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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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중/하)
-.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출판사, 2004년
■ 저자에 대하여 - 박지원
1. 명문 양반집에서
태어나다(1737년~1751년)
연암은 1737년(영조13년) 음력 2월 5일 한양 도성의 서쪽 반송방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년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한양 서부 11개 방(坊) 중의 하나인 반송방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속하는 지역이다. 연암의 집안은 당대 명문 양반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에 속했다. 어렸을 때부터 경제에 밝고 똑똑하여 할아버지 박필균(연암이 다섯살
때부터 스물두살 때까지 경기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예조
참판 등의 요직을 역임함)의 사랑을 받음. 그러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의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글공부를 하지 못함.
2. 이른 결혼과 학업에의
정진(1752년~1758년)
열여섯 살 때인 1752년 전주(全州) 이씨와 결혼한 연암은 장인 이보천과 그 아우인 이양천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학업 정진했다. 차숙 이양천은 문과 급제 후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호를 영목당이라
하였다. 그는 한시와 산문 창작에 뛰어나 주로 문학 면에서 연암을 지도했으데, 그에게서 배운 <사기>는
연암의 작품 세계에 특히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연암은 스무 살 무렵부터 같은 명문가 자제인 김이소, 이희천, 황승원 등과 함께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했다. 단릉처사 이윤영의 집에서 <주역>을 배우기도 했다.
3. 청년시절의 번민과
소설창작(1759년~1769년)
연암은 스무 살 무렵부터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 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했지만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광문전후>에 의하면 열여덟에 병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밤새워
가며 머슴부터 기인까지, 여러부류의 사람에게 시중의 이야기를 즐겨들었으며 이 이야기들이 뒷날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소설 창작을 통해 연암은 양반 사회의 우정의 도의가 사라진 현실을 개탄하고, 하층 민중과의 사귐에서 도리어 참된 우정을 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초기 소설들은 <마장전>과 <광문자전>의 떠돌이 거지들, <예덕선생전>의 똥 치는 인부, <민옹전>의 한미한 무반, <김신선전>의 불우한 중인들과 같이 주로 이름 없는 민중을
주인공격으로 내세우고 있다.
4. 과거를 포기, 은둔하며 북학파를 형성하다(1770년~1776년)
1770년 (영조 46년) 그는 소과 초시에 응시하여 초장과 종장 두 번의 시험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을뿐더러, 영조의 특명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크게 칭찬까지 받았다. 이러한 그가 이듬해의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크게 칭찬까지 받았다. 이듬해
소과 복시에는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응시하기는 했으나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나와 버렸으며, 그해 이후로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1772년 1773년 사이에 연암은
일단 처자를 경기도 광주에 있던 장인의 시골집으로 보낸 뒤 혼자 지내기로 했다. 당시 연암이 거처하던
집은 한양 중부 전동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 시절에 연암은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친밀히 교제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들은 당파나 신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서로 진정한 우정을 추구했으며, 문학
창작뿐 아니라 음악 연주와 감상, 서화와 골동품 애호 등 폭넓은 예술적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北學)을 지향한 데
있었다.
5. 대망의 중국여행과 <열하일기>을 저술하다.
(1777년~1785년)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인 정조가 즉위하자, 평소 연암을 미워한 홍국영
일파가 실력자로 부상하여 연암은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 연암 골짜기로 피신하였다. 그해 겨울 친구
유언호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여 연암을 물심양면으로 크게 도와주었다. 1780년 (정조4년)홍국영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 때 마침 팔촌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된 덕분에, 연암은
대망하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해 음력 5월
조정에서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박명원이 인솔하는 특별 사행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연암은 정사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여행하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었다.
6. 드디어 벼슬길에
나서다. (1786년~1790년)
1786년 연암은 음보로 선공감 감역(종9품)에 임명되어, 나이
쉰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는 벗 유언호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이라고 한다. 1789년 그는 평시서 주부(종6품)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의금부 도사로 전보되었다가 그해에 다시 제릉
영(종5품)으로
전임되었고,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종5품)으로 전보되었다. 1787년
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연암과 동갑으로 평소 부인 이씨의 부덕(婦德)을 존경했던 연암은
부인이 사망한 뒤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냈다. 같은 해 7월에는
형님 박희원이 별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맏며느라 덕수 이씨와 시집간 맏딸이 죽었다. 부인에 이어 맏며느리마저 사망하여 집안 살림을 맡길 데가 없었으므로, 주위에서
재혼을 권했으나 연암은 이를 마다하였다.
7. 안의(安義) 현감이 되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다. (1791년~1797년)
1791년(정조15년)음력 12월 연암은
경상도 안의(安義) 현감에 임명되었다. 안의에 부임한
즉시 연암은 엄정한 판결로 송사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으며, 관아에까지 침범하던 도적을 퇴치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녹봉을 털어 흉년에 굶주린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에도 힘을 다했다.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를 읽어 보고는 직각 남공철을 불러 <열하일기>의 문체를 비판하고 속죄하는 뜻에서 연암에게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안의 고을을 계속 다스리면서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으며, 1797년 면천 군수(종4품)에 부임하여 순정한 글을 지으라는 정조 임금의 명에 부응하여 <과농소초>를 지었다.
8. '계산초당'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1798년~1805년)
1800년 음력 6월 정조가 승하했다. 연암은 자신의 하찮은 글 솜씨를 알아준 정조의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고 하여 몹시 애통해하였다. 그해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연암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정국이 극도로 경색되어 갔다. 그 무렵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에 중용된 이서구가 연암에게 누차 관직에 복귀할 것을 권했으나, 연암은 굳이 사양하고 한양 축촌 가회방 재동의 '계산초당'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는 길을 택했다. 연암은 면천 군수 시절 이래 풍비(뇌졸증)로 고생했는데, 1804년 여름 이후 그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약을 물리치고 더 이상 들지 않았으며, 자제들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1805년(순조5년) 음력 10월 20일 연암은 계산초당에서 향년 69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열하일기 中
태학관에 머물면서
22 시방의 우리 나라로 본다면 외곬으로 유교를 숭상하여 예악과 문물이 중국을 본받아 예로부터 ‘작은 중국’이란 이름까지 듣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룩한 범절이나 식자들의 몸가짐으로 보아 옛날의 조송과 다를 바 없을 것이오.”
27 “우리 나라 선배들이란 나서 죽는 데라야 기껏해 봤자 바다 한 구석을 떠나지 못하여 반딧불같이 사라지고, 아침 버섯처럼 말라 잦아지는 처지에 얼마 되지 않는 시편들이 귀국 같은 큰 나라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외다. 그러나 ‘우물에 빠진 모수’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한 진공’이 있다는 것은 좀 곤란한 일입니다.”
30 애닯다. 좋은 이 밤 밝은 달 아래, 같이 놀 님이 이토록 없다니, 이럴 녘에 우리 권솔들만 저렇게들 쿨쿨 잘꼬, 도독부 장군님도 잠들었구나, 에라! 나도 방으로 들어가 숫제 베개를 베고 나뒹굴어질거나.
36 “우리 나라가 비록 바다 한 구석에 붙어 있지마는 네 가지를 자랑할 만합니다. 유교를 숭상하는 것이 첫째요, 홍수가 없는 것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딴 나라에서 가져오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여자가 개가를 않는 것이 넷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6 ‘붉은 꽃이 떨어지면 누런 꽃이 핀다.’는 동요로서 붉은 꽃은 청인들의 붉은 모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요, 누런 꽃은 몽고나 서번 사람들이 모두 누런 옷과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가리킴이다.
53 내가 어릴 적에 본 일로 하인들의 술판이 벌어졌는데 일흔 살에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등에 땀이 흐를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원래 웃음을 참지 못하는 성질이라 사흘을 두고 허리가 휘도록 웃은 일이 있었다.
56 참말 당시의 소의였던 언니며 누이들에게 오늘의 이 장관을 보였던들 그들은 영락없이 자리에 드러누워 울며불며 이런 궁실을 지어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57 설혹 이를 했다고 치더라도 모르기는 하려니와 맹견의 붓대로는 이를 묘사하여 무어라고 떠벌렸겠는가? ‘황금 전각이 아물아물해 보인다.’할 것인가? 그도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면 또 ‘황금 대궐이 허공에 속았다.’ 했을 것인가? 이것도 한 번 읊어 보고 지워 버렸을 것이다. 또 말해서 큼직한 2층 전가 기와는 황금 칠을 했더라.’ 할까, 혹은 ‘황제가 황금 전각에서 거처했다.’ 했을까? 비록 동서 양한의 글체가 언제나 제목은 작게 잡아 가지고 크게 떠벌려 서술하고 있었지마는 이를 묘사하지 못했을 것이니 이야말로 글 짓는 자들로서는 천고의 유한이라 헐 것이다.
57 궁실 그림을 그리는 자가 정교하다 하더라도 궁실은 사면이 있고 또 안과 밖이 있고 또 겹겹이 서 있을 바엔 비록 서양 그림의 정교한 필치로써도 다만 한 면만 그릴 뿐 세 면을 다 그릴 수 없을 것이요, 또 바깥만 그릴 뿐 안은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화가들의 천추의 유한으로 공자님도 벌써 이 두 가지를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글은 말을 다 할 수 없고, 그림은 뜻을 다 할 수 없다.” 하였다.
59 나는 그들에게 종일 일을 하면 금이 얼마씩이나 생기느냐고 ANFJDT더니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도 복불복이라고, 어떤 때는 하루 여남은 낟씩도 생기고 재수 없는 날은 서너 나도 생긴다고 하면서 재수만 있으면 잠시 동안에 부자도 된다고 했다.
69 이렇게 보니 비단 농사꾼들 태반이 밭뙈기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사방에 건달패까지 어울려 절로 큼직한 부락이 되고 십여만 명이 모여 미복 백화가 몰려 매매되고 술이야 밥이야 떡이야 엿이야 산골짝 속에 들어찼다고 한다. 이 금들이 어디로 빠지는지 나는 모를 일이다. 금은 많이 파낼수록 값은 더 비싸니 오늘 이곳서 보는 기와에 올린 도금이 우리 나라 금이 아닌 것을 누가 알 것이랴.
62 이에 도통 연신 평역장군으로 삼고 갈이필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새로 봉한 달뢰 라마를 보내어 서장 일대를 평정한 후 황교를 진흥시켰다. 소위 황교란 무슨 도인지 모르겠지마는 몽고 각 지방이 숭상하는 교이므로 이 지방이 잘못 침략을 받을 때는 강희 때부터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영하같이 먼곳까지 나가 좌기하고 장수를 보내어 구원을 하고 난리를 평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69 이날 밤 달은 찢어지게 밝아 기공과 함께 명륜당으로 나가 난간 아래를 거닐었다. 나는 달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달의 몸뚱이는 언제나 둥글어 햇빛을 빙 둘러 받고 보니 이 때문에 지구에서 본 달은 찼다가 기울다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밤 저 달을 온 세계가 한목으로 본다고 치면 보는 장소에 따라서 달은 살찌고 여위고 깊고 옅음이 있지 않을까요?
별은 달보다 크고 해는 땅덩이보다 크되 보기에는 그와 달라 보이는 것이 멀고 가까운 까닭이 아닐까요?
만약에 이것이 참말이라면 해와 땅과 달들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별들이 아닐까요?
별에서 땅을 볼 때도 역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70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도는 궤도가 해는 크고 달은 작으며 도는 속도가 늦고 빠름이 있어 한 해와 한 달은 일정한 도수에 맞고 있거늘 해와 달이 땅을 둘러싸 왼편으로 돈다는 말은 우물 속에서 보는 견식이 아닐까요?
땅덩이의 본바탕이란 둥글둥글 허공에 걸려 사방도 없고 아래 위도 없이 쐐기 돌 듯 돌다가 햇빛을 처음 받는 곳을 날이 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71 그러면 해와 달은 원래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요, 또 오고 가고 하는 것도 아니데 사람들은 땅이 움직여 돌지를 않고 언제나 한 자리에 박혀 있다고 너무 믿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 아닐까요?
71 저 착각을 한 자는 말하리다. 땅덩이가 돌 때는 땅 위에 실렸던 일체 물건들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기울어져 떨어질 터라고. 만약에 쏟아져 떨어진다면 어느 땅에 떨어질까요?
만약에 이렇다면 저 허공에 달린 별과 은하는 기운 대로 돌다가 무엇 때문에 떨어져 쏟아지들 않고 그대로 있을까요?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는다면 생명 없는 죽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어째서 썩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견딜까요?
72 땅덩이 거죽에 생물들이 붙어서 살 때는 쯩방울 같은 가장자리에다가 발을 붙이고 어디서나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비겨 본다면 수없는 개미와 벌들이 더러는 꼿꼿하게 선 바람벽에 기어가기도 하고 더러는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섰다고 하겠습니까?
시방도 이 땅덩이 밑창에는 역시 바다가 있을 터인데 만약에 땅거죽에 붙어 사는 생물들이 안 떨어지는가 의심을 한다면 따밑창 바다는 누가 동뚝을 쌓아 두었길래 물이 안 쏟아지고 그대로 있을까요?
72 지구는 둥글게 생겨 원래 음양이 없을 터인데 해로부터 불기운을 받고 달로부터 물기운을 얻어 흡사 살림꾼이 동쪽 이웃에게 불을 빌리고 서쪽이웃에게 물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매 한쪽은 불이요, 한쪽은 물인지라 이것이 소위 음양이 아닐까요?
억지로 오행이라고 이름을 붙여 쇠와 나무와 물과 불과 흙이 서로 낳고 저마끔 이겨 낸다고 한다면 바다에 큰 풍랑이 일 적에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현상은 무슨 까닭이라고 할까요?
73 홍대용이란 친구가 잇는데 호는 담헌입니다. 학문을 좋아하되 하나에 얽매이지 않아 일찍이 나와 함께 달구경을 하면서 장난삼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체로 황당하여 종잡기 어려우니 성인의 지혜로도 해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78 실상 내가 연암에 가서 살게 된 것은 일찍부터 목축에 뜻을 두었던 때문이다. 연암이 자리잡은 곳은 첩첩산중에 양쪽이 펀펀한 골짜기인 데다가 수초가 좋아서 소, 말, 노새, 나귀 수백 마리를 치기에 넉넉했다. 내가 일찍부터 말했지마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탓은 대체로 목축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까닭이다.
81 그러므로 말도 반드시 이따금 구레와 고삐를 풀어 놓아 물역 같은 시원한 곳에 놀게 하여 답답증을 풀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말하자면 생물의 성질에 따라 그 뜻을 맞추어 준다는 것이다.
82 그러면 또 무엇을 가리켜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고 할까? 대체로 아직껏 찬 물을 안 먹이고 있다. 말의 성질인즉 익힌 음식을 제일 싫어하니, 이는 말에게 더운 것은 병이 되기 때문이다. 콩이나 여물죽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먹이를 짜게 하여 물을 켜도록 하기 때문이요, 오줌을 잘 누도록 하는 것은 몸에 지닌 열을 풀기 위함이요, 냉수를 먹이는 것은 정갱이를 굳세게 만들고 발굽을 단단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88 그는 정말 우리 나라에서 중국의 달력을 쓰는 줄도 몰랐고 돈을 보고는 우리 나라에도 연호가 따로 있는 줄만 알았던 모양으로서 특별히 다른 의심을 가지고 내 속을 떠보려고 물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100 지방 각 군현에서는 미리 길 닦을 장정들을 징발하여 높은 데를 깍고 낮은 데를 메우고 돌 메로 고르고 흙손으로 발라서 필목을 편 듯, 먹줄에 맞추어 조금도 굴곡이 없고 기울어지고 비뚤어진 데가 없었다.
113 투미하게시리 높고 낮고 깊고 옅은 길수도 분변 못 하고는 이토록 버릇이 없을까 보냐. 이 무지막지한 도둑놈아, 이것이 무슨 꼴이람!”
119 흥! 세도란 이토록 믿을 수 없는 것이나 세력이 있는 곳엔 우르르 덤벼들었다가는 누 한번 굴리는 동안에 때는 가고 일은 식어 어디고 등 닿을 곳이 없을 때는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닷물에 들어가 풀어지듯, 얼음 산이 볕을 본 듯 녹아 버리고 마니 이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까보냐.
120 우리 나라에서 작은 배는 ‘거루’라 하고, 나룻배를 ‘나로’라고 하고, 큰 배를 ‘만자이’라 하고, 짐을 실어 나르는 배를 ‘송풍배’라 하고, 바다로 다니느 배를 ‘당돌이’라 하고, 상류에 다니는 배를 ‘물웃배’라 하고, 관서 지방에서는 배를 가리켜 ‘마상이’라고 한다. 제도들은 각각 다르지마는 단지 한 글자로 ‘선’이라 할 뿐이다. 비록 도, 접,책, 맹 등 글자는 빌려 쓰더라도 이름과 실상은 맞지 않다.
120 제가 젠 척하고 사람을 깔보더니 제자리에서 앙갚음을 받는구나, 교훈으로 삼아야지.
123 대체 학문이란 것은 신중히 생각하고 사물을 밝게 분별하고 자세히 묻고 넓게 안다는 것이다. 덕성만을 가지고 함부로 추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묻고’ ‘배움’과 연결시킨 것이다.
123 자기를 이긴다는 것도 자기를 이긴 후에야 타고난 심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 ‘회복’이란 말은 조금도 부족이 없다는 말로, 일식이나 월식처럼 다시금 둥글게 회복되는 것이요, 또 잃어버린 물건을 찾음과 같이 한푼쭝도 축이 안 난다는 말이다.
124 학문은 비록 관공의
의리와 용맹이라도 자기를 이기는 실천이 없이는 타고난 심성이 회복된 듯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관공을 가져다가 학문에다 추어올리는 것은 관공이 춘추대의에 밝아, 당시 오나라, 위나라 등 참람스러운 역적에게 엄정했다는 것이다. 그렇고 본즉 그가
어째서 관제라는 제왕의 칭호를 스스로 달갑게 여기겠는가? 관공의 영혼이 천년 넘게 산 듯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런 명분없는 칭호를 받지 않을 것이요, 만일 영혼이 엇다면 이런 아첨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30 조선 사람들이 술 먹는 법이란 세상에도 지독하다고 할 수 있으니 소위 술집이란 보잘것없어 길가에 소각문을 내고 새끼발을 늘이고 쳇바퀴로 등을 만들어 단 곳이 술집이다.
경개록
137 옛날에도 “오랜 벗도 마음이 멎지 않으면 낯설기만 하고, 우연히 마주한 이라도 마음이 통하면 오래 사귄 벗과 같다.”고 했지마는,
144 “땅에는 두 임금이 없을 터인데 어째서 임금 한 명이 적다고 할 수 있을까요?”
했다. 까닭인즉 왕일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 음이 같으면 같은 글자처럼 쓴다. 비록 말은 유창하지 못할 망정 재치가 빠르고 올됐다.
황교문답
156 거울은 글자로 안 쓴 경전이요, 경전이란 구리쇠로 만들지 않은 거울일 것입니다. 내가 비록 열흘 동안 채식을 하고 열흘 동안 목욕재계를 했더라도 혹시 오장의 한 모설이에 터럭만 하느 흠이 있다면 어째서 세 가지 빛깔로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163 공자의 문하에서 72명 제자가 그들의 스승에게 물은 것이란 ‘인’이 아니면 ‘혀’일 뿐인데 후세에 와서는 그렇지 않아 제자 된 자가 처음 와서 책을 펴고는 으레 한다는 강론이 ‘이기’입니다. 소위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올라앉으면서 대뜸 말한다는 것이 ‘성명’입니다.
163 오늘 학자들의 학문은 하늘과 인간을 꿰뚫고 있지마는 실제는 한 고을을 다스릴 줄 모르고 그들의 ‘이학’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일체의 자연 현상은 살피고 있지마는 한 가지 소소한 일도 판단을 못 합니다.
172 ‘라마’란 말은 서번 말로 ‘도덕’이란 뜻인데 소위 라마라면 모두 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방도 몽고에선, 중이 되면 죄다 라마 복장을 입습니다. 북경의 옹화궁에 있는 중들을 모두 라마라고 불러 만인이나 한인들도 라마에 몸을 붙여 중이 되는 자가 많습니다.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한데 끌리는 까닭이지요.
175 꽃잎은 열두 잎인데 꽃봉오리가 처음 터지면 초하루인 것과 달이 처음으로 한쪽 면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고, 꽃이 하루 한 잎씩 피어 열두 잎이 활짝 다 피면 보름인 것과 달이 처음으로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고, 꽃이 하루 한 잎씩 말아 들어 꽃 꼬투리가 떨어지면 그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명수’라고도 하고 또 ‘영수’라고도 한답니다.
178 인과설이란 다만 어떤 것이 원인이 되면 어떤 것이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 원인이면 싹이 트는 것이 결과요, 밭갈이 하는 것이 원인이면 수확하는 것이 결과요, 나무를 심는 것도 그럴 것이니 꽃이 원인이면 열매는 결과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경>에 이른 대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길하고 역리를 좇는 것은 흉할 것’이외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도의 인과입니다. 여기서 도덕과 역리는 원인이요, 길흉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길흉 보응설이 부족하다고 평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따르고 좇아 부응하는 영험이 이토록 빠를 수야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80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법은 윤회설과는 다릅니다. 소위 윤회설은, 맹수라도 갑자기
부처님의 생각을 품게 된다면 다음 대에 가서는 좋은 갚음을 받아 착한 사람이 될 것이요, 지금은 사람이더라도
짐승이나 다름없는 행실을 하면 후생에 가서는 나쁜 갚음을 받아 틀림없이 짐승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하는 말에 불과한 것으로 조잡하고 우둔하고 천박한 말입니다. <시경>에도, ‘효자가 끊어지지 않으니, 하늘은 너에게 길이길이 복을 주리라.’ 했으니, 핸회설의 증험이란 정작 이런 것으로서, 법왕이 소위 남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법이야 때 묻고 더러운 옷을 갈아 입듯이 아주 자기 몸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182 세상에는 아무리 다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묵던 여관에 정이 들어 여기 떨어져 머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82 불은 장작개비를 인연 삼아 붙어 잠깐 동안은 불과 장작이 얼싸안고 훨훨 기쁜 듯이 타다가 불이 다른 장작개비로 옮겨 붙을 때에는 어느 장작이고 먼저 타서 남은 잿덩이를 못내 그리워할 법은 없을 것입니다. 법왕이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다만 이 같을 뿐입니다.
183 ‘혹시 있을 수 있는 일’로써 함부로 만 가지 이치에다가 맞추려 하거나 천하의 이목을 돌리려는 것은 더욱 말할 수 없는 편견입니다.”
192 “잿마루턱 구름을 보고 고향집을 생각하고, 관에 쌓인 눈을 보고 탈 말이 생각난다.’는 격으로 모두가 지난 달의 추회인갑소.”
198 반선이란 것은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으로서 그의 기괴망측한 것은 말을 한다더라도 그 실정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며 보았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어떻다고 결론할 수 없는 것이다.
반선시말
211 오늘의 라마는 대체로 명나라 중엽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중에도 뛰어난 중 한 명이 있었으니, 종객파라 했습니다. 역시 먼 지방에서 서장 지방으로 들어왔는데 이상한 술법을 가져 누구나 한 번 보면 깜짝 놀랄 만했답니다. 그리고 또 남에게 태어난 다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찰십륜포
219 이 밖에도 둥근 정자, 굽은 복도, 첩첩이 들어선 누각 들이며 간드러진 나간과 층대들은 다들 푸른빛, 초록빛, 자줏빛, 남빛 유리 기와로 이어 공비는 억천만 금을 들였다. 채색은 신기루를 나무랄 듯하고 아로새긴 솜씨는 귀신도 고개를 숙일 만하였다. 주위 분위기는 신령님이 대드는 것만 같고 어두침침하기는 동트기 전 새벽녘과 같았다.
233 우리가 힘이 모자라서 저들에게 복종을 하고 보니 이래서 대국이라 하는 것이요, 대국이 힘으로써 우리를 굴복케 할 수는 있었으나 우리 나라를 처음에 승인한 국가는 아니었다. 오늘 그들의 여러 가지 우대와 공물을 감면해 주라는 명령은 대국의 처지로서는 ‘작은 것을 동정하고 먼 지방을 회유하는 정책’에 불과하고 본즉, 비록 한 세대마끔 한 번 공물을 없애 주고 한 해에 한 가지 폐백을 면제하더라도 이는 우대일뿐 우리가 말하는 은혜는 아니다.
행재잡록
233 오랑캐의 성질이란 깊은 골짜기와도 같아서 싫증이 나도록 만족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가죽 폐백이 부족할 때는 마소를 받고, 마소가 부족할 때는 진주와 보옥을 받는 것이나 시방은 그렇지도 않아서 가장 깊은 이해를 가지고 환대를 하고 관대한 정신으로 친절히 굴며 번잡한 책임을 지우지 않고 어떤 요구에도 어굿나거나 거부함이 없다.
242 이번에 가지고 온 표문과 예물은 조선의 성의대로 받으려니와 이후부터는 매년 일정한 정공만을 전례대로 받을 것이며 그 외의 표문과 예물은 모두 폐지하여 먼 나라 사람을 배려하여 실상을 주로 하고 허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나의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심세편
249 지체와 문벌이 높다는 것은 본래 우리 나라 풍속에서도 더러운 습관이니, 식자로서는 자기 나라 안에 있을 때라도 양반이란 말을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워하는 터에 더구나 변방의 토성쯤 가지고 중국의 묵은 겨레를 업수이 여길 것인가? 이것이 첫째 망령이다.
252 <맹자>에 이르기를,
“그 예절을 보아 정치를 알고 그 음악을 듣고 도덕을 알 수 있으니, 이 진리는 백세를 지난 뒤에 백세 이전의 왕을 비교해 보아도 틀리지 않다.”
257 엄계 꽃나무 아래 몇 잔 술을 마시면서 ‘망양록’과 ‘곡정필담’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꽃이슬에 붓을 적시어 이 글을 써서, 앞으로 중국에 유람하는 자가 주자를 반박하여 늘어놓은 자를 만나더라도 그를 범상찮은 선비로 알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배척하지 말고 말씨를 좋게 하면 점차로 그 정체를 밝힐 수 있으니, 이것으로써 천하대세를 엿볼 수 잇게 하고자 한다.
265 대체 목소리는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이로부터 나와 그 형상이 각각 다르고 보내, 악기의 음도 역시 여기 따라 다르므로 악기의 음에는 억지로라도 이름을 붙여 소리에 따라 갈라 나누었으니 음의 이름을 분명히 정한 뒤에야만 그 변화를 알아 낼 수 있을 것이요.
망양록
265 수없는 다른 음들을 음의 이름에 맞추어 표준을 삶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오음이 생긴 까닭일 것입니다. 음을 변화하는 면에서 본다면 하필 오음뿐이겠습니까? 백 가지 음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274 서양 사람들은 다들 역법에 정통하여 그들의 기하학 이치는 정미하고 세밀하기가 짝이 없어 무엇이나 물건을 만드는 데는 다들이 법을 쓰고 있답니다. 중국에서 기장 낟알을 포개어 크기를 헤아리는 따위는 도리어 조잡한 노릇입니다. 또 그들의 문자는 소리로 뜻을 삼아 새와 짐승의 소리나 바람과 비 소리까지도 귀로 분별치 못하는 것이 없이 혀로써 이를 형용해 낸답니다. 저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것이 없고 만국의 말을 통한다고 하면서 역시 저대로는 이 양금을 ‘천금’이라 하고 있습니다.
279 ‘무릇 소리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거쳐서 난다.’ 하였으니, 대체 몸이 극히 귀하고 오랜 수를 누리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종소리 같고, 내뽑는 힘이 웅장하고 화창하여 때로는 육률의 기본음인 황종률에 맞을 수 있습니다.
285 ‘참말 음악 지식이 없이 태상 벼슬이란 실로 부끄러운 일로서 매양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할까 보아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는바, 이야말로 수풀 개고리가 음률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290 그런데 뒷세상에 와서 임금이 어질고야 천지 기후도 고르고 생물이 잘 자란다는 이치는 생각도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써 율관을 가늠하고 갈대 재를 묻는 법으로써 좋은 기후를 맞고저 햇으니, 이는 ‘흰 바탕이 있은 후에야 색칠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요,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끝만 가지런히 하려고 든다.’는 격이니, 이렇고는 설사 계절에 맞추어 좋은 기운이 뻗친다 하더라도 이런 기운이 어데 속하는 기운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299 “저자에서는 화목을 볼 수 있고 우물터에서는 질서를 볼 수 잇습니다. 물건을 서로 교역하는 등 팔고 사는 두 편 뜻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저자의 도덕이요, 뒤에 물을 길러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릇을 벌여 놓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뜻에 찰 때에 돌아가는 것이 우물터의 도덕입니다. 대체 역사의 본질은 정직하여야 하고, 시호란 것은 잘잘못을 들어 밝히는 것입니다.”
306 혹시 여염 마을들에 음률을 좋아하고 거문고나 젓대 등속을 타고 부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부분이 부랑자나 파락호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보니, 양반 자제들은 치욕으로 여기고 부형들은 금하고 이웃 향당에서는 천하게 여겨 옛 성인들이 교육과 정치를 잘하는 데 있어서 둘도 없는 조화를 일으키더니 음악은 오로지 광대 나부래기의 책임이 되고 말았으니 세상에 이럴 이치야 없을 것입니다.
313 “이런 저술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 잡았다는 그것이 곧 악학입니다. 원래 음악의 본질은 시에 속한 것이요, 음악의 이용은 예에 속한 것입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세상 물정이 노무 노골화하고, 문자로써 사람을 가르칠 때는 오묘한 이치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되 가쁘지 않으며, 나타나되 불거지지 않으며, 깊숙하되 충충하지 않으며, 온순하되 강직할 수 있으며, 꼿꼿하되 구부릴 수 있으며, 낮았다 높았다 감격스럽고 흐느끼고 간곡하여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줄 때는 소름이 끼치도록 두렵기도 하고 벌벌 떨리도록 놀랍기도 하고 갑작스레 없어졌다가 슬그머니 생각나게도 됩니다.
314 ‘오음’이란 것이 소리의 문리라면 ‘육률’이란 소리의 뜻일 것입니다. 몸은 각각인데 똑같이 맞는 것은 소리의 덕행이요, 잡티 없이 순수하여 뽑아 낸 듯이 드러내는 것을 일러서 ‘아’하다는 것으로, ‘아’ 하다는 것은 소리의 광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4 그러므로 성인은 특히 저술하지도 않은 책과 말하지 않은 뜻에 유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하여 지혜가 좋은 자는 덕을 알게 되고 지혜가 나쁜자는 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이 과거의 학문을 계승하고 장래의 추진들을 개발하는 의취일 것입니다.
315~316 옛날 사람들은 글자를 두 자씩 포개어 써서 모두 음악 소리의 비결로 삼았는바 바람은 솨솨, 비는 주륵주륵, 사슴은 낄낄, 새는 짹짹, 기러기는 기럭기럭, 여우는 캥캥, 징경이는 깔깔, 벌레는 시룽시룽, 날개는 퍼득퍼득, 개는 컹컹 방울은 쩔렁쩔렁, 얼음 찍는 소리는 쿵쿵 나무 찍는 소리는 쩡쩡, 이것이 모두 소리의 시늉에 따랄 음악이 되는 비결일 것입니다.
316 “선생께서 옳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아직 옛날 사람으로는 이 밖에 내보지 못한 말입니다. 옛날의 노래는 후세의 독서나 다름없습니다. 옛날에 있었다는 서적이란 <주역>,<서경>,<시경>,<예기에 불과한 바, 이것마저 죄다 천자가 있는 도성에 간직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318 뒷날 세상 시 공부라는 것은 불고 타고 노래 부르는 법을 없애고는 네모난 책만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리와 시가 둘로 갈라지고 본즉 주자가 <시경>을 주석하면서 정풍과 위풍 같은 시를 아주 음탕한 과목으로 돌려 버렸으니, 이는 시의 음탕한 뜻만 깨닫고 음탕한 소리는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318 그리고 또 소리를 눈으로 감상할 것인가, 귀로 감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학자나 관리들이 그 근본 원리를 따져 음악을 창작하는 원리만 찾아 내려고 헤매다가는 드디어 음률의 눈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은 귀로 익히는 데 힘을 썼으나 오늘의 인사들은 하루아침에 이것을 눈으로 배우려고 하여 실지로 타고 부르고 하는 데는 아무런 공부도 없이 소리와 음률은 그만두고 함부로 책만 읽게 되었습니다.
323 아래위가 마주 지탱하고 강한 놈과 약한 놈이 서로 견제하여, 소위 발이 많은 벌레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나라, 한라나 이래로는 영토가 만 리나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리고 배부른 것과 춥고 따뜻한 것이 모조리 천자의 생각 하나에 달려 있어 천자가 생각 한 번만 잘못 먹어도 나라는 흙담 무너지듯, 울 없는 마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33 우리 나라가 중국을 그리는 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 되었습니다. 21대 역사를 통해서 신라와 고려로 국호를 삼은 상하 수천 년 동안에 아직 한 번인들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놀래킨 적이 있었던가요? 조선이 한나라의 사절을 죽인 것은 즉 위만조선이요, 기자조선은 아닙니다. 수나라, 당나라에 항거한 자는 고씨의 고구려요, 왕씨의 고려가 아닙니다.
344 죽이려던 자가 도리어 친구가 되고 때리지 않으면 정이 들지 않는다 하고 조사를 다하고 부처를 욕하는 것은 도리어 그 근본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여 모기령의 주자 공격은 비록 자기 딴에는 공로자로 생각하지마는 때리면 피를 내는 데야 누가 그의 ‘사랑’을 믿어 주겠습니까?
산장잡기
353 나는 구기를 들고 밥을 한 숟가락 떠먹어 보려고 하니, 구기가 깊어서 밥이 입에 닿지 않았다. 나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는,
“월나라 임금을 빨리 불러야 되겠소.”
했더니, 지정이 있다가 물었다.
“무엇 하려고?”
“월나라 임금은 사람 생김이 ‘긴 모가지에 까마귀 입부리’라고 했으니 말이지요.”
했더니, 지정은 곡정의 팔을 붙들고 밥티가 튀도록 웃으면서 재채기와 기침을 수없이 했다.
356 “일체 만물은 제 스스로 밝은 몸뚱이는 없는 것이요, 무엇이나 그 본체는 어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캄캄한 밤에 거울을 마주 대하면 빡빡하기는 나무나 돌이나 다름없으니, 비록 거울이 빛을 반사할 수 없는 성질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이 밝은 몸뚱이를 갖추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햇빛을 빌려온 뒤에야만 밝은 빛을 내는 것이니, 햇빛을 받는 곳에 빛이 나고 반사한 곳에서 되잡아 밝은 그림자가 생깁니다. 물이 밝은 빛에 대한 관계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358 무릇 물건이 크면 귀신이 붙고 물건이 오래되면 정기가 어리는 법입니다. 늙은 조개가 구슬 빛을 토하여 밤에도 번쩍이는 것은 정기가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이 땅덩이는 크다고 할 수 있고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어 허공에 박힌 보옥 같은 구슬이고 보매, 한 없이 큰 정기가 응당 절로 밝은 빛을 낼 것입니다. 비해서 사람으로 치면 점잖은 이가 도덕을 닦아 쌓고 보면 자연히 밖으로 꽃다운 영채를 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늘에 가득 찬 저 수없는 별들을 보면 모두가 몸에서 뿜는 빛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359 먼지와 먼지는 서로 의지를 삼아, 먼지가 엉키면 흙이 되고, 먼지가 거친 놈은 모래가 되고, 먼지가 단단한 놈은 돌이 되고, 먼지의 진액은 물이 되고, 먼지가 더우면 불이 되고, 먼지가 엉켜 맺혀서는 쇠가 되고, 먼지가 자라면 나무가 되고, 먼지가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먼지가 더위에 뜨고 기운이 복받치면 아내 여러가지 벌레로 화하는바, 오늘 우리 사람이란 곧 이 여러 가지 벌레의 한 종족일 것입니다.
361 공자는 <논어>에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야겠다.”는 말로 별세계를 공상했지만, 만약에 선생도 선뜻 ‘바람을 잡아타고 신선처럼 올라가신다.’면 이 왕 민호는 중유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361 ”하늘은 원래 모난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기 다리와 벼룩 궁둥이와 빗방울, 눈물, 방울조차 둥글지 않은 물건이 없어 이제 보아 산과 물과 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하늘이 만든 것이지만 아직 모난 별들을 본 적이 없은즉,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의심할 게 없습니다.
362 서양 사람은 다만 땅이 둥글다고만 했고, 지구가 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땅덩이가 둥글 수 있음을 알았으나 둥근 물건은 반드시 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저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지구가 한 바퀴 돌면 하루가 되고,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되고, 해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일년이 되고, 세상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1기가 되고 항성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1회가 됩니다.
364 선생의 변론은 매우 자세하여 조선 삼베옷에서 바늘 실밥이 낱낱이 똑똑하게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365 저 하늘에 가득찬 별들로부터 이 세 개 둥근 쭝방울을 본다면 대공에 점처럼 벌여 있는 것이 아주 하찮은 작은 별로밖에 안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람들이란 한 덩어리 물과 흙 짬에 앉아서 안계가 넓지 못하고 상상력도 한정이 있고 보니 또다시 허투루 뭇별들을 가지고 구주로 쪼개어 나누고 있습니다.
374 ‘멀리서 촛불 그림자가 붉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면서, 잘해라 하는 큰 소리가 들렸는데’ 라는 여남은 글자가 천고에 끝없는 의문을 일으켰으니 촛불이란 원래 컴컴한 밤에 소용되는 물건이요, 그림자만 희미한 것이요. 붉게 흔들린다는 말은 불빛이 껌뻑껌뻑한다는 것이요, 큰소리란 그리 화평스러운 소리가 아니요, ‘잘해라’란 말은 뜻이 명백하지 않은 말입니다.
381 옛날부터 제왕들은 신하들에게 가리치기만 좋아하여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아랫자리에 달려 붙은 자들이란 모두가 부귀 영화에만 눈이 어두운 자들로서 그 시대의 제왕에게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형편이었습니다.
384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비해서 말하자면 바둑 두기와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요, 신하는 옆에 앉은 구경꾼이니, 선생이 말씀하신, 옆에 있는 구경꾼이 바둑 두는 자보다 수가 나은것 같아 보인다는 말은 옳습니다. 바둑돌을 잡은 자가 잘 판단을 못할 때는 옆사람의 훈수를 듣지 않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387 “선생의 청탁을 가리지 않는 넓은 도량에 감격할 뿐입니다. 대체로 세상일이란 무엇이나 정도로 하지 않아서는 못 쓰는 법이요, 또 ‘한 자를 구부려서 열 자를 바르게 잡는 법’도 옳지 못할 줄로 생각합니다.
388~389 대체 세상일이란, 비하자면 양쪽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줄이 끊어지면 줄이 끊어진 자리로부터 짧은 쪽에 있는 자가 먼저 넘어지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습니다. 처음 두 편은 어금지금하기 때문에 세상에 역리와 순리는 있고, 옳고 그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 확실히 성공과 실패가 밝혀진 뒤에는 역리라든가 순리란 말도 도리어 등불 뒤에서 하는 귓속말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393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는 데 대한 그의 이론으로는 ‘궁중과 조정이 한 몸뚱이가 되라’. 하였고, 임금의 덕에 대하여 힘쓸 것을 말할 때에는 ‘함부로 자신이 경솔하게 쓸데없는 말을 끌어당겨 의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고, 그가 자신이 짊어진 천하의 중임을 말할 때에는 ‘나라에 대하여 충성된 생각을 가지는 자는 누구나 다만 자신의 과실과 결함을 부지런히 청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야말로 참말 만세를 두고도 그가 죽은 자리를 다시 채울 수 없는 대승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장의 영지를 빼앗은 것은 ‘열 자를 바로잡는다 하여 한 자를 구부린’ 셈이 아닐까요?”
397 그러매 제갈량을 평하여 ‘이윤과 여상 사이에서 형과 아우를 가릴 수 없다.’고 한 것은 옳은 평일 것입니다.
398 그리고 포악한 임금과 암둔한 황제라도 오히려 때로는 충성을 받아들이고 정직한 일을 장려할 때도 있었지마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어진 재상이라도 자기에 대한 부단한 공격을 달게 접수하고 자신이 나아가 비판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자는 듣지 못하였고 본즉, 임금 된 처지로서는 비록 옹치 같은 미운 사람이라도 때로는 마음을 놓도록 할 수 있었으나 신하의 처지에 있어서는 비록 한기와 부필 같은 어진 신하도 죽어 가면서 자신에 대한 의혹을 풀지는 못했으니, 이는 천고를 통하여 신하 된 처지에 대한 한 개 정평일 것입니다.
399 “세상일이란 매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하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논어>를 읽다가도 “공자가 강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물을 못 건너는 것은 하늘의 마련이다.’란 구절에 이르러 미상불 세 번 탄식하였고, ‘항우가 오강을 못 건넜다.’는 구절에 이르러 미상불 세 번 탄식하였고, ‘종유수가 강물을 건너라고 세 번 외쳤다.’는 구절을 대하고 미상불 세 번 탄식을 하였으니, 이만해도 아홉 번 탄식한 것으로 벌써 가 태부의 여섯 번 탄식보다 많은갑소이다.”
405 “세상일이란 거꾸로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태백이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해서 장하다고 했지만, 은나라 주옹을 태백의 시대에 비해 본다면 주왕은 그때 아직 뱃속에 들지도 않았을 적이요, 당시 문왕의 조부인 단보 고공의 처지를 여러 제후 국가에 비해 본다면 변두리에 붙은 하찮은 부용국에 불과한 터에 양보한다는 천하는 필경 누가 가진 천하인지 모를 일이요, 태백이 과연 누구를 상대로 세 번씩이나 천하를 양보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410 “옳습니다. 어질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예절을 지키면서도 무력을 쓸 수 잇고, 지혜가 있으면서도 물을 줄 알고, 용맹이 있으면서도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신의가 있으면서도 변화를 할 줄 아는 것을 가리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성정이 이렇지 않고는 역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416 우리 선비들이 말하는 바 ‘천명’이란 것은 ‘운수’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운수란 것은 역시 성공과 실패의 결과만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하는 말로, ‘하늘이 임금의 지위를 주고 인심은 자연히 돌아온다.’는 말은 이야말로 엉터리 수작에 불과합니다.
417 “다만 우수로만 미룬다면 세상에는 무서이고 손댈 데가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천명이란 말을 드물게 말했으니 이는 세상을 위하여 가르침을 세우는 데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등왕각에 바람을 보내 주고, 운이 가면 천복비도 벼락을 맞네.’ 한 것처럼 세상일이란 모두 ‘때가 오고 운이 가고’하는 것 뿐인갑습니다.”
428 곡정은 말했다.
“나라를 세우는 원칙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씀인지요?”
“오제는 음악이 각각 다르고,
우왕, 탕왕, 무왕 삼왕은 예절이 각각 다르니
한 나라는 충성을 숭상하고 은나라는 질박을 숭상하고 주나라는 문화를 숭상했음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 원인을 살펴본다면 비록 백세 동안이라도 잘잘못과 이해득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은 천하를 두고 흠짐이 없는 금 사발에다가 비했지마는 오늘의 금사발은 잘 익은 수박과 같을 것입니다.”
“금 사발은 흠집이 없지마는 수박은 깨지기 쉬운 걸요.”
곡정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외다. 수박이란 겉은 푸르고 속은 누렇고 씨가 많고 맛이 시원하여 말하자면 ‘천하를 천하 속에 간직한 셈’입니다.
429 소위 요 임금과 순 임금은 의관을 정하게만 하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렸다고 합니다. 무릇 천하를 차지하고 통치를 할 때에는 ‘백성이란 무엇이나 시켜서 하도록 할 뿐이요, 이유를 알릴 것은 못 된다.’는 원칙을 썼습니다. 이는 요순의 뜻으로서 공자가 부연하였고 진 시황이 실천을 했습니다.”
429 “백성이야말로 제 밭 갈아 제 밥 먹고 제 우물을 파서 제가 먹는 것으로 타고난 본분을 따르는 것이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은, 요 임금이 평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서 들었을 때 속으로 슬그머니 기뻐했던 점입니다.
430 대체 임금에게 잘 보이면 백성에게 인심을 잃고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하면 임금에게 의심을 사는 법입니다. 한 시대의 임금을 도와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렁을 떼어 두고 난간을 막아 두어 손 한번만 실수하면 넘어져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435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천자의 지위야말로 참말 괴로운 자리일 것입니다. 한 고조가 환관의 다리를 베고 집 천장을 쳐다보고 누었을 때야 팔 년 동안 얻은 것이 무엇이라 생각했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물이 말라드는 늘그막에 돌이켜 지난날을 회상한다면 이가 시릴 만큼 서글펐겠지요. 이때쯤은 응당 세상일이란 아무런 맛도 없었을 것입니다.”
436 “그가 급제를 못 할 때는 세상의 결함을 훌륭히 알 수 있을 일이지마는 만약에 급제를 해 버렸다면 도리어 아무런 재미가 없을 일이지요.”
448~449 금년은 내 나이 마흔넷이건만 무서움을 타기는 어릴 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오늘 이 한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우뚝 서고 보니 달은 지고 물을 울고 바람은 솨솨, 반딧불은 펄펄 날아서 보는 것마다 무엇이나 다 놀랍고 휘둥그레지고 이상야릇하였건만, 나는 갑자기 겁나는 마음이 없어지고 이상하게도 신이 날 대로 나서 팔공산의 풀잎 군사나 북평의 호석 까지도 나를 놀래지 못하니, 더욱이 내 자신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450 대체 물소리란 듣기에 달린 것이다. 연암 산골 내가 사는 집 문앞에는 큰 개울이 잇어서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소낙비가 한번 지나가면 개울물은 갑자기 불어서 언제나 수레 소리, 말 달리는 소리, 대포 소리, 북소리를 듣게 되어 필경에는 아주 귀탈이 날 지경으로 귀에 젖어 버린다.
451 나는 언젠가 문을 닫고 누워 소리나는 종류에 따라 이를 사물에 비교해 들어 보았다. 깊숙한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하니 이는 청아한 취미로 들은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듯 한 것은 분노하는 소리로 들은 것이요, 뭇 개구리가 저마끔 우는 소리는 발칙스러운 것으로써 들은 것이요, 수없는 대가치가 서로 마주 어울려 내는 듯한 소리는 성난 소리로써 들은 것이요, 벼락 소리, 천둥 소리인 듯한 것은 공포심으로 들은 것이요, 찻물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는 취미로 들은 것이요, 거문고가 궁성, 우성에 맞게 나는 듯한 소리는 슬픔으로 들은 것이요. 종이 문장에 풍지 우는 듯한 소리는 의심스럽게 들은 탓이다. 무엇이나 올바르게 듣지 못하고 더구나 가슴속에 무슨 딴 생각을 먹고 있으면 그것이 귀에서 소리가 되는 것이다.
452 나는 오늘에야 이치를 알았다.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육신의 귀와 누이 탈이 될 턱이 없고 귀와 눈을 믿을수록 보고 듣는 힘이 밝아져서 더욱 병통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내 마부가 발을 말발굽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가고 보니,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고삐를 늦추어 물에 들어갔다.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다. 한 번만 까딱하면 강물 바닥인지라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으니, 이때야 내 마음속에는 벌써 한 번 떨어질 것을 각오한 바라, 내 귓속에는 드디어 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는 데도 마치 의자 위에서 앉고 눕고 기동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455 만일 온 세상이 비를 바랄 때에 이렇게 한 뜨락만 비로 축인다면 이 역시 일은 다 된일인 성싶다.
457 이것이 잠시 동안에 하고 마는 놀음인데도, 기율이 이같이도 엄격하다. 만약에 이런 법으로 군대가 전쟁터로 나간다면 세상에 누가 감히 다칠 것인가? 그러나 천하의 태평은 도덕에 있는 것이요, 규율에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더구나 이 따위 잡극의 규율이 천하의 태평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랴?
466 평생에 괴상한 구경은 열하 있을 때만큼 본 적이 없으나 그 이름 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문자로 형용할 수가 없어 모두 생략하고 적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로구나.
472 대체 코끼리 눈은 몹시 가늘어서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는 눈부터 먼저 웃는 것과 같으나 그의 어진 성품은 이 눈에 있는 것이다.
요술구경
484 벗는 것도 못 본 동안에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에서 떨어져 나왔다. 손을 묶은 데는 종시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신통한 놀음을 세 번씩이나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495 인간 세상이 꿈결 같은 것은 본디 이같이 거울 속과도 같아서 차고 더운 변천이 이토록 달랐다. 일체 세간의 가지가지 사물이 아침엔 피었다가 저녁엔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고 갑자기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속의 꿈 이야기로, 바야흐로 죽으면서 살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일 것인가? 세상에 착한 마음을 가진 착한 형제자매들에게 이르노니 허깨비 같은 세상에 꿈 같은 몸뚱이와 거품 같은 황금과 번개 같은 재물로 큰 인연을 맺어서 천지 기수에 따라 잠시 이 세상에 머무를 뿐이거든 원컨대 이 거울을 본으로 삼아 덥다고 나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아 있는 돈을 회사하여 이 가난을 구제할지라.
열하일기 下
구외이문
23 매양 유람하는 여가를 타서 의자를 집 밖에 있는 큰 홰나무 아래 내다 놓고 더위를 식히면서 듣고 보고 그 자리에서 마음이 생각난 것을 그대로 적으니, 이를 ‘피서록’이라고 한다.
33 열하 술집들이 번화한 품은 황성에 못지않아 바람벽 위에는 이름 난 사람들의 서화를 많이들 붙여 두었다. ‘유하정’이라고 하는 술집에는,
부귀와 공명을
다 잊어버리고
한평생 두고두고
술이나 먹을거나.
고운 꽃 삼백 가지
울 속에 심어 두어
비바람 사철 향기
실컷 맡아 보리라.
36 그의 마누라가 있다가 그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은 어째서 나한테는 그런 시를 짓지 못하냐느고 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당신도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지으리라고 하여 그 마누라가 불 부는 시늉을 했더니 남편이 시를 지어,
숯불을 불다나니
푸른 입술 우물우물
장작을 때다나니
검은 팔뚝 드러났네.
자욱한 연기 속
멀리 뵈는 그 얼굴
귀신 할미 상판인 양
못나기도 하여라.
45 책을 들자 눈물은
천년 역사 적시고
물에 닿은 문인은
시름도 한없네.
확사가 엮은 시들
시 솜씨는 날리니
치정전집 한 권을
구해 볼거나.
56 소심거
코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무엇인지 알자 하니
콧구멍이 막혔ㅇ러라.
찬 꿈속 스며드는
그윽이 나는 향기
달빛을 희롱하는
한가지 매화러라.
57 비하루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울 제
갈기도 너울너울
하늘 말이 달리는 듯
선약을 캐고저
우완을 찾을랴니
적성의 아침놀에
길마저 잃었구나.
67 “조선이 신라를 멸했다고 주석에 쓴 말은 더구나 당토않은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고려를 계승하고,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은 즉 어떻게 오백 년 전 신라를 멸할 수 있었겠습니까?”
78 속담에, ‘항주 버릇은 겉만 보아 좋다, 나쁘다 떠드는 것이 한 특색이다.’ 하고 또 ‘항주 버릇은 파와 같아 대가리의 꽃은 보기 좋게 총총 백였지마는 소은 텅 비었다.’고 한다. 그들의 습성이 협잡하기를 좋아하여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둡고 뒷일을 생각지 않아, 벌써 송날 때부터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생선에 물을 집어넣고, 천에 기름과 분르 바르는 짓을 해 왔다.”
96 중국 인사들은 나를 만나면 반드시 먼저 뱃길을 묻고 아울러 어디서 상륙하였느냐고 묻는다. 이럴 때마다 내가 육로로 요동에서부터 산해관으로 들어와 북경까지 닿았다고 하면 더러는 믿지 않는 자까지 있었다. 중국 인사들도 때로는 우둔스럽기가 이와 같다.
104 천년 지난 오늘에도
항우의 혼은 남아
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음릉 길을 잃은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언제나 길에 서서
길잡이 노릇하네.
111 소는 어떤 소나 덜썩 크고 집집이 방목을 하는데도 어린아이 한 명이 능히 소 수십 마리씩 먹이는데 코를 꿰기는커녕 뿔도 매지 않았다. 중국이 짐승 길들이는 기술은 비록 우리 나라로서는 따를 수 없지마는 코를 꿰지 않는 법은 또 무슨 고금의 변천이라 할까?
113 중국은 글자가 곧 말이 되지마는 우리 조선은 말이 먼저요, 글자는 나중이므로 중국과 조선은 이 점이 구별되고 있다. 이는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 먼저 되고 글자가 나중이고 보면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자대로 따로 놀아 가령 ‘천天’을 읽을 때는 ‘한날 천’이라고 하여 이런 경우에서 글자 외에 또다른 한 개 어려운 어휘를 갖게 된다. 어린아이가 이미 ‘한날’이란 무슨 말인지 모를진대 어떻게 ‘천天’을 알 수 잇을 것인가?
122 철석 같은 의지론
담헌 님이요,
고매한 재덕으론
연암 님일세.
이역에도 그 이름
모를 이 없고
드높은 학풍은
서로이었네.
130 가랑비 내리는 봄 뒤원
무거운 이슬방울
오동잎이 먼저 알고
가느단 뇌성이매
새마저 놀라잖네.
싹트는 새 풀잎은
깊숙한 꿈속 같고
활짝 핀 꽃봉오리
말없이 멀뚱멀뚱.
섬돌에 검정 개미
오르다 미끄러질 제
나뭇잎 안은 벌레
떨어질까 아슬아슬.
물 위에 선 쌍무지개
저 멀리 보일 적
연기 속 새 한 마리
굼뜨게 날아드네.
외로운 나그네는
시름없이 앉아서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도 잠겼어라.
139 마하발이란 나라가 바친 낙타조의 알이었다. 황제는 세자에게 구경을 시키고 드디어 세자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면서 정가신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정가신이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시에, ‘동이만 한 새알 속에 불로주를 가득 담아, 만세토록 사시라. 훈훈한 그 술기운, 해동까지 미치리. 하여, 황제는 가상히 여기고 자기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149 중국 사람들은 조선 진주를 보물로 여겨 ‘고려 구슬’이라고 한다. 빛깔은 담박하며 희기는 옥돌 같다. 요즘 중국 사람들이 모자 앞이마에 한 알씩 박아 두어 모자의 앞뒤를 표시한다.
158 양귀비의 상은 산 사람처럼 요염하고, 안녹산의 상은 뚱뚱하게 생긴 데다가 배를 가리지 않은 채 희떡 드러내놓아 볼썽없이 추악했다고 말했다. 이런 음탕스러운 당집을 헐지 않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경계하는 뜻인지?
166 장성 밖에 있는 백운탑 돌함 속에는 요나라 시대에 죽은 중의 시체가 있는데, 몸뚱이가 지금도 썩지 않고 부드러운 윤기가 돌면서 따뜻하나 눈은 감고 숨은 끊어졌다고 한다.
173 가장 더러운 냄새를 ‘고려취’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 하지 않아 발 냄새가 흉하다는 것이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동이’라고 말하는바, 이는 ‘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다.
‘려’자 발음은 ‘리’요, ‘동’ 자 발음은 ‘두’와 ‘등’ 음의 반절인바, 우리 사람들은 이런 줄 잘모르고는 냄새가 좋지 못할 때는 ‘고려취’라 하고 다른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할 때는 ‘아무개는 동이’라고 해, 마침내 훔친다는 말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185 우리 나라 서적으로서 중국에 들어가 출판한 것이 매우 드무나 홀로 <동의보감>25권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185 “<동의보감>은 즉 명나라 시대 조선의 양평군 허준의 저작이다. 조선의 풍속을 본다면 본디부터 문자를 알고 독설을 좋아한다. 허준 역시 세족이다. 만력 연간에 허봉, 허성, 혀균 형제 세 사람이 다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울렸고 그의 누이 경번 재명은 그 형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중국을 둘러싼 여러 나라들 중에서 가장 걸출하다.
186 ‘보감’이란 무슨 뜻일까? 비해 말하면 햇빛이 뚫고 비치는 곳에는 어둠을 헤치고 살을 쪼개고 베듯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 잡으면 환하게 밝아 거울과 같음이다.,
187 이러므로 뛰어난 명의는 병을 고치는 데 병이 들어 눕기 전에 고치는 것이요, 병이 다 든 후에 고치지는 않는 것이다. 병이 다 든 후에 고친다는 것을 병을 치료하는 법에서는 아주 하책일 것이다.
192 “선의란 좋은 옷입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들 상상품 좋은 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어 무늬로 귀천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심의란 것은 귀천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고 길흉의 구별도 없이 꼭 같은 복장입니다. 이를 대포로써 만드는 것은 그 검소함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옷감이 아니겠습니까?
193 요순은 도덕이 있으매 온 세상이 조공을 하였고, 우 임금과 탕 임금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니 만국이 손을 잡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또 진 시황은 자주 흉노를 정벌하다가 그의 몸은 썩은 고기가 되었고, 거란은 중원땅을 한번 유린하다가 몸은 소금에 절인 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94 여기에서 오는 길흉화복은 뿌리와 가지가 서로 맞닿은 것과 같고 그 신실함은 춘하추동이 제때에 닥침과 같고 그 힘은 뇌성벽력과 같으니 어찌 조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205 오늘의 오사란은 옛날의 편죽이다. 옛날은 글자를 모두 대쪽에다가 칠로 쓰고 가죽 끈으로 엮었으니, 소위 간책이란 것이 이것이다. 그 모양은 지금 오사란과 같았다. 공자가 <주역>을 읽는데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13 옹노는 또 늪지에 관한 이름으로서 <수경주>에는 사면으로 모여 들어 있는 물을 ‘옹’이라고 하고, 흐르지 않는 것을 ‘노’라고도 했다.
215 요즘 천주당에 그려 놓은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있다. 그 형상이 구름 바다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아 그 귀신인가 한다.
225 “위대한 교화력과 도덕이 있는 것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공자도 ‘내가 어찌 감히’ 하고 말했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성인이라고 하십니까?”
232 우리나라 속담에도 “관청 돼지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월나라가 진나라의 여윈 꼴을 본다.는 말과 같다. 이는 모두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다는 말로 한 나라 세상에도 효성과 청렴이 이 같거늘 더구나 뒷날 세상일까 보냐.
240 전설에 의하면 당 태종이 진왕으로 있을 때 이 산에 올라 가시나무를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 가시나무는 우리 동리 훈장이 나에게 글 구절 떼는 것을 가르칠 때 쓰던 회초리다.”
하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는데 그때 가시나무들은 모두 머리를 드리우고 엎드리듯 하였다고 한다. 그러데 시방도 그 시늉을 내는 듯하다.
옥갑야화
250 귀부인이 되었지마는 손수 비단을 짰는데 모두 ‘보은’이란 글자를 수놓았다고 한다. 홍군이 귀국하게 되자 이 보은단 외에 비단과 금은을 수없이 선물하여 전송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석 상서가 군대를 맡고 있으면서 출병을 주장한 것은 석씨가 본디 조선 사람과 의리를 맺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254 안해는 화를 바락 내면서 바가지를 긁었다.
“그래! 밤낮없이 글을 읽어 배웠다는 것이 고작 ‘어떻게 하겠소?’란 말뿐이오? 장인바치질도 못 한다. 장사도 못한다. 그러면 도적질이라도 못 할 것이 뭐요?”
허생은 책을 덮고 일어서면서,
“애석하구나 내가 당초 십 년 동안 글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했더니 금년이 칠 년이렷다.”
256 아까 그 손님은 비록 옷과 신발이 허술하기는 하나 말은 간결하고 눈초리에 뱃심이 나타나고 얼굴에 수줍은 빛이 없으니 이런 이는 재물이 없어도 자족하는 사람일 것이네. 그가 시험해 본다는 일이 필시 작은 일이 아닐 터이니, 나 역시 그 손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안 주면 몰라도 돈 만 냥을 이미 줄 바에야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할 것인가?”
257 “덕이 있는 곳에 사람이 붙는 법이거든! 덕이 없음을 걱정할 일이지 사람 없는 걱정이야 할 것 없네!”
261 “내가 부자가 되려고 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가지겠소?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의지 삼아 살 터이니, 당신은 가끔 나를 보살펴 식구에 따라 양식을 보내 주고 몸을 재서 옷감이나 보내 주면 일생을 이것으로 만족하겠소. 누가 재물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겠소?”
263 내 짐작으로 내 재주라면 능히 백만 냥은 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마는 운수야 하늘에 있는 것이라 내가 어찌 꼭 알수야 있었겠소? 그러매 나를 부리는 자는 복이 잇는 자일 터라 반드시 부유한데 더욱 부유할 것도 역시 하늘 운수 일것이오. 이러고야 어찌 돈을 꾸어 주지 않겠소? 벌써 돈을 꾼 다음에는 돈 임자의 복을 빙자해 장사를 했으므로 손만 대면 성공하게 되었으니 만약에 내 자신의 돈으로 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단정하지 못할것이오.”
266 “그래! 소위 사대부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오랑캐 땅에 나서 자칭 사대부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래위 입성을 소복으로 한다는 것은 이것이야 상복이 아닌가? 머리를 쥐어 묶어삐쭉하게 쪼았으니 이거야 남방 오랑캐의 북상투가 아닌가? 무엇이 예법이란 말인가? 번오기는 자기의 사사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되복 입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금 명나라를 위하여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 머리칼 한오리까지 아끼고 앞으로 장차 전장에 나가 말을 달리고 칼을 내두르고 창을 쓰고 돌을 날릴 궁리를 한다면서도 그놈의 넓은 소매를 그대로 두는 것이 소위 예법이란 말인가?
황도기략
275 북경성의 앞은 조정이요, 뒤는 저자요, 왼쪽은 종묘요, 오른쪽은 사직이 있으며, 아홉 문이 바르고 아홉 거리가 곧아서 한번 도성이 바르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
284 사람에게 비한다면 요순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지마는 만약에 좌우에서 원, 개 같은 어진 신하가 보필하지 않고 구차하게 망나니, 나무꾼 따위로 직위를 채울 뿐이라면 아무리 요순과 같은 성인이 있어서 일월성신과 별별 갖은 무늬로 수놓은 복장을 입고 영롱한 광채를 휘날리며 눈동자가 둘씩 있는 눈을 끔벅거린다 하더라도 저 혼자 오뚝 서서 어떻게 그 위대한 정치를 하겠습니까?
297 이로부터 천하에서는 감히 또다시 태자를 미리 세우자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였으니 전성문이 닫힌 지도 곧 백 년이 될 것이다.
306 저들로서는 근본 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 냈다고 자칭하고 있으나, 뜻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려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잇는 것을 모르고 있다.
310 천장을 바라다본즉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룽주룽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하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졌다.
갑자기 구경하던 사람들은 누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벌리고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319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은 쇠라도 끊는다.”
323 “황제에게 하사받은 저택이 바로 이 전각의 왼편에 있었다. 때는 바로 가을비가 처음 개고, 푸른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아 가슴을 풀어 젖히고 밖에 나앉으니 높다란 집은 흘러내리는 밝은 달빛과 함께 마주 비춰 바로 광한궁에라도 올라앉은 듯이 황홀했다.”
하였다. 대체로 이 터가 앞이 터진 곳이어서 때가 달밤 맑은 경치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320 오르고 내리고 날아가는 모습이 각각 자세를 갖추어 변화무궁한데도 터럭 끝만치 이은 자리를 찾을 수 없었으니, 마음먹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되었다.
339 서점으로서 제일 큰 데가 문수당, 오류거, 선월루, 명성당 등이다. 천하의 거인들과 국내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들 이 안에 묵고 있다.
공자묘를 참배한 감상
348 내가 얼마 전에 참배한 열하의 태학은 이 태학을 본뜬 것이다. 지금에 두루 공자묘를 구경하고 명나라 적 옛 제도와 비교하여 생각할 때에 태화전은 비록 조금 모자라는 것 같기는 했으나 제도의 정제된 품은 비슷했다. 뜨락의 넓이라든가 아래채들의 둘레들이 역시 동악묘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위패는 모두 함 속에 넣어 감실에 모셔 두고 누런 휘장을 드리웠다.
352 이곳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았을 터인데, 어디고 씻고 닦아 맑게 정돈하지 않은 데가 없어 탁자들은 가지런하고, 문과 창은 밝아 종이를 바른 지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하나도 찢어지고 떨어진 데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마는 중국 법도의 대체를 알 수 있는 일이다.
362 역사에서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하늘의 뜻을 단연코 알 수 잇는 것이다. 그것들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경사스러운 상서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알뜰하게 좇기도 하고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어린아이와 부녀자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고 의사들이란 공연히 한 손으로 하늘을 버티다시피하고 보니 이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또 어려운 일이 아닐까 보냐.
369 비록 낙제한 과목이라도 꼬누는 법이 친절하여 작자로 하여금 똑똑히 낙제한 이유를 알도록 하였다. 정성스럽고 간절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큰 나라 시험장 제도가 엄격한 점과 고시하는 법이 자세하고도 주의 깊은 점은 과거 보는 자로서 넉넉히 유감이 없도록 해 놓았다.
앙엽기
376 ‘앙엽’이란 말은 옛날 사람이 감 잎사귀에 글자를 써서 항아리 속에 모았다가 기록했다는 고사를 본받아서 한 말이다.
383 어허! 한 여자의 마음과 손재간도 이같이 신기롭거든, 하물며 온 절간의 이룩이란 천하의 힘을 모아 놓은 것임이랴.
절 가운데 있는 보물과 진기한 골동품들은 틈이 없어 다 보지를 못했다.
387 술이야 밥이야 꽃과자 등속을 팔고 새를 놀린다, 땅 재주를 한다, 요술을 보인다, 야단법석을 하여 절집 안은 큰 도회처나 다름없었다.
394 자신들이 몸소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데를 볼 수 있었는바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끔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
402 북양왕묘는 전각집과 모셔 둔 위패 같은 것이 남묘와 꼭 같고, 동쪽은 호수에 닿아 물가에 수없는 버들은 그늘이 짙은데 물가에 노는 손들은 언제나 가득했다.
동란섭필
413 그대! 그 강물 건너지 맙시사고
그토고 애태워 당부를 했건만
그대! 필경은 그 강물에 사라졌구나.
그대는 어디로! 이 몸은 어쩔꼬.
418 반선이 앉은 자리는 앞은 평상이요, 뒤는 거울이요, 왼편은 종을 달았고, 오른편은 옥을 두었고, 위로는 물을 소반에 떠 두었고, 아래는 보배로운 칼을 두었다. 밤낮 없이 분향을 하고 있다 하니, 허허 웃는 일이다.
422 압록가의 발원지는 장백산으로서 국경의 여러 산속을 흘러내리므로 언제든지 물이 맑다. 동팔참의 여러 분들은 모두 맑으니, 그 이유는 같다.
425 고려 인삼을 찬미하는 글에, “세 가지에 다섯 잎, 양지 볕을 등지고 응달로 향한다. 그를 구하려면 자작나무 밑을 찾으라.”는 말이 있다. 또 중국의 문헌에는 많이들 이 글이 실리고 있다.
자작나무 잎은 오동나무 잎 같아서 매우 크고 그늘이 많이 지므로 인삼이 이런 응달에서 자란다고 했다. 자작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책 판각에 쓰는 나무로서 우리 나라에는 매우 흔한 나무다.
435 <명산기>에는 쓰기를, 강원도 금강산에 소가 한 군데 있어, 이름을 ‘관음담’이라고 하였다. 소의 언덕 이름을 수건 바위라하고, 반석 복판에는 오목하게 둘러 꺼진 데가 있어 방아 확처럼 생겼는데, 세상에 전하기는 관음보살이 빨래질한 데라고 했다.
436 만력 임진년(1592)에 신종 황제는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우리나라 국난을 구원하였는바, 이 당시 지출한 은이 8백만 냥이라 한다.
439 흡독석은 크기가 대추만 하고 검푸른 빛깔이다. 소서양에 있는 일종의 독사머리 속에 든 돌멩이인데, 이 돌멩이는 능히 뱀고 전갈과 지네 등 여러 가지 독충들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하고 발찌와 일체 독종 악창을 낫게 한다.
447 우리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흘러넘치게 소다가도 조선 사람들이 떠나면 즉시 말라 버린다고 한다. 요동은 본래 조선땅이므로 기운이 맞먹는 무엇이 있어 그렇다고들 말했다.
456 소동파가 고려를 미워하는 것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의곬으로 거란과 친하고 있었으면서도, 특별히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가끔 송나라 조정을 찾아갔다. 중국 인사들이 고려의 충정을 알뜰하게 보아 주지 않고 혹시 조정 형편을 엿보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한 것은 괴이쩍은 일이 아니다.
460 공은 우리 나라로 올 때에 군사를 몰아 조령을 넘어 문경에서 충주로 돌아왔으므로 그의 갓과 두루마기가 합천에 남아 있다.
469 소위 군기대신은 다 만인들이다. 전에 들은 바로는 나라의 기밀에 관한 큰일이 생길 때는
황제가 은밀히 군기대신을 불러 함께 높은 다락에 올라가 밑에서 사닥다리를 가져다 둔다. 비록 며칠이라도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주위에서 누구도 감히 누각 가까이 가지를 못한다고 한다.
472 우리 나라 서해안 장연, 풍천 해변은 고기잡이를 하는 중국 배들이 휩쓸고 있다. 이 배들은 모두 각화도 사람들로서 매년 5월초에 와서는 7월 초에는 돌아가곤 한다
472 지금도 중국 배들이 서해안에 오면 지방 하급 이교들이 즉시 해당 지방관에게 보고를 하지마는 실상은 말릴 제주가 없다.
472 수영은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그 지방 관리에게 그날로 쫓아내라고 명령을 내리나, 기실은 모두가 귀 막고 방울 도적질하는 격이니 우리 나라 국경 수비가 실로 한심한 일이다.
481 “조선은 본디부터 예의를 숭상하여 머리털을 머리보다도 소중히 여기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사정없이 서두른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본래대로 되돌아설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 들의 풍속에 따라 예의로 구속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들이 만일 우리 나라 풍속에 따른다면 말 타고 활쏘기가 편리할 터인 즉, 이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다.”
하여 이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우리 편으로서 생각한다면 이런 다행이 없을 일이라 하지마는, 저들의 계책으로는 우리들이 문약한 습성을 그대로 두려는 것이었다.
금료소초
488 고기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는 개의 침을 먹고, 곡식 가시랭이가 목에 걸렸을 때는 거위의 침을 넘기면 즉시 낫는다.
489 구기자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시력을 더 좋게 할 수 있다.
494 졸지에 더위를 먹어 숨이 막혔을 때는 큰 마늘 한 줌과 길바닥의 뜨거운 흙을 섞어 갈아서 이긴후 다시 새로 길어 온 물을 부어 걸러서 찌끼를 버리고 마시면 낫는다. ‘피서록’에 이 방문을 실었다.
495 치질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변을 본 후 감초 끓인 물로 뒷물을 하고 오배자와 여지초 두 가지 약을 사기 남비에 달인 물로 씻는다.
501 양기를 돕는 데는 가을 잠자리를 머리와 날개와 다리를 떼어 버리고 아주 곱게 갈아서 쌀뜨물에 반죽을 하여 환을 만들어 먹는 것이 좋다. 세 홉을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한 되를 먹으면 노인이 젊은 여자와 장난을 할 수 있다..
■ 내가 저자라면
연암은 명문가 출신에다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 과거시험을 통해 출세 할
수도 있었지만,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또한 그는 우물 안 시야에서 벗어나 천하의 대세를 살피고 나라의 낙후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을 다녀온 뒤 북학 사상을 집대성한 거작
<열하일기>를 남겼다. 그가 남긴 <열하일기>는 사진 없이도 탁월한 묘사로 그 당시 중국의
문화와 생활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정민 선생님의 한시미학산책에는 연암의 글로 시작해서 연암의 <답창애2>로 마무리 짓고 있다. 20년 만에 눈이 열린 장님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본래의 제자리로 찾아가라는 의미이다. "다시 눈을 감고 먼저 내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마지막 문구는 글을 쓰면서 흔들릴 때마다 항상 떠올리고 있다. 그 때 접했던 연암은 단지 한시를 잘 짓는 선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우리 문학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내가 쓰고 있는
'똥'이라는 주제에 도움이 되는 그의 작품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무릎을 치고 소리까지 내질렀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의 주제를
새롭게 읽어냈다. 벌써 200년 된 그의 작품이 깊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필시 세상을 바라본 그의 마음이 진실되고 따뜻했기 때문이 아닐까? <열하일기>를 읽는 동안 세상의 일면을 드러난 현상과 단순한 의미만을 바라본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다채롭고 값진 보물이 숨어있음을 연암을 통해서
찾게 되었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열정적인 탐구심, 나라와 백성에 대한 사람이 담겨져 있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설득력 있는 서술도 탁월하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들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감동으로 연신 탄성을 자아냈다. 또한 양반 사회의 모순을 꼬집으며, 모든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창조하여 더 좋은 나라로 거듭나기를 열망하는 연암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열하일기>은
일기 쓰듯이 중국기행의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구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설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 또한 소설적 구성처럼
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어서, 마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여정을 느낄 수 있다. 첫 관문을 통과하고, 시련의 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극적인 위기
상황이 극복하고 다시 귀환하게 되는 영웅의 모험 구성이 떠올랐다. 따라서, 내가 저자라면 이러한 영웅의 모험 구성으로 이야기를 써 나가도 흥미로울 것 같다.
나는 이번 <열하일기> 부록에 수록된 그의 작품을 우연히 보다가 '예덕선생'이라는 소설을 발견했다. 그리고, 원문을 찾아내어서 '예덕선생'을 읽고 또 읽었다. 나와 똑같은 '똥쟁이'가 등장해서 일까? 엄행수 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그 당시 시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늘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연암을 알게 되었고, 창작과 학문에만 전념한 연암을 내 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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