳은 없었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그 중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피렌체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출현한 갈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단테의 추방을 초래한 피렌체의 내분은 마침내 메디치가의 지배로 끝났다.
323 마키아벨리를 올바로 평가하자면, 그는 악행을 하나의 원리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선악을 넘은 것으로, 핵물리학자의 연구와 같다. 권력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무자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선하냐 악하냐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며, 마키아벨리에게는 흥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331 그들은 모두 하루 6시간의 노동을 하고, 반드시 8시에 자고, 아침 4시에 일어난다. 학자의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지적인 일에 집중하고,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337 이탈리아의 인본주의자들의 사상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수학적 전통이 새삼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세계의 수적 구조가 다시 강조되어, 여태까지 이 구조의 존재를 무색하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과 대치하게 되었다.
343 물체를 계속 밀지 않으면 정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옳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이리저리 밀 수 잇는 물체에서 관찰할 수 있다. 마찬가지 이야기가 별에도 해당될 것이라고 잘못 추론되었지만, 별은 실제로 우리가 하늘로 밀어올려 움직이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틀림없이 무엇인가 다른 방법으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여겼다.
346 평화를 위해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여 이후부터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모든 생각을 버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명령대로 했지만,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고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의 철회는 물론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교재판소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과학적 연구를 교묘하게 뭉개왔다.
354 이성의 기능은 기하학처럼 논증의 성격을 띤다. 우리는 정의를 세울 때, 자기 모순에 빠진 관념을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정의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은 이런 뜻에서 실천을 통해서 획득한 그 무엇이며, 그것은 데카르트가 주장하듯 타고난 것은 아니다. 이어 그는 감정을 운동으로 설명한다. 감정의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은 평등하며, 저마다 남을 희생시켜 자기를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만인과 만인이 겨루는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고 홉스는 생각한다.
355~356 르네상스 이후에 사상가의 관심을 모은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방법의 중요성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베이컨과 홉스에 관해서 언급한 대로다. 르네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영향을 받고 이를 융합시켜 고대인과 같은 장중한 새로운 철학 체계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그는 마땅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356 그해 겨울, 그는 자기 철학을 움직일 주요 관념 몇 가지를 찾아냈다. 이 경험은, <방법서설>에 기술되어 있다. 어느 날 평소보다 더 추워져서 데카르트는 어느 오두막으로 들어가, 타일을 바른 아궁이 옆에 앉았다. 적당히 몸이 따뜻해졌을 때 그는 명상을 시작했는데, 그날 그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분명히 마음 속에 떠올렸다.
357이 스칸디나비아의 원수는 참다운 르네상스인이었다. 의지가 견고하고 활력이 왕성한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아침 5시부터 철학을 가르치라고 일렀다. 스웨덴의 겨울이 한창 일 때, 한밤중의 이 비철학적 기상 시간을 데카르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병을 얻어, 1650년 2월에 죽었다.
359 오감의 증언은 불확실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수학은 의문의 여지는 없으나, 역시 수학까지도 의심해야 한다. 신이 우리를 일관되게 헤매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의심하는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여기에 바로 형이상학의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고 데카르는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하나의 생각하는 존재며, 자연적 실체와은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육체와도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360 외연과 운동이라는, 오관과 관계 없는 일반 관념은 데카르트에게는 타고난 관념이며, 순수 지식은 근본적으로 이런 성질의 것이다. 감관지각은 색채, 미각, 촉각과 같은 이차적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실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초 조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상이라는 유명한 예를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것은 외연으로, 이것이야말로 정신이 인식하는 타고난 관념이다.
365 1673년, 파라타인 선제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의 지위를 스피노자에게 주려고 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 영예를 거절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나는 젊은 사람들의 교육에 전념하게 되면 철학 연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기존 종교를 뒤집어엎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계 내에서 철학을 할 자유를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새삼스럽게 출세할 생각은 없고, 오직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어서 강의를 사양하니, 이를 위해 현재대로 있게 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69 일단 적절한 관념을 가지면, 우리는 틀림없이 사물의 질서와 관계를 알게 되므로, 이 질서와 관계는 관념의 질서 및 관계와 같다. 정신의 본성은 사물을 우발적으로 보지 않고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일이 잘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신과, 또는 같은 말이지만 세계와 하나가 된다. 이 전후 관계에서, “정신의 본성은 어떤 무시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지각한다”라는 저 유명한 말은 스피노자가 만든 것이다. 실제 이것은 정신이 사물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사실의 한 결과다.
370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이 스피노자도 무지야말로 모든 악의 최대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지식이야말로 우주의 보다 큰 이해라는 뜻에서, 현명하고 적절한 행동에 이바지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376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현미경 덕분에 새로운 발견이 축적되어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레벤후크는 정자를 발견했고, 한 방울의 물에 미생물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일상 세계보다 규모가 작은, 말하자면 하나의 전 세계였다. 이와 같은 고찰은 단자를 외연을 가지지 않는 궁극의 형이상학적인 영혼이라고 보는 관념과 통한다.
383 비코는 인간이 만드는 역사에서 가장 큰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역사가가 역사 과정의 일반 법칙을 발견하여, 왜 사물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나타났고, 예견대로 이어질 것인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코는 모두 세부적인 것이 기계적으로 예언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대체적인 윤곽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문제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고, 조수의 간만처럼 인간의 운명도 순환한다고 본다. 순환 이론은 우리도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료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코는 역사라는 작품의 창작자이자 연기자이기도 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역사 반복의 모습을 구하여, 이들 낡은 관념에 새로운 견해를 부여하고 있다.
제7장 영국 경험론
395 그런 뜻에서 정신은 한 장의 백지와 같다. 여기에 정신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경험이다. 이들 내용을, 로크는 매우 넓은 뜻의 말을 빌려 관념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관념이 그 대상에 따라서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먼저, 우리의 오감을 통한 외계의 관찰에서 오는 감각의 관념이 있다. 도 하나는 정신이 자기를 관찰할 때 생기는 반성의 관념이다.
399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있다고 그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다시 자연법의 원리가 배후에 아른거린다. 이런 원리에서지 않으면, 행동의 옳고 그름은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법부라는 제3의 권력이 해야 할 독특한 역할이 나온다.
401 독립선언문 중 “우리는 이들 진리를 자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구절에는 원래 제퍼슨이 초안에서 사용한 ‘신성하고 부정할 수 없는’이란 어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랭클린이 이를 ‘자명한’으로 대체한 것도, 로크의 철학적 언어를 흉내낸 것이다.
410 <인간 지식의 원리>의 서문에서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까지 철학자를 재미있게 만들고, 지식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은 어려움 중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대부분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처음에 먼지를 일으켰으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다. “
제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433 낭만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이다. 그는 아마도 정치 이론과 교육에 관한 저서를 제외하면, 엄밀한 뜻에서 철학자라고 할 수 없다. 저술 활동과 폭넓은 문학 활동을 통해서, 그는 후기 낭만주의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435 1762년, 교육론 <에밀>과 그의 정치 이론이 담긴 <사회 계약론>이 세상에 나왔다. 둘 다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에밀>은 자연 종교를 설명한 방법이 모든 종교 단체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었고, <사회계약론>은 민주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루소는 우선 당시 프러시아령이던 뉴사텔로 피난하고,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서 흄을 만났고, 조지 3세로부터 연금을 받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모든 사람과 다투어 피해망상이 심해졌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 빈곤함과 비참한 상황 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438 어떤 뜻에서 우리는 칸트 철학이 한편으로는 영국 경험론의 극단적인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적 합리론의 고유한 원리 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440 칸트는 명제를 서로 구별하는 방법과 함께 다른 분류 기준을 도입한다. 원칙적으로 경험과 무관한 지식을, 그는 ‘아프리오리(연역명제)’라고 부른다. 나중에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포스테리오리(귀납명제)’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이들 두 분류가 서로 교차한다는 것이다.
449 이 연설에서 독일 내셔널리즘은 약간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피히테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인격을 갖는 일과 독일 사람이 되는 것은 틀림없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459 변증법적 단계에 세 단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 하나의 진술이 있고, 다음에 이것이 반대 진술의 대립을 받아, 마지막에 이 두 개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의 복합체가 된다. 이를테면, 금은 귀중하다는 정립을 주장했다고 하자. 이에 대해 금은 귀중하지 않다는 반정립이 대항했다고 하자. 그때 금의 가치는 상황 여하에 따라 바뀐다고 하는 종합에 아마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우연히 옥스퍼드 거리에 있고, 거기에 당신에게서 금을 받고 그 대가로 샌드위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금은 귀중하다. 그러나 금을 한 봉지 갖고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어 물이 필요하다면, 그때 금은 귀중하지 않다. 이와 같이 부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459 여기에서 노점은 종합 명제가 새로운 명제가 되어, 똑 같은 변증법적 과정이 다시 시작되고, 우리가 전 우주를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이 과정이 계속된다. 어떤 것의 완전한 의미는 그 모든 가능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즉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체적으로 바로볼 때 그 완전환 의미가 드러난다.
462 변증법에서 나오는 또 다른 독특한 편견은 헤겔의 ‘3’이 라는 숫자에 대한 편애이다. 변증법이 정립과 반정립과 종합이라고 하는 삼단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것이 3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무엇이든지 나눌 필요가 있을 경우, 헤겔은 그것을 셋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동양 세계, 그리스 세계 및 로마 세계, 마지막으로 게르만 세계를 인정한다. 그 밖의 것은 전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473 쇼펜하우어는 합리론 체계의 낙관론 대신에, 행복이 깃들 수 없는 아주 어두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성 또한 그에게는 악한 것이었다. 생식은 단순히 고통의 희생자를 새로 낳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여자 혐오증은 이 견해와 관련된다. 그는 이런 점에서 여자의 역할이 남자의 역할보다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473 칸트적 인식론이 이와 같이 비관주의적이 견해와 결부될만한 논리적 이유는 하나도 없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은 기질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행복은 손에 닿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말년을 침울하게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저서는 인정을 받고 재정 사정도 조금 좋아졌다. 그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갑자기 전보다도 명랑해졌다.
476 니체가 비극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 얻은 것은 비극적 영웅이라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그는 비극 속에서 정감의 대행적인 정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본다. 쇼펜하우어가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데 반해, 니체는 낙천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당연히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76 그에 의하면, 자유인은 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인간형이다. 노예 도덕의 진부한 실례를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들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내세에서의 보다 좋은 삶을 향한 희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관주의적이고, 온유함이나 동정과 같은 노예의 냄새가 나는 덕목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9장 공리주의 이후
487 벤담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은 자기에게 가능한 최대의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최대의 행복은 심리학과 결부된다. 여기에서 행복은 쾌락과 같은 뜻을 갖는다. 법의 기능은 누구나 자기의 최대 쾌락을 구할 때 다른 사람의 그것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보증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491 밀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사실상 쾌락이라는 공리주의의 원리를 지지하는 논의를 진행시키려고 할 때,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대상이 보인다는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소리가 들리는 증거는 사람들이 이것을 듣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밖의 경험에 대한 근원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바람직하다는 증거로 들 수 잇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차이를 감추는, 언어적인 유사성에 입각한 억지다.
502 마르크주의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으면, 진보 편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시의 방문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영예로운 말은 ‘반동’이라는 두 글자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당신이 뒤로 돌아서서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의 과정은, 이윽고 당신도 배제될 몸이 라는 것을 보증한다. 진보가 최후의 승리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이것은 정통 신앙을 신봉하지 않는 요소를 폭력에 호소해서 이를 제거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이 점에서 마르크주의의 정치 철학에는 강한 메시아적 경향이 있다. 오랜 옛날, 하나의 신조를 수립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우리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적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다.
511 지니란 당신이 자기 진술로 실천할 수 잇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내가 하나의 화학 물질에 대해 어떤 진술을 했다고 하면, 그때 이 진술의 중요성은 실험하고 평가할 수 있는 물질의 모든 속성에 의해 높아진다. 이것이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퍼스의 목적인 듯하다.
516 제임스는 행복에만 이바지한다면 사람은 신앙을 고르는 자유가 있다고 인정하는 점으로 보아, 이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아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신앙의 경우는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종교인이 이런 방식으로 신앙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종교적 신앙을 갖는 것은, 이들 신앙에 의해서 만족이 생긴다고 그가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행복한 것은 신앙 때문이다.
제10장 현대 철학
528 한때 한 사람이 몇 가지 학문을 습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떤 사람이든지 한 분야에서도 철저하게 파악하기가 더욱더 곤란해졌다. 지적 연구는 전문화되고 그 구분이 한층 좁아졌기 때문에, 현대에는 언어의 혼란이 생겼다.
537 브래들리는 이성적인 사고와 그 범주 아래에서, 노출된 감정이나 경험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우리가 실재를 운운할 수 있는 것은 이 단계에서 이다. 사고는 항상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왜곡한다. 그것은 단순한 가상을 낳는다. 그 까닭은 사고가 실재한 것에 분류나 관련의 다른 틀을 강요하여 실재를 왜곡한다. 이와 같이 브래들리는 사고작용의 과정에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가상과 실재>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다.
542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지능이 본능을 능가하는 동물이 되었다. 베르그송은 분명히 루소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약간 불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지능은 본능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말았다. 지능이 스스로 자기 개념적인 속박을 세계에 강요하여, 왜곡된 세계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을 해방의 힘으로 보는 합리론의 이론에서 매우 먼 거리를 온 것이다.
546 꿈을 꾸고 있다는 것과 눈을 떠 의식이 있다는 것에 대한 구별은 전자가 일종의 자유와 공상을 인정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일단 눈을 뜬 후의 생활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엄격한 현실과 맞설 수는 없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의 자유는 결국 실질적이기보다는 표면적이다. 이것은 꿈에 대한 어떤 일반이론의 결과여야 한다. 프로이트의 저서에서 전반적인 가설에 따르면, 꿈 속에5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평소 생활에서 억압된 희망이나 욕망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546~547 꿈을 꾸는 사람은 직접 경험에 근거를 갖는 각양각색의 요소와, 그날의 희망뿐만 아니라, 지나간 어렸을 적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희망을 자유롭게 섞어서 재건한다는 것만을 지적하면 충분하다. 해석이라는 과제는 꿈의 진정한 뜻을 푸는 일이다. 여기에는 억압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상징적인 인식이 따르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재미없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이거나, 그다지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이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551 실재물과 순수한 접촉에 대해서 이것은 내면으로부터 안다는 것, 즉 아는 사람과 그 대상이 서로 녹아서 단 하나의 실재물로 합쳐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스피노자를 생각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도 실제로 모든 명제가 결국, 보편적 체계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히 한 형태의 체계적 관념론이다. 단, 그것은 듀이 철학의 관렴론조의 성격과는 같다고 할 수 없다. 듀이의 전체 개념이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 화이트 헤드의 관념론은 후기 셸링의 유기적 관념과 공통점이 많다.
557 마찬가지로 수송 수단도 19세기에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났다. 여행 양식은 철도가 생길 때까지 로마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인간은 이카로스의 전설을 실재의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과 100년 전(1860년경)에는 80일 만에 지구를 일주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80시간 만에 일주할 수 있게 되었다.
561 야스퍼스의 존재 이론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 가지 관념을 비교하게 된다. 최저의 수준에는 단지 존재하고 잇는 객관적 세계가 있다. 그 존재는 현존재로, 객관적으로 바깥에서 파악된 것이다. 그것은 과학 분야의 모든 면을 포괄한다.
562 야스퍼스에게 철학은 초월적인 종류의 존재, 또는 자체 존재에 속하나.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란 개인이 초월하려고 할 때의 노력이다. 개인의 도덕적 삶의 경우, 이것은 개인적 실존에서 작용한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자유의 감정을 경험한다. 자유는 합리적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합리적 설명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가 어떤 기분으로 나타난 것을 인정하는데 만족해야 한다. 야스퍼스가 키에르케고르로부터 빌린 의견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라고 느껴도 거기에는 어떤 근심하는 기분이나 공포의 기분이 따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현존재의 단계가 이성에 지배되는 데 반해, 자아 존재는 기분에 지배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565 특수한 인생관을 바꾸어 하나의 존재론적 이론으로 전환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합리론 진영에 속하든 경험론 진영에 속하든, 전통적 철학자에게는 다소 색다르게 보인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철학적 교과서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573 다라서 각종 언어의 유희를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용을 통해 그것을 사용할 때의 말뜻을 터득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의 ‘문법’이나 ‘논리’를 배운다고 한다.
맺는말
580 내가 말하고 있는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확실히 구별된 지식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소크라테스의 견해에서는 지식이 선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는 이 이론을 너무나도 합리론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이 하나 잇다. 사람이 총체적으로 알고 잇는 것이 무한히 작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실로 거리낌없이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결국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정한 탐구야말로 선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52 | # 27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정민 [1] | 샐리올리브 | 2012.11.05 | 3136 |
3451 |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정민- | 장재용 | 2012.11.05 | 4377 |
3450 | #27_다산의 지식경영법 정민 | 서연 | 2012.11.05 | 2704 |
3449 | #27. 다산선생 지식경영법_정민 | 한젤리타 | 2012.11.04 | 2984 |
3448 | 다선선생 지식경영법_ 정민 | 레몬 | 2012.11.04 | 3155 |
3447 | 서양의 지혜 철학이란 무엇인가-러셀 [1] | 2012.10.29 | 3368 | |
3446 | 서양의 지혜 - 버트런드 러셀 [9] | 학이시습 | 2012.10.29 | 6209 |
3445 | 서양의 지혜 - 버트런트 러셀/ 정광섭 옮김 [1] | 세린 | 2012.10.29 | 3092 |
3444 | #26 서양의 지혜 B.A.W.러셀 [1] | 샐리올리브 | 2012.10.29 | 2923 |
3443 | 서양의 지혜 - 버트런드 러셀 [2] | 콩두 | 2012.10.29 | 4074 |
» | #26. 서양의 지혜_버트런드 러셀 [1] | 한젤리타 | 2012.10.29 | 3196 |
3441 | 서양의 지혜 - 버트런드 러셀 [1] | 레몬 | 2012.10.29 | 3727 |
3440 | 서양의 지혜 -버트런드 러셀- [1] | 장재용 | 2012.10.27 | 3639 |
3439 | 즐거운 지식 - 니체 | 콩두 | 2012.10.22 | 4076 |
3438 | #25_즐거운 지식 프리드리히 니체 | 서연 | 2012.10.22 | 3233 |
3437 | 즐거운 지식 - 니체 [10] | 학이시습 | 2012.10.22 | 8726 |
3436 | 즐거운 지식 -니체- | 장재용 | 2012.10.22 | 3452 |
3435 | #25 니체 - 즐거운 지식 [1] [1] | 샐리올리브 | 2012.10.22 | 3161 |
3434 | 즐거운 지식 - 프리드리히 니체 [7] | 세린 | 2012.10.22 | 4773 |
3433 | 즐거운 지식-니체 | 2012.10.22 | 4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