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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8일 06시 27분 등록

아내의 보물상자

 

직장생활 15, 마흔을 앞둔 서른아홉의 과장 말년 차. 조직생활의 답답함을 느끼면서 어디론가 이탈을 꿈꾸는 나이. 늘 반복적인 출근 길에 우연히 찾은 회사 옆 도서관. 몇 년 동안 같은 길을 걸으면서 다녔지만, 그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도서관 건물이 어느 날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그 곳에 발길을 옮길 때는 주변의 눈치를 보면 걸어갔습니다. 점심 때 혼자서 걸어가는 것. 그 걸음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 왠지 소외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처음 닿은 발길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7시부터 문을 연 도서관 열람실에 앉았습니다. 책을 읽거나 하얀 종이 위에 그림도 그리고, 생각을 적어내려 갔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씩 숨통을 트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심 때는 도서관 자료실에 길게 늘어선 책장에 기대거나 바닥에 주저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작가의 이야기에 빠지기 시작하면 같은 작가가 쓴 책들을 쭉 읽어보았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가끔씩 책을 읽다가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쳐 지각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이 더 없이 즐거웠습니다.

 

결혼하면서 아내의 집에서 가지고 온 이삿짐이 떠올랐습니다. 대부분 책 상자들로 작은 방 한구석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왜 가져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고, 책 상자를 옮기면서 발등에 찍힌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일까요? 단 하나의 상자도 풀지 않는 채 먼지만 쌓여갔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숨통 트기를 하면서 아내의 책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하나씩 뜯어냈습니다. 상자를 여는 순간 보이던 책 제목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한 권씩 손에 잡고 먼지를 닦아낼 때마다 제 마음의 찌던 때도 함께 깨끗해졌습니다. 아내가 읽으면서 책갈피로 사용했던 나뭇잎과 종이조각들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오래된 책 속에 묵어있던 깊은 향이 더해져 산속에 질박한 흙 냄새처럼 구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책 읽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과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아내가 읽었던 감동의 순간들이 시간을 관통하며 저에게 이어져왔습니다.

 

     어느 여름 날, 도서관 열람실에 새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날개 짓을 하며 열람실을 날아다녔습니다.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모른 채 허둥지둥.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혼비백산. 자리에 일어나서 도망가거나 어떤 사람은 새를 향해 거칠게 손짓하며 말했습니다.

이쪽 말고 저쪽으로 나가

그럴수록 새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벽에 부딪쳤습니다. 가짜 하늘이 그려진 유리창에 다가가지만 다시 또 머리를 부딪치고는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기운이 떨어진 새는 책상 위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새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낯선 사람들로 두렵기만 합니다. 누군가 가까이 가자, 다시 날개를 펼쳐 봅니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날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린 걸까요? 도서관 경비아저씨가 열람실 문을 열고, 손에는 긴 빗자루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나는 머리 위에 있는 큰 창문을 하나 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날개는 바람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번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진짜 하늘이 보이는 창문으로 날아갔습니다. 창 밖으로 탈출한 새는 탁 트인 푸른 창공으로 높이 올라갔습니다.  처음 세상의 공기를 마신 것처럼, 처음 세상에 날개 짓을 하며 날아본 새처럼 날아 올랐습니다.

 

그 동안 나는 어디로 나가야 할지 방향을 모른 채 허둥지둥 날개 짓만 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 오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입니다. 책상 앞에 놓여진 아내의 책이 보였습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고 바람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알려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날개의 흔적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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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13:42:03 *.43.131.14

결혼 10년 가까이 된 내가 풀지 않았던 처녀적 책 상자를 풀어서 읽으면서, 내가 끼워둔 종이와 나뭇잎, 누름꽃의 향기를 맡아보는 남편을 본다면 저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아내의 보물상자'란 제목이 그런 따스한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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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22:52:10 *.2.60.8

남편분께서도 꼭 그러실거예요.

저도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을 저의 아이들이 커서 보물처럼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예요.

제가 아내의 책에 얻는 따스한 느낌처럼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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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0 04:33:58 *.39.134.221

"날개는 바람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확...닿는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일어서나? 라는 물음과 함께.

누군가 정해준 커리큘럼은 안전망이었다. 그것을 나를 보호하고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었던것같아.

이제는 도서관에 날아든 저 새처럼 이리저리 부딪치고 낯선이들에 둘러싸여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디를 향해서 날아야 푸른 창공으로 오르는 길인지를 찾아야 하는 그 시간이 내 앞에 남아 있음을 지각한다.

네가 늘 이야기하는 팔팔이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란 것이 이런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아침이야.

지나고 보니 마흔아홉이란 나이에 연구원을 했네.

언제부턴가 나이의 숫자를 잃어버렸지만 설흔아홉이란 숫자를 보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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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3 07:03:58 *.33.18.163

그래서 마지막 주 과제는 혼자서 날아보려고, '나의 이야기'를 선택했어요. 

나의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거든요. 

제 글 속에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해줘서 넘 고맙습니다.

항상 누님의 생각은 저에게 특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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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9:04:28 *.51.145.193

아, 행님 글이 언제부턴가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는 걸 느낍니다.

행님의 이같은 소설적 수필이 나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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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3 07:07:46 *.33.18.163

항상 너의 칭찬은 나를 기운 넘치게 하는 것 같아.

조만간 너보러 부산으로 가야겠다. 

너의 조언대로 이런 형식의 글을 꾸준히 써 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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