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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등산가의 회상 (souvenirs d’un alpiniste)
* 에밀 자벨 지음, 김장호 옮김, 평화, 1991.12.10
1. ‘사색의 등산가’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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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자벨 (1847 ~ 1883)
사색이 없는 행동이란 행동이 없는 사색만큼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행동과 사색을 절묘하게 자신의 생애에 조화시켜 낸 사람이 에밀 자벨이다. 그는 등산가이자 문학인이요 활동가이자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에누리 없이 십분, 이 한 권의 책 속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의 묘사는 탁월하다. 죽음을 비켜가는 등반가의 순간 순간을 마치 카메라를 찍듯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 보여준다. 에밀 자벨의 모든 등반기는 그래서 단순한 결과 보고서라기 보다는 인간 심상의 정밀한 기록으로 더 값진 것이다.
그는 36년, 짧지 않은 평생을 알프스 언저리를 떠난 적이 없는 알프스를 사랑한 등반가다. 19세기 중엽 알피니즘이 한창 꽃을 피우던 시절이다. 그의 일대기와 등반 약사를 장황하게 설명해 본다.
19세기 후반 20년 동안 알프스 등반에 정진하다가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알피니스트 에밀 자벨(Emile Javelle·1847-1883)은 프랑스 태생의 귀화한 스위스인이었다. 그는 유명한 문필가로 그의 사후 16년이 지난 1899년에 한 후배가 자벨의 등반기를 수집해 프랑스어 판으로 간행한 책이 <알피니스트의 회상록(Souvenirs d'un Alpiniste)>이고, 이 책의 영문판이 <Alpine Memories>이다. 1991년 동국대학교의 고 김장호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해 <어느 등산가의 회상>이란 제목으로 간행한 바 있는데, 총 17장으로 구성된 자벨의 회상록 중에서 ‘다시 세르벵으로(마터호른 트래버스)’를 비롯한 6장의 글이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자벨은 소년 시절 식물학자였던 자신의 숙부를 따라 도피네산군과 몽블랑산군의 여러 빙하를 답파하고 수많은 산과 고개를 넘나들며 알피니스트의 수련을 쌓았다. 그는 스위스의 한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대학교의 수사학 교수가 되었는데,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같은 유명화가들이 아름다운 알프스 풍광을 화폭에 담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으로 여기고 자신이 직접 그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틴달 교수의 발자취를 따라 동부 알프스를 제외한 나머지 알프스 전역을 방랑했다. 그의 책 속에는 알프스 5개 봉 등정기만 수록되어 있지만, 그는 몽블랑, 몬테로사, 마터호른, 바이스호른 그리고 그랑 파라디스를 비롯해 알프스의 주요 봉우리들을 모두 등정했다.
그는 붉은 저녁 놀 속에서 불타오르는 산봉우리 당뒤미디를 ‘알프스의 파르테논(신전)’이라고 격찬했는데, 이 산을 등반 중에 눈사태에 휩쓸려 수직거리 500m를 추락하기도 했다.
그는 알프스 여러 계곡에 메아리치는 천둥소리, 눈사태와 낙석의 굉음, 항상 그늘 속에 잠겨 고독이 감도는 깊은 계곡, 하늘의 구름을 무너뜨리는 뾰족 뾰족한 암탑들의 야성(野性)의 세계는 물론, 절벽의 심연 위에서 이슬을 머금고 한들거리는 연약한 꽃잎, 강풍에 줄기가 부러진 채 절벽에 매달려 있는 외로운 전나무의 강인한 생명력,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며 허공에서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공중폭포 등, 알프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폐혈관 파열 질환을 앓고 나서, 19세기 유럽 사회에 팽배해 있던 염세주의와 무주의(니힐리즘)에 경도되었다. 그는 빙하 옆에 쌓여 있는 빙퇴석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의 모든 것도 언젠가는 그와 같이 폐허로 환원할 것이고, 그 마지막 순간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셰익스피어의 창조, 베토벤의 꿈과 같은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 소멸해 버릴 것을 애통해했다.
또한 그는 산정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세계를 영원히 향유할 수 없는 인간의 단명을 탄식했다. 그의 책 속에는 알프스 산촌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을 기술한 ‘살방-발레의 산촌’과 수많은 아름다운 폭포로 유명한 ‘살랑슈의 협곡’ 답사와 같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묘사가 포함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이미 산악문학이 널리 보급된 영국 사회와는 달리, 이 분야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럽 대륙에서 그의 회상록은 산악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1870년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체르마트를 방문했을 때, 마터호른의 산악미에 매료되어 그 산을 오르기를 열망했다. 가난했던 그는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세르벵의 사나이’란 별호를 지닌 가이드 니콜라스 크누벨을 고용하고, 훼른리 쪽으로 마터호른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세찬 돌풍 속에 얼음 능선에 스텝을 깎으며 전진했다. 그들이 동벽의 오버행 바위 밑에 도달했을 때 낙석의 포화가 시작되었다. 커다란 돌덩이 한 개가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내려 벽에 부딪치며 굉음을 냈고, 중간 크기의 수많은 돌들은 일제사격 소리를 내고 모래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접근했다가 아래쪽 푸르겐빙하로 사라졌다.
낙석사태가 잠잠해지자, 그들은 등반을 재개해 쿨와르와 바위 선반을 이용하여 한 시간 이상 오른 후 마터호른 피라미드의 중간 지점쯤 되는 3,800m 지점의 깎아지른 절벽 밑에 위치한 세르벵 대피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빙하 위에 서서히 드리우는 보랏빛 산 그림자와 석양의 황금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색채의 세계를 연출했다. 다음날 새벽 4시 그들은 암벽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태양의 장밋빛이 높은 봉우리와 산등성이를 스치고 기어올라오면서 옅은 아침 안개의 베일을 벗겨내고 빙하, 빙탑, 만년설 위에서 찬란하게 번쩍거렸다.
밤새 혹한 속에서 냉각된 바위에 손을 대는 일은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것이나 진배없었고, 추위 속에서 계속되는 바위 선반과 쿨와르의 등반은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낙석사태가 돌발하면 부근의 쿨와르 속으로 대피해 가며 등반을 계속해, 넓은 눈밭을 트래버스하고 산등성이의 숄더에 도달했다. 가이드들이 ‘붉은 암장’이라고 부르는 높이 200m쯤 되는 마터호른 동벽의 불그스레한 수직벽이 60도 경사의 마터호른 북벽 상부와 만나 날카로운 모서리의 산등성이를 이루고 있었는데, 붉은 암장의 매우 가파른 곳에서 등로가 막히고 우측 북벽으로 트래버스해 올라야 하는 구간이 나타났다. 그들이 한 군데 오버행이 있는 북벽의 높이 4m 수직 벽을 오르자, 높은 바위 사면이 나타났다. 초등시에 가이드 타우그발터 노인이 자신과 불행했던 동료 4명 사이의 자일이 끊어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던 가슴 아픈 장소였다.
서로 자일을 묶은 크누벨과 자벨은 붉은 암장의 마지막 벽을 통과하고 나서 정상능선, 즉 길이 100m쯤 되는 수직벽의 가장자리를 따라올라 등성이 최고점인 정상에 섰다. 정상은 조금 낮은 남서쪽 봉우리(이탈리아 정상)와 또 다시 이어져 있었다. 마터호른 산악미에 매혹된 자벨은 4년 뒤인 1874년 일행과 마터호른의 이탈리아 능선도 등반했다.
스위스의 훼른리 능선보다 등반이 훨씬 까다로운 리옹 리지 등반은 여러 개의 쿨와르, 침니, 아레트, 암탑과 암벽을 돌파해야 하는 고된 과정이었다. 해발 3,835m 지점의 낭떠러지에 매달린 대피소 위쪽이 최난구간으로, 1860년대 초 윔퍼와 마터호른 초등경쟁을 벌이던 틴달 교수의 발목을 잡은 곳이다.
틴달봉(Pic Tyndall)과 주봉 사이의 아레트는 톱니형태의 좁은 능선이었다. 절벽 밑 대피소 아래쪽의 난코스 구간 네 군데와 대피소 위쪽의 세 군데에 고정로프가 설치되었는데, 최후의 고정로프 설치장소는 고양이도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의 수직 벽이었다. 루트 최후의 난코스에는 로프에 목재를 끼워 만든 줄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강풍에 요동치는 줄사다리 구간을 돌파하고 마터호른 정상을 밟은 후 30cm의 신설이 덮인 훼른리 능선으로 어렵사리 하산해 마터호른 트래버스에 성공했다.
자벨은 알프스에서 수 차례 중요한 초등도 이룩했는데, 그중에 ‘투르 노아르(3,824m)’ 초등이 으뜸가는 등반업적이다. 스위스 레만 호반에서 바라보이는 그 아름다운 바위 피라미드는 톱날 능선 상에 솟아 있다. 1876년 자벨은 가이드 요제프 외 2명의 동료들과 누바 빙하 옆 퇴석지대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하룻밤만이라도 원시인들의 생활을 경험해 보려고 노간주나무로 모닥불을 피우고 그 옆에서 야영했다 (당시는 노천 야영이 다반사가 아니었다). 흔들리는 불꽃이 그들의 춤추는 그림자를 암벽에 비추자 원시동굴의 괴기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좁은 쿨와르, 미끄러운 화강암벽, 눈처마, 면도날 같은 스노 리지를 돌파하고, 날카로운 첨봉들이 늘어선 톱니 형 능선, 즉 ‘투르 노아르’의 남릉 밑에 도달했다. 이 능선은 높이 10m, 또는 20m의 스텝(Step)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몇 개는 오버행이어서 등반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바위선반을 이용하며 ‘투르 노아르’의 기나긴 동벽을 트래버스한 후 다시 능선에 붙어 허공에 설치된 자연의 암벽 돌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허공에 매달린 채 작은 바위주름에 손끝과 구두 끝을 걸어(핸드홀드와 풋홀드로 삼고) 몸을 끌어올리고 사지를 비틀기도 하면서 전진했다. 드디어 능선 너머 3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이 바라보였다. 그들은 정상에서 벅찬 감격을 맛보고 케른(원추형 돌무덤)을 쌓고 하산했다. 그는 20년간의 숙원이었던 몽블랑 등정을 마친 후 등정기를 단행본으로 간행할 계획이었는데, 그의 요절로 인해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는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 있는 산을 등반 중에 오한이 난 후 폐결핵으로 진전되어 사망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3개월 전까지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알프스 고지대를 산책했다.
2. ‘어느 등산가의 회상’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역자 서문
□ 마치 인공위성이 찍어 보낸 황량한 천체의 풍경을 바라보듯 또는 거대한 고대 짐승의 각질 비늘 등을 밟듯 자연의 무참한 파괴력 앞에 눈과 얼음과 돌 등 온갖 퇴적물로 혼돈의 극한을 이루고 있는 장엄한 빙하 한가운데 서서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은 이렇게 폐허로 돌아간다. 우리 인간의 세계도 거기에 예외일 수 없다. 이 관념 앞에서는 고집을 부려도 소용없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셰익스피어의 창조가 베토벤의 꿈이 마지막 인간의 마지막 폐허 위에서 멸망할 때 과연 어는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라고 자문한 다음, 그제야 그는 모든 것을 멸망하게 하는 거대한 힘을 감지하고서는 이렇게 읊조린다. ‘그 힘만이 혼자 살아남는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영혼도 인간성에서 오는 모든 것으로부터 공허하게 되어 무어라 잘라 말할 수 없는 무한의 사랑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그때 그 숭고한 사랑에 젖어 들면서 영원한 휴식 속에 이 항구 불변의 힘과 결합하고 싶다고 염원한다.’ (p. 8~9)
Ü 역자의 말은 에밀 자벨의 관점에 기댄 것이다. 이는 장자적 사유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장자의 소요유 편을 인용해본다.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鯤(곤)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鵬(붕)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존재 너머를 사유하는 者(자). 에밀 자벨은 등산가이기 전에 생을 관조하는 철학자라 하겠다. 이것은 또 어떤가.
‘아지랑이나 먼지는 생물의 숨결에도 날린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것이 본래의 빛일까? 그것이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일 것이다.’ 시선은 비슷하다.
□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과연 지금 살아있는 것보다 근사한 것일까?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상에서 그는 기약함이 없이 인간에 대한 확실한 긍정과 신념 위에 선 것이다.
1883년 4월 24일, 36년이라는 길지도 않은 생애 동안 알프스에서만 살다가 그 산자락에서 숨을 거둔 자벨을 가리켜 그저 흔한 알피니스트의 한 사람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인수봉에서 또는 설악의 빙벽에서 내려오는 젊은 산악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그의 손에 꼭 쥐어 주고 싶은 것이 이 책이다. (p. 9)
Ü 역자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두 여름의 추억
□ 나란 사람은 그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등산가, 그다지 쓸모도 없는 산악회 회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톱펠이나 틴달, 칼람과 드 소쉬르를 존경한다. 나는 여태도 이들 빛나는 우두머리들의 말석에도 끼지 못하고 그들의 어느 유파에도 힘껏 따라가지 못한 채 그저 계속 그들 중 누군가에게 매료되어 그들의 뒤를 멀리서 그것도 아주 멀리서 쫓아가고 있는 중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p. 13)
Ü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겸손한 사람이다. 예사롭지 않은 진실성을 느낀다.
□ 나는 학문적 관찰이나 빙하 연구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그래서 한 포기의 식물, 한 장의 스케치도 내게는 없다. 단지 만년설 언저리에서 꺾은 한 송이 작은 꽃잎이라든가, 사랑하는 그 어느 산봉우리의 프로필만이 내 손에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출발할 때와 똑같이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올 뿐인 것이다. (p. 14)
Ü 죽음을 비켜가는 등산가의 필수 조건이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고 다시 되돌아 오는 것.
□ 오히려 푸른 빛 얼굴 가리개와 소인 찍힌 지팡이를 지닌 구경꾼들에게 무용지인이라는 이름을 되돌려주자. 대신, 지워져 버린 오솔길을 더듬어 혼자서 깊은 산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는 자, 그리고 첩첩이 쌓인 퇴석을 넘고 넘어 빙하를 거슬러 오르고 높고 높은 봉우리에 도전하는 자에게야말로 또 다른 이름을 얹어 주어야 할 것이다. (p. 14)
Ü 미지를 향해 한 발을 내딛는 사람, 바로 이 한 발자국에 인류가 살아가는 것이다. 에밀 자벨은 나에게 죽은 야생을 다시 살려놓고 삶의 지루함이 생동으로 바뀌어야 함을 선동한다.
□ 가엾고 불쌍한 미래여! 만일 이 소박함을 잃어야만 한다면 말이다. (p. 18)
Ü 이것은 자벨의 시간에 대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소박한 행복이 아니라면 미래는 가엾다. 미래의 행복으로 지금의 불행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 아! 감미로운 이 저녁 한때는 왜 이다지도 짧은가. 오, 태양이여, 어이하여 그대는 이다지도 급히 지려하는가!, 오, 잠시만 잠시만 머물러다오! 그대의 마지막 빛이 아직도 뫼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동안 조금만 더 이 최초의 그림자의 상큼함을 음미하게 해다오! (p. 18)
Ü 에밀 자벨은 일몰에 대한 표현에 매우 특화된 사람이다. 앞으로도 많은 주옥 같은 황혼의 표현이 남아있다. 우리를 기다린다. 모두 여기에 표현해 보려 한다.
□ 황혼 무렵이었다. 최후의 광선이 최후의 침봉에서 이제 막 그 빛을 거두어 갔을 때 (p. 19)
Ü 나는 이 장면을 탐세루크 일몰과 에베레스트에서 하산하다 캠프2에서 바라본 일몰을 겹친다.
□ 그러나 여러 시간 중에서 가장 감미로운 이 시간은 동시에 가장 빠른 속도로 지나간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도망쳐 버렸다. (p. 20)
Ü 멈추어라 순간아! 를 소리칠 일이다.
□ 위대한 각성의 날, 그 모든 것은 반드시 내 앞에 소생하리라. 참나무 고목이여 나무꾼 도끼 아래 쓰러지거라. 그리고 또 너 오두막이여 겨울날 눈 속에 넘어져 모습을 감추거라. 탐욕한 시간이여 이 감미로운 한 순간을 포식한 뒤 모든 산들을 파멸시켜라. 멋대로,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자. 프란시스크여 시간으로 하여금 그 작업을 완수하도록 맡겨두자. 영원의 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이들 모든 것은 우리에게 돌아올 테니까. (p. 21)
Ü 자벨의 이 문장은 캠벨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중 나는 신기한 경험을 목격했어요. 황소 모양의 원형질이 풀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고 새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광경도 새 모양의 원형질이 물고기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
또한 황인숙의 시 ‘신성한 숲’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원형을 보는 날이 아닌가 싶다.
이 숲.
들벚나무와 사시나무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
뜻밖에 만난 놀란, 한 그루의 향나무와
밟은 적도 긁힌 적도 무수한
덩굴나무와 가시나무.
본 적은 있으나 이름 모를 나무들과
보지 못한 나무들
보지 못할 나무들
이 숲.
꿈틀거리는 나무 사이로
두려움 없이 내가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새처럼 가볍지도 않은데
이들은 내게 적의의 새를 날리지 않을까?
이 숲.
나무의 무리 가득한
숲
안개로
깊어지고.
□ 일단 옳은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만사는 즐겁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차츰 별빛이 스러지면서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부지런한 오두막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간간이 방울소리가 새벽 정적을 깨뜨린다. 고지에서 불어 내리는 산뜻한 새벽 대기에 활기를 되찾아 무거운 몸도, 배낭의 무게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즐겁고 경쾌한 걸음을 표현할 적당한 어휘가 있을 것도 같지만 사람이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은 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길을 더 즐기려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p. 23~24)
Ü 걷는 자의 행복이다. 무아지경으로 빠지는 이 순간 때문에 산을 놓아버릴 수 없다. 누군가 말하기를 오르가즘의 10배에 이르는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라고도 했다.
□ 나는 두 개의 자연이 있음을 몽상한다. 하나가 맹목적이며 거칠고 힘에 찬 공포스러운 그리고 바위를 들어 올리고 산을 뒤엎는 자연이라면 다른 하나는 조용하고 살뜰하고 힘은 있으나 부드럽고 유연해, 백합꽃잎을 그처럼 오묘하게 만들고 꽃으로 장식된 가느다란 가지를 우아하게 떨게 하는 그 자연 그리고 그 고귀하고 순결한 표정을 우리의 처녀들에게 부여한 숭고한 예술가. 그 자연이다. (p. 24)
Ü 절대자는 무가치적이다. 캠벨은 자벨이 말한 자연의 두 얼굴에 대해 힌두교의 신 칼리여신을 말하며 설명한다.
‘왼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의 손은 참혹하게 잘린 인두의 머리터럭을 거머쥐고 있었으며 위의 오른손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그 아래 손으로는 은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목에 걸린 목걸이는 인간의 머리를 꿴 것이었고 치마는 인간의 팔을 짜맞춘 것이었다. 긴 혀는 피를 찾아 낼름거렸다.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the black one, 즉 칼리 kali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다.’
□ 바위 선반 하나하나마다 빙하는 얼마나 힘찬 균열을 얼마나 풍부한 빙탑을 진열했을 것인가! 빙하는 그 아래쪽에서 지극히 순수한 것이었을 것이다. (p. 26)
Ü ice fall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했다.
□ 경치가 좋고 최단거리이며 피곤하지 않은 코스 (p. 27)
Ü 이런 건 없다.
□ 침니, 혹은 위험 장소, 오버행 등 그 밖에 클라이머들의 이상한 우상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p. 28)
Ü 나의 우상이다.
□ 모든 정신적인 높은 곳의 중턱에 학문의 미덕의 중도에 이 고개는 존재한다. 용기 있는 자는 그 길을 계속 나아갈 것이고 그리고 목적에 도달한다. 기력이 없는 자는 경사면을 재어 보고서 절망하고 중지한다. (p. 29)
Ü 어렵지만 가는 것, 모든 사람이 힘들어 할 때 앞서 가는 것, 그것이 용기다.
□ 황혼 무렵, 대산맥 둥근 봉우리에 쌓인 눈의 순수함으로 찬연하게 그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 거대하고 깊은 그늘은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가. 또한 주위를 에워싼 암벽과 일곱 개의 침봉과 발 딜리에의 절벽의 낙조는 이 얼마나 숭고함에 넘쳐 흐르는가! 우리는 가을날 아름다운 황혼의 레만 호숫가에서 당 디 미디가 마치 그녀 혼자만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빛을 선택하고 태양이 그녀를 향해 가장 화려한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p. 33)
□ 이제 모든 것은 지나가고 때가 그것을 실어다 나른다. 시간이 상처 입힐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대에게는 필요하다. 서슴지 말고 걸어가라. 그대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p. 34)
Ü 시간 앞에 당당한 자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일 게다. 이 문장, 너무 마음에 든다.
□ 여기에 그 어떤 환상의 전설이 없는 것은 인간들이 이미 그런 전설을 만들 수 없게 된 시절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p. 36)
Ü 신화 없는 시대, 바로 지금의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소떼가 산을 내려가고 들에 정적이 깃들 때 맑은 시냇가에서 잠시 피로를 풀어보라. 그때 황혼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태양이 봉우리를 붉게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면 살랑프는 그때야말로 조용히 말을 걸어 올 것이다. (p. 39)
□ 아, 만일 이 세상에 나의 즐거운 땅 그것은 나의 조국이라고 문득문득 외치고 싶은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그 자유로운 산의 품속, 황홀한 고장, 숭고한 골짜기를 숨겨놓은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비난할 지 모르나 만약 운명이 지금 나를 어딘가 먼 바닷가로 추방한다고 하면 나는 두 개의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이다. (p. 39)
Ü 캬!!! 그리워하며 눈물 흘릴 대상이 있는 것, 그것이 내 조국이다.
□ 살랑슈의 협곡은 정말 아름답다. 수량이 많은 격류는 찬란한 비폭이 되어 낙하한다. 그것이 높이 15미터나 되는 화강암 암벽까지 다가오면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무력, 둔중, 한정된 존재를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 가벼운 물줄기는 장애물을 무시하면서 바위가 없는 곳에서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람의 얼굴에 비말을 끼얹고 그 무력한 권위를 비웃는다. (p. 41)
Ü 아 멋진 표현!
□ 지도와 나침반에 의하여 코스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저 높은 알프스 산 중 인적 없는 미지의 오지, 모험에 투신하며 머무를 수 있을 곳과 식량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하는 일만큼 매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싶지 않다. 그리고 산에서의 멋진 노숙…(p. 47)
Ü 내 아마 이런 매혹에 빠져 산을 다니지 않았나 싶다. 18세기 후반의 등반가에게 이런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니.
□ 이름난 정상 정복 같은 일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마음 내키는 대로 아주 자유롭게 자기만의 기쁨을 위해 쓸쓸한 고산지대를 방황하는 자존심에서 해방된 등산가들이다. (p. 47)
□ 마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미녀처럼, 그녀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위해 장소와 기후와 시간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p. 51)
Ü 당 디 미디의 심 드 레스트(동봉)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그 동봉을 가장 사랑하는 봉우리라 밝히고 있다. 이 표현들은 도대체 어떻게 고안한 것인가.
□ 오래 전에 진 해는 하늘에 보라빛 광채를 드리우고 그 반사는 여태도 페닝 산맥의 아름다운 빙하를 물들이고 있었다. 마침 이때, 루트 살리에르 위로 둥근 달이 그 장엄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두 개의 빛이 교차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색조를 이루었다. 여기에 회색, 보라, 녹색의 가장 섬세한 색조가 어우러졌다. 순간, 색조는 아름다움과 깊이의 극을 이루었다. 그리고 조금씩 보라빛이 사라지고 엷은 녹색이 주조를 이루어 나갔다. 이윽고 달만이 혼자 남아, 그 조용한 빛을 화면 전체에 펼치는 것이었다. (p. 58)
□ 만일 오두막이 비어 있으면 이때야말로 알프스 산행에서 가장 멋있는 즐거움의 하나가 시작된다. 즉, 이 무주공산의 세계에서 어렵사리 임시 숙소를 만들거나 추위를 막거나 먹을 것을 만들기 위해 있는 지혜를 총동원하고 가능한 한 색다른 수단을 강구해 보는 즐거움 말이다. (p. 58)
Ü 필수의 장비는 자연에 널려 있다. 살아남는 것의 즐거움은 이런 결핍이 주는 즐거움이다. 위대함은 결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오! 알프스의 이 순결한 대기에 젖은 밤의 천체, 이 꿈속처럼 빛나는 장엄한 이 광경을 어찌하여 예술은 표현할 수 없단 말인가. (p. 61)
□ 오른다. 오르는 거다! 아, 강건해지고 노고에 익숙해진 모든 기관이 아무런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더 높이 더 높이 오르자! 그리하여 세계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자! 빛의 영토를 향해 오르자! 제 몸뚱이에 대한 이 만족, 정신에 대한 이 만족! (p. 61~62)
□ 아침에 사람은 낮을 향해 간다. 그것은 희망의 시간, 기쁘고 순수한 찬미의 시간이다. 황혼, 사람은 밤을 향해 간다. 그것은 우울한 몽상의 시간, 과거에 대한 애석, 미래에 대한 불안의 시간이다… 더욱 나이 들어 무덤에 가까워질 때가 오면, 어쩌면 나도 그런 황혼의 우울한 시간을 사라져가는 낮의 석별의 시간을 좋아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젊은 나는 이 아침의 순결함에 빛나는 먼 지평선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하루의 희망인 해돋이를 더욱 사랑한다. (P. 64)
Ü 그러나 자벨은 일몰에 더 정리를 느끼고 있다.
□ 이 오만한 암벽에 처음 다가가는 자의 심장은 잠시 두근거릴 것이다. (p. 64)
□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 오면 이따금 스스로 이렇게 질문할 때가 있다. 도대체 저 높은 곳까지 무엇을 찾으러 갔던가. 어떤 기묘한 즐거움이 꼬드겼길래 불안 없이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위험에 스스로 몸을 던졌던가. (p. 67)
Ü 나는 이런 질문들이 좋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있는 답을 기다리는 질문들, 정당화하는 답들이 아닌 삶의 방편이나 자세가 달라지게 할 수도 있는 질문 말이다.
□ 드 스탈 부인은 ‘우리들의 본성 중에서 모든 것이 생명을 사랑하도록 명령할 때 몸을 죽음 앞에 던지는 특이한 즐거움’이라 말했고 파스칼은 ‘호기심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본 것을 말하기 위해서만 보려고 한다.’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다른 더 깊은 곳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p. 68)
□ 그 어떤 깊고 저항하기 어려운 본능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높이면서 오르고 또 오르고 끊임없이 오르기를 원한다. 등산가가 가장 뾰죽한 봉우리만을 공간에서 가장 해방된 봉우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항상 최고의 봉우리를 남몰래 사랑하는 것이다. 두 개의 목소리가 절벽의 언저리와 높은 산봉우리 근처에서 똑똑하게 들린다. 그 하나는 인간적인 목소리로 피로와 공포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초인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가라, 더 높이 보다 더 높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다행인 것은 인간이 그 무한의 동경을 끝까지 속일 수 있다는 것, 또 승리의 그 순간에도 하나의 감추어진 실망이 그가 또 다시 배반당한 것을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승리 후에도 정상에서 보낸 장엄한 시간을 상기하고 명상하기를 즐기는 등산가여, 그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는가 묻고 싶다. (p. 69)
Ü 사색하는 등산가 에밀 자벨이여, 왜 없겠는가. 그대의 말을 새기기로 한다.
□ 3000미터 허공에 매달려 일망 천리, 론 계곡을 눈아래 하고 창공에 사라지는 평야를 멀리 바라다 보는 넓이, 불과 몇 발자국, 기울고, 울퉁불퉁하고 그런 하나의 테라스를 상상해보라. 이 정상 이 쾌청의 순간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닌다. (p. 70)
Ü 상상하라. 눈을 감으면 우리는 그 광경을 매우 자세하고 똑똑히 볼 수 있다.
□ 아, 인간의 초라함이여. 오, 세계의 왜소함이여, 이런 그림을 앞에 두고 그대들은 무엇인가. 이 빛의 나라, 이 순결의 영토에서 바라볼 때,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알프스의 메아리’에서 1870년 (p. 71)
Ü 또 다시 도가적 사유가 18세기 서양의 산악인에서 느껴진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한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적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한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장자의 말이다. 이 말 뒤에 에밀 자벨의 말을 곧바로 이어보자.
세르뱅 등반
(마터혼 4482m, 현재 4477.5m)
□ 영원히 등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지금은 용이한 것이라고 공언되고 있다. 아마도 새로운 불행이 발생하여 이 산의 어려움과 위험성이 다시 올바르게 평가될 때까지 이 생각은 지속될 것이다. (p. 74)
Ü 이것은 오늘날 에베레스트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 그 호방한 모습, 힘찬 퍼짐, 자랑스런 고립에 의한 특이한 피라미드 (p. 76)
Ü K2
□ 주위 4킬로에 걸쳐 다른 산들은 모두 몸을 낮추어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벌거벗은 채, 음울하게, 거칠게, 왕자처럼, 그는 거기에 버티고 서 있다. 허공은 그의 것이고 그 의연한 산정은 희뿌연 창공에 사라진다. (P. 77)
Ü K2의 모습이 연상된다. 산중의 산. 산을 엎드리게 하는 산, 산을 압도하는 산. 저자는 마테호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이만큼 장엄하고 고요한 광경을 눈앞에 하고 내일의 운명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내일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획을 앞두고서의 일이다. (p. 77)
Ü 어제, 오늘, 내일은 인간의 언어이자 시간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부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들에게서 인간의 시간, 내일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시간조차 무참해지는 광경.
□ 부드럽고 깊숙하게 달려드는 그늘진 청색과 태양의 마지막 빛이 던지는 순수하고 고결한 황금빛 하늘에서 이 두 개의 색채가 서로 어울려 보라빛 어린 찬연한 반영을 하늘 저 멀리 펼치고 있다. (p. 83)
Ü 일몰에 깊이 특화된 에밀 자벨의 표현이다.
□ 이곳에서 100미터쯤 위, 이제부터 우리가 오르려 하고 있는 급경사에서 저 불행한 네 사람의 추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산의 첫 등정이었다. 나는 이 무서운 드라마를 마음 속에 떠올리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잘 되지 않았다. (p. 87)
□ 20보쯤 전방에 정상이 세르뱅의 진정한 정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최후의 20보를 가는 기쁨 그것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을 것인가. (p. 89)
Ü 그리 기쁘지 않았다. 웬일인지 그리도 담담할 수가 없었다.
□ 내 마음은 무한한 기쁨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나는 자기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손으로 몸을 만져보고 싶기까지 했다. 세르뱅의 정상에서 자신의 생명이 충만해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순간이 특이하여 다시 없는 것으로 자신의 전존재로 향유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내 느낌의 모든 것을 일시에 파악하려 한 나머지 혼란 상태에 빠져 잠시 동안 아무것도 식별할 수가 없었다. (p. 91)
Ü 정상에서의 모습이다. 에밀 자벨은 정상의 풍경을 3페이지 넘게 할애하고 있는데 그 묘사가 탁월하다. 정상의 기쁨을 경험해본 사람으로 그의 묘사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를 때는 뜨거운 열정과 차츰 가까워지는 승리의 기쁨으로 그 모든 장해를 돌파할 수 있었으나 하강 때에는 피로하고 흥미도 가시어 눈앞에는 어려움만이 남는다. (p. 93)
Ü 뿐만 아니다. 진력을 다해 올랐기 때문에 내려갈 때는 모든 힘이 소진된 상태고 이미 한계 넘어 힘을 모든 써 버린 상황이라 순간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려 버린다. 대부분의 사고 하산할 때 일어난다. 명심하라.
□ 고백하지만 내 마음 저 깊은 속에서는 회한 비슷한 것이 그때 깔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나는 모든 등산가가 열망하는 이 등반을 몇 번이나 꿈꾸어 왔다. 오랫동안 나는 멀리서 열렬하게 이 승리의 잔을 갈망해 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것을 마셨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 얼마나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가. 소유욕에 불탔으면서도 일단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그때 가서 자신의 욕망을 뉘우치다니 (p. 95)
Ü 연극을 끝낸 후의 삐에로 분장을 지우는 희극인의 마음이 이러할까. 공허하다. 매우 공허해서 부끄러워진다.
발 다니비에르에서의 8일간
(187x년 7월 15일, 찌날에서)
□ 나를 끊임없이 매혹하는 고개, 모맹 패스 (p. 96)
Ü 언제가 한번 꼭 가볼 생각이다. 그때에는 당 디 미디와 모맹패스, 마테호른, 아이거 북벽을 오르리라.
□ 검은 피크는 로 벳소라 부르고 흰 봉우리는 포앙 드 찌날 일세. 전자가 음울하고 거만하고 거친 인상인만큼, 후자는 더욱 그 백색과 기품있는 윤곽으로 순수하고 단아한 부드러움을 자랑한다네. 이렇게 두드러진 대조도 드물 것이네. 마치 질투심 많은 괴물에게 감시 당하고 있는 아름다운 처녀와도 같다 할까. (p. 97~98)
Ü 에밀 자벨은 산을 의인화하는 표현에 매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마터혼의 묘사와 위의 문장을 보라.
□ 이건 살아 있어요 시시각각으로 둔한 어떤 소리가 들리고 돌더미 떨어지고 작은 산이 무너지고 하면서 끊임없이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있어요 (p. 102)
Ü 거대한 빙하의 움직임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움직인다. 그 거대하고 위대한 움직임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기하지 않은가. 거대한 빙하의 움직임은 존재 너머의 시간이 존재의 시간에게 일러주는 대우주의 시그널이다.
□ 그리고 대지는 살아 있어요. 만일, 산다는 말이 단순히 자기자신의 힘으로 행동하고 물론, 보다 긴밀하고 물질에 속해 있는 것이라 해도 한결 장엄하고 힘찬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분화구나 대양의 기슭에서처럼 여기서 당신을 매료시키는 것은 당신이 발 밑에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거대한 생물입니다. 그리고 그 미세한 생물인 당신은 호기심과 존경이 뒤섞인 감동으로 그의 무수한 기관의 하나인 이 빙하의 어렴풋한 고동에 귀를 기울이려고 오는 겁니다. (p. 102)
Ü 이런 글을 써야 한다. 반드시 인용하자.
□ 여기 와서, 세계는 변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말만의 비유가 아니다. 모든 사물은 새롭고 그 모든 모습은 기묘한 것이거나 아니면 미지의 것이다. 생명을 생각케 하는 것이라곤 여기 아무것도 없다. 자연의 두 세계는 동시에 사라지고 광물의 세계와 그 밖의 현상의 차거운 장엄만이 남아있다. (p. 106)
□ 우리는 온통 눈으로 덮인 둘레 돌 위에 앉아 싫증 내지도 않고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러나 이 광경의 아름다움 속에는 그 어떤 부족한 것이 간직되어 있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마음이 아파온다. 자연의 모든 힘의 어찌 할 수 없는 강대함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낀다. 그 난폭한 접촉에 의해 내면 세계의 섬세하고 치밀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의 도덕적 식별의 섬세함 같은 것은 지극히 하찮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온갖 것이 거대한 힘 앞에 숙명적으로 몸을 내어 맡긴 채 물질 세계의 냉혹하고 또 압도적인 인상아래 소멸한다. 물질의 일시적인 모든 모습이 멸망한다 해도 그 거대한 힘만이 혼자 살아남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말하자면 인간성에서 오는 모든 것으로부터 공허하게 되어 뭔지는 모르나 다만 무한의 사랑 같은 것만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숭고한 포옹을 받으면서 영원한 휴식 속에서 이들 항구불변의 힘과 결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p. 106~107)
Ü 지극히 불교적 사유다.
□ 이 산악지괴가 융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두터운 층을 파괴하고 그 파편을 산허리에 뿜어내었을 것이다. 이런 강대한 파괴력, 상상을 초월한 현상은 생각만 해도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융기하는 지각의 덩이로서는 두께 1000미터 정도의 외피를 들어올리거나 찢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실로 단단하고 강한 암석도 여기서는 마치 부드러운 헝겊조각처럼 접어지기도 하고 또 비틀어 올려졌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밑 힘에게는 그런 저항쯤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융기의 건에 대해 c와 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새로운 형식에 의한 낡은 논쟁, 즉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성논자와 화성논자의 논쟁이다. (p. 109)
Ü 이 사람 봐라. 흥미로운 사람이다. 상상의 나래와 사유의 지평이 한계 지어지지 않은 사람이구나.
□ 보편화 하는 것은 상상이며 가설을 세우는 것도 상상이다. (p. 110(
□ 이 지구 전체가 아직도 뭉글뭉글한 상태여서 헤아릴 수 없는 뜨거운 열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뒤덮고 있는 얇은 덮개 위에 살고 있다고 몽상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상식을 떠난 난폭하고 가공할 가설은 북쪽의 평온한 정신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사물의 완만하고 무한한 전개를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거나 시냇물이 숱한 시간을 소비하여 산을 무너뜨리고 강장동물이 대륙을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p. 110)
Ü 넓은 시선이다. 시적이고 과학적이며 미래적이다.
□ 그것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폐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슨 폐허인가? 먼지가 되어 사라질 우리 세계의 폐허이다. 이 관념 앞에서는 고집을 부려도 소용없다.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없다. 인류도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토록 아름답고 생명에 넘쳐 있는 지구, 이 지구도 언젠가는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111)
Ü 죽으면 썩어진다. 광막한 우주에 우리는 시간을 빌려 태어나야 했고 살아야만 했고 죽어야만 하는 미물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을 원하는가.
□ 최후의 인간이 최후의 오두막 그 폐허 위에서 멸망할 때 소크라테스의 사상, 셰익스피어의 창조, 라파엘로의 심상, 베토벤의 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동시에 두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둘이 다같이 무궁하며 멋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세계 중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p. 111~112)
Ü 장자의 제물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벨은 분명 장자를 일독했을 것이다. 확신한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만물의 조화라 한다.’
□ 한줄기 햇빛 속에는 철학의 모든 체계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웅변이 있다.
나는 생의 저 쪽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몇 세기 뒤에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모른다. 그런 것은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이 풍요한 햇빛 아래, 알프스의 맑은 공기 속에서 나는 진정코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전체가 내 심장 속에 있다. 그런데도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만든 자는 또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지금 살아있는 것보다 멋진 것일까? 지금 있는 모든 것을 나는 예전에 꿈꾼 적이 있었던가? 그러면서 다시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려고 하는가! (p. 112)
Ü 백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듯 백 년 후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공허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문장은 이 책의 백미다.
□ 산의 자유여! 나 자신의 즐거운 소유여! 미지의 쓸쓸한 봉우리를 정처 없이 헤매며 순백의 눈 위를 밟고 하늘을 향해 오르는 행복이여! 신의 장엄하고 수려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경건하고 감미로운 기쁨을 이보다 더 가슴 뿌듯하게 하는 무엇이 또 있단 말인가. (p. 113)
Ü 자벨은 연타를 날린다.
□ 고산의 험준한 하늘 밑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정적 속의 그 완만함, 그 무관심, 그리고 그 고립된 생활! 참으로 열띠고 황망하고 행동과 사색으로 가득한 우리의 생활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이 운명은 무엇인가. (p. 116)
□ 다만 어려운 것은 가장 서툰 사람이 지상 3미터 높이에서나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일을 크레바스를 내려다 보는 수백 미터 사면에서 서슴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다. 두려운 단 한가지 사실은 상상이다. 파스칼이 착오와 허위의 정부라고 말한, 그 상상이다. (p. 119)
Ü 높은 고도에서 인간이 하는 상상은 두려움을 낳는다. 쭈라타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쭈라타지 않으면 행동은 자연스럽다.
□ 신중과 야심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p. 121)
Ü 산에서의 판단은 항상 갈등한다. 정상의 마력은 뿌리치기 힘들고 자신의 능력은 항상 한계를 보인다. 그 둘 사이의 갈등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 미국의 쓸쓸한 오지 인디언들은 내세에는 사냥감이 많은 대초원에서 영원히 수렵할 수 있는 운명으로 타고 나기를 꿈꾼다고 한다. 친구여 나의 소망은 자네는 웃을 테지만 다정한 다른 것들 것 함께 높은 산의 골짜기 휴식을 주는 깊은 평화, 하얀 봉우리들의 자랑스런 싱그러움, 끝없는 산행, 항상 되풀이되는 이런 등산에 대한 희망 없이는 더 나은 인생을 꿈꾸지 못할 것 같네. (p. 128)
Ü 이 사람 진정한 산꾼이다.
바이스혼 등반
(4512m 현재 4505m)
□ 동트기 전 대산맥이 하나의 긴 퍼짐이 되어 전개하는 전망대, 예를 들면, 디아블루레, 당 드 모르클 등에 올라가 보면, 태양이 스스로 그들 봉우리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p. 129)
□ 바이스 혼은 1861년 그 정상 처녀설에 발을 얹게 된 최초의 사람들은 물리학자 틴달 (p. 131)
□ 우툴두툴한 바위 위 빙하를 앞에 둔 3000미터 높이에서 하는 이런 식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데가 있다. 그것은 고락을 함께 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맛이다. (p. 133)
Ü 8000m 눈물의 스프와 한 여름 저체온증을 걱정하며 마시는 라면 국물, 장기 등반에 울러맨 40kg의 배낭, 남은 2m 절벽에 매달려 힘이 빠지며 손가락이 풀려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는 것.
□ 톱니 같은 침봉과 흔들거리는 작은 탑들이 숲을 이루고 양쪽으로는 그 밑을 알 수 없는 심연이 내려다 보이는 길이 약 1000미터의 황폐한 성벽을 상상해 보라. (p. 140)
□ 물통은 모두 비어있고 식량도 바닥이 나 있었다. 그리고 심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벌써 추위에 떨기 시작했다. (p. 145)
□ 이런 암장을 밤에 내려가다간 목뼈가 부러지기 십상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상황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어떤 매력마저 느낀다. (p. 146)
Ü 맞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즐겨왔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으나 앞으로의 일들을 무조건 긍정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 내 머리는 피로와 졸음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저 하늘에 요괴스런 자가 바로 우리를 위협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p. 147)
찌날 로트 혼 등반
(4223m 현재 4221m)
□ 설령 기술했다 해도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이 아니면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또한 곤란한 등반 중에는 치밀한 관찰을 할 수도 없다. 산에 대한 능력에도 등산자 각자의 차이가 있으며 산행이 결행된 시기의 상황이나 산의 컨디션, 등산자와 가이드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의 하나가 된다. (p. 158)
당 데랑 등반
(4189m 현재 4171m)
□ 베르그슈른트 (p. 161)
Ü 빙하의 최상류부에서 빙하와 주변부 기반암 사이에 발달하는 일종의 크레바스(crevasses)를 말한다.
□ 일체가 혼란과 심연뿐이며 지옥의 광경도 여기 비하면 별 것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p. 162)
살방 (발레의 한 산촌)
□ 지구의 외피를 꿰뚫은 몽블랑에게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거칠게 융기하여 단열된 그 방대한 지층은 거의 수직으로 서 있고 그 단편의 날카로운 이빨자국은 허공에 거뭇거뭇한 정수리를 뚜렷하게 내보이고 있다. (p. 167)
□ 두께 2000미터의 얼음은 이곳으로 흘러내려 론 계곡에 가서 큰 물결과 합류한 것이다. (p. 167)
□ 거대한 빙하는 그대로 거기를 뚫고 나갔다. 그 무거운 덩치들은 몇 천 년 동안을 이들 바위 위에 얹혀져 갈아내고 부수고 누르고 저항하는 것들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p. 168)
Ü 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빙하는 용해에 의해 후퇴하고 그에 따라 배후에 퇴석 지대를 낳고 자신의 아래에서 가루가 된 암석에서 생긴 흙과 혼합된 돌과 자갈의 막대한 혼돈을 남긴 것이다. (p. 168)
Ü 시적 표현에 감탄한다.
□ 여기 저기 퍼져 뭇산의 단단한 뼈대마다에 넝마처럼 달라붙은 이 진흙, 바위 머리 뒤에 축적된 이 질척질척한 침전물이야말로 후일 이 협곡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근원을 만들어준 바로 그것이다. 삶과 죽음은 자연계 도처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괴물 같은 빙하가 후퇴함에 따라 식물은 곧 그 뒤를 이어 나타나기 시작하여 황량한 장소, 풍화된 벌거벗은 바위, 혼돈된 잔해와 빙하가 내다버린 메마른 흙더미를 헤집고 퍼져나갔다. (p. 169
□ 아네모네 (p. 170)
Ü 아네모네 이야기를 변신이야기에서 인용한다.
‘베누스 여신이 이 청년에게 반하게 된 내력은 이렇다. 베누스 연신의 아들 쿠피도는 어느 날 화살통을 멘 체로 어머니에 게 입을 맞추려다 화살통 위로 비죽이 솟아오른 화살촉으로 그만 어머니 베누스 여신의 젖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화살촉에 찔리는 순간 인간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린 이 여신은 하늘보다도 아도니스가 좋았던 것이다.
베누스까지도 반하게 만들었던 너의 젊음, 너의 그 아름다움, 너의 그 매력도 사자나 멧돼지나 그 밖의 사나운 들짐승의 눈이나 사나운 성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멧돼지는 그 무서운 엄니로 전광석화같이 공격하고 사자는 포악하여 언제나 인간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기다린다. 내 너에게 이르거니와 이런 짐승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여신은 아도니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런 놈을 만나거든 내 너에게 당부하거니와 몸을 피하도록 하여라. 어느 날 아도니스는 멧돼지를 만났다. 맷돼지는 날랜 걸음으로이 아도니스를 따라잡았고 그 엄니로 청년의 사타구니를 찍어 누런 모래밭에다 굴려버린 것이다.
이 말 끝에 베누스 여신은 아도니스의 피에다 향기로운 넥타르를 뿌렸다. 신주가 뿌려지자 아도니스의 피에 젖었던 노란 모래에서 거품이 일었고 잠시 후에는 여기에서 핏빛 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이 꽃은 피기가 무섭게 곧 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람을 연상하여 이 꽃의 이름을 아네모네라고 부른다.’ 오르페우스의 기나긴 이야기는 이로써 끝난다.
□ 흑사병이 그들의 아름다운 바위를 인간의 피로 물들이게도 했다.
고산의 아름다운 적막 그 평화 속에서 빙하와 이웃한 저 높은 곳에서 투쟁이 있었다고 누가 믿을 수나 있겠는가. (p. 177)
Ü 투쟁은 삶의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
□ 선량한 살방 사람들은 경험에 의해서 저 유명한 멜서스의 법칙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다윈의 대담한 가설이 탄생한 법칙, 즉 인구는 그것을 양육할 산물보다 훨씬 급속하게 증가하는 것이라는 치명적인 법칙이다. (p. 180)
Ü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의 지혜에서 이야기 한다.
‘멜서스의 인구론, 찰스 다윈은 여기에서 자연도태의 원리와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을 얻었다. 유기체의 증가율의 기하학적 속도와 이에 이어 일어나는 경쟁을 논할 때,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멜서스의 이론을 동식물의 세계 전체에 다양하게 적용한 것이다. 이 경우, 식량의 인공적 증가도 신중한 결혼 자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의 요지를 철학자 김용규는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 힘들다! 그러나 걸어야만 한다. 이 괴로운 작업, 이것이 빵이다. 이것이 가족들의 생명이다. 가엾은 조그만 맨발이여! 그 일생에서 그들은 대체 몇 번이나 이 돌을 밟고 이 험한 길을 오르내릴 것인가. (p. 184)
Ü 모든 척박함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 특히 이 마을은 이른 아침 금빛 나는 첫 햇살이 마을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그 순간이 정말 볼만하다. 커다란 장방향의 초원 북쪽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의 오두막은 마치 두 팔을 벌리고 늘어선 것처럼 양쪽으로 길게 그러나 짐을 들고 지나갈만한 골목길을 내어놓고 사이 좋게 늘어서 있다. (p. 185)
Ü 이것은 마치 남체 바자를 묘사한 것 같다. 3400m 고지에 있는 이 마을은 정연하고 분주하다.
□ 하나하나의 조그만 사연들이 물건의 값어치를 높여주고 있으니 인생 말년에 약간의 휴식을 보장해 줄 물건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노역을 되풀이하면서 배운 현명 검약가들의 질서와 정결을 사랑하는 마음, 평안한 만족, 생활의 안락함을 나타내고 있다. (p. 192)
Ü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는 않지만 손때 묻은 물건들의 깊은 감흥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나는 네팔의 산악박물관에 들렀을 때 타베이 준코 (일본 여성 산악인) 의 때묻은 피켈을 보고 이런 감흥을 받은 듯 하다.
□ 어떤 형식의 것이라도 만일 그것이 성스런 높은 곳에 대한 애정의 비약이 아니라면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과 천국에 있는 다른 인물들과의 사이를 구별하는 것 같은 일은 냉담한 박사들에게 맡겨놓으면 될 것이다. (p. 195)
Ü 그리하여 종교는 사유의 비약을 필히 수반하는 것이다. 사유의 비약은 어떻게 비롯되는 것일까.
‘수학자가 삼각형에 대한 정리를 증명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딘가에 그린 그 어떤 도형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도형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확립된 정리는 무조건적이어서 어느 때나 들어맞는다.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이에 반하여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겉치레뿐이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이라고 보는 관점까지 거의 다다랐다. 이것이야말로 피타고라스 학설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 후 이런 생각이 줄곧 신학은 물론 철학 사상까지도 지배했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했다.
관념이 실재를 지배한 이 삼각형의 사건, 사유는 매우 오랫동안 인간의 사고를 지배했다. 기독교의 수태고지, 부활 개념도 이와 같은 사념에서 출발하지 않았겠는가. 플라톤이 기하학을 모르는 자를 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러한 관념에 기초한 이데아를 그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념의 공리가 이데아를 믿게 하는 교리이자 도구였으니 말이다.
□ 그녀들은 여자 특유의 직감으로 평지의 복장은 평지의 사상과 허영을 날라다 준다고 생각한다. (p. 197)
□ 그리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부의 원천을 앞에 두고 선망이 활동을 개시할 것이며 경쟁이 움트고 인간의 마음은 살방이라 해서 타처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니 전에는 우애적이었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이제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변할 것이다. (p. 200~201)
Ü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에서 자본의 생리로 인해 인간의 영혼이 침해 받고 있다.
□ 그러나 세상사 흐름은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살방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그 욕망의 단순함 속에야말로 모든 풍요 중의 가장 진실한 풍요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인지도 모른다. (p. 201)
Ü 그렇다. 혼자 자본과 싸운다고 바뀌어질 것이 있는가. 혼자 푸르러 살면 좋은 것인가. 그러나 그래야 한다.
살랑슈의 협곡
□ 그 광대하고 수려한 영토에 새로이 나타난 인간이 희희낙낙하면서 거기를 차지하고 무인지경의 대륙을 지나가며 하나하나 언덕을 밟고 자기 앞에 펼쳐진 미지의 공간을 보았을 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이 엄숙하고 산뜻한 적막경을 앞에 하고 숲의 그늘에서 나뭇잎의 신비로운 속삭임에서 바위 사이로 흐르는 격류의 굉음에서 얼마나 황홀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을 것인가. (p. 202)
Ü 그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겠다. 아름다움의 대문명이 있었다면 말이다.
□ 길도 없는 하나의 골짜기가 도끼소리 한번 울리지 않은 수목림이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못한 심연 속의 폭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지금 서둘러 그것을 즐겨야 한다. (p. 204)
Ü 그런 곳은 이제 자신들의 마음속에서나 찾아야 할 것.
□ 시냇물은 어느 것이나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살랑슈의 물결은 세계를 달리고 싶은 심정으로 협곡으로 돌진한다. (p. 205)
□ 이만한 가벼운 물을 이만한 푹신한 흰 거품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p. 206)
Ü 시적이다.
□ 어두운 궁륭을 앞에 두고 물보라가 햇빛과 희롱하며 거기 3중의 무지개를 그리고 있다. 내려가면서 폭포소리는 점점 그 맹위를 더해가고 저 밑에는 협곡의 훨씬 높은 곳까지 이따금 튀어오르는 은빛 물보라가 마지막 폭포의 크기를 말해준다. (p. 207)
Ü 폭포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고소에서 낙하하는 물은 맹렬한 기세로 바위를 때리고 물의 덩어리는 무서운 기세로 그대로 비스듬히 튀어올라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심연으로 뛰어든다. 거품이 날아 흩어질 때마다 자신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이 착각은 번번히 되풀이되기 때문에 그 진동에 계속 견디어 내기란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이 곧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이 광폭한 힘의 막대한 발산이 던져주는 그 매력 때문이다. (p. 208)
Ü 멍하니 폭포의 굉음을 듣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정이다.
□ 사고 또한 세상 관심사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의 사슬에서 자유로이 비상하며 빛 속에서 파도와 함께 희롱하고 소나무가지와 더불어 흔들리며 혹은 창공을 나르는 독수리를 쫓는다. 사고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고대의 거친 자연과 제대로 어울린 사교는 사랑으로 자연을 보듬으며 이윽고 상냥하고 조화로운 감정에 충만하여 세계의 여명기의 그 평화와 행복의 그 어떤 느낌을 찾아낸다. 그 마음 저 깊은 속에 인류가 황야에서 노래한 저 최초의 찬가의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 (p. 209)
□ 조그만 균열만 있으면 투박하고 굵직한 줄기들이 뻗어 나와 산뜻한 잎사귀의 관을 씌운다. 그리고 수직의 암벽 측면에는 노송나무가 그 균열에 뿌리를 내려 집요하게 성장하고 바위에 달라 붙어서 그 어두운 가지를 심연위로 뻗고 있다. 이렇게 단단한 바위 속에서 이렇게 많은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p. 210)
Ü 모르는가 화강암은 그 속에 물을 품고 있다.
□ 그 큰 비폭과 격앙된 분노를 마감한다. (p. 211)
□ 모든 물결이 그 빛을 향해 일시에 돌진한다. 모든 것이 가장 작은 한방울까지도 빛의 조각 조각을 탐익한다. (p. 211)
Ü 멋진 표현이다.
□ 어느 경솔한 투기 사업가가 이 최후의 폭포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익을 보기 위해 폭포를 상처내는데 성공했다. 하나의 회랑을 만들기 위해 수량을 제한했으며 물의 흐름을 억제한 저 유명한 피스 바슈가 그것이다. (p. 211)
□ 그러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발로 짓밟지 않고는 그 정적을 맛볼 수 없고 죽이지 않고는 한 송이 꽃도 꺾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숙명적 인과다. (p. 212)
Ü 자벨의 통찰은 경이롭다. 자벨이 말하고 있는 숙명적 인과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에 의해 다음과 같이 신화차원의 일로 해석된다.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신화의 힘 P. 91~92)
생물을 죽여 내가 취함으로 내가 살고 그리고 결국 내가 죽어 너에게로 간다. 원초적인 범죄에 대한 죽임의 양형 기준, 그 벌을 받는 일과 원형의 삶에서 화해하는 일은 같다. 결국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신화의 힘 p. 96)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원형에 다가서는 삶의 Ritual. 식물과 같이 스스로 밥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원초적 결함이 이러한 리츄얼을 낳았으나 인간에게는 결함을 넘어선 범죄로의 진화가 이 하나의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MORE’
트리앙 산군
□ 경험을 쌓고 신중한 두세사람의 동료와 협력해서 지도를 면밀히 연구하고 현장을 사전에 답사한 뒤에 모험에 들어간다. 남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루트를 발견하여 이를 개척하고 타인이 거둔 승리를 새롭게 하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승리를 획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런 종류의 탐험에 가장 알맞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p. 215)
□ 독자에게 다행한 일은 지면이 부족한 것이다. (p. 215)
□ 이 아름다운 정적의 깡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몽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으나 그 꿈을 실현 시키려면 문제가 다른다. (p. 217)
□ 크레바스의 대부분이 단단하게 눈으로 메꾸어져 있는 이 순결 무구한 융단 위를 가면서 눈의 사하라를 횡단하기 시작해보라. 천보를 걸어도 자신의 위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것이다. (p. 219)
Ü 그 황망함은 겪어봐야 알 것이다. 캠프1에서 캠프2 가는 길은 하염없었다.
투르 노아르의 초등정
(또한 그대 산들이여 어이하여 그대 이같이 아름다운가! –바이런-)
□ 내가 특히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몽블랑 산군의 이 동녁 끝부분이다. (p. 226)
□ 긍지 높은 화강암이여! (p. 226)
□ 가자!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 가는데 이렇게 꾸물댈 수는 없지 않은가! (p. 226)
□ 나는 도회지의 그 단조로운 생활을 끊어버리고 이 같은 야성의 세계에 몸을 던져 단 하룻밤만이라도 우리들의 조상이 그 숲 속에서 영위했던 것과 같은 생활을 우리도 영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p. 230)
Ü 어째서 이런 판에 박힌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되었을까. 임금 노동이 아니라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런 개 같은 인생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트레버스해야 할 험준하고 미끌미끌한 화강암, 감아 붙거나 직선으로 올라야만 하는 부서진 거대한 바위의 퇴적, 망설이면서 오를 수밖에 없는 빙빙 감겨진 눈차양, 혹은 면도날 같은 짧은 눈의 등성이 (p. 231)
□ 엄청난 중량에도 불구하고 창공에 부각된 이 화강암을, 인간이 그 발등 위를 기어 다니고 가련한 작은 손이 그 두렵고 험한 살결에 닿을 때는 흡사 잠들어 있는 어떤 거대한 괴물의 등딱지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p. 232)
Ü 이 시적 표현을…다행이다. 이 표현을 산악인이 해주어서. 자벨이여 고맙다.
□ 화강암의 아주 작은 주름살 같은 표면에 손끝을 걸고 구두 끝을 바위에 걸어 몸을 지탱한다. 어쩌면 미켈란젤로를 즐겁게 했을지도 모를 그런 자세로 몸을 비틀기도 한다. (p. 233)
Ü 캬 이런 멋진 표현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 아, 그 아름다운 한때여! 언어를 초월한 기쁨이여! (p. 233)
Ü 언어 위의 세계, 존재 너머의 그곳, 시간 이전의 시간.
□ 3000미터 허공에서 아름다운 화강암을 기어 오르는 일만큼 강렬하고 순수한 기쁨을 내게 준일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왜, 생의 대부분을 어리석은 새장 속에서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문명이 이 고산의 빛나는 세계로 발전해가도록 하는 것이 자연에게는 큰 희생을 치루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 광대한 지평선과 마주하여 이렇게 맑은 대기, 이토록 투명한 빛 속에서 순결하고 힘찬 온갖 것에 둘러싸여 있을 때 인간은 결코 나빠질 수 없다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적어도 철학자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선이라거나 자연은 우리 요구에 적응하는 본능만을 우리에게 주었거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많은 불행한 자들의 가슴에 우리들이 거기 살기를 금지 당한 저 높은 산들에 대한 극복하기 어려운 사랑을 심어주었단 말인가? (p. 234)
Ü 에밀 자벨은 깊다. 나의 롤 모델이 되려 한다.
□ 그 옛날의 시가 우리의 가련한 현대의 영혼 속에서 모두 사멸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p. 235)
□ 그리고 반쯤 덮인 좁다랗게 붕괴된 모서리를 이루고 있는 정상은 어떤 인간의 자취로부터도 더렵혀지지 않고 있었다. (p. 235)
□ 절벽에 두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과 좋은 눈을 지닌 행복을 함께 순박하게 생각하게 하는 전망의 하나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p. 236)
Ü 내 단명함은 삶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나 산에 올라 절벽 위에서 두 다리를 흔들거리는 그 자유는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으리. 그 단명함,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에 뜻밖에도 우리는 무한의 지경을 탐익할 수 있다.
□ 히말라야의 고소 적막의 한복판에서 법열에 잠겨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천 년을 머물렀다는 저 고대 인도 바라몬 승처럼 왜 나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는가. 신앙을 잃은 우리들의 세기에서는 이제 그런 기적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p. 239)
Ü 물질이 만연하여 얻게 된 것도 많으나 잃게 된 것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신앙이다. 신화이다. 자벨이 위 문장에서 말하는 머무른다의 의미는 자신의 마음이 머무는 것을 마땅히 해라는 금강경의 금문자를 떠올리게 한다.
□ 이들 바위가 존재하고 창공에 그 자랑스러운 나체를 우뚝 솟구쳐 올린, 헤아릴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을 뿐더러 어느 누구의 눈도 지금 그대가 내다 보고 있는 바를 보지 못했으며 이 세상이 비롯된 이후 여기에 계속되었던 침묵을 최초로 깨뜨린 것이 그대 음성이고 그리고 인류 최초의 대표자로서 이 황량한 처소에 나타나는 특권을 부여받은 자가 많은 군중 속에서 우연히도 선택된 인간, 즉 다름 아닌 그대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p. 242)
Ü 인류 최초로 미답봉을 오른 인간의 감정에 대한 표현은 아마도 에밀 자벨이 이 세상의 갑이다. 그러나 등정행위 자체는 반인류적이라 할 수도 있다. 수 천년 수렵시대를 거치며 신성시 되던 산은 등산이라는 즐길 수 있는 행위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그것 또한 에밀 자벨이 혐오해마지 않는 문명의 이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 인간이 여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지구의 이 일각은 인간의 것이다. (p. 243)
□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소멸한다. 그런 것은 골짜기의 푸른 주름살 밑 조그만 한 구석이나 작게 희뿌옇게 긁힌 상처에 약간 그 자국을 인정할 뿐이다. 인간은 무서운 공간의 넓이 속에 제 혼자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때 우주의 신비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우리에게 그 진정한 관념을 줄 수는 없는 것, 뿐인가 눈을 뜨면 뜰수록 그 신비는 커지기만 한다는 다른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회에 사로잡힌다. 이런 무한의 공허를 바라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사람은 일찍이 몰랐던 불안에 떨게 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애착을 느끼는 이런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정말인가, 하고 자문한다. 이 심장,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이 사랑의 아궁이가 어딘가 암흑으로 사라지기 위해 한때 흔들리고 있는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p. 244)
Ü 고전이 이야기하던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한계를 느꼈듯 자벨 또한 자신의 모습과 운명에 대한 연민이 광활한 알프스 앞에서 무참해 지는 순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산에서 아름다움은 공포가 되고 공포는 다시 아름다움이 된다.
□ 바위에 오르는 자는 단 일순간이라도 그 목적과 수단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암벽등반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예술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실행에 있어서도 참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p. 247)
□ 그의 정신은 다른 어떤 세상사에도 쏠리지 않으니까 그는 늘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한 장소로 나갔다가 죽게 되는 산양은 대부분 언제나 먹보 산양이라는 것을 (p. 247)
플랑 스리지에의 포도의 집
(오,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 저 멀리 빛나는 지평선과 함께, 잔잔하게 이어지는 큰 산자락, 투명한 포도잎 창살 아래 숨겨진 그 행복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부드러운 풀밭에 앉아 포도나뭇가지 사이로 많은 비용을 들여 행복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 멀리 포르클라 가도를 오르내리는 것을 내다본다. 그리고 이따금 그저 손을 한번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잘 익은 금빛 포도 한 송이를 따서는 둘이서 웃으며 달콤한 말을 주고 받는다.
우리는 끝내 친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내내 황금시대의 일을 꿈속에 그리고 있었다. (p. 254)
Ü 자벨은 끝까지 일상을 배반한다. 포도를 상상하는 일조차 그는 자연에 묻힌 인간의 모습을 동경하고 새장 속 인간의 삶에 분노한다.
그가 말한 황금시대는 정확히 어떤 생각인지는 당장에는 알 수가 없다.
3. ‘오르는 자의 꿈’ (내가 저자라면)
‘시간이 상처 입힐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대에게는 필요하다. 서슴지 말고 걸어가라. 그대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에밀 자벨-
19세기 ‘정상 정복’ 이라는 다소 천박한 욕망을 토대로 진행된 비약적인 등산 발전은 1세기 내에 대부분의 알프스 지역 봉우리들에 인간의 발을 허락했다. 인류의 대부분의 시간이 수렵을 통한 원시적 삶이라 봤을 때 등산은 반인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렵의 시대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신봉하면서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산들은 대부분 신격화되었고 신화의 토대가 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산들이 인간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는 근대의 제국주의의 팽창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아쉽게도 프랑스 산악인 emile javelle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당시 대부분의 산악인들과는 조금은 달랐고 소규모든 대규모든 산악회의 소속으로 활동하던 세태와는 달랐다. 그는 늘 개별적이었고 사유적이었다. 산에 올라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고 자신의 미천함을 깨달았다.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소멸한다. 그런 것은 골짜기의 푸른 주름살 밑 조그만 한 구석이나 작게 희뿌옇게 긁힌 상처에 약간 그 자국을 인정할 뿐이다. 인간은 무서운 공간의 넓이 속에 제 혼자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때 우주의 신비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우리에게 그 진정한 관념을 줄 수는 없는 것, 뿐인가 눈을 뜨면 뜰수록 그 신비는 커지기만 한다는 다른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회에 사로잡힌다. 이런 무한의 공허를 바라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사람은 일찍이 몰랐던 불안에 떨게 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애착을 느끼는 이런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정말인가, 하고 자문한다. 이 심장,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이 사랑의 아궁이가 어딘가 암흑으로 사라지기 위해 한때 흔들리고 있는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자연을 동경하여 산에 올랐지만 그 산을 두려워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물인 자신이 우주의 산물인 산 앞에 시간 너머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 앞에 시간의 존재가 감히 들어가서 비벼대는 일을 두려워하였다. 그가 남긴 장자적 사유는 어떤가.
‘아, 인간의 초라함이여. 오, 세계의 왜소함이여, 이런 그림을 앞에 두고 그대들은 무엇인가. 이 빛의 나라, 이 순결의 영토에서 바라볼 때,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최후의 인간이 최후의 오두막 그 폐허 위에서 멸망할 때 소크라테스의 사상, 셰익스피어의 창조, 라파엘로의 심상, 베토벤의 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동시에 두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둘이 다같이 무궁하며 멋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세계 중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또한 그가 남긴 산과 계곡, 폭포, 광막한 알프스의 준봉들을 표현한 심상은 어떤가. 기가 막힌다. 나는 그가 남긴 주옥 같은 자연에 대한 표현이 산악인의 글에서 나오게 되었음을 깊이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산을 사랑하여 산에서 한 평생 놀다 가고자 했음을 자신의 유일한 철학이라 강조하던 한 산악인은 그 깊은 철학적 사유를 더하여 산이 그를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지 않았나 한다. 왜냐하면 산이 그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까운 36년 짧은 해를 산과 함께 보내어 산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의 사후에 펴낸 유고집이다. 주로 그의 등반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는 등반기를 쓴 산악인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산악인이었다. 글은 심오하고 깨끗하다. 인간의 뇌를 꺼내 풍욕시키는 매력이 있는 글이다. 1991년 국내에 처음 소개되어 현재는 절판된 귀한 책이다. 그래서 책의 구성은 매우 단조롭다. 더 이상 단조로울 수 없을 만큼이지만 그 묵직한 단순함 속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한 등산가의 강철 같은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의 표현을 많이 인용하기로 했다. Emile javelle, 그를 내 롤모델로 삼아 죽은 산악인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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