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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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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일 06시 45분 등록

“2학기에도 이 강의를 선택해준 여러분, 환영합니다. 아직까지도 내 강의를 듣겠다고 모인 사람들은 정말 물리를 원하거나 아니면 아직 제 정신을 못 차린 부류겠죠?”

 

짐머만의 실없는 유머에 학생들은 예의 상 깔깔 웃어주었다. 김도 조금 웃었다. 눈으로 에이브러험의 뒷통수를 좇으면서그 고슬거리는 갈색 머리는 옆사람과 여유롭게 귓속말을 한다. 김은 에이브러험이 휙 고개를 돌리자 서둘러 눈동자를 치웠다. 방학 내내 펼쳐 보았던 각론책이 마치 새 책인 양 뻔뻔히 놓여 있다. 김은 벌써 초조함을 느꼈다.

 

짐머만 교수님!”

 

김은 강의실을 나가는 교수의 뒤를 좇았다. 그가 뒤돌아보자 김은 파일로 철한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이번 방학 동안 리히터의 정리를 공부했습니다. 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짐머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김의 논문을 들쳐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훌륭해.” 짐머만이 말했다. 김의 눈이 희망으로 번뜩였다.

 

훌륭하군 김군. 리히터의 정리에 관한 학계의 연구들을 잘 정리했군.”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특정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는 말게나. 이번 학기도 열심히 공부해주게.”

 

, 교수님? 제 논문은 교수님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 자네의 논문은 그저 리뷰 저널일 뿐이야. 노트 정리를 잘한 것이지.”

 

하지만 이제 정리를 이해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중요한 기본을 제 스스로 공부한 것이죠. 이제 기본이 되었으니, 연구원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리히터의 정리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무엇인가?”

 

?”

 

정말 이해했다면, 이제 자네만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게 연구의 시작이지. 자네는 리히터의 정리가 어떤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연구로는…”

 

짐머만은 거기까지 듣고 고개를 내저은 후 몸을 돌렸다. 김은 바삐 걷는 교수의 옆을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교수님의 방향을 따르겠습니다! 제가 분명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 이건 우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야. 자네가 방학 동안 공들여 한 공부는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네. 자네 스스로 연구 방향의 실마리도 잡지 못한다면 결코 정리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지.”

 

“… …”

 

시간 낭비를 하지 말란 뜻이네. , 가능성이 없는 것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일단 이번 학기는 각론을 열심히 공부해. 알겠나?”

 

김은 짐머만의 좁아진 미간으로 시선을 모았다. 깊은 골그 깊이만큼 김은 처절히 짓눌렸다. 작아지는 교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은 마음을 추스렸다. 굴욕적이다. 개자식감히 내 가능성을 제멋대로 평가하다니! 아무거나 내뱉었더라면 만족했겠나? 그래, 에이브러험이 뭣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렇게 미국식으로? 김은 자신의 지나치게 신중했던 대답을 곱씹으며 후회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이제 마지막 레벨이야...”

 

엘은 침대 구석에서 닌텐도 게임을 하며 말했다. 김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야심작이었던 논문을 책상에 휙 그러나 노고로 인한 애정 때문에 그리 세게 던지지는 못한 채 내던진 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엘은 김의 눈치를 보아야 할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태풍의 눈과 같은 저기압을 불러올만한 상황이란보나마나 짐머만 교수겠지.

 

엘은 게임기를 가만히 내려놓고 베게 위로 엎드렸다. 곁눈질로 책상에 앉은 김의 구부러진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본다. 툭툭벽걸이 시계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저 상태로 분명 반나절은 갈테지. 저녁을 거르게 될테고그러면 엘 자신도 굶게 될테고그러나 김은 결국 힘들게 펜을 잡을 것이다. 시간을 감정적 이유로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김은 절망하거나 재기하였다. 그리고 관찰자가 보기에 그의 감정은 점점 편차가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듯했다. ‘쇠약해지고 있군. 더 정확히 이상해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짐머만이 그 감정의 꼭지를 따버린 모양이다.’ 엘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거, 불편한데?

 

우리의 천재 바이올리스트, 오다는 2학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강의 등록만 하고 연주 일정을 핑계로 시험들을 페이퍼로 대체할 생각일 모양이다. 프로 연주가인 학생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오다가 실은 연주 여행이 아니라 불과 15Km 떨어진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김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엘은 2학기에도 여전히 오다의 자리를 쓸 수가 있었다. 김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다처럼 도망갈 구석이 있는 놈과 물리학을 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보다는 차라리 사회 부적응자와 지내는 편이 더욱 위로가 된다. 엘은 김에게 자신이 이 대학의 졸업생이지만 취직할 생각이 없어 대학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일이 재미가 없어서.” 엘은 시큰둥하게 대답하였다. 물론 김은 그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졸업생 명부 어디에서도 엘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다를 정신병동에 보내버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꽤나 믿을 만했다. 엘은 바이올린만큼은 정말 잘 켰다. 못미더워 하는 김을 위해 엘은 딱 한번, 오다가 두고 간 연습용 바이올린 중 하나를 손에 잡았다. 그 연주 이후, 김은 다시는 오다의 일을 의심하지 않았다.

 

엘은 담배를 챙겨 들고 잠시 기숙사를 비웠다. 김은 혼자 내버려두면 알아서 재생되리라. 이제 조금 추워진 밤 공기에 연기를 날려보내며 대학가를 걸었다. 바삐 움직이는 학생들 사이로 이제 막 점등되는 가로등. 엘은 목을 움추린 채 팔짱을 끼었다. 이제 웬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 길로 숙소로 돌아와보니 김은 책상이 아닌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가만히 어깨를 흔들었다.

 

?”

 

“… …”

 

밥은? 나 배고파.”

 

김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눈이 빨갛다. 정말 잔거야? 김의 흐트러진 머리를 보며 엘은 조금 미안해졌다. 김은 차마 울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은채 묵묵히 지갑을 챙겨들었다. “술이나 마시자…” 의외의 제안에 엘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짐머만은 개새끼야.”

 

그래…”

 

분명히 3대를 내려오는 인종차별주의자인 게 분명해.”

 

그래그래…”

 

엘은 연신 푸랑크소세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술안주로 저녁을 때우려들다니엘은 오늘 하루 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허겁지겁 음식을 쓸어넣었다. 김은 입에 술과 침을 발라가며 붉어진 얼굴로 맥주잔을 바에 쾅쾅 내리박았다. 대학가의 술집은 새학기를 시작한 학생들로 붐볐기 때문에 그의 열띤 태도는 그리 큰 소음을 유발하진 않았다.

 

이제 짐머만 이야기는 좀 그만해라. 마치 네 마누라라도 되는 것 같잖아.”

 

엘은 양심적으로 마지막 남은 소시지 한 조각을 찍어 김의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짐머만 대신 단백질을 좀 씹어보라구.” 김은 얼떨결에 입을 벌렸다가 엘의 뒤쪽으로 바에 들어오는 에이브러험 일당을 발견하곤 들어갔던 소시지를 뱉어냈다. 에이브러험은 남은 자리가 김의 옆자리 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곤 밍기적거리며 그 쪽으로 향했다. 에이브러험의 여자 친구는 엘을 곁눈질로 훑어보곤 금발 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

 

, 여기선 처음 보는 것 같네. 아까 수업 시간에는 인상적이었어…”

 

“… 안녕, 에이브러험, 그렇게 나에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거야 네가 열렬한 짐머만의 추종자니까 말이야. 널 관찰하는 건 늘 즐겁다구.”

 

뭐가? 내가? 아니야전혀..”

 

많이 마신 모양이군…”

 

에이브러험은 바에 팔꿈치를 대곤 여유롭게 웃었다. 그의 여자친구도 따라 웃었다. “소개하지, 베쓰야. 그 옆은?”

 

룸메이트야. . 여기는 에이브러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전공이?”

 

음대야…”

 

김은 엘 대신 말했다. 왠지 엘이 에이브러험과 엮이는 건 원치 않는다. 무엇인가 불길하고 짜증스러웠다. 베쓰의 눈이 커졌다. “어머, 나도 음대생인데왜 한 번도 본적이 없지?”

 

음대생 아니예요.”

 

엘이 불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음대생들보다 바이올린을 훨씬 잘 켠다구…” 김은 불필요하게 엘을 추켜세웠다. 에이브러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 다음 학기에는 꼭 연구원으로 들어오길 바라네. 가능하다면 말이지.”

 

“…신경 꺼.”

 

나야 짐머만 교수가 워낙 간청해서 같은 랩에 있긴 하지만, 사실 리히터의 정리는 쓰레기야. 전혀 가망성이 없단 말이지.”

 

“… …”

 

위로가되려나?”

 

쓰레기는 네 논문이지 정리는 완벽해.”

 

눈동자가 돌아갔다. 미소가 싹 가신 채, 에이브러험은 방금 운을 뗀 엘을 쳐다보았다. 그는 접시의 남은 소스를 모아 포크로 먹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이봐 룸메이트, 정확히 전공이 뭐라고 했지?”

 

말한 적 없는데기억력이 제로로군.”

 

물리학을 좀 알긴 아나? 네가 리히터나 짐머만을 들어나 봤냔 말이야?”

 

그럼. 짐머만을 내가 가르쳤으니까.”

 

“… …??”

 

아직도 그 때 가르친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더군.”

 

에이브러험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 새끼, 완전히 돈 놈이구만김은 동료의 웃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나에게도 전수 좀 해주지 그래? 내 논문에서 뭐가 그리 쓰레기 같았는지 말이야?”

 

“… …”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나? 내 논문을 봤다면서? 짐머만 교수보다 내가 더 낫지 않아? 그 교수가 그 엉터리 정리를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평생을 낭비하는 동안, 나는 오류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말이야!”

 

에이브, 그만해.”

 

베쓰가 남자친구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그만해에이브러험은 기가 막힌 눈으로 김을 한 번 훑어보고는 뒤돌아섰다. “무리한 방어였어, 노력해봐. 친구나 너나안타까운 한 쌍이군.” 김은 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엘은 김의 시선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말해주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거야저 녀석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더군.”

 

“… …”

 

신경쓰지 마, . 저 녀석은 얼간이일 뿐이니까.”

 

너 전공이 물리학이었어?”

 

“…전공이 없었지. 물리도 괜찮았어.”

 

김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너 물리를 하다가 미쳐버린 거니?”

 

난 미치지 않았어.”

 

그래미친 줄 알면 그게 미친 거겠니.”

 

김은 엘의 머리를 쓰다듬곤 자리에서 툭 일어났다. 엘은 가만히 김을 따라나섰다.

 

 

 

 

 

 

 

 

 

 

 

오빠, 오빠 지금 거긴 몇 시야?”

 

김은 영상 통화를 걸어 온 여동생의 동그란 얼굴을 멀거머니 쳐다보았다. “여기 도서관이야…” 주변에서 시끄러운 김의 자리로 눈치를 주지만 김은 기운 없이 여동생의 수다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오빠, 주변 좀 비춰줘봐봐. 진짜 거기 학벌드 대학인거지? 나 친구한테 자랑 좀 하게…”

 

김은 축 쳐진 어깨로 폰을 들어 공중에서 휘 돌렸다. 그를 노려보고 있던 학생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직 학기 초인데 왜 벌써 정신 놓고 지랄이야폰 속의 여동생이 꺄르르 웃는다.

 

오빠, 오빠, 엄마 바꿔줄게.”

 

시끄러, 오빠 공부해야 해.”

 

오빠, 금방 딱 한 번만…”

 

김은 전화를 툭 꺼버린다. 엄마짜증난다. 미안한만큼 원망스럽다. 아니, 원망스러워서 미안한건가? 조금만 더 여유롭게 태어났더라면, 나는 챙이나 대니얼처럼 그저 취미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너무 버겁다김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였다. 1… 2김은 책상에 엎드려 조금 끅끅 댄 후 묵묵히 짐을 챙겨들었다. 아무래도 조금 아픈 것 같다. 오늘만 딱 오늘만..

 

 

 

 

 

 

 

 

, 이번 성적 잘 나왔어?”

 

“… …”

 

, 난 랜들 교수 수업에서 간당간당한 탓에 A가 안나올 줄 알았거든! 와아 그런데 A인 거 있지? 정말 십년 감수했네.”

 

김은 자신 옆에서 떠드는 챙에게 겨우 고개를 돌려 조금 웃어보였다. 방금 챙이 말한 그 과목에서 김은 B-를 받았다. 어째서 그런 성적이 가능한 것이지? 분명히 제대로 공부했고 불안하긴 했지만 답을 써내지 못한 것은 없었다. 짐머만의 수업은

 

C+

 

김은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성적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확인해본다. 아니다, 해킹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정심을 보이고 있다김은 가까스로 평점을 계산해보았다. 이 상태로는 장학금도 받을 수가 없다. 김은 성적의 이의 제기를 할 과목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과목이다. 김은 타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김은 더 이상 최우등생이 아니다. 불과 1학기 만에!

 

확실히 각론은 다른 것 같아. 성적 순위 변동이 좀 잦은 모양이야. 이리 술렁대니…”

 

“… …”

 

에이, .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그래봤자 A0에서 A-로 떨어진 거 아니냐? 동양계들은 꼭 그러더라.”

 

대니얼은 김의 어깨를 툭 쳤다. 챙이 대니얼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뭐하냐? 망할 짐머만 교수이번에도 김은 연구원에서 또 제외된 모양이던데.”

 

? 연구원을 또 뽑았어?”

 

김은 챙을 쳐다보았다. 그는 김의 놀란 눈을 보곤 금방 목소리의 톤은 낮추어 겨우 대꾸하였다.

 

그래이번엔 마르타가 영입된 모양이야.”

 

제길짐머만은 마르타의 가슴에 더 관심이 있는 거라구. 테이블에 턱 얹혀놓고 관상할 육중한 매스 두 개가 필요한 거겠지.”

 

이제 제발 그만해.”

 

김이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 마르타는 훌륭한 학생이야…”

 

…”

 

나 이번 성적이 좋지 않아. 어쩌면 한 학기 쉬게 될지도 모르겠다.”

 

“… …”

 

김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친구들에게 겨우 씩 웃어주고는 달리듯이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짐머만이 정말 제대로 보았군. 나는 정말진짜로 뭣도 아니었던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지독한 성적이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다니

 

내가

 

고작

 

이 정도였나?

 

 

 

 

 

 

 

 

띠리리리…”

 

여자 기숙사에서 열심히 베쓰의 몸 안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있던 엘은 폰이 울리자 인상을 흐렸다. 절정까지는 아직 좀 남았는데... 아래의 여자가 신경쓰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팔목을 잡았다. 엘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끝을 향해 치달았다. 여자의 비명이 이어지고 엘은 분비물을 수거한 뒤 겨우 걸어 폰을 해제하였다. 여자가 얼른 따라붙어 그의 가슴에 입술을 가져갔다. 엘은 그녀의 얼굴을 침대 쪽으로 치우며 폰에 응답했다.

 

? ?”

 

여기 술집인데요, 폰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하는 겁니다.”

 

? 무슨 일인데요?”

 

김이라는 사람, 룸메이트인가요? 여기 쓰러져 있어요.”

 

“… …”

 

 

 

 

 

 

 

 

 

대학가의 강변은 스산한 내음을 풍겼다. 엘은 정신을 차렸다고 우기는 김을 간간히 부축하면서 강둑을 따라 걸었다. 섹스 후에는 담배 한 대가 최곤데엘은 담배각에 손이 갔다가도 이내 휘청거리는 김을 일으켜 세우느라 곤욕을 치렀다. 도대체 오늘은 왜 이렇게 퍼마신 거야? 이상하게 이 녀석의 나라는 꼭 갈 때까지 퍼마시는 문화가 있어. 엘은 김이 꽤나 잘 걷는 듯 보이자 얼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겨우 한 모금, 살 것 같다. 눈을 돌려 김을 보니

 

없다.

 

엘은 당황하여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이 망할 자식, 어디로 간거야?

 

엘은 가로등이 거의 설치 되지 않은 어두운 다리에서 김을 겨우 발견하였다. 그는 귀신처럼 머리카락을 중력 방향으로 늘어뜨린 채 난간에 허리를 바운딩 해대고 있었다. 토하고 싶은 모양인데엘은 천천히 김에게 다가갔다.

 

두드려줘?”

 

“… …”

 

벡터가 잘못됐어. 거긴 막힌 길이라구…”

 

김은 엘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 김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담배 냄새가 김을 꽤 진정시켰다. 그러나 약간의 각성만으로도 김은 서글퍼졌다.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자신의 갈 길은 무엇인지점점 더 명확해 지고 있다. 김은 다른 의미의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었다.

 

죽고 싶어…”

 

“… …”

 

정말 죽고 싶다.”

 

어차피 죽어. 사람은…”

 

엘은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실현 가능한 목표니 걱정말라구…” 김은 검은 물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이는 바람에 하얀 포말을 간혹 드러내고 있다. 차갑겠지. 그러나 왠지 뛰어들면 따스할 것 같아. 마치 자궁안처럼, 모든 것을 포//해버려라. 새롭게! 김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 너도 알고 있었던 거지. 내 목표란 것들은…. 죄다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을 말야.”

 

무슨 소리야…”

 

내가이 김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는, 너무도너무도 너무도 자질이 없다는 걸 말이야.”

 

,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건 여러 방법이 있지.”’

 

엘은 난간에 담뱃재를 털었다. “짐머만을 죽여버려. 그럼 역사에 길이 남을 거야.”

 

그건 비겁한 짓이야…”

 

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천재야. 난 살리에르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럼 아무것도 되지 마.”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어. 난 이미 김이라구. 머저리 김. 아무것도 아닌 김.”

 

네 말 속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 안드냐?”

 

글쎄난 바보라서 아무 것도 모르겠어.”

 

김은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엘은 김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망설이는 진동엘은 자신도 모르게 난간을 붙잡았다.

 

이봐, 소크라테스죽으려면 다른 날 죽는 게 어떨까? 강물에 불면 몰골이 흉측하다구.”

 

“… …”

 

객기라면 집어치워. 난 절대 구해주지 않을 테니까…”

 

김은 엘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난간에 허리를 돌렸다. 각속도가 예상보다 빠른데…? 김은 아까부터 가늠하고 있던 허리의 높이가 난간과 맞아떨어지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이마에 철다리의 하단부가 쿵 닿고김은 떨어졌다. 강물이 귓속과 콧구멍으로 빨려들어왔다. 죽으려고 뛰어내린 건데 숨은 멈춰서 뭣하겠어. 김은 물을 삼켰다. 괴롭다. 빠져 죽는다. 이 고통! 폐부가 잠식된다! 그러나 곧 죽을 것이다. 괜찮아 까짓것김은 부력으로 조금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떠내려갔다.

 

“… …”

 

엘은 담배를 마저 태우며 흐름을 따라 유유히 강둑을 걸었다. 그러면서 찬찬히 흥미어린 눈으로죽음의 과정을 관찰하였다. 김은 꽤 잘 버텼다. 옷이 모두 강물에 젖자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김은 흐느적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죽는건가? 혼미해진 정신 때문에 운동 신경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양이군. 담배꽁초를 떨어버린 엘은 강둑의 바위에 앉아 턱에 손을 괴었다. 시체의 움직임이 점점 더 커진다.

 

“…살려줘…”

 

김은 물 반 공기 반의 입으로 힘없이 외쳤다. 엘은 미동 없이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김의 움직임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엘은 웃옷을 벗었다. 나직히 욕을 내뱉으면서강물이 차다. 그는 천천히 축 늘어진 몸뚱아리 하나를 끌고 나왔다. 기도를 확보하고맥박을 체크하고엘은 김을 발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마지못해 입술을 갖다 대었다. 망할 자식숨을 훅 불어넣자 푸욱 물을 토해낸다. 엘은 그제서야 조금 숨을 고르고 김의 옆에 함께 누웠다.

 

“…추워…”

 

그러니까, 오늘 죽지 말랬잖아 병신아.”

 

“… …”

 

엘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바지 주머니 속을 뒤적거렸다. 담배가 다 젖어버렸다. 울적한 마음으로 옆으로 치워버린다.

 

구해주지 않는다면서…”

 

살려달라며.”

 

아냐안그랬어.”

 

그래? 그럼 다시 들어가든가.”

 

“… …”

 

둘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가온다. 오리온 자리의 삼태성이 정갈하게 빛난다. 거인의 초상창백한 푸른색에 눈이 시리다.

 

별로 구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구나?”

 

좀 담궈 둘 필요성은 느꼈지…”

 

“….죽을 뻔 했다구.”

 

죽을 고비를 넘기면 사람이 좀 변하는 법이니까…”

 

“…미친

 

엘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김을 바라보았다. 김은 귀찮다는 듯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김은 볼멘 소리로 지껄였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전혀 달라지 게 없어?”

 

아니, 그냥 이젠 알겠어. 내가 어떻게 죽게 될지…”

 

또 시도하겠다는 거야? 그럼 내가 없을 때 해야 할 거 아냐. 의도를 분명히 하라구.”

 

“…난 또 네가 쿨한 줄 알았지.”

 

이 자식강물에서 너무 빨린 꺼낸 모양이군.”

 

엘은 체력이 회복되자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털었다. “일어나 병신아, 오늘은 이만하자구.”

 

김은 엘이 내미는 손을 마지못해 잡았다. 그러다 그의 몸에 길게 그어진 상흔에 눈이 갔다.

 

다친거야?”

 

, 이거? 아냐. 예전부터 있던 거야.”

 

“… 굉장한 상천데?”

 

엘은 쑥스러운지 내밀었던 손을 치우곤 얼른 웃옷을 입었다. “그래나도 죽을 뻔한 적이 있지. 짜식강물에 뛰어드는 건 부끄러운 스케일이라구.”

 

어쩌다 그런거냐?”

 

“… …”

 

사고였어엘은 포기한 듯 셔츠를 올려 상처를 보여주었다. 김은 무릎으로 다가서서 가만히 상처를 만져보았다. “비장이랑 신장이 없어. -! 날아갔지.”

 

폭발 사고였어?”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 교통사고?”

 

“… …”

 

중력이라고 해두자. 엘은 자신의 배에 놓인 김의 손을 잡아 가만히 공중에 떨궜다. 김은 그제서야 무릎을 일으킬 기운을 내었다.

 

놀랐어. 나도 수술했거든.”

 

넌 뭔데?”

 

나도 신장이 없어.”

 

장기기증이라도 했어?”

 

팔았어.”

 

?”

 

“…샤넬백 사느라.”

 

엘은 선뜻 이해를 못하다가 뒤늦게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김은 미친 듯이 웃는 엘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런 발설을 하게 될 줄이야. 이런 게 엘이 말한 변화일까? 김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을 발견하곤 속으로 조금 놀라긴 했다.

 

너 정말 골 때리는 놈이구나! 진짜로 여자 때문에 신장을 팔았단 거냐?”

 

그래…”

 

그래서 얼마나 받았어?”

 

그냥 백 하나만 샀어.”

 

, 그걸 그 여자애가 사달라고 한거야?”

 

아니…”

 

너 엄청 간절했나 보다. 미친 놈!”

 

너한테 그런 소리 듣긴 좀 그래.”

 

, 미치겠다 진짜.”

 

엘은 김의 엉덩이를 축구처럼 뻥 찼다. 김은 슬쩍 무릎이 휘청하였으나 무감각하게 다시 일어섰다. 무덤덤히 걷는 김을 바라보다가 엘은 덥썩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그 여자랑은?”

 

뭐가 어떻게 돼.”

 

개랑 잤어?”

 

“… …”

 

넌 도대체 뭘 한거냐?”

 

엘은 김의 어깨를 돌이켜 세웠다. 이런 병신 중의 상병신을 봤나김은 엘의 호기심으로 번뜩이는 눈을 흘끗 쳐다보고는 귀찮다는 듯 그의 팔목을 치웠다.

 

너란 새끼들은 이해 못해.”

 

아니, 나란 새끼가 도대체 어떤 놈인데?”

 

너 잘생겼잖아.”

 

내가?”

 

김은 엘에게 주먹질을 했다. 엘은 가볍게 제압하곤 김을 생포했다. “그래, 미친 것 빼곤 아주 환타스틱하게 생겨먹었지…” 엘은 김의 말을 곱씹는 듯 하더니 무안하게 결박한 몸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그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냐?”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생각도 안나 나는…”

 

그 여잔 지금 뭐하니?”

 

알게 뭐야의대에 진학해서 동기 동창이랑 사귄다고 들었어. 헤어진 것 같진 않던데…”

 

엘은 여기까지 듣고 못참겠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여 웃었다. 진짜 골때린다 이 자식

 

관심 없는 것 치고는 신상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네?”

 

정말이지 난관심 없어.”

 

알았어. 알았다고.”

 

엘은 아직 휘청대는 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맹탕 같은 놈이다. 저 자식. 독사같은 놈인 줄 알았더니엘은 앞서 걷는 김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김의 구부러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감정을 질질 끌며 터벅 터벅 걷는 중이다. 금새 속도를 따라잡힌다. 엘은 그 위태로운 그림자의 끝을 가만히 밟아 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적어도 오늘 밤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엘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상처나도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그래서 나는너는달라졌나? 우리는 이제 인생을 살고 있나?

 

 

 

 

 

 

 

 

 

 

 

어쩐지 살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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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3 18:29:28 *.229.250.5

장면이 쉽게 그려져서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진다.

갈수록 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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