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걸음
- 조회 수 6088
- 댓글 수 1
- 추천 수 0
Book Race 1: 그리스인 이야기 2013. 1.31
1. 저자 만나기 어렵다. 지난 여름, 같은 저자의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고, 작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와 나의 짧은 관찰을 섞은 리뷰를
할 때는 이리 힘들지 않았는데. 오병곤 사부의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강좌에서 한번 들여다 본 저자였다. 그런데 불과 수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저자가 이리 힘든 대상이 되다니, 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더 모르겠다. ‘마흔 세살…’을 쓸
때의 그와 지금의 그는 또 다른 사람인 듯 책도 많이 다르다. 일단 기억해보고, 상상해보자. 내 기억에 의한 구본형은 이렇다. 2011년 10월 29일,
저자를 강연회에서 처음 만났다. (일년에 한번 내 생일도 늘 잊고 넘어가는 엉성한 정신이건만, 놀랍게도 날짜가 사인 받은 책에 써 있었다!) 크고 작은 기업 임원들이
모인 저녁을 겸한 강연회에서, 그는 ‘The Boss’라는
저서를 기반으로 간단한 강연을 했다. 강연은 좋았다. 마침
내가 고민하던 부분도 건드려주었다. 그런데 이분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기업체 대상 강연에서 만나는 에너지 과잉의 지나치게 친절한 연자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일단 그리 안 친절했다. 말도 많지 않았다. 사인도 딱 내 이름과 본인 이름만 써줬다. 격려의 말 한 마디 없이!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이 강렬한 포스와 은근히 전해오는 묵직한 내공…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강연을
듣고 돌아온 후, 나는 자의로 읽는 일이 거의 없는 처세술 류의 저서 중 정말 드물게 거의 끝까지 그
책을 읽었다. 읽고 나서는 마침 고민스러웠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나름 유용한 시각도 갖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책에 저자의 서명을 받으며 교환한 명함 덕분에,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다양한 편지들을 매일 아침 이메일을 열 때마다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나의 버킷 리스트를 꺼내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되기’를 조심스레 얹어두었다. 당시로선 실현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리스트였건만. 여하간 이것이 저자와 나의 유일한 대면에 대한 기억이고 나 혼자 키워온 인연의 시작이다. 짧은 기억 속에 고정된 그와 달리, 책을
통해 만난 그는 변하고 있다. 아직 저자의 책을 많이 접하지는 못하였기에, 그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가
구본형 선생의 저자 소개는 좀 달라졌다. 처음 만난 그의 책에서 소개한 구본형은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변화경영전문가로서, IBM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중심으로 직장인의 멘토 또는 경영사상가로 매끈하게 포장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훨씬 더 근본적인 개인의 변화, 자기
혁신을 중심으로 점점 더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탐구자이자 조언자이면서 실천가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비유하자면, 구본형은 잘 나가는 강남의
스타 강사에서 전쟁보다 치열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는 제다이들의 유일무이한 스승 요다로 변해가는 중인 듯 하다.
조직의 변화를 관리하는 직장인에서, 변화
경영의 道를 설파하는 1인 기업가로, 삶에 있어 변화를 통한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위한 스승으로, 자기 혁명의 실천가로 더 깊어지고 뾰족해지는 저자의
프로필을 보며 나는 자신의 화두인 변화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구본형을 만났다. 이것이 내가 책 속에서
발견한 구본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자기혁명가 구본형이 두렵다. 이렇게 치열하게 엄격하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을 ‘진짜로 만나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줄 지 생각하면 설레기 전에
긴장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생활 속의 심리학 이야기’에서 던져준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모델이라 뜨끔하고, 모락 모락
질투가 난다. ‘나를 완전히 긍정한 후,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는 그 길로 가야 한다’는 한마디를 자꾸 곱씹게 만드는 구본형 선생. 그러니까 나는, 그를 쿨하게 부러워할 수도 없고 무심할 수도 없어
버겁다. 그래서 나는 이 짧은 저자와의 만남을 정리하며 부끄럽게도 또,
평정심을 잃고 지치고 말았다. 온갖 감정이 파도를 치게 만드는 이 얄미운 저자, 에잇 내 칼, 아니 내 마우스를 받아랏! 나는 매우 내향적이며 직관적 기질에 가깝다.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느끼는 것이 우선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판단보다는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의미와 내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많다….(중략) 그러나 세계를 함께 할 사람을 고는 데 까다롭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보일 수 있다…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기, p304) 그가 ‘마흔 세살…’에서 고백한 자아상을 보면 분명히 그는 INFP다. 나도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인지,
나와 비슷한 기질과 고민을 공유했을 것 같은 그의 글과 행적들을 무심히 들여다 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구본형을 좀 더 연구해야겠다. 나를 알고 나답게 행복해지고 나답게 잘 살기 위해 할 일들의 우선 리스트에 그의 충고를 올려 놓을 것이다. 아직 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발명하고 한참 앞서 간 그가 진정으로 부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그를
닮고자 하고 그 같은 성공을 꿈꾸는 일이 몹시 어색하다. 공개적인 따라쟁이가 된다는 것이 쑥스럽고 쪽팔리기도
하다. 그래서 그간 내게는 멘토도 없었나 보다. 굳이 따지자면 사부의 사부쯤 될 구본형 선생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더 유심히 관찰하고 이것 저것 질문도 많이 하리라.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팬으로서 따라쟁이로서 그가 발견한 기쁨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3000년이 지나 우리는 가지 가지의 문명들이 혼합된
글로벌 시대에 와 있다. 우리의 의식 세계는 문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아직도 문명에
의해 순치되지 않은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
그것이 자기 경영의 본질이다.그래서 신호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내명의 어둠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며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의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 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일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P18-P19) 아비를 쫓아낸 제우스가 다시 그 자손에 의해 쫓겨나리라는 것은 영원한 무의식의 강박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세대는 언젠가 반드시 지나가고 자식의 시대가 오며,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에게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상징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시간의 비극이며
또한 축복이다. (p29, 주) 자식이 부모를 넘어서 저 혼자 나아갈 때, 또는 영원히 그 그늘에서 기를
펴지 못할 때 느끼는 부모의 이중적인 감정을 뭐라 표현할지. 아비와 자식이 그토록 경쟁적이고 치명적인
관계일 수 있음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은 내가 마흔에 이르렀기 때문인가. 모든 것은 지나가고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에서 비극보다는 안도를 느끼는 것은 역시 마흔을 넘긴 탓이려나.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신으로부터 모든 것, 즉 강점과 약점, 저주와 축복 모두를 받은 여자가 되었다. 제우스는 한 사람 안에 너무도 많은 대립적 요소를 넣어두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해서 하루도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모순, 갈등, 패러독스, 딜레마가 태초의 인간의 조건이 되었다.(p30) 그러므로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다. 매일 헷갈리고 고민하고 번복하는 나의
기복은 이러한 자연스런 인간적 특성의 발로일 뿐이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것만 좀 줄일 수 있다면… 시인 뿐이 아니다. 작곡가든 미술가든 조각가든
가수든 무용수든 칭하여 예술가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무사이 여신들이 문득 천둥처럼 찾아와 가슴을 뒤흔들고 내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 단 한번의 손짓으로 심혼을 흔드는 불멸의 대작을 만들어내기를 염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한 인류로서 중세인이며, 고대인이며,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인류의 모든 과거가 살아 숨쉬고
있다가 어떤 야생의 순간에 원시의 순수한 힘으로 우주적 교감을 이루게 될 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시선은 의식의 혁명을 겪게 된다.(p33) 보고 읽고 받아들이고 감탄하는 것은 잘 할 수 있는데. 나를 던져 쓰고
나누고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비교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서 승부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런 일일지, 고민하다 나는 늘 좀 더 안전한 제 2의 길을 택했다. 그럼에도 내 안을 속속들이 들춰내어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들어내는 그 날을 소원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제우스의 바람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지배신이 이미 있는 도시에 그리스인이 들어가 영향력이 커지면 제우스 숭배도 함께 퍼지게 되면서 원래의 토속신과 하나로 융화되게 된다. 그러면 그 토속신의 아내 역시 제우스에게 양도된다. 이 과정이 바로
제우스의 끝없는 외도 행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p65) 여자는 이 시대에 양도되고 증여되는 재산으로 여겨지는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기도 하고, 토속신과 새로운 지배신의 융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이 된다.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The way it is) 네가 따르는 한 가닥 실이 있지 변화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가는 실 그러나 그 실만은 변치 않아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따라가는지 궁금해하지. 너는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 해. 그렇지만 그 실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 그 실을 꼭 잡고 있는 한, 너는 절대 길을 잃지 않아. 살다 보면 슬픈 일도 일어나고, 사람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기도 하지. 네가 무얼 해도 시간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어. 그래도 그 실을 꼭 잡고 놓으면 안돼. - 윌리엄
스태퍼드(William Stafford, p92-93)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미로를 밝혀준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미궁 속에 길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삶이라는 슬픈 미궁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운명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른다.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미로를 사랑했기에, 그 속에
길이 있기에 그 길이 고통스러워도 버리고 파괴하지 않는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입을 통해 아리아드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 마디는 ‘사랑한
것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배신하고
떠나는 사랑을 어찌 미워하지 않으리.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인간은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이며, 패러독스이고 스스로에게 딜레마인 것이다. 즉 ‘나는 너의 미로’인
것이다. 아리아드네야말로 미로 탐험 전문가가 아닌가! 아리아드네야말로
사랑이 미로이며, 삶이 미궁이며, 스스로가 미궁임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p97) 삶이 알 수 없는 미궁이며 그래도 사랑하라는 말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독백처럼 털어놓은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그리웠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를 만났는데, 한 순간에 그냥 그녀를 잃어버렸어. 그것도 영영.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랬는데, 난 뭘 해야 할 지 알았어. 그냥
계속 숨쉬는 거야. 살아가는 거야. 내일을 또 어떤 조류를
만나 돛이 펴질 지 모르잖아.” 톰 행크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간신히 재회한 사랑, 그 모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던 목숨 같은 연인을 만나고도 결국 영영 이별하고 마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나는 주인공이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을 보다가 눈물이 고였다. 아리아드네와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 삶의 가차 없음을 받아들이고서야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그 역시 시장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마치 판도라가 금단의 상자를 열어 모든 죄악을 이 세상에 뿌리듯이 그도 스마트폰을
만들어 세상에 뿌림으로써 ‘생각 없음’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사람들은 이것과 함께 일어나고 이것과 함께 잠이 든다. 지하철에서
책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마트폰이 차지했다. 생각이
사라지고 정보가 주가 되면서 오락과 채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들과의 연결은 혁명적으로 증진되었으나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을 버려두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서로를 모독한다. 사람들은 몰입을 잊어버렸다.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는 죄’가 전염병처럼 범람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으나 특별한 악인도 악마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웃집 아저씨였을 뿐이다. ‘악의 평범성’, 그 원천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죄’에서 온다. 시키는
일을 그저 따르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음으로써 주도적 삶도 사라진다.(p103-104) 악의 평범성, 생각하지 않을 때 의식도 하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죄악에
대해, 그래서 죄책감조차 없이 남지 않는 악행에 대해서라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예는 있다. 모른다는 것을 면죄부로 삼는 그들.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또한 잔인한 사냥꾼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는 고통을 체험한 유일한 신이다. 그는
포도나무처럼 매년 가지치기를 당하고 추운 겨울 갈래갈래 껍질이 찢어진 죽은 나무둥치처럼 매년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매년 부활한다. 기쁨에 가득 차서 다시 살아나며, 죽어야 할 자들에게 죽음이 희망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는 불멸의
신인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간의 여인이 낳은 유일한 신이다. 여인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나
세멜레는 제우스의 많은 여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다. (p113-114) 디오니소스에게 많은 장이
할애되지 않은 것은 좀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은 모험을 선동하는 목적에 충실하니, 아마도 디오니소스의 부활과 기독교의 예수와 여러 기타 종교와 신화 속 부활의 모티프에 대해 더 파고드는 것은
여타 신화 읽기 서적에서 파고들면 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빵의 역사를 읽고 난 후 죽음과 부활과
종교와 곡식의 연관성에 대해 자꾸 끌린다. 메데이아는 바곳이라는 독초로 독약을 제조했다. 이
독초는 저승의 문을 지키는, 저리가 셋달린 개 케르베로스의 침으로부터 자라나는 풀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열두 과업의 하나로 이 개를 잡아올때 목을 감아 잡았기 때문에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는 동안
개의 입에서 나온 침이 바위를 적셨는데, 그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풀이 있었다. 단단한 바위 위에서만 자란다고 하여 바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곳은 지독한 독초였다. (p125) 바곳, Monk’s hood, 일명 수도사의 두건, 학명 아카로이드 아코니친, 우리나라에서는 투구꽃으로 불리고, 한약재상에서는 부자라고 불리는 독초. 바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나를 시대추리물에 입문시킨 앨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였는데, 케르베로스의 침에서 기원을
설명한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이것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거 참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참 전통 있는 독극물이었구만… 흐흠. 설명 그럴
듯하고, 이거 재미있다!
시인은 노래한다.
미궁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버리고 떠나야 하네. 사랑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내, 만인이 환호하는
영융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불임의 영웅
아비를 배신하고 사랑을 선택한 여인, 잡아야 할 손은 자신의 손 밖에 없는 그 손을 남몰래 놓아버리고 검은 돛을 단 채 제 아비를 죽이고 말았구나. 한번 사랑한 것은 먼저 미워할 수 없으니 네 운명을 사랑하라.(p127) 테세우스가 그토록 많은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영웅이건만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이토록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진정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함께 성공적으로 꾸려나가기는 힘들기 때문일까.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개인적 삶이 비극으로 가득 찬 예는 참 많다. 그러니까
둘 다 성공한 사람들을 참아내기가 더 힘든 것인지? 테세우스는 현명하고 공정한 왕이 되었다.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기를 원치 않았다. 각 마을에 있던 공회당이나 행정청들을 없애고 아크로폴리스에 공동의
공회당을 지었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을 아테네로 정하고 공동의 제사를 지냈다. 시민들이 투표할 수 있는 의회를 짓고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는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평등을 조건으로 외지에서 적극적으로 인구를 유입시켰다. “모든 민족이여, 이 땅으로 오라.”
이것이 그의 기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민주정치를
펴기 위해 왕의 자리를 내던진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다. 다른 도시국가들이 한 사람의 절대군주 밑에 머리를 조아리는 체제를 구축해갈
때 아테네는 모든 나라와 도시 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테세우스는 국민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위대한 나라의 초석을 놓았다.(p128) 오홋, 이것은 테세우스가 실존인물이라는 것? 몰랐다, 역시 멋지다!!! 그의
모험담은 후세가 아테네 최초의 영웅을 신격화하기 위한 각색인 것인가?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접점에 있는
인물들은 역시 흥미롭다!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p138) 들라크루아가 그린 격노한 메데이아의 얼굴은 가장 풍부한 표정을 담은 눈 밑까지 검은 그림자로 덮여있다. 아마도 감히 자식을 죽이기 직전 메데이아의 심정을 담은 눈을 그려낼 엄두를 내지 못한 까닭일까?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 눈빛에서 더 많은 감정을 끌어내게 하는 묘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대사에 꼭 맞는 그림이 바로 들라크루아의 그림이다. 두
아이를 죽이기 위해 비수를 손에 든 여인. 자신의 생을 지옥으로 몰아넣게 될 행위를 하기 직전의 여인.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얼굴은 분노 너머의 절망과 허무를 담고 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게 될 내 사랑들.”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어미의 모습.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것은 처음 잘못된 사랑을 시작한
자신의 젊은 과거를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리라. 왕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불운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 메데이아가 더불어 사랑한 것은 그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빛나는 시선’을 마주할 때는 마음이 뒤집어지곤
했었다. 품에 안고 있을 때도, 심지어 그 아이들을 죽일
때도 못 견디게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분노와 복수심이 사랑을 삼켜버렸다. 분노는 의지보다 강해 스스로 삭힐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이 뻗쳐 나갔다.
우리는 그 악마적 힘에 대항할 수 없으며, 그 힘이 우리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메데이아가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바로 그 승리의 순간에 그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다. 악마가 영혼을 쥐고 흔든다. 상황은
끝났다.(P138-139) 이 불쌍한 여자. 어찌 이리 지독한 사랑을 하여 이 지경까지 갔단 말이냐. 그러고도 또 살아갈 것이면서, 아이들을... 나는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순간,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철저히 파괴되는 순간 괴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승리의 기쁨에 충만한 순간 외치는 “멈추어라
시간아, 너 참 아름답구나”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바로 이때 악마는 우리의 영혼을 넘겨받게 되어 있다. 악마에게 영혼이
넘어가는 순간 신은 영혼을 악마의 손에서 구원한다. 그레첸 역시 그랬다. 파우스트에게 버림받고 미쳐서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는 가장 비참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신은 그녀를 구원해주었다. 신은 인간의 바닥에 존재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달콤한 죄악 “오
펠릭스 쿨파 O felix culpa”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의 동물적 존재가 죽고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시선으로 보면
옛 아담이 새 아담으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원죄다. 인간은
영원한 기쁨의 에델동산에서 쫓겨나 타락한다. 그러나 그 타락이 없었다면 구세주도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 승화는 그냥 낙원에 머물 때의 의식보다 더 높은 의식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그 타락이 없었다면 더 높은 영혼으로의 승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죄악이 얼마나 달콤한 죄악인가! 죄악, 바로 육체의 죽음
없이는 정신적 존재로의 재생도 없다. 선불교의 스승 육조 혜능은 그리하여 기가 마긴 명언 하나를 남겨두었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은 타락한 정신 속에 있다.” (p143) 메데이아의 극한에 다다른 사랑과 증오와 죄악이 완전한 파멸로 종결되지 않고, 또
다른 왕의 아내로서 다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더욱 놀랍다. 그런 극한의 상황을 겪고 다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악착스러워지는 그녀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녀의 지독한 열정보다 더 악착같은 삶에의 의지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 지.
가장 큰 죄악을 지은 후에야 오는 정신적 재생에 대한 부분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레첸이 그랬을 지는 몰라도 메데이아가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정말로 생존 본능, 삶의 의지가 강한 여자라는 생각은 드나, 그것을
넘어 더 높은 정신으로의 승화를 이뤄냈는지는 모르겠다. 메데이아를 더 자세히 탐구하면 공감할 수 있으려나? “아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그 대신 너에게 주어진 운명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어찌하여 불가능한 일을 탐하는가? 발 앞에 일을
직시하라. 발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 죽어야 할 우리의
조건을 잊지 마라.” – 핀다로스 pindaros (p149)
사랑을 하면 배신을 하지 말고 비밀을 보았거든 입을 덮어 바위가 되라. 비밀이 자라 곧 피처럼 붉은 불행이 되리니 그 비밀에서 멀리 도망쳐라. 숨겨둔 어두운 곳은 언젠가 밝은 곳이 되는 법.
결코 불행은 전하는 전령이 되지 말지니 사랑할수록 미움도 크고 복수가 지나칠수록 후회도 크니 언젠가 분노 속에서 저지른 일을 뉘우칠 때 그 일을 전한 자를 가장 미워하리라 (p152) 완전 공감! 입조심하자.
아쉽구나, 신의 분노 속에서 태어나고 다시 신의 분노로 운명을 다하는구나. 현실을 나는 자들은 신이 그에게 허락한 것을 즐길 줄 알고, 그 천직의 즐거움이 삶임을 믿는다. 일 외에 다른 두 큰 즐거움이 없을 때 일은 놀이가 되나니. 운명을 따르라. 투덜거리지 마라. 그러나 높은 하늘을 지나는 바람은 수시로 행로를 바꾸니 무엇이 운명인 줄 어찌 알겠는가. 다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
시인은 마음을 다 털어내지 못하여 다시 노래한다.
자신의 일을 하다 죽기 바라네. 태어난 운명대로 길을 가고 그 길 위에서 늙으리니.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천직이니 천직을 다한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되나니.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그만두고, 평생 가야 할 길로 들어선 자는 황금의 시기를 맞이하리니 그들에게 퇴직은 없다. 죽음이 바로 퇴직이므로. (p154-155)
죽음이 곧 퇴직, 헉. 나는
지금 아무래도 인생의 직업, 직장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다. 철학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철학은 세계의 사싱인
이성(절대정신)이 그 형성과정을 끝내고 난 뒤에 비로소 철학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철학이 회색에 다시 회색을 덧칠할 때 삶은 이미 늙어버린 모습이 되어있다. 잿빛에 잿빛을 덧칠하면 그 삶의 모습은 젊음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단지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그 첫 날개를 편다. – 헤겔의
법철학 서문(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