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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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소국인가 ? , 삼성월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난히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불순한 침공과
악에 받친 저항 속에 휘몰려
공연히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살고 싶어 안타까운
꽃같은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어리석은... 무익한... 순환되는
싸움 끝내고
생명이 생명으로 아름다운 세상되라고
살고 싶은 젊은이 하나 이국땅에서 죽었습니다.
한 가족이 우리의 슬픔 속에 남았습니다.
슬픈 아침입니다.
이 글은 김선일씨가 피살된 것을 알게된 날 아침에 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추모의 글이다. 그 젊은이가 피살된 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하나의 공통적인 기조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약소국’이라는 전제였다. 이 정조(情調)는 참으로 깊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끊임없는 일본과의 열등비교, 동맹이 아닌 종속의 개념으로서의 한미동맹은 특히 우리를 괴롭히는 약소국 콤플렉스인 것 같다. 우리는 약소국인가 ? 그럴 수 밖에 없을까 ?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적절한 것인가 ?
내 마음은 12세기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칭기스칸 이전 이 땅은 서른 개 정도의 부족으로 갈려 부족 전체가 죽고 죽이는 소모적인 전투를 일 삼고 있었다. 그들의 혹독한 생활에 대하여 역사가 르네 크루세는 이렇게 말한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이 발달 된 농경사회의 단계로 진입한 시기에 이 유목민들이 아직도 잔존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드라마에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것은 이웃하는 민족들과 일종의 시차같은 현상을 낳았다. 기원전 2천년 전의 사람들이 기원 후 12 세기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중세가 되어서도 3천년 전의 미개인처럼 건조하고 추운 땅을 헤메며 치열한 살상의 각축장 속에서 극빈의 생활을 하던 그들은 그러나 13세기 초 칭기스칸에 이르러 정복지가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가장 이름 난 정복자, 나폴레옹과 히틀러 그리고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땅들을 다 합한 것 보다 더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이 정복지는 칭기스칸 사후 그 후손들에 의해 두 배 가량 더 넓어져 대원제국을 형성했다.
그들의 인구는 칭기스칸 당시 모두 합해 겨우 150만에서 3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 작은 인구의 유목민들이 북에서 시베리아에서부터 남으로 페르시아만까지, 동으로 태평양에서 서쪽으로 다뉴브강에 걸치는 대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을 어떻게 가능했을까 ?
첫 번째는 결핍을 극복하는 능력이었다. 지구의 70% 이상은 물이다. 육지는 북반구에 몰려 있고, 걱정 없이 농업이 가능한 물많고 비옥한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유목은 건조하고 척박하여 농업이라는 정착민의 생활 방식이 적용될 수 없는 지역에서 인간이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생활 방식이었다. 인류는 유목이라는 생활 방식을 창조해 냄으로써 건조하고 광대한 불모의 대지조차 생존이 가능한 생활권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힘은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힘은 바로 생활의 힘이었다.
칭기스칸은 그래서 후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 살게 될 때, 나의 제국은 사라질 것이다. ”
둘째는 열린 사고다. 정착민들의 문명은 성곽과 도시로 상징된다. 그들은 한 곳에서 나서 청춘을 보내고 그 곳에서 죽는다. 그들의 세계는 울타리로 보호된 폐쇄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길 위에서의 생활’이 본업이다. 도시와 성곽들을 잇는 길과 선의 세계가 그들의 생존 공간이었다.
실제로 칭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은 자신들의 제국 속에 하나의 생활방식과 문명만을 강요하지 않았다. 여러 개의 문명, 수없이 많은 족속, 다종교를 허용했다. 그들에게 자하드라는 성전(聖戰)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케 자사크(Yeke Jasag)불리는 대법령 조차 유목민들의 충성과 기강을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집행력을 가진 법이었지만, 피정복민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전통적 법체계를 따르도록 허용했다. 말하자면 이중적 법체제였던 것이다. 10만명 남짓한 군대로 시작한 칭기스칸의 푸른군대는 정복에 따라 피정복민들을 수용하여 다국적군을 편성함으로써 수십만의 강력한 적군과 대적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칭기스칸은 자신을 활로 쏘아 중상을 입게 한 제베를 적군 가운데서 발탁하여 자신의 맹장으로 키워냈고, 야율초재와 같은 거란인을 등용하였고, 장춘진인 같은 한족을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혈통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유능하고 재주있는 사람들은 발탁하여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아마도 징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이 아버지 에수게이에게 약탈된 여인이었다는 것, 칭기스칸의 부인 부르테는 적장에게 납치되었다 구출되어 적장의 아이를 낳게 되었고, 칭기스칸은 그 아이에게 나그네라는 의미의 ‘주치’라는 이름을 지어 주며 양육했던 것은 열린 마음에 대한 극단적 상징성이었는 지도 모른다.
셋째는 테크놀로지 헤게모니를 들 수 있다. 당시 몽골의 전투력은 세계최강이었다. 유럽인들에게 그들은 ‘전쟁이 직업이고 말잔등이 일터인 반인반마의 괴물’로 인식되었다. 앞뒤에 버팀목이 있는 안장과 발을 얻는 등자는 그들이 말 위에서 곡예에 가까운 신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의 활은 작지만 강력했고, 철화살촉은 파괴력이 강한 삼각추형이었으며, 날아갈 때 끔찍한 소리를 내 적군의 기를 꺽어 놓았다. 칭기스칸은 호레즘 제국을 멸망시킬 때, 기술자들은 죽이지 않았다. 6만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데려와 집단 기술촌을 만들고 성곽을 공격하는 투석기등 공성무기를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신무기들 들고 장성과 성곽의 나라 중국으로 짓쳐나가 금나라를 멸하고 남송을 통합하게 된다.
넷째는 스피드였다. 그들은 걷기를 배움과 동시에 말타는 것을 배웠다. 수렵을 통해 전투력을 증진시키고, 평상시에는 말과 양을 치고, 유사시에는 언제고 전사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군장의 무게는 유럽인들의 평균 군장 보다 훨씬 가벼웠다. 빠른 질주의 기마병을 지원하는 병참의 핵심은 보르추라고 하는 마른 고기가루였다. 소를 잡아 말려 가루를 내어 소의 방광에 담으면 소 한 마리가 거뜬히 들어간다 한다. 이것을 말에 싣고 달리다 몇 숟가락 물에 타 마시면 훌륭한 영양식이 되었다. 당시 몽골 기병의 전투력은 바로 전사로서의 개인적 수련과 장비의 우위, 그리고 기마병이라는 속도에 비교우위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 기병의 스피드의 우위는 유럽인들이 머스켓 소총을 발명하고 난 다음부터 사라지게 된다.
나는 21세기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 모델로서 13세기 몽골제국에 대한 특성 4개를 정리해 보았다. 이것은 13 세기에 존재한 21 세기의 모델에 대한 하나의 가상적 연결인 셈이다. 새로운 시대는 땅의 크기나 과거의 찬란한 역사, 인구의 수, 현재의 경제적 위치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약소국은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은 새로운 기준을 원한다. 우리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노마디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노마디즘의 핵심은 바로 빈곤과 결핍을 극복하는 탁월한 능력,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 동시에 세계 속에서 자신의 특별함과 차별성을 잃지 않은 로칼리즘, 특정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탁월한 기술력, 환경을 이해하고 적응할 뿐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창조해 가는 스피드에 있다.
한국의 현대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침략당했고 짓밟혔고 서로 죽였다. 그 속에서 지난 50년간 우리는 가난과 결핍을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배움이 강한 민족이었다. 선비의 나라였고 치마바람의 나라였다. 가난한 부모가 굶어 가며 자식의 교육을 시킨 나라는 많지 않다. 학습이 곧 전문성과 기술력으로 이어지는 지금 교육에 대한 뜨거움은 강력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창의력과 상상력과 재능에 기초한 교육개혁이 이루어 진다면, 우리는 가장 빨리 핵심 분야에서 테크노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는 부실의 상징이었고 ‘냄비’는 한국인에 대한 자조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새로움에 대한 부단한 관심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속도가 주는 쇼크를 견뎌가는 데 소질이 있는 민족이다.
만일 우리가 반도가 주는 지리적 덫, 문화적 폐쇄성이라는 정신적 덫, 권위주의와 수직적 구도의 경직성만 탈피해 낼 수 있다면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선도국의 반열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김선일이라는 한국의 젊은이는 이국 땅에서 죽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라는 남의 전쟁 속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한 사람이, 한미동맹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파병이라는 연결 고리 속에서 희생되었다. 그의 죽음 자체가 세계화와 지구화라는 21세기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비극이었다.
우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위대함에 대한 가능성이다. 적당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김선일의 피납 사실을 통보받은 외교부의 사무관을 상기하자. 내가 그 사무관처럼 일하고 있지는 않는 지 돌이켜 보자. 세계 속에 고립된 채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는 안이함 속에 있을 때, 김선일의 구출을 위해 작동시켜야할 그럴 듯한 국제적 채널하나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던 정부의 무능을 기억하자. 한 분야에서 10년을 근무하고도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되면, 아랍어를 구사하는 중동 전문가가 태부족인 한국 외교부를 떠올리자. 늘 깨어 있고 배우자. 이것이 한 젊은이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메시지다.
IP *.229.146.16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난히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불순한 침공과
악에 받친 저항 속에 휘몰려
공연히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살고 싶어 안타까운
꽃같은 젊은이 하나 죽었습니다.
어리석은... 무익한... 순환되는
싸움 끝내고
생명이 생명으로 아름다운 세상되라고
살고 싶은 젊은이 하나 이국땅에서 죽었습니다.
한 가족이 우리의 슬픔 속에 남았습니다.
슬픈 아침입니다.
이 글은 김선일씨가 피살된 것을 알게된 날 아침에 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추모의 글이다. 그 젊은이가 피살된 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하나의 공통적인 기조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약소국’이라는 전제였다. 이 정조(情調)는 참으로 깊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끊임없는 일본과의 열등비교, 동맹이 아닌 종속의 개념으로서의 한미동맹은 특히 우리를 괴롭히는 약소국 콤플렉스인 것 같다. 우리는 약소국인가 ? 그럴 수 밖에 없을까 ?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적절한 것인가 ?
내 마음은 12세기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칭기스칸 이전 이 땅은 서른 개 정도의 부족으로 갈려 부족 전체가 죽고 죽이는 소모적인 전투를 일 삼고 있었다. 그들의 혹독한 생활에 대하여 역사가 르네 크루세는 이렇게 말한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이 발달 된 농경사회의 단계로 진입한 시기에 이 유목민들이 아직도 잔존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드라마에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것은 이웃하는 민족들과 일종의 시차같은 현상을 낳았다. 기원전 2천년 전의 사람들이 기원 후 12 세기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중세가 되어서도 3천년 전의 미개인처럼 건조하고 추운 땅을 헤메며 치열한 살상의 각축장 속에서 극빈의 생활을 하던 그들은 그러나 13세기 초 칭기스칸에 이르러 정복지가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가장 이름 난 정복자, 나폴레옹과 히틀러 그리고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땅들을 다 합한 것 보다 더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이 정복지는 칭기스칸 사후 그 후손들에 의해 두 배 가량 더 넓어져 대원제국을 형성했다.
그들의 인구는 칭기스칸 당시 모두 합해 겨우 150만에서 3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 작은 인구의 유목민들이 북에서 시베리아에서부터 남으로 페르시아만까지, 동으로 태평양에서 서쪽으로 다뉴브강에 걸치는 대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을 어떻게 가능했을까 ?
첫 번째는 결핍을 극복하는 능력이었다. 지구의 70% 이상은 물이다. 육지는 북반구에 몰려 있고, 걱정 없이 농업이 가능한 물많고 비옥한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유목은 건조하고 척박하여 농업이라는 정착민의 생활 방식이 적용될 수 없는 지역에서 인간이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생활 방식이었다. 인류는 유목이라는 생활 방식을 창조해 냄으로써 건조하고 광대한 불모의 대지조차 생존이 가능한 생활권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힘은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힘은 바로 생활의 힘이었다.
칭기스칸은 그래서 후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 살게 될 때, 나의 제국은 사라질 것이다. ”
둘째는 열린 사고다. 정착민들의 문명은 성곽과 도시로 상징된다. 그들은 한 곳에서 나서 청춘을 보내고 그 곳에서 죽는다. 그들의 세계는 울타리로 보호된 폐쇄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길 위에서의 생활’이 본업이다. 도시와 성곽들을 잇는 길과 선의 세계가 그들의 생존 공간이었다.
실제로 칭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은 자신들의 제국 속에 하나의 생활방식과 문명만을 강요하지 않았다. 여러 개의 문명, 수없이 많은 족속, 다종교를 허용했다. 그들에게 자하드라는 성전(聖戰)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케 자사크(Yeke Jasag)불리는 대법령 조차 유목민들의 충성과 기강을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집행력을 가진 법이었지만, 피정복민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전통적 법체계를 따르도록 허용했다. 말하자면 이중적 법체제였던 것이다. 10만명 남짓한 군대로 시작한 칭기스칸의 푸른군대는 정복에 따라 피정복민들을 수용하여 다국적군을 편성함으로써 수십만의 강력한 적군과 대적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칭기스칸은 자신을 활로 쏘아 중상을 입게 한 제베를 적군 가운데서 발탁하여 자신의 맹장으로 키워냈고, 야율초재와 같은 거란인을 등용하였고, 장춘진인 같은 한족을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혈통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유능하고 재주있는 사람들은 발탁하여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아마도 징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이 아버지 에수게이에게 약탈된 여인이었다는 것, 칭기스칸의 부인 부르테는 적장에게 납치되었다 구출되어 적장의 아이를 낳게 되었고, 칭기스칸은 그 아이에게 나그네라는 의미의 ‘주치’라는 이름을 지어 주며 양육했던 것은 열린 마음에 대한 극단적 상징성이었는 지도 모른다.
셋째는 테크놀로지 헤게모니를 들 수 있다. 당시 몽골의 전투력은 세계최강이었다. 유럽인들에게 그들은 ‘전쟁이 직업이고 말잔등이 일터인 반인반마의 괴물’로 인식되었다. 앞뒤에 버팀목이 있는 안장과 발을 얻는 등자는 그들이 말 위에서 곡예에 가까운 신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의 활은 작지만 강력했고, 철화살촉은 파괴력이 강한 삼각추형이었으며, 날아갈 때 끔찍한 소리를 내 적군의 기를 꺽어 놓았다. 칭기스칸은 호레즘 제국을 멸망시킬 때, 기술자들은 죽이지 않았다. 6만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데려와 집단 기술촌을 만들고 성곽을 공격하는 투석기등 공성무기를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신무기들 들고 장성과 성곽의 나라 중국으로 짓쳐나가 금나라를 멸하고 남송을 통합하게 된다.
넷째는 스피드였다. 그들은 걷기를 배움과 동시에 말타는 것을 배웠다. 수렵을 통해 전투력을 증진시키고, 평상시에는 말과 양을 치고, 유사시에는 언제고 전사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군장의 무게는 유럽인들의 평균 군장 보다 훨씬 가벼웠다. 빠른 질주의 기마병을 지원하는 병참의 핵심은 보르추라고 하는 마른 고기가루였다. 소를 잡아 말려 가루를 내어 소의 방광에 담으면 소 한 마리가 거뜬히 들어간다 한다. 이것을 말에 싣고 달리다 몇 숟가락 물에 타 마시면 훌륭한 영양식이 되었다. 당시 몽골 기병의 전투력은 바로 전사로서의 개인적 수련과 장비의 우위, 그리고 기마병이라는 속도에 비교우위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 기병의 스피드의 우위는 유럽인들이 머스켓 소총을 발명하고 난 다음부터 사라지게 된다.
나는 21세기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 모델로서 13세기 몽골제국에 대한 특성 4개를 정리해 보았다. 이것은 13 세기에 존재한 21 세기의 모델에 대한 하나의 가상적 연결인 셈이다. 새로운 시대는 땅의 크기나 과거의 찬란한 역사, 인구의 수, 현재의 경제적 위치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약소국은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은 새로운 기준을 원한다. 우리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노마디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노마디즘의 핵심은 바로 빈곤과 결핍을 극복하는 탁월한 능력,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 동시에 세계 속에서 자신의 특별함과 차별성을 잃지 않은 로칼리즘, 특정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탁월한 기술력, 환경을 이해하고 적응할 뿐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창조해 가는 스피드에 있다.
한국의 현대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침략당했고 짓밟혔고 서로 죽였다. 그 속에서 지난 50년간 우리는 가난과 결핍을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배움이 강한 민족이었다. 선비의 나라였고 치마바람의 나라였다. 가난한 부모가 굶어 가며 자식의 교육을 시킨 나라는 많지 않다. 학습이 곧 전문성과 기술력으로 이어지는 지금 교육에 대한 뜨거움은 강력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창의력과 상상력과 재능에 기초한 교육개혁이 이루어 진다면, 우리는 가장 빨리 핵심 분야에서 테크노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는 부실의 상징이었고 ‘냄비’는 한국인에 대한 자조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새로움에 대한 부단한 관심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속도가 주는 쇼크를 견뎌가는 데 소질이 있는 민족이다.
만일 우리가 반도가 주는 지리적 덫, 문화적 폐쇄성이라는 정신적 덫, 권위주의와 수직적 구도의 경직성만 탈피해 낼 수 있다면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선도국의 반열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김선일이라는 한국의 젊은이는 이국 땅에서 죽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라는 남의 전쟁 속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한 사람이, 한미동맹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파병이라는 연결 고리 속에서 희생되었다. 그의 죽음 자체가 세계화와 지구화라는 21세기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비극이었다.
우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위대함에 대한 가능성이다. 적당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김선일의 피납 사실을 통보받은 외교부의 사무관을 상기하자. 내가 그 사무관처럼 일하고 있지는 않는 지 돌이켜 보자. 세계 속에 고립된 채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는 안이함 속에 있을 때, 김선일의 구출을 위해 작동시켜야할 그럴 듯한 국제적 채널하나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던 정부의 무능을 기억하자. 한 분야에서 10년을 근무하고도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되면, 아랍어를 구사하는 중동 전문가가 태부족인 한국 외교부를 떠올리자. 늘 깨어 있고 배우자. 이것이 한 젊은이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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