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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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 이르는 길은 멀었다. 죽은 자들은 모두 강을 건너야 했다. 비통의 강을 건너고 시름의 강을 지나 또 불의 강을 넘고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야 했다. 그러고도 다시 한참동안 저승의 벌판을 지나면 마침내 아홉 구비로 굽어 흐르는 스튁스 강을 만나게 된다. 저승은 스튁스 강 건너에 있었다.
무서운 ‘증오의 강’에는 죽음 같은 증오의 물결
깊고 검은 ‘시름의 강’, 참혹한 ‘비통의 강’
회한의 흐름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때로는 ‘비통의 강’, 때로는 ‘통곡의 강’
용솟음치는 불길의 폭포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불의 강’
여기에서 멀리 떨어져 조용히 흐르는 ‘망각의 강’
이 강물을 마시는 자는 전생의 삶과 존재,
희로애락을 모두 잊는다. *
비통의 강이라 불리는 아케론 강은 아무나 건널 수 없었다. 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고,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나누는 경계였다. 살아서는 건널 수 없고, 죽은 자들은 그 강을 다시 건너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을 건너 저승의 세계에 다녀온 자들이 있었다. 영웅 헤라클레스와 오르페우스였다. 그리고 에로스의 여인 푸쉬케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전해준 이야기 덕분에 저승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집쟁이 카론 영감의 이야기조차도.
카론 영감은 아케론 강에서 죽은 자들을 강 건너 저승으로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올림포스의 위대한 신도 아니고, 특별한 권능을 가진 존재도 아니지만, 그는 결코 만만하게 볼 영감이 아니었다. 비록 가진 것은 밑창도 없는 소가죽으로 만든 조각배가 전부였지만, 그의 고집이 얼마나 세고 성격 또한 까탈스러운지 도무지 에누리라는 것이 없었다. 그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신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제우스의 전령인 헤르메스만이 하데스에게 올림포스의 소식을 전하고, 제우스에게 저승세계의 동정을 알리기 위해 다닐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들 입장에서 저승세계에 다녀와야 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 싶겠지만,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에게는 경우가 좀 달랐다. 누구나 꼭 한번 가야할 길에서 그를 만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카론 영감의 배를 얻어 타야 했다. 아무리 죽은 혼령일망정 아케론 강을 혼자서는 건널 수 없었다. 그의 배를 타려면 일단 엽전 한 닢씩은 지녀야 했다. 하지만 배삯을 지녔다고 아무나 태워주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깐깐한 그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때문에 아케론 강가에는 아직 그의 배를 얻어 타지 못한 망자들로 늘 넘쳐났다. 미처 엽전을 준비하지 못한 자도 있었고, 생전의 버릇대로 엽전을 꾸려는 자들도 있었다. 죽은 사실이 억울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도 있었고,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배의 좋은 자리를 차지해보려고 허세와 잔꾀를 부리기도 했다. 죽은 자들은 저마다 사연도 구구절절했고, 행색도 가지가지였다. 그렇지만 먼저 죽었다고 해서 먼저 배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억울하다고 해서 도루 이승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걸음도 아니었다. 카론은 그런 자들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제 풀에 제가 지쳐 마침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이승에서 가졌던 모든 것들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죽음도 연습이 필요했다.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린 자들은 곧 고분고분해졌다. 카론 영감은 그런 자들 중에서 몇을 골라 자신의 배에 태웠다. 그래야 뱃길도 무탈했다. 단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영웅 헤라클레스였다.
말이 좋아 영웅이지 그는 거의 불한당이었다. 처음부터 우격다짐으로 멱살을 움켜잡았고, 난동을 부렸다.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치우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제우스의 핏줄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제우스의 자식이라지만 그때 당했던 수모를 생각하면 카론영감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졌다. 헤라클레스는 마치 맡겨놓은 것을 되찾아가듯 케르베로스를 데려가야겠다며 저승길을 재촉했었다. 제 자식과 아내를 때려죽이고 그 죄를 씻고자 저승에 온 사연을 카론 영감이 모를 리 없었다. 신들과 인간세계를 통틀어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우스의 바람기 덕분에 태어난 핏줄이었고, 그 출생의 운명 때문에 헤라여신의 눈 밖에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길이었음을 카론 영감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딱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런 연민을 가질 겨를조차 없었다. 막무가내로 저승까지 내려간 헤라클레스는 결국 저승 문을 지키던 케르베로스를 데려갔지만 그 괴물만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감히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겠다며 저승으로 숨어들었던 테세우스도 함께 데려갔다. 그 일로 저승세계는 발칵 뒤집어졌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됐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승세계로 돌아가는 헤라클레스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스튁스는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길을 열었고, 플레게톤의 불길도 꺼졌으며, 코퀴토스도 숨을 쉬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배가 떠있던 아케론마저도 통곡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실 하데스도 어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 때문에 애궃은 카론 영감은 한 해 내내 고역을 치러야 했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헤라클레스의 경우에 비하면 오르페우스의 경우는 달랐다.
아폴론의 아들 오르페우스는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독사에 물려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하다 마침내 저승세계의 신 하데스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사연도 사연이었지만, 어디 그런 경우가 한 둘이던가. 저승길을 안내하던 사자들에게 애걸하며 징징대던 혼령들을 숱하게 겪어본 카론이었다. 그런 사연 저런 슬픔 다 들어주다보면 어느 누구하나 저승길로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에게는 아폴론의 아들답게 마녀 싸이렌도 물리친 하프연주 솜씨가 있었다. 카론 영감은 그 하프연주에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잠이 든 척 했었다. 또 다시 떨어질 하데스의 불호령이 두렵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 늙은이에게도 하나쯤 있게 마련이었다. 결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젊음, 그리고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 자신의 목숨을 바꿀 수도 있는 광기와 열정. 카론 영감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영감에게도 그런 로망이 있었던 것일까. 글쎄 무뚝뚝한 영감의 입에서 그런 추억담을 기대하기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하데스도 이신전심이었던 것일까. 오르페우스의 연주와 사연을 들은 하데스는 어쩐 일인지 관대했다. 그로 하여금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도록 허락했고,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도 일러주었다. 단순히 하프연주 솜씨 때문이었을까. 카론 영감은 짐짓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비록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신이라지만 그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았다. 젊은 시절 하데스 역시도 아내 페르세포네를 얻기 위해 숱한 모험을 각오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하데스 또한 오르페우스를 통해 사랑이 죽음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해보면 오르페우스는 젊은이답게 경솔했다. 저승의 끝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하데스의 호의를 잊다니. 돌이켜보면 가슴 아프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저승의 세계에는 하데스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규칙이 있게 마련이었다. 한 번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다시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신들이 티탄 족과의 전쟁을 마친 이래로, 하데스가 저승세계를 관장한 후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지켜왔던 약속이었다.
때문에 신들의 약속은 스튁스 강을 두고 이루어졌다. 제우스는 이따금씩 올림푸스의 최고신들 간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헤르메스를 시켜 스튁스 강물을 담아가곤 했다. 스튁스 강물에 걸고 한 서약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데스가 아직 처녀였던 페르세포네를 저승세계로 납치해 온 직후, 대지의 여신인 데미테르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를 되찾아 오겠다고 스튁스 강물에 두고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제우스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웠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꾀 많고 눈치 빠른 헤르메스 덕에 자칫 평생을 총각귀신이 될 뻔 했던 하데스가 장가를 들게 되었지만, 신들조차도 스튁스 강물을 걸고 뱉은 말은 다시 거둘 수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랑하는 이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일일지라도 그 약속은 다시 번복될 수 없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그의 아들 파에톤의 비극도 그러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빛나는 자’라는 뜻의 파에톤은 헬리오스와 인간인 클뤼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에톤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성장했지만, 청년이 되면서 곧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파에톤은 어머니 클뤼메네를 떠나 아버지인 헬리오스가 사는 태양의 궁전을 찾아간다. 먼 길을 거쳐 자신을 찾아온 아들 파에톤을 헬리오스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애틋한 연민이었을까. 성급한 부정 때문이었을까. 헬리오스는 대견스러웠을 아들에게 선뜻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뱉으며 흔히 올림포스의 신들이 하던 것처럼 스튁스 강을 두고 맹세를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파에톤의 소원을 들은 헬리오스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파에톤은 제우스신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태양마차를 몰겠다고 나선 것이다. 헬리오스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 맹세를 거둘 수는 없었다. 헬리오스는 아들 파에톤에게 다른 소원을 말해줄 것을 청했지만, 파에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뻔해보였건만 헬리오스는 결국 태양마차를 내어주고 말았다. 태양마차의 천마들은 종횡무진 했고, 파에톤은 제 아버지처럼 천마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궤도를 벗어난 태양 때문에 대지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샘들이 메말랐으며, 지상의 수많은 강들은 바닥을 드러내었다. 바다도 들끓었지만, 포세이돈조차도 어찌 손을 쓸 수 없었다. 무너진 천계의 질서 앞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분노했고, 마침내 제우스는 천궁의 꼭대기에 올라 벼락을 거머쥐었다. 파에톤이 어찌 되었을까. 단 한 번의 벼락으로 그는 불길이 되어 추락했다. 산산조각이 난 태양마차의 파편들이 세상의 곳곳으로 흩어졌다. 자신의 힘과 젊음을 과신한 한 청년의 운명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났고, 천계의 질서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파에톤의 죽음도 아들을 잃은 헬리오스의 슬픔도 잊었지만, 태양은 바다의 저편에서 아침마다 어김없이 떠올랐다. 오늘도 스튁스 강은 무심히 흘렀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되돌아 흐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강을 두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과 다짐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후회와 원망이 강물 속에 잠겨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통한의 눈물과 아픔의 기억들이 흐르는 것일까. 혹여 강물에게 그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묻는다면 그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강은 기억할 수 없다. 아니 기억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카론 영감은 오늘도 묵묵히 노를 저었다. 강은 말이 없었다.
* 영국의 시인 밀턴의 ‘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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