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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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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7일 07시 07분 등록
금요일 새벽이였다.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시간 확인차 핸드폰을 보니 카톡이 몇개 와있다.
"시험 붙었어?"
같은 내용의 카톡이 5개 정도 와있다.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걱정반 호기심반으로 물어보는 거였다. 한국시간으로 9시에 결과가 나오니깐 여기 시간으로 새벽 2시쯤 결과가 나온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시험 결과 하나 때문에 심장이 쿵퉁 뛰는게 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던가? 아직 결과를 보지도 않았는데 왜 먼저 걱정을 하는지 의아했다. 대범한 척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뭍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공부한다고 보냈던 지긋지긋했던 과거와 혹시 모를 불안한 미래가 필름처럼 머리를 휩쓸고 간다.

사실 목요일 저녁 회식을 핑계로 맥주랑 보드카를 잔뜩 마셨다. 혹시나 금요일 새벽 긴장해서 잠을 못잘까 싶어서 술의 힘을 빌린 것이다. 헌데 결과는 최악이다. 지금은 금요일 새벽 3시. 잠은 잠대로 못자고 속은 속대로 안좋다. 일단 일어났다.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오늘은 더이상 못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최상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았다. 삼십분동안 시간을 들여서 곰곰히 생각해 보고 또 해보았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고 핸드폰을 들었다.

Wifi를 연결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숨이 막힌다. 아니 속이 안 좋다. 술 조금만 마실껄.. 어제 괜히 오버해서 술을 마셨나 보다. 작년에 한번 떨어져봐서 익숙한 사이트다. 결과가 어디에 나오는지도 대충 알고 있다. 클릭, 클릭, 클릭.. 바로 이 조그만 버튼. 이것만 누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의외로 담담하게 버튼을 눌렀다. 왠지 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합격'. 핸드폰이라 그런지 글자가 너무 작다.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확인해 본다. 여전히 '불합격'

아까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상실감이 더 컸다. 이성적인 생각은 아이의 손을 떠난 풍선처럼 순식간에 하늘로 사라져 간다.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커튼을 제쳐보니 하늘이 뿌였다. 오늘부터 비가 온다더니 정말 비가 오려나 보다. 급하게 출장 나온다고 우산도 깜박했는데.. 그나저나 이제 앞으로 뭘해야 하지? 스탈린이 지어줬다는 최고층 문화궁전 건물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앞으로 뭘해야 할지 막막했다. 해야할 일이 눈앞에 한가득한데 그냥 피곤했다.

그 새벽 난 완벽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였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이 새벽을 중심으로 뒤틀려 버린 기분이였다. 다시 또 공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아니 과연 시험을 합격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부터 프로젝트 때문에 회사는 정말 바빠질텐데 변경영은 잘 할 수 있을까? 몇년동안 손대지 않았던 먼지 잔뜩 쓴 기타도 다시 잡아 보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걸까? 결혼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미뤄야 하는걸까? 생각은 꼬리를 타고 이어지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감기 기운때문에 몸도 안좋고 날씨도 스산하다. 바보같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마신건지.. 평소보다 더 스스로를 자책했다. 창밖을 보니 회색 구름 사이로 어설프게 해가 뜨려고 한다. 그 이상한 하늘 색을 보고 있자니 다시한번 현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했다. 누구에게도 이 비참한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게 지금의 날씨처럼 흐릿한 기분이였다. 왜 난 이런 간단한 장애물 하나 넘지 못하고 이리도 쩔쩔매고 있는걸까? 스스로가 한심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오늘은 그냥 푹 쉬고 싶지만 어제 퇴근하기 전에 적어놨던 ToDo 리스트가 떠올랐다. 하~아. 할게 잔뜩 남았다.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출근하기 전까지 남은 4시간동안 이 허무함을 이 어두운 호텔방에서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눈을 감고 다시 정신을 잡아본다. 어떻게 이 패배감을 떨쳐 낼 수 있을까? 먼저 시시포스를 생각했다. 매일 돌을 들어나르는 그를 생각했다. 그의 무거운 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황량한 민둥산 뜨거운 태양 외로움 무엇보다 비참하고 보람없는 그의 노동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그리고 힘든 모험을 떠나는 오디세우스도 생각한다.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그의 모험담을 잔인한게 들여다 본다. 지금 있는 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벗어나 그의 모험에 동참해 본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 검침없는 전진을 보면서 내 보잘것 없는 손을 바라본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을 겪는 것인지 물어본다. 대답은 없지만 계속 물어본다. 또 신에게 도전했던 마르시아스를 생각한다. 살을 벗겨내는 벌을 당하는 그의 옆에서 그를 한동안 바라본다. 아프지는 않을까? 난 저런 형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게 왜 신에게 도전한건지 물어본다. 왜 그렇게 무모한 일을 했는지 물어본다. 역시나 대답은 없다.

어렴풋한 여명이 비추는 그 곳에서 난 나를 위해서 신화를 생각했다. 이 비극의 주인공들. 잔인하고 원시적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도전과 모험 실패들은.. 그래 아주아주 사소로운 이야기일 뿐이다. 난 어떠한 신체적 고통과 죽음, 그리고 가슴을 드려내는 아픔을 겪은 것이 아니였다. 신화를 통해 내 고민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내 도전들도 내 방황들도 아주아주 작아 보였다. 신화가 오늘 처음으로 고마웠다. 내 불행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줘서.. 그리고 신화가 나를 돌아보게 해줬다. 인간의 꿈 도전 모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줬다. 그 이야기들 안에서 풍기는 기이한 오로라 속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해 주었다. 아침 8시쯤 난 평상시의 나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내 고민들을 잊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간발의 차이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지만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버스 정류장에 오기 전에 했던 사소한 게으름들에 대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책이나 봐야겠다. 덕분에 책을 읽을 수 있다니, 그서도 참 괜찮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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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4:09:49 *.50.65.2

준영~~ 뭐라고 위로를 해야할지. 

혹시 이 말이 위로가 된다면 좋겠는데...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거다

세상일은 다 될 수도 없고, 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안되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또 시도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진정 자신의 길이라면, ...

-스님의 주례사 중에서-


나는 다만 할 뿐이고, 되고 안되고는 신이 우주가 알아서 할 일이라면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될까. 

준영이가 모든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면, 그 자체로서 더 소중하다고 봐.

나도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더라구.

우리 앞에 어떤 길이 놓여있는지는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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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4:43:14 *.58.97.136

준영아.....

많이 섭섭하고 속상하겠다.

그동안 정말 많이 수고했는데....

 

준영아..

한국 오면 맛있는 밥, 든든하게 함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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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5:55:13 *.46.178.46

오디세우스도 10년의 고독한 항해를 통해 영웅으로 재탄생 했지. 

준영이도 영웅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 영웅이 될 수 있을꺼야. 

묵묵히 걸어야하는 침묵과 고난의 시간을 거친다면 말이지. 


고생많다. 어여 와서 함께 하자. 

참고로, 오프 수업 무쟈게 재미 있었다. 즐거웠다. 눈물도 찔끔 흘리고

부럽지?! 그러니 어여와. 6월 오프때는 엠티가니까 그 날 마음껏 즐겨보자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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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04:16:56 *.153.23.18

시험이 그리 되었군요. -_-

이국의 쓸쓸함, 신화를 곁들여 만든 빵을 드신 밤이네요.

출장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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