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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6일 22시 51분 등록

삶의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현실 속에서 벽이라는 여러 대상들을 만난다. 타인 혹은 주어진 환경이나 장애물 등의 실체로써. 나는 지금 암벽 앞에 서있다. 그는 형태가 다양하다. 직각으로써 때론 심한 각도의 경사로써 기울어져 사람을 절망케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암벽을 오를시 기울어진 경사진 벽은 말 그대로 쥐약이다. 그날도 그러하였다. 발을 단단히 디디고 머리위 홀드를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웃긴다. 마음 같아서는 폴짝 뛰어서라도 움켜지고 싶지만 그것은 염원일 뿐. 몇 번 시도해 보지만 제자리걸음이다. 이럴 땐 남들 보기에 부끄럽다. 어린 초등학생들도 잘도 올라가건만.

“잘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그러면서 강사는 손가락으로 나의 배를 만져본다.

“어머, 근육이 하나도 없네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이유가 있었군요. 배에 힘이 없으니 올라가지 못하죠.”

무안하다. 중년의 흔적으로 무장된 두툼한 뱃살이기에 정작 王자 모양을 바라지도 않지만 필요한 근육은커녕 지방만 넘쳐나니. 그러면서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홀드를 손으로 잡은 상황에서 팔을 길게 늘어뜨리기 보다는, 최대한 암벽에 몸을 밀착 시킨 채 디딘 발을 틀며 잡아보라는. 심호흡을 해본다. 이번에는……. 그런데 그 순간 고등학교시절 그놈 얼굴이 떠올라졌다.

중3. 끝이 보이질 않는 암흑속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한차례 병원수술을 거치는 와중에 치러진 연합고사 시험에서 거푸 고배를 마시고나니 빛이 보이질 않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다 삼류 고등학교 흔히 따라지라 불리는 곳에 간신히 진학을 하게 되었다. 수준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공부는 뒷전이고, 중학교 때 주먹으로 한가닥 하던 짱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대거 포진한 탓에 입학식부터 서열의 우위를 정하는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중국 춘추전국시기도 아니건만 방과 후 패싸움은 기본이고 수업시간 중에도 유리창이 깨지는 등 다툼이 일어났다. 선생님들도 암담한지 내심 손을 놓고 있었다. 순탄치 않을 학창시절에 걱정이 앞선다. 더욱이 이런 환경 속에서 과연 내가 선택할 길은 무엇인지. 교과서를 들쳐볼 수밖에 없었다. 몸도 약하고 힘도 없는 내가 해야 할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학교를 평정한 그놈을 만났고, 누구도 그 녀석에겐 대항할 수 없었음에도 그날 시비가 붙는 상황이 일어났다. 게임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럼에도 싸움이라니 급우들에겐 신나는 구경꺼리가 생긴 마냥 난리가 났다. 그것도 평소 눈에 띄지 않는 범생이라고 불리던 내가 실제 주인공이 되었으니. 무슨 용기가 있어서인지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런 나를 힘이 좋은 그놈은 멱살을 잡더니 한손으로 움켜쥐며 들어 올린다. 숨이 막힌다. 삶이 죄어오듯 그놈 손아귀의 힘은 강도를 더해갔다. 꽥꽥 소리를 질렀고 주먹과 발길질을 해대며 허우적거렸지만 바람소리만 허공을 가른다. 고목나무 매미마냥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장난감의 대상이 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놈의 가소롭다는 눈빛이 더욱 절망적이 되게 하였다. 얼마 후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겁도 없이 도전한 용기가 가상해서인지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땅위로 순순히 내려놓았다. 그게 끝이었다. 비참했다. 한 대를 때리기는커녕 아이들의 놀림감만 되고만 나 자신이. 화장실로 뛰어가자 서러움에 북받쳐오는 울음이 분출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무엇 때문인지 나에게 건드리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녀석의 모습이 홀드 속에 투영되어서인지 수차례의 패배에도 전투의욕이 되살아났다. 이곳의 관문을 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어떡하든 잡고 일어서야 한다. 배에 힘이 없으면 깡으로라도 잡아야 한다. 손에 땀이 흐르며 자꾸 미끄러진다. 힘이 빠지는 가운데 벌써 몇 번째의 시도인가. 그러다 기어코 나의 손으로 첫 번째 홀드를 잡았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의 뜨거움. 그러했다. 남들은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감격스러웠다. 정상에 선 것도 아니건만 당시 그놈 얼굴에 펀치 하나를 보기 좋게 작렬시킨 기분이었다.

 

묘하게도 암벽은 세상을 닮았다. 그렇기에 그곳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군상은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에서의 타파 방법과 유사한 행동을 취한다. 초보자이든 그렇지 않든 장애물을 만날 때면 가릴 것 없이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지. 어떤 경로로 가면 될까. 그러다 손과 다리를 뻗어 간격과 타이밍을 견주어 갈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한다. 어떤 이는 소심하게 어떤 이는 대범하게 그러다 땅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한 번 더 도전해 봐야지. 아니, 힘을 비축해야하니 쉬었다 가자고. 뭐야, 내가 이런 곳에 떨어지다니. 많은 유형들이 있지만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대상이 있다. 개인의 성격과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도박과 운전하는 습관을 보면 된다고 한다. 재미로 치는 가벼운 화투 놀음이라도 돈을 잃게 되면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왕짜증, 판을 뒤엎기도 하는 등 재수 없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 운전은 어떤가. 평소 침착하고 건실해 보이던 00씨. 운전대를 잡자마자 엑셀레터를 밟고 누군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그럴 때 우리는 이야기한다. ‘저 사람한테 저런 면이 있었네.’ 우리는 그럴 때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본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냐고.

클라이밍도 그러하다. 그녀의 가녀린 몸집 탓에 그리 운동을 해본 느낌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강사가 내어준 과제물을 그녀는 끈질기게 반복을 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힘이 달려 쉬고 있음에도 그녀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있다. 반전이었다. 한마디로 근성이 있다고 할까. 해내겠다는 욕구가 남달라 보였다. 직업이 의사란다. 누구는 한 가지도 하기 힘든 가운데 요가도 병행하고 있고, 최근에는 중동권의 새로운 고객 창출을 위한 아랍어 수강까지 나섰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거려 진다. 역시~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이들이 있다. 목표로 설정한 것에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 조금은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는.

00거래처 방문 교육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에 띄는 한사람이 있다. 여름 뙤약볕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파라솔을 펼쳐놓고 제품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더운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녀는 내가 건네는 인사말에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웃음으로 화답을 한다. 계절과 다른 이의 시선에 상관없이 날마다 아침 조회가 마치면 이렇게 가두홍보를 몇 시간 이어나가는 그녀. 벌써 1년째이다. 함께 홍보작업을 시작했던 이들은 여러 개인적 사정으로 그만두었음에도 그녀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매달리고 있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동안 단골고객도 생겼고 그 같은 성실성에 박수를 보내는 이도 있다. 고객들은 영악하다. 똑같은 상품을 사더라도 어떤 이에게 구입하는 게 좋은지를.

영업부 근무시절.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다음 새로운 영업 본부장이 외부에서 스카우트 되었다. 삼성생명 출신으로 이 계통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전형적인 필드형의 그. 첫눈에 보기에도 호락호락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다. 축하식 및 상견례의 자리가 저녁에 마련되었다.

“금번 새롭게 명을 받은 000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의례적인 박수가 이어진 후 이어지는 신임 본부장의 한마디.

“처음 자리이기도하니 술 한 잔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냉면 사발을 주문한다. 거기다 소주 한 병을 가득 붓더니 벌컥벌컥 물을 마시듯 직접 들이킨다.

‘뭐야, 설마 저걸 우리보고 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지만 그 우려는 현실로 돌아왔다.

“옆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영업이라는 보직의 일원으로 분위기상 이런 자리를 피하기는 어렵다. 그것도 책임을 맡고 있는 수장과의 첫 만남이기에 혹시나 잘못 밉보이면 어쩌나 라는 생각이 모두를 지배한다. 그러기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라도 억지로라도 입을 대더니 어쨌든 전체 직원 한 번의 순례가 무사히 돌았다. 얼굴은 빨갛게 홍조를 띠고 가슴은 벌렁거리는 가운데 위장기관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두 번째 냉면 사발이 돌아갔다. 친히 본인이 마시고 전달하는 터라 거부할 수도 없을 터. 그렇다고 더 이상 마시지 못한다고 말도 못할 상황. 신호가 찾아온다. 몇 사람이 쓰러지며 그중엔 직접 현장에서 오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소주 냉면사발이 세 차례 순번을 돌자 참석자중 절반은 전멸상태이며, 악이다 깡이다 버티던 나의 경우도 정신 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는 누런 금니를 드러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영업은 깡입니다. 영업은 오기입니다. 이런 허약한 정신으로 활동을 했으니 자연히 매출이 부진할 수밖에요. 내일 아침 7시까지 전원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득의양양 일어서는 그. 그리고 아침 7시면 칼같이 출근하는 그. 그런 그를 두고 독하다는 말도 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하반기 매출 상승세의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계기가 되었다.

 

업종을 떠나 무언가를 하다보면 잘되는 호시절이 있다. 그러다 경기 혹은 여러 환경적 제약조건에 따른 하락세 또는 슬럼프라는 것이 찾아온다. 그럴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흔히 이것을 깡이라고 부른다. 깡을 국어사전에서는 악착같은 기질이나 힘으로 풀이하지만, 나는 이것을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존재라고 부른다. 영업부 초년병시절 선배 직원이 들려준 한마디가 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몸으로 때우고 그것도 안 되면 깡으로 버티라고.

EBS방송 커리큘럼중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위험천만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지 않는 분들을 취재하는 것인데, 우연히 ‘기장 멸치잡이’를 하는 이들의 방송을 보게 되었다. 20년 혹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까지 험한 바다위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루의 투쟁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마지막 클로징시 자신의 일에 대한 한 어부의 멘트가 가슴을 울린다.

“젊은 사람들이 와서 멸치잡이를 몇 번 해보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포기하고 갑니다. 요령은 경험이 쌓이면 자연히 되는 거지만, 이 일은 힘으로 오기로 이를 악물고 해야 됩니다.”

이를 악물고 해야 되는 그것.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매일 글을 쓰라. 이 규칙대로 실행하는데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의무감으로 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의무감도 끝없이 반복되다보면 예기치 않은 성과를 이뤄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깡의 힘이고 존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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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04:56:52 *.153.23.18

오 깡승호 선배가 든 두 가지 예가 무섭고 멋진데요. 7시 출근 금니 사나이와 터지면서도 떼어내도 들어붙어 싸우자 드는 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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