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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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 백린기 무리가 보인다.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인식하고 있지만 더욱 자신들만의 반원을 공고히 구축한다. “이번에 유일권 교수 연구 논문만 억셉(accept)되면 하버드로 뜰 생각이야. 한국에선 영 스케일이 안 나와.” 백린기는 모든 것이 불만인 듯 했다. “유 교수도 이제 한 물 갔지. 이미 죽은 이론을 헤까집고 있으니… 연구원 발탁만 봐도 총기가 흐려진 게 보인다니까.” 무리 중 한 명의 고개가 김이상을 향해 비스듬히 돌아간다. “저 자식? 꼭 허풍은 아닌 것 같던데…”
“두고 보면 알겠지.”
백린기는 입꼬리를 애매하게 치켜올렸다. 비웃음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표정이다. 이제 시선의 중심에는 김이상이 있다. 왕좌를 뺏긴 백린기는 초조함에 초연함을 덧칠했다.
“왔냐?”
허지만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김이상에게 알은 척을 했다. “웬 일이냐? 너 동창회 싫어하잖아. 이제 논문 좀 쓰니까 올 마음이 생기냐?”
“나야 뭐, 바빴지.”
“웃기시네.”
허지만은 콧바람을 방귀처럼 풍풍 뀌었다. “술이 어디에 있는지나 아냐?”
“난 안마셔.”
“니 꺼 말고, 내 꺼 좀 가져와라. 밀러.”
“술은 좀 자제하는 게 좋겠어. 몸에 좋지도 않은데.”
“언제부터 내 생각 했냐?”
“머리도 나빠지고…”
“야, 넌 니 머리 나빠질까봐 술 안마시냐? 니 머리나 내 머리나 인류 운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니가 죽으면 지구가 멈추기라고 할 것 같냐?”
“말이 좀 지나치네.”
“넌 자만이 지나치네.”
김이상은 말을 끊었다. 허지만은 취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데시벨을 점점 높인다. 고의적일까? 친구를 망신주기 위해서? 김은 하릴없이 목을 꺾어 맥주방울을 핥는 허지만을 바라보았다. 시야 뒤로 스치듯 고서연이 지나간다. 의도적으로 느려진 걸음걸이… 분명히 김이상을 의식하고 있다. 김은 초점을 흐리는 체 하며 비죽이 웃었다. 그래, 내가 지구 자전의 중심축일 필요는 없지. 내게 필요한 건 저 여자 하나니까.
“왜, 너 아직도 고서연 좋아하냐?”
허지만은 목소리의 크기를 줄이지 않고 말했다. 김이상은 순간 허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야, 꿈 깨. 니가 아인슈타인이라도 저 병원장 딸내미는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말이라고 꼴리는대로 지껄이는 버릇은 여전하네.”
“너 여자 꼬실려고 물리하냐? 한참을 잘못 짚었네. 그게 네가 멍청하다는 증거야 자식아.”
네 눈에는 지금 내 눈에 들려고 안달볶달하는 저 년 모습이 눈에 안들어오냐? 김이상은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허지만의 짓꺼리를 묵묵히 참고 넘겼다. 아직 얻어낼 정보가 있다.
“오랜만에 보니까 긴가 민가 해서 본거야. 이름이 서연이었지. 저 애는 남자 친구가 있지 않나?”
김이상은 허지만을 은근 떠 보았다. 혹시 고서연이 아직도 그 얼빠진 남자와… 고서연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자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는 않았다. 그저 한 철의 젊음을 소비하기 위해 어쩔 줄을 몰라할 뿐. 미인의 필연적 운명이라 여긴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어. 그러나 기억해 둘 것이 있어.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크나큰 실수야. 너는 철없던 과거를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거야. 이해는 해. 너는 어렸고 내 가능성을 간파할 눈도 없었겠지. 내가 과연 아량을 베풀까? 허지만은 김이상의 능청에 아랫턱이 떨어졌다. 오우 마이 갓. 이 자식이 지금 서연을 못알아보는 체를 하겠다?
“꿈 깨 미친 놈아. 저 불여시가 뭐가 좋냐? 요즘 준재벌들이랑 선보러 다니느라 정신 없다더라. 똑똑한 애니까 하루라도 어릴 때 팔리려고 하겠지.”
허지만은 통쾌하다는 듯 겔겔 웃었다. “알겠냐? 결국 다 돈이라고. 내가 너처럼 뭐빠지게 공부하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거다. 어차피 난 부모님 사업 물려받을 거거든. 내가 만약 가난했으면 지금쯤 리히터의 정리 쯤은 애초에 증명하지 않았겠냐? 헝그리 정신?”
김은 순간 허지만의 턱주가리를 한 방 갈겨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분명히 김이상의 처지를 빗대어 한 말이다. 하지만 참자. 참아야지. 이 개자식이 맞은 자리에서 일어나 꽥꽥 대는 꼬락서니를 볼 순 없었다. 김이상은 약간의 무례함이 느껴질 정도로 급히 허지만을 떠났다. 고서연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남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렇다면… 김이상은 보다 일을 수월하게 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오랜만이네?”
김이상은 테라스 난간에 기댄 여자의 가는 종아리와 엉덩이 굴곡을 잠시 바라보곤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장기를 집어삼켰다. 예전의 나는 내가 아니었음을!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어야겠지. 김이상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야 얼마나 찌질했던간에, 이제 남자와 여자는 평생을 맹세할 사람을 구할 시기가 되었고 바로 그 순간, 둘은 만난다. 최고의 찬사와 함께 등장한 남자! 여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배필임을 알아본다… 말은 생각보다 잘 나왔다. 고서연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녀는 아까 김이상의 냉대를 곱씹고 있던 터였다. 그 와중에 김의 아는 체에 고서연은 잠시 갈등했으나 이내 결심한 듯 속눈썹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네. 코도 낮고 볼도 어중간한 높이에 붙어 심술궂어 보인다. 다만 눈은 좀 예쁘지… 서글서글, 눈꼬리가 묘기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희한한 눈. 김이상은 일부러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너 솔직히 다시 보니 별로야… 그래도 역사가 있으니 한 번은 밟아주고 가주지.
“이상아, 오랜만이야. 아깐 좀 바빠보이더라.”
“아아, 간만이라서. 잘 지내?”
“응… 많이 멋있어졌다. 김이상.”
“글쎄… 너도 좀 변했다.”
아 그래… 고서연은 입모양을 일그러뜨렸다. 좀 변했다는 이야기가 마치 “넌 이제 나이들어 보여.” 정도로 들렸다. 김이상은 아차, 싶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과거의 망령이 회귀하려 한다. 집어 넣어, 집어 넣어 두라구!
“이상아… 우리 고등학생 때는, 참 친했었는데… 기억나?”
“…흠… 그랬나?”
“그랬나? 라니… 정말 섭섭한걸? 난 다 기억하는데.”
고서연은 눈으로 반달을 만들었다. 자신의 매력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있다. 김이상은 그녀의 ‘다 기억’한다는 발언이 불안했다. 제발 묻지 않은 대답은 하지 말라구. 난 그저 네 안부를 물은 거라고 네 의학 공부나, 커리어나… 망할.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추했던 자신의 과거? 연민의 추억?
“네가 나한테 가방도 사줬었잖아.”
“… …”
예고된 형벌이 정수리에 꽂혔다. 그래, 가방. 내가 가방 사줬었지. 샤넬백.
“내가?”
“…응. 기억 안나?”
“글쎄, 잘 기억이 안나네.”
“에이 거짓말.”
“그걸 사준 게 너였나?”
“뭐야 너 정말…”
고서연은 이제 양 눈썹 꼬리를 팔자로 만들었다. 잉잉 엥엥 울상으로. 잔인한 년. 니가 울긴 왜 울어? 복벽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서 있는 건 네가 나이라 나거든? 김이상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이 괴물 같은 종족은 전혀 변하질 않았군. 왜 예전엔 미쳐 몰랐을까? 여자란 종족은 악마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걸. 고서연은 정말로 실망한 듯 –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선 확신의 끈을 결코 놓지 않은 채 – 표정을 잔뜩 쭈구렸다. 김이상의 안색을 분별하려 동공은 잔뜩 확장한 채. 김은 고서연이 코브라의 목처럼 고개를 툭툭 꺾어가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웠다.
“이상아…”
“… …”
“너… 나 좋아했잖아?”
고서연은 또박또박 발음하였다. 말꼬리에서 겨우 추궁조를 잘라먹었다. 김이상의 신경끈이 투둑 – 끊어졌다. 어쩔 수가 없구나 너는… 김이상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고서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서 온기를 느꼈다. 다행감이 그녀의 볼에도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둘은 말을 잊은 채 영원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김이상은 그리움을 느꼈다. 고서연,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그 때였다. 사람들의 무리 – 정확히는 백린기 무리 – 가 테라스로 들이닥쳤다. 뭐지, 뭐야? 김이상은 등 뒤의 불빛을 받고 서 있는 그림자들의 표정에서 비열한 계획을 감지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어이, 김이상. 유감이다.”
“뭐가?”
“너 논문 표절이랜다.”
“…뭐?”
백린기의 무리 중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어쩌냐? 유일권 교수 논문이랑 네 논문이랑 겹쳤다는데… 지금 유 교수는 머리통이 열려서 너 찾고 난리도 아니랜다. 지금 막 연락왔어.”
“… …”
김이상은 난간에서 몸을 뗐다. 고서연은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백린기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너 여기 있다고는 안했어. 그래도, 동창회는 유지되어야 할 것 같아서… 너 괜찮냐?”
“그럼 왜 내 핸드폰으로 연락이 안오고…”
“연락했겠지. 안되니까 우리한테 연락이 온 거지.”
“아아…”
“너, 유 교수 논문 훔쳤냐?”
“누가 그래!!”
“추종수가 그러던데? 너랑 같은 랩에 있는 애 아냐?”
김이상은 무리를 뚫고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깨들은 김을 밀어냈다. “비키라고…”
“아니, 말을 해보라고… 떳떳하면 왜 자릴 떠나?”
“그야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냐?”
“여기서 확인해. 조금 있으면 추종수도 온다고 했으니까.”
“유 교수 만나러 갈거라고…”
“기다려 미친 놈아, 간만에 동창횐데 벌써 가려고?”
눈들이 번쩍번쩍 빛났다. 희열의 미소. 먹잇감을 앞에 둔 사자 무리들. 마침 하이에나처럼 추종수가 머리를 기웃거렸다. 동창회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와 같은 푸른 츄리닝 차림이다. “뭐야, 다 여기 있었네?”
“야, 이 새끼가 도망가려 그래서 잡아놨다.”
“어, 김이상. 표정이 왜 그래?”
“이 새끼야 알만하지. 어떻게 된거냐? 유 교수 논문 표절건… 설명 좀 해줘라.”
백린기는 맥주병의 뚜껑을 통 까서 추종수에게 건넸다. 추종수는 뜨악한 표정으로 병을 한 번 치켜들어 인사를 한 후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곤 슬슬 김이상의 눈치를 봤다.
“지금 유 교수야 실성했지. 김이상 너도 곧 학회지에서 연락이 갈 거야. 아무튼, 축하한다.”
“뭐?”
“아아… 김이상 네 논문은 표지 논문으로 실릴 거래.”
“야, 유 교수 논문을 김이상이 표절했는데 왜 이 새끼 논문이 실려??”
백린기는 추종수에게 멱살잡이라고 할 뜻 눈을 희번뜩 치켜떴다. 추종수는 뒤로 한 번 목을 뺐다.
“나도 모르는데? 학회에서 그렇게 결정한거야. 학회에 따져 병신아.”
“분명히 뭐가 잘못됐어. 학생 논문을 교수가 뺏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게 일반적이니까!”
이 자식처럼 대범하게 교수 논문을 훔치는 예는 별로 없으니까 말이야! 이제 사람들의 표정은 도덕적 비난으로 스펙트럼이 옮겨갔다. 독립투사들처럼, 그들은 공분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뭐!”
“유 교수 논문에서 김이상 이론이 나올 수가 없대…”
“… …!”
“반면에 유 교수 논문은 지난 번 김이상 초기 논문의 내용을 차용한 것이 밝혀졌고… 아무튼 김이상 저 새끼가 희한하게 리히터의 정리를 끝까지 증명한 것 같더라.”
“… ….”
“뭐냐, 이 분위기는? 아무튼 표절건이 끼어서 취재진은 잠시 보류 중이긴 한데… 아무튼,”
“김이상이 증명했다고?”
“야, 당사자가 저기 있는데 저 자식한테 물어봐.”
“… …”
백린기는 화석처럼 굳었다. 김이상은 살의에 대한 두려움과 죽을 듯한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마치 몸이 흰 색으로 휘발되는 듯했다. 김은 쭉정이를 세워놓은 듯 힘빠진 그네들을 밀쳐냈다. 이제 그들은 김의 행로를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 없었다. 제발… 이제 꺼져줘버려. 백을 남겨두고 주인공을 잃은 관객들은 튕겨나가듯 흩어져버렸다. 고서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립글로즈맛이 났다. 그 와중에도 입술은 더욱 새빨개졌겠지? 고서연은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이 김이상을 쫓아갈 때다. 그는 와해되는 군중 사이로 천재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