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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07시 24분 등록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 김장호 지음, 일진사, 2007.04.15

 

1. ‘글 쓰는 산쟁이(저자에 대하여)

 

■ 김장호 (1929 ~ 1999)

 

그는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삶을 살았다. 학생들을 엄하게 가르치기로 소문난 대학교 교수였으며 아홉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삶은 등산가 혹은 산악 에세이스트의 면모에서 더욱 잘 찾을 수 있다.

 

취미로 오르기 시작한 산이 산을 향한 열병 mountain fever 으로 번졌다. 1977 에베레스트 원정 훈련대장을 맡아 설악산 눈밭에서 고상돈 등과 함께 뒹군 그였다. 스스로 바위를 타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 날리는 후배 대원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기도 한 사람이다. 돌아와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곤 했다.

 

저서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1978

,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1982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1989

한국 명산기 1993

우리 산이 좋다 2000 가 있다.

 

2.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바위에의 초대

 

□ 나는 유혹할 줄 모르는 요석공주나 메피스토펠레스를 생각할 수 없듯이 유혹당할 줄도 모르는 원효나 파우스트를 좋아할 수 없다. 인간의 가능은 여전히 위험을 무릅쓰고 알지 못할 미지의 매력에 유혹당할 줄 아는 거기에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 15)

 

Ü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우리, 읽은 책이다. 인용하지 않을 수 있나. 우선 원효부터.

 

춘원 이광수는 원효를 인물 소설화 시키며 아래와 같은 발문을 쓴다.

‘원효는 신라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이오 고승이오 성승이다. 그의 대승기신론소와 화엄경소는 불교가 전하는 동안 전할 것이다. 원효는 세계적 위인이다. 그러나 원효는 요석공주로 하여 파계하야 설총을 낳았다. 그는 어찌하여서 파계를 하였던가. 성승의 파계 그것은 큰 사건이다. 오늘날까지 해답 못 된 문제다. 인성의 근저에 관련된 문제다. 나는 이 (중략) 인간으로서의 고로와 성자로서의 수행을 그려보고 싶다.’ 이에 대해 일연은 원효의 생애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 카잔차키스가 겹쳐진다. 또한, 고운기는 말한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면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중략) 원효는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이면서도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것. 불교는 늘 이와 같은 변증법의 고리를 물고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겠다. 그 과정에 원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 놓았다.

 

다소 긴 잔소리에 더해 원효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횬ㄴ 고선사에서 지내고 있엇다. 원효가 그를 보고 예를 갖춰 맞았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소.

함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어떤가요?’

‘좋다.’

그래서 함께 집에 이르렀다. 원효더러 보살 수계를 해달라 했다. 시신 앞에서 축원하였다.

 

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

 

사복이글이 번거롭군요하더니 고쳐서 말했다. ‘죽고 남이 괴롭구나.’

 

□ 알피니스트 alpinist 란 바로 이 3천 고도 이상의 산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인 등산가를 가리킨다. (p. 15)

 

Ü 알피니스트에 정의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 등산에 디레티시마 direttissima가 등장했다. 디레티시마란 영어 디렉티즘의 이탈리아말로서 번역하면 직등주의가 된다. 어느 방향을 잡아 곧장 오르는 등산기술을 말한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 돌아 오름이 아니라, 바위건 벼랑이건 혹은 냇물이건 그것을 뚫고 오른다. (p. 16)

 

Ü 전위적 등반가들이 추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계곡치기라는 산행을 통한 디레티시마를 구현한다.

 

□ 아이거 북쪽 벼랑 같은 데는 5백 미터나 되는 수직의 난소가 있는 이른바 죽음의 벽이라 불러지던 곳으로 더구나 거기에는 1년 내내 파란 얼음이 덮인 곳이지만 30명이나 되는 명 등산가의 생명을 잃게 한 끝에 1961 3 12일에 드디어 정복 되었다. 이것이 바로 디레티시마다. (p. 17)

 

Ü 저 파란 얼음이라는 단어에 내 가슴이 순간 요동을 쳤다. 이것 참신기하다.

 

□ 아직은 팔 다리가 성한, 그리하여 아직은 야성이 가시지 않은 젊은이에게 권하노니 바위로 오라! (p. 17)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과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 구름 떠도는 바람 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 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들새가 가는 길, 표범이 가는 길로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 사나이들의 신나는 얘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벼랑 길이 다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존 메이스필드의 시 바다에의 열병 sea fever’를 산으로 방향을 바꾸어 고쳐 써 본 것이다. 이를테면 희문 혹은 페러디다. (p. 20)

 

Ü 그랬구나. 나는 이 시가 참 좋다. 인류가 목적 없이 산을 찾기 시작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지금, 저자는 이유 없는 오름짓의 행복을 알아차리고 그 행복의 언어들을 잘 갈무리하였다. 알피니스트 시인이었거나 시인 알피니스트이었거나 그의 생은 분명 행복으로 넘쳐났을 터다. 그 처지를 마냥 부러워 만하고 있는 내가 있으니. 다시 한번 더 그에게 부러움을 보낸다. 아래 시를 마저 한번 느껴보자.

 

북한산 (김장호)

 

어버이를 여의고 나는 / 내게 지붕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

분가를 하고서는 더구나 / 내가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돌아보며 돌아보며 / 됨됨이를 탓하면서 //

골목마다 책 갈피 마다 / , 신열로 달아오르던 나날, //

문득 머리 위로 덮여오는 / 지붕, //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밑을 헤집고 //

마냥 기어오른 마루턱 /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 나를 만났다 //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사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 하늘은 고대 눈발을 날릴 듯이 찌뿌둥하여 때로 하늬바람마저 스산하게 발 밑에 낙엽을 굴릴 때쯤이면 사실 산 사나이의 가슴에는 모닥불이 이는 것이다. (p. 21)

 

Ü 산에 가고 싶은 사무치는 마음을 어찌 이리 통렬하게 표현했던가.

 

□ 거기 칼날 같은 바람이 매울수록 고산의 적요는 더욱 나를 매혹하리니 눈에는 애애한 백설, 이윽고 그 심산의 모닥불 냄새, 불티 튀는 소리, 때로 골을 울리는 딱따구리 소리가 귀에 들린다. (p. 21)

 

□ 누가 일러 산사나이를 리얼리스트라 부르던가. 그가 설령 빈틈 없는 계획을 짜내고 장비의 무게와 지도상의 거리를 측정하고 계산하며 실제적인 모든 준비를 갖추어 미지의 꿈을 현실화 해내는 용의주도한 실무가라 할지라도 그를 그렇게 몰아가는 근본 동기는 바로 이 그리움이며 설레임이 시키는 것이니 그럴 수만 있다면 한번 그의 가슴의 문을 열어 보라. 몽몽한 김이 서리는 활화산일 것이 분명하리니, 알고 보면 그는 타고난 로맨티스트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p. 22)

 

Ü 그래 생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인간이 드러날 게다.

 

등산가의 발

 

□ 대개 손은 받아 쥐고 거두어 들이는 수용기관임에 대하여 발은 나아가고 뚫어내는 발진기관으로 여겨진 셈이다. (p. 26)

 

□ 사실 등산가의 발을 보라. 발가락과 뒤꿈치에 굳은 살은 두껍게 박혔을지라도 화사하리만큼 가는 발목의 긴장감이며 거기서부터 무릎 짬으로 도토롬히 죄어서 부풀어 오르는 속으로 삼밧줄보다 더 억센 힘줄의 그 돌기로 하여 장딴지에 이중의 복선을 이룬 전면에는 쇠꼬챙이를 심은 듯 확실한 수직의 정강이가 받쳐 주고 있으니 그 균형감과 조화감은 그대로 프랙시텔렉스가 조각한 올림포스의 제신, 그 중에도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아폴론의 그 대리석의 하체를 보는 느낌이다. 그것이 60킬로그램의 체중에 다시 20킬로그램 무게의 배낭을 메고 5미터를 뛰어내렸을 때 가속도의 무게까지 합하여 톤으로 헤아리는 엄청난 무게를 거뜬히 받쳐 주고 있는 것이니 가히 황금의 발이라 할 것이다. (P. 27)

 

Ü 이로써 자유낙하 시 발목이 받는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인터벌 트레이닝

 

한 주간의 겹치고 쌓인 抑鬱(억울)의 상태 (P. 30)

 

Ü 좋은 표현이다.

 

□ 진실로 알피니스트란 산에 오르기 위하여 평소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두고 이름이다. 결코 어느 하루 몇 천 고도의 산을 올랐다는 과거의 사실만으로 그를 알피니스트라 부를 수는 없다. (p. 30)

 

Ü 나에게 주는 일침이다.

 

□ 진실로 알피니즘이란 등정의 기쁨, 그 영광의 기록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이르는 과정, 정상까지의 도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알피니즘에만 결코 졸업이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p. 31)

 

□ 몸도 늘상 익히지 않으면 편안한 자세로 굳어 가게 마련인 것이니 늙고 굳어 가는 자연의 태에서 스스로를 해방하여 유연성을 가꾸고 굴신성을 회복하며 그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는 평소의 몸가짐이 바로 인터벌 트레이닝인 셈이다. 알피니스트가 늙지 않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p. 32)

 

Ü 주옥 같은 말이다.

 

고도에 대하여

 

□ 인간은 언제부터 높이를 지향하게 된 것일까. 높이에는 초월적 자유가 있고 불변의 진리가 있고 또 영원의 안식이 있다고 누가 일러준 것일까. (p. 39)

 

□ 모순은 마침내 모순 속에서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을 모순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길은 죽음뿐인 것을.

흔히 피폐한 사회에서는 모순을 젊다 하고 그 모순 속에 뛰어드는 일을 무모하다, 위험하다 하여 안정만을 적응으로 치고 다른 높은 세계를 바라보는 자를 끝내 이단시하여 부적응자로 낙인찍지만 그들이야말로 애초에 현실 너머로만 통하는 그 위험에 한발 가까이 다가설 줄도 모르면서 입만 열면 안전, 무난, 보신을 집집이 가훈으로 삼고 사람마다 그것을 처세술로 떠받더니 급기야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저보다 높이에 있는 자의 꼬리를 들쑤시고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형태를 부리기 일쑤가 아니던가. (p. 42)

 

Ü 스스로 생의 인화성을 죽여 놓아 타오른 기억이 없는 사람은 슬프다. 마찬가지로 그런 개인이 대다수이며 사회적 윤리적 담론의 주류를 이룬 사회는 또한 슬프다.

 

□ 모순과 갈등이 인간에게 내재하는 한, 고도란 끝내 그에게 있어 위험을 동반하는 하나의 유혹일지 모른다. 그러나 위험을 멀리 하고서는 참된 마음의 안정은 찾아주지 않는 것을 위험을 무릅씀이 없이는 발전도 해탈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은 오히려 위험에 끌리는 유혹을 지녔으니 그 유혹이야말로 참된 해탈에의 어구가 아닐까.

산이 저만치 높이에서 손짓한다. 가슴이 설레인다. 유혹을 하는 자를 나무라되 그 유혹을 당할 줄도 모르는 자에게는 네발 세계를 되 안겨 줄 일이다. (p. 42~43)

 

Ü ‘참다운 죽음의 위험은 신이 내리는 선물이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 신경을 자극하는 이 신기한 맛을 죽음의 불안을 모른 인간이 가련하다. 지상의 기쁨 따위는 언제라도 내던진다. 그러나 내게서 두려움을 빼앗아간다면 차라리 죽은 것이 나을 만큼 인생은 삭박하고 지루하게 되리라!’

 

廢道(폐도)

 

□ 반들거리는 돌바닥 길에 도포자락 휘날리며 허위허위 한양 길로 내닫던 할애비의 땀내나는 미투리 냄새를 맡아보지 않을까. (p. 46)

 

Ü 참 정겨운 글이다.

 

누가 말했던가. 일상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등산이요 또 일상의 생활이 막닥뜨린 곳에서부터 새로이 찾게 되는 것이 求道(구도)라고.

사실 물에 길이 열리듯이 바다에 뱃길이 열리고 지금은 하늘에도 천체의 궤도 밖에 비행기와 인공위성의 길이 뚫리어 길 아닌 것이 없는 현대공간에 오히려 사람의 마음의 길은 더욱 묘연해가는 느낌임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길이 없는 산속에 잠깐 멈추어 서서 나뭇가지 사이로 능선과 계곡 너머 자신의 나갈 방향을 아련히 내다보듯이 바쁜 사람이여 바쁠수록 신작로를 버리고 잠시 폐도를 거닐어 보라. 가슴 속에 시끄러운 먼지와 소음을 갈앉히고 버려진 길, 그 역사의 허상 위에 나서 보라. (p. 47)

 

여름 산의 바위

 

태양의 혀끝이 핥고 지나간 자욱마다 홈 파인 그늘, 무한조밀의 그런 분포로 바위 면 가득히 앉은 곰보딱지의 그 얼굴을 쓰다듬으면 어쩌면 태양의 그 혀끝에 쇠가시가 돋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실낱 같은 바위의 그 눈금 짬에 손톱 끝을 세우고 몸을 끌어올리면 등줄기에서는 다시 태양의 그 뜨거운 혀끝이 불꽃 같은 타액을 질질 흘리며 나불거린다.

생명감이란 이런 것일까! 태양과 바위, 이 두 개의 불꽃 튕기는 팽팽한 대치 속에 나를 개재시켜 놓고 그때 비로소 벅차오르는 생명의 충실감, 그제사 창문을 여는 생명의 안도감!

사실 안온한 생활 속에 행복은 있을지라도 거기 감격이 있을 수 없듯이 평탄한 생존 속에 잠기어 죽음을 넘나다보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진실로 생명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이다. (p. 52)

 

Ü , 이 멋진 표현을 보라. 기가 막힌다.

 

등산대회

 

□ 관객의 시야에 드는 고정된 그라운드가 없으니 그 관객이란 것은 물론 그들의 열띤 갈채가 있을 리 없고 룰이 없으니 반칙이 있을 수 없으며 선수와 관객이 함께 경기의 과정을 시종 지켜볼 수 없으니 우승의 영광에 실감이 따르지 않을뿐더러 수상권내에 들지 않은 팀이라고 해서 쓰라린 패배감을 짓씹는 것도 아니다. (p. 61)

 

산에는 왜 가는가

 

□ 희랍비극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인간의 그 여자가 아니라 영원한 생성자로서의 대지의 상징이었듯 초모룽마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산이라는 뜻이 듯이 산은 본디 생산자요 인간생면의 근원적인 모태였다. (p. 67)

 

□ 알피니즘의 초기에 전 세계에 걸쳐 그 기록을 자랑하는 영국은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빅토리아 조 최성기에 세계제패라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숨김없이 등산에까지 반영시켰던 것이다.

 

등산의 자세

 

□ 금강산, 설악산, 가리왕산의 그 우람찬 줄거리가 두로봉에 와서 멈칫 쌍갈래로 갈라지는 (p. 70)

 

□ 나는 사실 방방곡곡 경승지라 이름난 곳마다 원효와 의상과 자장 등 당대 학승의 이름이 안 붙은 봉우리나 암자나 굴이나 대지가 거의 없다시피한 것을 보고 고개를 기우뚱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p. 73)

 

Ü 그들은 승려이자 등산가였다.

 

벌이 꽃에 들어 꿀을 빨되 언제 그 꽃의 어느 부분을 해치더냐 말이다. (p. 73)

 

Ü 아니 온 듯 가야 하는 곳이 산이다.

 

설악()

 

□ 아아! 지금쯤 오세암의 양지쪽엔 곰취나물이 얼마나 널렸을까. 쌍폭 아래 산다래는 얼마나 구성지게 영글었을까. 가야동의 다람쥐는 또 얼마나 토실하게 살이 올랐을까. 내가 세운 케른은 지금쯤 사늘한 골짜기에 혼자 서서 화려한 겨울,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p. 75)

 

산길에서

 

길이 끝나는 데서 등산은 시작된다. 이 말을 또 바꾸면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어 젖혀 나가는 것이 등산인 셈이다. (p. 76)

 

Ü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

 

사실, 시가 일상의 언어가 끝나는 이른바 그 언어도단의 경지에서 피어나듯이 등산도 일상의 길이 끝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p. 77)

 

□ 어쩌면 구도자나 등산가는 모두 현실과 이데아의 사이, 지상과 영원의 그 사이에서 인간의 육신을 끌고 다 같이 앓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p. 78)

 

올라놓고 보면 산이란 차라리 슬픈 것이다. 힘들여 오르는 일, 거기에만 등산의 기쁨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등산을 구도 정신의 그것에 비기는 연유는 있다. (p. 79)

 

Ü 그리하여 정산에서 울었고 울어 나온 눈물이 얼어 다시 눈을 되 찔렀다.

 

산의 우정

 

□ 한 오라기 밧줄에 서로의 생명을 잇대어 파트너와 나와의 사이에 피를 엇섞는 것, 내 외로움만큼 남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일, 그리하여 외로움과 외로움 사이의 단절이 위험에 처하여 오히려 강인한 유대로 결합하는 것, 그래서 등산은 마침내 강풍을 타고 흩날리는 눈보라 속의 밤하늘을 뚫고 찬연히 산상에 빛나는 햇발처럼 눈부신 휴머니즘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p. 92)

 

Ü 지난한 수사와 현란한 형용에도 불구하고 글이 맵시를 찾아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 점심밥 동여매고 뛰어갔다 그 날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닌 바에 일단은 산에 간다는 것은 역시 거기 산에 산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p. 96)

 

□ 산의 모습이 피어 오르는 가스발 사이로 하나 둘씩 떠올라 그 때마다 얼음이 주름살이 금빛으로 빛나면서 뚜렷이 드러나 금빛 얼음의 주름살은 이미 산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장엄한 한 개의 존재로서 안개의 바다 위에 떠오르고 있었다. (p. 97)

 

Ü 이것은 메스너의 수사다.

 

□ 이런 글을 읽으면 역시 호흡이 짧은 사람, 공명심이 앞서는 사람은 산 사람으로는 적격이 아닐 성싶다. (p. 97)

 

□ 차라리 용렬하고 범용할지라도 그 부지런하고 참을성 있고 그러면서 안으로 성실한 생각 하나로 뭉쳐 있음으로 하여 아무하고나 적당히는 사귈 줄 모르는 사람, 그리하여 옳은 일 앞에 피가 끓어 그냥은 앉아 배길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써 산은 지금 우리가 기다려 마지않는 그 바람직한 사람처럼 그리운 것이다. (p. 98)

 

산장

 

□ 지친 다리를 끌고 겨우 그 뒤꽁무니를 따르다가 리더의 지시에 따라 잠깐 바위 모서리에라도 걸터앉아 다리를 쉴 때 그때 쉰다는 것의 고마움은 그리 쉬이 잊혀지는 법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누가 산에는 왜 가느냐 하고 물을 때 서슴지 않고 나서서 쉬러 간다고 잘라 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p. 100)

 

Ü 산이 거기 있어 간다고 했던 머메리는 쉴 새 없는 기자들의 질문에 귀찮아서 그리 말한 것이다. 그리고 메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낭가파르바트를 혼자서 오르려고 했을 때 그 계획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온 신문 기자가 있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 기자가 내 산행을 기사화했을 때는 살아서 돌아올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왔다.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신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일도 여전히, 틀림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어느 산 사나이의 초상

 

□ 대개 난 체하는 사람은 뒤가 흐린 법이다. 오히려 패기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위인이 때로 맑은 눈빛을 번득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꺾이지 않을 강인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p. 106)

 

Ü 이 나라 최초로 세계최고봉에 등정했던 고상돈을 기리는 말이다.

 

산악인의 목숨

 

산을 찾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일에 앞서 자신의 생명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구에 바탕하는 것이다. (p. 108)

 

Ü 동의한다.

 

□ 그 위험과 성취감의 함수 관계가 들어 등산가로 하여금 그가 지불한만큼의 드높은 보람을 자신의 생명에 되돌려 받게 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생명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p. 109)

 

□ 산악인의 죽음은 무어니 하더라도 그가 등산에서 얻어낸 덕목만큼의 인간적 예지와 의기로 심화된 질량을 함께 모두어 자신과 사회에 되살린 다음, 마치 불이 그에게 주어진 모든 가연물을 모두 열과 빛으로 환원시키고 난 뒤 스스로 꺼지듯 하는 完全死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p. 110)

 

Ü 모두 다 태우고 가는 사람.

 

젊은 산악인에게

 

□ 무어니 하더라도 산악인이야말로 등산을 생각하되 마치 자신의 그 인생이라는 것처럼 토탈리티라는 전체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터득해야 하네. 조그만 일에 집착하거나 난 체하는 버릇 가지고는 큰 산 못하네. (p. 114)

 

Ü 동사, ‘산하다’… 한참을 뚫어져라 단어를 살폈다. 그것은 오르는 것인가. 올려진 상황인가. 오르려는 모든 열망을 포함한 것인가. 산처럼 사유하다는 뜻인가. 산의 철학을 지닌 사람의 산행을 말하는가.

 

□ 게다가 세상에 누구 하나 그라운드에 앉아 갈채를 보내주기를 하나, 머리 위에 거금의 상금이 떨어지기를 하나 (p. 115)

 

Ü 그래, 그런 것 하나 없는데 무엇하러 자꾸 오르려 하는가. 거참.

 

□ 하지만 자네 내면의 목소리가 부르면 어쩔 수 없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알아서 주재해야지 또 어쩌겠나. (p. 116)

 

산의 이미지

 

□ 웅산은 설레고 장산은 헐떡이고 육산은 숨차고 악산은 어질하며 고산은 앙다물어지고 야산은 허둥댄다. 산은 어떤 산이건 내게 있어 몸으로 올라서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p. 118)

 

Ü 산을 인간의 모습에 비유하자면 그러하겠다. 단지 평지에서 지각운동으로 솟아오른 것에 지나지 않는 산에 필요 이상의 과도한 의인화는 경계해야 하며 인간의 사회적 습속인 정치, 사회적 가치가 산에 덧씌워지는 일은 볼썽 사나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 그게 그런가.

 

꿈에서는 오히려 추락을 일삼는다. 고대인의 수렵은 물론 광석과 초목의 채취로 산에서 무진장의 풍요를 캐러 든 것처럼 나는 산에서 또 무한량의 생명감을 노획한다. (p. 119)

 

Ü 좋은 표현이다.

 

풀 냄새를 맡으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산에서 풀 냄새를 맡게 해다오. 목마른 자가 샘물에 엎드려 그러듯이 우거진 풀숲에 내 얼굴을 함뿍 적시게 해다오. 그리움을 허공에 대어 놓고 헹궈내기 위하여 향기로운 손수건 같이 내 손으로 그것을 뒤흔들게 해다오. (p. 122)

 

Ü 주옥이다. 보들레르의 머리카락 속의 지구 저편이라는 시를 변용했다.

 

산에서 자는 일은 방을 등지고 벽과 지붕을 등지고 자동차와 전기불과 문명을 등지고 제 등으로 메고 온 천막 한 채를 아늑한 풀밭에 조촐하게 세운 다음, 바닥을 깔고 들어 앉으면 문명 세계에서 느끼지 못하던 인간, 그것의 본성을 되찾게 되기 때문이다. (p. 124)

 

Ü vivack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산은 해가 지면서 비로소 입을 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 바람이 능선에서 불어 내리면서 봉우리 끝 바위가 먼저 이쪽을 향하여 아는 체를 하면, 이어 산마루에 실루엣을 그리며 줄지어선 나무들이 군무를 벌이고 시냇물 소리가 커지자 밤 이슬도 내리기 전 서편 하늘에 떠오르는 별 조각을 향하여 풀잎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판을 벌인다. (p. 125)

 

Ü 아주 정겨운 표현이다. 재미있다. 표현이 탁월하다.

 

나만의 산

 

□ 어느새 산은 온통 내 안에서 숨 쉬는 것이니 나만의 산길이 걸어가는 거기, 나만의 산은 어는 후미진 골짜기의 들꽃처럼 소리 없이 내 안에서 그 봉오리를 벙그는 것이다. (p. 128)

 

Ü 벙글다 : ‘아직 피지 아니한 어린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 망울이 생기다.’

 

혼자 가는 산

 

□ 여럿이 어울려 가면 하기야 서로 힘이 되어 덜 괴롭고 덜 외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덜 괴롭고 덜 외로운 사실이 어떤 면으로 보면 등산의 근원적인 뜻에서 오히려 위배가 되는 것이다. 등산이란 괴롭고 외로운 그리하여 궁극적인 자아를 건지기 위한 그 바로 忍辱行(인욕행)에 뜻이 있는 것이니 괴롭고 외롭지 않으면 이미 등산의 참 면목은 퇴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33)

 

Ü 외로워서 사람이듯 그 사람이 가는 곳이 산이다.

 

하산길

 

□ 산 꾼들의 머릿속 갈피 뒤에는 어딘가 이런 따스한 영상의 단편들이 박혀 있어서 그것이 때로 난데 없이 떠올라서는 양복을 차려 입고 뛰는 걸음을 멈추게 하고 또 때로는 책상 머리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게 하고 혼자 입가에 웃음을 흘리게도 하는 것이다. (p. 136)

 

Ü 이를테면 이런 것이겠다.

 

가끔, 혼자 가까운 산을 올라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배낭이 전공책보다 중요했던 시절, 그 때 그 곳을 오르며 나누었던 얘기들이 환청처럼 귀를 때리는 경험, 눈을 살포시 감으면 아예 그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 눈 앞에 3D 환영을 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 배낭 그 옷들을 입고서 말입니다. 또한, 수직의 화강암 바위 밑 늘어진 자일 아래에서 안타깝게 올려다 보고 있던 그 후배의 모습. 바위를 다 올라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하던 후배. 하지만, 시커먼 땟물과 피투성이로 떨어대는 손가락을 보며 우리는 속으로 미안하다. 후배야…’ 고함쳤습니다. 무명의 솔 냄새, 설악의 설정, 사자평 은은한 텐트 불빛, 한 여름 능선 길, 굵은 비 맞으며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고 한 겨울 한파를 뜨거운 라면 국물과 힘찬 산가 한 자락으로 날려 버린 기억

 

□ 사람이 골에 있으면 ()인이지만 산에 있으면 신선이 아니던가. (p. 138)

 

나의 산행

 

□ 그런 산은 그렇지, 내게도 늘그막의 그 한가한 날이 주어지는 날, 그때는 나도 남들처럼 넉넉하게는 떠벌이지 못할 망정 끓여 먹을 것 갈아 입을 몇 가지만 달랑 짊어지고 그렇게 천천히 찾아가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p. 140)

 

새해에도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 내가 왜 이쪽으로 가고 있을까. (p. 142)

 

Ü 어느 순간 정신을 깨고 나면 둘러 메여진 배낭이 어색하다. 어디지?

 

□ 끌린다는 것은 사실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찾고 있던 그 무엇을 실지로 거기 만났을 때 일어나는 자신의 겉으로의 변화는 이미 이성의 제동을 넘어서는 것이다. (p. 143)

 

□ 에릭 쉽튼이 말한다.

매혹의 원천은 자신의 안에 내재 한다. 그것은 누구나가 타고나는 귀중한 감각으로서 미지의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마음에서 우러난다. 그것을 잃게 되면 인생이란 멋없어지고 색채도 바래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미지의 프론티어는 영원으로 번져간다.’ (p. 143)

 

Ü Eric shipton은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시 대장이다.

 

산지명고

 

□ 지도를 들여다보는 재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가 그 자리에 가 서 있기라도 하듯이 꿈속에 잠기는 맛은 사실 산을 오르는 그 자체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이다. (p. 145)

 

Ü 이거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모를 일이다. 얼마나 기쁜 일인지.

 

□ 불당굴, 점말, 배오개, 가오실

불당굴은 불 안골, 굳이 말하면 사타구니 안골이니 그것은 지형을 인체에 비겨 고봉준령 산 속에 폭 파묻힌 골짜기 안이라는 뜻이다. 불은 성기로서 인수봉의 옛 이름 부아악도 아기를 업은 형용이라 함은 점잖은 눈의 뜻풀이요 그 음을 향찰식으로 읽어 불메, 즉 성기 모양의 봉우리라는 것이다.

점말은 가마가 있는 마을이다. 죄인, 도망꾼이 주로 숨어살았고 그들을 가리켜 점놈이라 불렀으니 점놈들의 마을로도 뜻은 서는 것이다. 가맛골과 같고 釜谷(부곡), 釜項(부항), 沙器(사기)店村(점촌), 店末(점말)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배오개는 赤峴(적현), 梨峴(이현)으로서 붉은 흙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곳만은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밝은 양지를 이루는 고개가 된다. (p. 147)

 

산은 원래 다신교에서 여신산이다. 본디는 할미산, 어미산, 한자로는 노고산, 아미산이니 그것은 생산과 풍요를 그산, 그 산 아래 안겨다 주는 이른 바 영원의 어머니로서 의식되었었다. 티베트 쪽에서 에베레스트를 초모룽마, 즉 영원한 여신의 산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도 그 까닭이다. (p. 148)

 

Ü 사가르마타, 초모룽마는 대지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바깥 높이에 눈을 뜨라

 

□ 그 듬직한 몸매, 그 알찬 차림, 그 쨍쨍한 기술을 제 눈으로 보면서 더 높은 곳으로 엑셀시오 excelsior!하고 등을 밀어주고 싶고 나라 안팎에 두루 그를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 누구라 안 날 것인가. (p. 156)

 

세계의 정상에 서다

 

1시간당 40미터 미만의 고도를 벌어들인 것 (p. 162)

 

Ü 엄청 빠른 속도다.

마나슬루 등정이 뜻하는 것

□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manasa, 즉 영혼에 lu lung 즉 땅을 줄인 말이니 바로 영혼의 땅이다. 인도 측량국에서는 피크 30, 티베트어로는 kritang 1. 즉 청정한 처소요 또 산기슭 사마 주민들은 kang bungen, 즉 눈의 어깨라는 뜻으로도 부른다. (p. 167)

 

Ü 유독 마나슬루는 이 나라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71년 김기섭의 7200미터 지점에서 전락사, 72 6500미터 지점에서 15명이 눈사태로 매몰됐었다.

 

행락의 미학

 

□ 자연과 얼려, 고대 그리스인들이 5월 포도를 재배하여 생산과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제사지내는 행사와도 흡사한 것 (p. 169)

 

□ 보폭을 감안하지 않은 층계, 옆에 암석과 수목을 파괴하여 만드는 노변정지는 허가 받은 파괴행위라 밖에 말할 수 없다. (p. 171)

 

□ 법구경에 있는 말이지만 꽃에 들어 꿀을 빠는 벌처럼 탁발승은 마을을 지나야 한다. 했다. (p. 172)

 

Ü 벌이 꽃에 들어 꿀을 빼되 그 꽃의 어느 부분을 다치고 가던가 말이다.

 

산악 자연의 보호

 

□ 에베레스트를 더럽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73년의 이태리 원정대로서 그 대장 기도 몽지노는 대원 64명에 그 곱이 넘는 세르파를 고용한 위에 사상 최고의 물자를 투입하여 임하였다. 본국에서 들여온 헬리콥터가 돌풍에 휘말리어 추락한 그 잔해를 여전히 여기 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p. 177)

 

Ü 목불인견이다. 目不忍見 :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딱하거나 참혹한 상황

 

등산이란 본디 위험부담을 안고 들어가는 것으로 그것이 감해질수록 그것이 목적하는 효과도 덜해지는 것이니 등산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생각부터가 막말로 등산행위를 모독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 181)

 

Ü 모든 케이블카는 내려져야 한다.

산의 적설학

1975년 설악골에서 에베레스트 훈련대의 3대원과 69년 백미폭 아래서의 한국산악회 10동지의 조난 사고 (p. 185)

 

Ü 거기에 죽음의 계곡에 묻힌 12명의 산악인을 더한다.

산 공부

□ 늘 쉬고 있는 사람은 휴식의 고마움을 모른다. 쉰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것인줄 미처 몰랐다는 말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갯마루로 기어올라 거기 마루터기에 걸터앉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p. 187)

 

Ü 그래서 다시 가고 싶은 게로군.

 

□ 산의 철학을 깊인다. (p. 188)

 

그러나 등산이 그 사람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는 더 속 깊은 까닭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히려 미지의 것에 대한 회답을 스스로 얻어 내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인 것이다. (p. 194)

 

인간을 벗어난다

 

의식주 그 모든 것 중 꼭 필요한 것만 가리고 추려서 챙겨 넣은 배낭 하나만 달랑 짊어지고 인간문명을 벗어나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는 것이니 그때 그대 속에 잠자던 영혼은 눈을 비비고 그대 앞에 마주 앉을 것이다.

옆에 인간의 것이라곤 없는 대자연의 풀밭에 벌렁 누워 멍청하게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참 구름 같은 감정 속에 자신의 멍청함을 되씹는 맛도 일취라 하리라. (p. 195)

 

Ü 모습을 상상함에 미소가 찾아오고 그리 편할 수가 없구나. 자연은 산은 이래서 좋은 모양이다. 주는 것 없이 좋은 곳. 내 영혼의 고향.

 

때는 봄, 맨발에 새 풀이 간지러운 초원을 건너 자지러지는 산새 소리를 따라 떠나라. 문명이 흐려 놓은 공해를 벗어나 영마루를 넘어라. 물질문명에 찌든 그대 허파와 살갗을 태양 아래 태우고 냇물에 씻어라.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써 자연 속에 자신의 인간을 회복하라. (p. 196)

 

Ü 무어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떠나라는 데. 온 몸으로 동의하는 바다.

 

여자가 산에 오를 때

 

□ 유요세군, 여자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형용사는 으레 가냘프고 연약한 것이다. 타베이 준코 1975년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녀의 나이 만으로 마흔 하나, 153센티미터 키에 44킬로그램의 몸무게 밖에 안 된다. 남매를 둔 어머니다. (p. 200)

 

Ü 현실보다 강한 이 여기에 또 있다. 나는 네팔에 갔을 때 산악박물관에서 타베이 준코의 때묻은 피켈을 본 적이 있다. 그 찌든 때는 나에게 물었다. 꿈꾸고 있는가?

 

지속성의 산

 

이 산 저 산을 섭렵하며 높이를 벌고 위험도를 이기며 쌓아 올리는 곳에 비로소 등산의 개념이 잡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연간 50일 이상은 산에서 자고 올 줄도 알아야 한다. 당일치기 습성을 벗어나 어느 기간 산에서 산다는 생각을 저버려서는 산 꾼이 못 된다. (p. 208)

 

Ü 백 번 동의 하는 것이 이 땅의 마루금을 몇 십일을 두고 걸을 때면 산이 주는 합일의 희열에 감당할 수 없다. 산에서 자고 산에서 걷고 산에서 이야기하고 산에서 느끼고 산에서 먹는 일, 그 환장할 기쁨을 만끽하려면 거기, 산에서 살아야 한다. 그 기억은 지울 수 없는 환희다.

 

야성의 회복

□ 하늘이 그의 사람됨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심신을 괴롭힌다는 맹자 말씀도 그것이다. 역경을 회피하지 않고 거기 대항하여 적응력을 기르게 되기 때문이다. (p. 212)

 

때마침 하늬바람은 일어 사람들이 그 외투깃을 세우고 움츠러들 때, 사람이 있어 그 언 손을 가만히 왼쪽 가슴에 얹어보라. 그때 떠오르는 내면의 목소리. ‘바람이 인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구가 들릴 것이다. (p. 212)

 

□ 뜻이 남다른 사람의 하루해가 범상할 수는 없다. (p. 213)

 

□ 그는 혼자의 속셈으로 남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는 난체하는 법이 없다. 그 사람 뭐 그래?’하고 손가락질을 받을 일을 저질러놓고 산으로 내뺀 사람의 등산화가 빙벽에 바로 세워질 것인가. (p. 214)

 

Ü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함은 예서도 마찬가지겠다.

 

산에는 왜 오르는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실존적인 고독을 씻어내기 위함이라는 답이 이때 나옴직도 한 것이다. 등산자를 높이로 밀어 올려 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하루하루 성실한 생활의 축적을 빼놓고 달리 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p. 214)

 

산에 올라 산을 물어보아도 산은 없다. 눈앞에 나무, 발 아래 풀포기, 건너편의 바위에게 물어보라. 제가 산이라 답하는가. 솟아나는 옹달샘, 지저귀는 산새, 감도는 안갯발, 흐르는 구름도 산을 제 입으로 가리키지 못한다. 둘레를 다 둘러보아도 결국 산은 거기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모습들이 평지의 것들과 유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높이 오를수록 키가 작아지는 나무들, 그 껍질이며 가지 뻗는 시늉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 수종, 그 맵시가 다르다. 바위도 예사 바위가 아니다. 거기 앉은 이끼 빛깔만이 아니라 풍화한 기색, 균열부터가 다르다. 샘물 맛이 달다고 해서만이 아니다. 솟아 오르는 시늉이 다르고 맑음새가 유다르다. 어디 산까치 날개 빛이 집까치와 같던가. 공기가 투명해서만도 아니다. 산새는 산새라서 울음소리가 다르고 종자부터가 다르다. 흐르는 안개, 구름도 하계에서 쳐다볼 때의 그런 층을 이루지 않는다. 풀풀이 실실이 풀려서 혹은 얼굴을 부비고 발 아래를 감싸돌며 명주 타래처럼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 그런 모든 평지에도 있는 것들을 그런 양으로 바꾸어 놓는 것, 그것이 산이다. (p. 216)

 

Ü 단지 높이에의 차이가 산의 모든 것이라면 슬플 게다. 그러나 그것이 높이로서의 그 가치를 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래 풀, 나무, 흙 때문이다. 그 아무런 가치 없어 보이는 무가치적 존재들이 높은 존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높이라는 것이다. 넓지 않으면 들이 아니듯이 높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p. 216)

 

가령 말로써 산이 너그럽다 하자, 그 너그럽다는 말에는 너비나 폭은 있을지언정 산이 지니는 무한량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신비롭다 말하면 너무나 뚜렷하고 또 힘차다고 말해본들 거기에는 산의 무한 적료감이 우러나지 않는다. (p. 216)

 

Ü 뜬구름 같은 산의 너그러움, 유아적이다.

 

□ 골짜기에서 산의 높이를 재기가 어렵듯이 높은 산에서 많은 산을 내려다볼 때에는 그 하나하나의 높이를 알아보기 힘들다. 산의 경치를 가장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높이와 깊이가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멀리 이것 저것 보이는 높이이면서도 대상이 눈 아래 깔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이다. 그랑뚜르날랭이 바로 그러한 전망을 가졌다. (p. 219)

 

Ü 에드워드 윔퍼라는 등산가가 한 말이란다. 산의 진경을 보는 지점. 나는 몇몇 산들의 이런 지점을 알고 있다. 참 다행이다.

 

□ 추상화된 의식의 진공상태에 먼동이 틀 때의 아련한 박명이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갯발에 비칠 리 없는 것이다. (p. 221)

 

Ü 표현 한번 기가 막힌다.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움이라 말할 수 있다. 아쉬워하는 심리적 갈증이다. (p. 221)

 

□ 산은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눈짓을 보낸다. 그것은 이미 남이 아니다. 내 속에 일찍부터 있었던 것의 손짓이요 눈빛이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간이 본디 지니고 있었던 바의 것을 더 많이 지니고 있어서 그런 걸까. 혹은 이것을 추체험이라 부르는 걸까. 사람이 산을 쳐다보면 그것이 설령 멀리 갈매빛으로 아득해 보이더라도 혹은 또 그것이 험준해 보여 감히 근접해볼 용기를 품게 해 주지 않더라도 공연히 그야말로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어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안에서 찾고 있었던 바의 것을 산이 품고 있다는 것일까.

 

이르되 회귀심, 더러는 인간의 고향이 바로 그 산이여서 그런다고도 말하지만 문명으로 길들여지기 이전의 인간, 거친 산야를 헤매던 그 본성이 원시적인 모습으로 거기 누워있는 산을 쳐다보자 되살아난다고는 말할 수 없을까. 불교에서는 도에 이르는 경지를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본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만 그 본고향이란 바로 인간의 본성을 되찾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리고 또 니체가 말하는 원향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디오니소스가 노니는 원생의 숲, 문명의 해독이 말끔히 가신 그런 인간의 본디 모양을 상정한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p. 222~223)

 

Ü

 

우리가 영마루에 걸린 고개 하나를 넘더라도 그 고개 너머에 벌어진 새로운 풍경에 대하여 고개 아래에서부터 미리 가슴을 두근거린다. 그래서 설령 고개 너머 세계가 기대와는 딴판이더라도 그리움은 다시 그 다음 고개를 또 넘게 하는 것이다. (p. 224)

 

Ü 길은 세월의 지층이 간직한 이야기로 버틴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 바람 한 줄기에 풀어내는 인간의 이야기들을 이 고개의 길은 다 들어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고개가 좋다. 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고개의 길은 세상의 장삼이사들의 온갖 얘기들을 다 들어주고 안아주는 품이 넓은 사람일 게다. 바람은 고갯길의 그 웅장한 매력에 푹 빠진 열성 팬이라 항상 곁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큰아이의 이름에 고개를 뜻하는 (), 둘째 아이에게는 들어준다는 의미의 ()을 새겨두었다. 그리운 고개, 가슴 뛰는 고개.

 

평지와는 늘 맞물려 있는데 지나지 않지만 인간이 문명의 손으로 짓 주물러 놓은 평지에서 보면 산은 여전히 그 인간의 그리움이요 꿈일 수밖에 없다. (p. 225)

 

□ 곰살맞다 (p. 225)

 

Ü 몹시 부드럽고 친절하다.

 

정월달의 산

 

소리치며 날개를 터는 산자락에 눈사태가 요란하다. 한여름의 주먹질 같은 빗줄기며 따가웠던 햇살, 살점 에이는 삿대바람을 이기고 난 뒤의 빛나는 자유. (p. 228)

 

Ü 아름다운 표현.

 

산은 쉬지 않는다. 산은 쉬지 않고 준비한다. 스스로 마련하여 스스로 시절을 갈아 입는다. 사람이 들어 이루 헤일 수 없는 그 모든 자연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진열하고 또 시절이 되면 그것들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는다. (p. 228)

 

□ 아이젠이 얼음짝에 먹혀들 때 (p. 228)

 

Ü , 이 아찔한 표현을 그대는 생각해 내었단 말인가.

 

인수봉 등반

□ 장다름 gendarme : 프랑스 말로 근위병 혹은 헌병. 산에서는 주봉을 지키듯 그 곁에 버티어 서는 봉우리를 부른다. (p. 229)

 

□ 봄날 산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산으로 돌변하면서 그 모든 허술한 준비를 채찍질한다. (p. 231)

 

□ 주검에 매질하는 법은 없다지만 (p. 231)

 

구도자

 

아방가르드란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병력을 전진시키되 수만의 인마를 무작정 몰고 나감이 아니라 전방 깊숙이 전초병을 내보내어 적진을 살피게 하고 그 판단의 위에 방향을 잡아 작전을 펴게 되는 것이니 그때 전초병이 겁이 많아 본대 위치에서 멀리 나아가주지 않으면 본대는 옴짝달싹을 못하게 된다. 따라서 작전의 성패는 일단 전초병의 과감한 진출 여부에 돌아간다. 그것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적진 속에서의 외로운 행진을 요구한다. (p. 233)

 

Ü 등산가와 전초병이 다를 것이 없다. 도 닦는 승려, 시인도 마찬가지.

 

북한산의 가을달

 

바위에 붙은 이끼마저 말려서는 새로 빨래하여 다려놓은 욧잇처럼 깨끗한 화강암 암반이 눈앞에 다가선다. (p. 236)

 

Ü 아름다운 표현

 

□ 한국의 시냇물이 맑아 보이는 것도 이 화강암 모래알이 씻겨 내려 깔린 탓이요, 그 시냇물 반석 위에 널어 놓은 빨래가 눈에 아플 만큼 유달리 희게 보이는 것도 그 산의 치마바위 빛깔이 거기 반영된 탓이다. (p. 237)

 

산으로 바다로

 

길든 짐승새끼처럼 한 가지 훈련은 잘 되어 있지만 제 나름의 것을 생각해낼 줄 모르는 아이, 작게 완성된 아이, 약고 잽싸고 눈치는 빠르면서 중대한 판국에 가서 허둥대는 아이, 담대한 체하면서 오히려 참을성이 없고 겁을 더 많이 타는 아이, 떠들썩 하면서 열정은 없는 아이, 실속은 차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노상 중대한 것을 놓치고 마는 아이, 그리고서도 나혼자만으로 싸여 있어 울어버릴 수도 없는 아이, 무서운 아이, (p. 240)

 

Ü 아이가 아니라 내 모습이다. 어디 멀리 갈 것 없다.

 

순사에게 뺨 맞고 순사된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게 사회 심리와 문명비평에 대한 날카로운 관점이 들어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고 또 공포감을 함께 줄 수 있는 그 능력이 매스컴의 그 상품가치로 환치되는 것이다.

 

젊음이 왜 아름다운가. 그 마음 한 구석에 양지바른 공터가 있어 누가 거기 어떤 씨앗을 흩뿌리더라도 그 씨앗이 속에 간직한 가능성을 백분 키워낼 수 있는 그득 찬 거름을 간직하는 일이거늘, 그의 마음속 공터를 덮어버린 것은 누구며, 거름을 주는 대신 칡덤불로 하늘을 가려버린 것은 또 누구인가. 걷잡을 수 없이 가볍게 하늘거리는 날개와 스스로 높은 가지를 골라 기어오를 수 있는 눈과 팔과 다리를 철사줄로 얽매어 둔 자는 누구인가. (p. 243)

 

Ü 건넌 방에 숨을 죽이고 엎드린 아이들을 해방하라. 넉넉한 인간으로 자라도록 그들을 산으로 바다로 뛰놀게 하라. 부디 인간을 자신의 허망한 꿈의 소도구로 갖다놓지 마라. 그리하여 아이들의 꿈에 형틀을 씌우지 마라 (저자)

 

길든 짐승새끼처럼 한 가지 훈련은 잘 되어 있지만 제 나름의 것을 생각해낼 줄 모르는 아이, 작게 완성된 아이, 약고 잽싸고 눈치는 빠르면서 중대한 판국에 가서 허둥대는 아이, 담대한 체하면서 오히려 참을성이 없고 겁을 더 많이 타는 아이, 떠들썩 하면서 열정은 없는 아이, 실속은 차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노상 중대한 것을 놓치고 마는 아이, 그리고서도 나혼자만으로 싸여 있어 울어버릴 수도 없는 아이, 무서운 아이, (p. 240)

 

Ü 아이가 아니라 내 모습이다. 어디 멀리 갈 것 없다.

 

산에서 내려다 보면

 

한낮에는 뿌옇게 바래어 지쳐 보였던 빛이다. 그것이 저녁나절이 되면서 빨아들일 듯한 선도를 내뿜으면서 생기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 (p. 246)

 

Ü 멋진 표현을 어떻게 찾았을까.

 

□ 직사광선이란 사실, 하나의 물체가 지니는 제 빛깔을 그 둘레의 빛깔과의 온당한 조화관계에서 무너뜨려나가는 것인지는 모른다. 따라서 양지바른 곳에 놓인 사물들은 늘 저 자신을 둘레의 조건 속에 흡수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한 혼탁인가. 저 자신을 놓치고 구름을 잡는 우둔이 거기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그늘에서와 달리 헤픈 감정의 일탈이 있고 신경의 둔한 이완과 저도 모를 이성의 기만이 따르게 마련이다. 뿐 인가. 이 직사광선은 또 해 그늘을 아주 흑암으로 덮어버리는 횡포마저 자행한다. (P. 247)

 

Ü 이건 조금 어렵다.

 

□ 능선 너머에서 겁을 주는 하늬바람과는 달리 거기에는 내장 속을 흐르는 은밀한 생명의 긴장이 있다. 누가 있어 내면의 소리를 거부하는가. 응달에 굴을 파고 겨울을 나는 산토끼도 양달이 아니어서 건너다 보이는 비탈에 눈 녹은 햇살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주 보이는 응달에 쌓인 눈 더미에 놀라 도로 굴속으로 움츠려 들었다가 끝내 겨울을 나지 못하고 굶어 죽고 마는 양달 토끼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p. 248)

 

Ü 풀은 물을 기억한다.

 

산에 가는 기쁨

 

□ 이 놈아 너나 나나 죽고 나면 여섯자 사방인데 웬 놈의 욕심을 그렇게 부려서 이 꼴이 되었느냐! (p. 257)

 

Ü 밀가루 포대에 구멍을 뚫어 표시된 만큼 자신의 땅으로 하고 출발했던 두 하인 중 욕심을 부려 죽은 하인을 두고 주인이 한 말이다.

 

부싯돌 반짝이는 시간밖에 안 되는 이 생명의 기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이승에 남기는 흔적의 짙고 옅음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였다. (p. 258)

 

Ü 당나라 시인 백낙천

 

□ 알고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없이 완전한 현실주의자도 또 완전한 이상주의자도 못되고 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흔히 돈 벌레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꿈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내면의 목마름이 없을 수 없듯이 꿈만 먹고 사는 듯이 보이는 눈알이 퀭한 위인도 이 또한 배고픔에 대한 당장의 아쉬움을 이길 어느 방책도 현실의 밖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p. 258)

 

Ü 그렇다. 처지는 모든 것을 말해 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처지에서 발목 잡히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는 그 말에 꿈은 발목 잡힌다. 그러나 꿈을 찾는 즐거움은 배고픔의 고통에 비기겠는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처지를 배반하지 않고 이상을 좇는 현실, 매력적이지 않은가. 한번 살아볼 일이다.

 

□ 문제는 다시 그 추구하는 바를 놓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짜임새 있게 먹여나가는가 하는 데로 돌아간다. (p. 258)

 

Ü 그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곳에 있다.

 

□ 만상을 변화시켜 마지않는 시간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인생인 바에 흘러간 시간을 애달프게 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다. 역시 오늘을 열심히 살 일이다. (p. 260)

 

Ü 이것이 결론인가. 다소 싱겁다. 그러나 이런 말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테다.

 

이른 봄, 산자락에서

 

□ 겨울에 이미 봄은 스스로를 장만하고 있었다.

 

가마니채 흙간에 쌓아두었던 씨감자 한 알을 빠개어 보라. 껍질에는 늙은이 뱃가죽같이 볼품없이 쪼글쪼글 주름살이 져 있는데도 속에서는 파란 싹이 뽀얀 우유빛 녹말을 젖줄처럼 물고 자라나고 있는 것을 (p. 262)

 

Ü , 주옥 같은 표현

 

사실 사과나무는 사과 맛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아픔을 이기고 이런 가혹한 시련을 겪고서도 연후에 제 몸에서 태어나는 사과를 그는 제 입으로 가져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설령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게 할망정 그 자신 그 열매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젓가락이 음식을 물어다 입까지 운반하는 일에 시종할 뿐, 중도에서 그것을 가로채어 먹어버리는 일이 없듯이 사과나무는 하늘과 땅의 자양분을 빨아들여 그것을 제 몸으로 여과하고 삭이고 잉태한 끝에 마침내 그것으로 사과 한 알을 익혀내어서는 아까울 것 없이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의 입에 갖다 넣어주되 그 자신 그것을 가로채는 법이 없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한 봉사자, 저 아니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한 알 사과의 창조자는 그 자신을 치 세우는 법이 없는 것이다. (p. 264)

 

Ü 이 책의 백미다. 김장호의 사과

손의 자유, 발의 자유

 

□ 바위건 얼음이건 발아래 놓이는 것에 대해서 발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 268)

 

Ü 이것이 삶의 detail이다.

 

□ 발에 자유가 주어질 때 그 행동반경의 너비에 비례하는 생명의 발전이 거기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 270)

 

Ü 그러나 우리는 한계 지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그 너머를 꿈꾼다. 그래서 그리로 간다.

 

□ 석가모니는 사실 제 혼자 인생의 빌미를 깨쳐낸 것으로 도의 끝을 본 것이 아니다. 그 깨쳐낸 바를 들고 나아가 중생들과 함께 넓히면서 깨침을 펴나간 그 자비로운 이타행의 그 넓은 지역에 걸치는 발자취, 거기에 석가모니불의 위대함은 있었던 것이다. (p. 271)

 

Ü 붓다의 보살도다.

 

□ 초원을 활보하던 들소는 육우, 유우의 모습으로 바뀌고, 사납던 개와 고양이는 손바닥에 놓이는 완상용 노리개감이 되고 말았다. (p. 281)

 

Ü 야생이 사라진 세계, 그 인위의 파렴치함이 감염처럼 퍼진다.

 

등산도 이다.

 

□ 등산이란 초기에 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었고 이어서는 또 그것이 모험을 전제하는 슈퍼 스포츠를 겸한 위에 다시 여느 스포츠와는 다른 인간정신의 문제에 기본을 두는 전 인간적인 활동이 되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p. 288)

 

□ 남이 여태 밟지 않은 전인미답의 지역에 발을 디밀어 험로를 뚫고 길을 열어젖힐 끝에 미지의 것을 제 손으로 움켜 쥐는 탐험정신이 등산의 본 목적이요 방향이다. (p. 289)

 

Ü 조금의 이견이 있다. 그 땅에 들어섬에 조금의 근신 없이 두려움 없이 미안함 없이 들어서는 것이 맞는 말인가. 인간의 천박한 도전이 그 땅에 들어섬에 따라 그 땅이 당할 앞으로의 욕보임을 생각하면 그 첫발을 내딛는 인간은 기도하고 그 미안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하지 않겠는가.

 

山地通過(산지통과)의 비방 (p. 290)

 

□ 중요한 것은 역시 그 일을 위하여 쏟아 붓는 열정, 지식의 축적과 그것을 제 몸으로 정리하는 뼈아픈 노력과 그 산에 대한 집념, 미지의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동경이 앞서는 것이다. 여느 스포츠와 달리 개런티나 보너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박수갈채가 있는가. 인간의 관심이 사라진 무인지대에서 묵묵하고 고독한 행진은 무엇이 시키는 것일까. 목숨을 내거는 위험부담을 감내하면서 그 일을 감행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p. 291)

 

Ü 나의 질문과 같다. 이 사람, 유난히 동질감에 젖는다.

 

□ 해도 산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반응에 있어 남다른 바가 있는 것이다. 제 발로 그 아름다움의 정수에 가 닿아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강한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p. 292)

 

Ü 위의 물음에 답이 되겠는가.

 

에필로그

 

우리는 그 만큼 자랐다.

아기들이 앓으면서 자라듯이

우리는 뒹굴면서 자랐다.

 

인수봉 암벽에서 미끄러지며

지리산 칠선골을 헤메며

설악의 눈구렁에 파묻히며

한라산 얼음판을 뒹굴며

그렇게 자랐다.

 

뿐인가.

마나슬루에 형제들을 묻고

로체샤르에서 돌아서고

츄렌히말,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를 더듬으며

뼈아프게 산 많은 나라의 아들들은 자랐다.

 

보라!

설연을 헤집고 소리없이 이동해 가는 생과 사의 관계를

(중략)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

모두가 발아래 있다.

,

아직은 거기 인간이 발 붙이고 살게 마련인 궁륭의 지구가 눈아래 펼쳐진다.

(이하생략, p. 294~295)

 

Ü 그대의 감격이 나의 감격으로 전해지는 것은 그 괴로움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그 환장할 맛을 알기 때문이겠다. 어쩌겠는가. 간 사람이 아쉬울 뿐이다.

 

□ 명산의 조건 놓임새(位置(위치)), 앉음새(山容(산용)) 품새(容量(용량)) (p. 296)

 

 

3. ‘mountain fever’ (내가 저자라면)

그의 수사로 즐거웠던 한 주였다. 산에 관해 목말라했던 형용의 언어들을 배불리 취하고 더는 움직일 수 없는 포만감으로 젖어 들었다. 그에 대한 산에 애정을 따라갈 수 있을까마는 그의 철학적 표현과 기가 막힌 묘사에도 앞지를 수 없는 거리감에 자괴한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그의 사후 지인들에 의해 편찬된 그의 에세이 집이다.

 

감히 말해도 될는지 의문이다. 그의 사유는 내 사유와 닮은 곳이 있다. 그는 현존의 사람이 아니지만 내 곁에 있다. 그의 생각이 있고 그의 글이 나에게 와 닿아 있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추모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나는 지금 그가 그립다. 그가 존 메이스필드의 시 바다에의 열병 sea fever’를 산으로 방향을 바꾸어 고쳐 쓴 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내 마음에 열병을 낳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 이런 fever는 다시 없어질 수 있는 불씨였음을 인정할 때 그에게 진 부채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우선 그 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를 한번 읊어보자.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과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 구름 떠도는 바람 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 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들새가 가는 길, 표범이 가는 길로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 사나이들의 신나는 얘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벼랑 길이 다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있으면 그만이다.

 

어떤가. 내 마음을 이리도 확 잡아 끄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는 시인이자 에세이트이자, 산악인이자, 학자다. 제 자신이 컨텐츠가 없는 사람은 슬프다. 그리고 허무하다. 스스로 생의 인화성을 죽여 놓아 제 자신을 타오르게 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슬픈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개인이 대다수이며 사회적 윤리적 담론의 주류를 이룬 사회는 또한 슬프다. 그는 그 슬픔을 딛고 산에 기댄 사람이다. 그리하여 온전히 그 슬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시도 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북한산

 

어버이를 여의고 나는 / 내게 지붕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

분가를 하고서는 더구나 / 내가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돌아보며 돌아보며 / 됨됨이를 탓하면서 //

골목마다 책 갈피 마다 / , 신열로 달아오르던 나날, //

문득 머리 위로 덮여오는 / 지붕, //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밑을 헤집고 //

마냥 기어오른 마루턱 /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 나를 만났다 //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사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마지막 연에서 흩뿌리는 눈물이 감지되는가. 그가 말한 사과 한 알을 품어도 제 것으로 취하지 않던 산이 자신이 왔음을 알고 안아준다. 그 눈물겨운 고마움과 감격이 3자적 입장에서 담담히 펼쳐 내고 있는 저 의젓한 마지막 연을 보라. 앞서 많은 수사를 제한하여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지만 오히려 더 큰 눈물을 자아내는 저 마지막 연을 보라. 나에게는 감격이다. , 산에서 산이 나에게 주는 그런 감격을 느꼈던 것 같아 남일 같지 않은 것이다.

 

책은 66편의 에세이로 두서 없이 묶여져 있다. 그것이 두서 없다는 것은 앞과 뒤가 필요 없어서다. 모든 글이 두가 되고 모든 글이 서가 된다. 모두 그런 글이다. 내 이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나는 저자를 시기하고 있다. 어찌 이리 기가 막힌 표현들을 산으로 불러내었는가. 그러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많은 에세이들을 하나의 주제로 또는 서너 개의 주제로 묶어 내었다면 독자로 하여금 가독성을 높였을 게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가 여전히 글로 살아 있음을 지금 느끼고 싶을 뿐이다. 산이 있어 두렵지 않지만 그가 있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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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05:42:08 *.39.134.221

어제다. 잠잠하던 겨울이 칼바람을 몰고왔다.

이른 아침 어두컴컴을 등에지고 출근을 한다. 강바람은 매섭다.

빌딩숲사이의 바람도 강바람을 시기하는가보다.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문득...든 생각이 있다.

아............산에 가고싶다.

칼바람이 능선을 때리는 그 산.

지난해의 설악이 생각난다. 어찌 이리 가슴을 때리는 글들이 있는가 싶다. 읽다가 그만두었다.

이렇게 읽을 글이 아니란 생각이다.

책을 사야지. 그래서 읽어야지.

이제 책사러간다. 알라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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