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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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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일 01시 01분 등록

 

그러면 이제,

 

우리의 삶의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인가?

 

 

여기에서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다.

 

앞서 제시한 프리쳐드의 그래프(Pritchard’s graph)는 낯선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 그래프를 분명히 전에 본 적이 있다. 이 그래프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언급된다. 기억할 것이다. 키팅 선생의 첫 수업에서 학생들은 어떤 그래프에 대해 읽고 필기를 한다. 그 때 키팅 선생이 칠판에 그리던 그래프가 바로 프리쳐드의 그래프다. 이 때, 키팅 선생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RIP IT OUT

 

 

 

 

키팅 선생은 프리쳐드의 그래프의 페이지를 찢어버리라고 했다.

 

왜 키팅 선생은 그래프를 찢어버리라고 했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를 수학적 그래프로 나타낸다는 것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었을까? 키팅 선생은 단지 특이한 교육계의 이단아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학생이라면 평생의 행운이라 할만큼 위대하고 용감한 스승이자 사상가였다. 키팅 선생이 생각한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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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인생이 무엇인가(WHAT)와 같은 보다 근본적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

 

인생이 무엇일까? WHAT?

 

어떻게 살아야 할까? HOW?

 

왜 살아야 하는가? WHY?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서

 

 

죽지 못해서

 

 

가장 흔한 대답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시다시피 둘 다 답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 살아있는 것을 기본 옵션으로 부여 받았을 때, “왜 계속 살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살아있음의 조건과 비교해야 할 대상은 죽음이다. 죽음은 절대적 무의 상태다.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서 행복한 것과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사이에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이 기왕에 살아있으며 때가 되면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즐겁게 지내다가 가자 고 생각한다고 가정하자. 그것 역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인간이 고통을 피하려 하고 즐거움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현상학적 설명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죽지 못해서?

 

당신은 죽을 수 있다.

 

선문답만 존재할 뿐, 진정한 답은 불가지일까? 모든 Why의 끝에는 무엇이 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이라고 대답한다. 신은 굉장히 유용한 도피처이다. 그래서 이런 속편한 결과에 합의한 사람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 대답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서 굉장히 유용하게 적용된다. 당신도 신의 몽당연필인가?

 

가장 최신의 유행하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누구나 제각기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 모든 이유들이 의미가 있으므로 모두 존중 받아야 한다. 결국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은 취향의 문제이다??? 개인주의와 타인에 대한 무한한 똘레랑스(관용)은 제법 쿨하고 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해답에 대한 탐구를 회피하는 것이다. “삶에 공통된 해답 따위는 없다는 암묵적 냉소도 깔려 있다. ‘남이야 어찌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왜 살아야...”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코 알베르 카뮈이다. 그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겠지만 시지프스의 신화란, 벌로 영원히 산으로 돌을 굴려야 하는 운명을 가진 시지프스에 관한 이야기다. 이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고 시지프스는 영원히 그 돌을 굴려서 올려야 하는데 그 상징은 인간 삶의 고통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리하여 끝나지 않는 인생의 의문과 추구를 상징한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논평이 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우주의 구조>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물리학자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어린 시절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었던 일화에 대해 언급하였다.

 

 

“카뮈의 진정한 고민은 과연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 그러나 카뮈는 인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반면, 과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과학은 분명 추구할 만한 가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가치를 더 높여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에 접했던 실존주의 철학과 비교할 때, 과학에 관한 카뮈의 주장은 다소 엉뚱하게 들렸다. 당시 물리학자를 꿈꾸던 나는 인생의 궁극적 무대인 이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화 <큐브>에서 사람들은 큐브 속에 갖혀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이 영화에서 물리학자는 큐브의 문이 열리는 시간을 계산해내지만 큐브를 탈출하진 못한다. 큐브를 이해하는 것이 큐브로부터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큐브로부터 자유롭지 않을지는 몰라도 큐브를 이해함으로서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브라이언 그린의 말에 동조한다. 과학이 궁극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즉 과학이 철학을 잠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늘 급진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범접해서는 안 되는 부분에 멋모르는 과학자들이 감히 접근하려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과학의 반과학(비과학이 아니다)성에 대해 고찰하게 하였다. 물론 과학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은 있지만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과학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로지 사실만이 과학이다. 과학이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을 해주는가? 직접 해주지는 않는다. 과학은 단지 이게 다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이를 통해서 삶의 답을 알아내게 한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아직도 회의하고 있다. 나는 사이언톨로지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읽어주길 바란다. 당신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보여주겠다.

 

앞서 말한 <시지프스의 신화>는 체념적이다. 시간이 흘러도 돌이 올랐다가 떨어지고 다시 오르는 것은 대칭적으로 반복된다. 당신은 역사가 돌고 돈다고 생각하는가?

 

 

http://www.youtube.com/watch?v=0jHsq36_NTU&feature=youtu.be

 

 

위의 영상은 돌고 돈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순다. 당신은 언젠가 유투브에서 이 영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영상은 우리 태양계의 공전 현상에 관한 것이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rotation). 그리하여 항상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라는 것이 우리가 교육받은 내용이다. 그러나 허블이 발견하였듯이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태양계는 시속 7만 킬로미터로 날아가고 있다.” 이 영상은 태양계의 helical model에 관한 것이다. 지구는 태양을 돌지만태양계는 날아가고 있기 때문에 날아가면서 돈다(vortex)”. 우리 지구는 단 한번도 같은 곳을 돈 적이 없다. 우리는 단 한번도 같은 곳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인류에게도 이 세계는 첫 경험이다. 단 한번도 같았던 적은 없다. 우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에 대한 궁극적 답이 영원히없을 것이라는 항상성에 대한 믿음. 확실한가?

 

 

인류는 답을 구했다.

 

 

인류는 답을 구했다. 이 답이라는 것은, 궁극적 답에 관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의 version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iPhone 4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iPhone 3 iPhone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며, iPhone 5가 출시되기 전에는 iPhone 4가 유일한 iPhone이다.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뉴튼의 고전물리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그리고 이후에 현대 과학자들의 양자역학이 등장한다.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도 다양한 version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version은 결코 뒤로 소추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가장 최선 버전의 답은 무엇인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한 설명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인류의 모든 문명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더라도 단 한 문장만 알려진다면 모두 복구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 문장은 바로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다.

 

원자론은 돌턴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런데 사실,

원자론은 인류 역사 상 두 번 주장되었다.

 

데모크리토스 (B.C 460-380) 그리고 돌턴 (1766-1844). 왜 데모크리토스 때에는 불가능하였나? 돌턴의 시기에 인류는 물질이 정말로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 하에 실험을 할 수 있었고 증명해냈다. 그 후 과학계에는 빅뱅이 일어났다. 이 두 시기의 차이점은, 데모크리토스는 주장은 하였으되 정말로 알았던 것은 아니며, 돌턴은 정말로 알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아는 것과 정말로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인류는 사람이 죽는 것은 알았지만, “정말로죽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일까?

 

우리는 1858년을 기억해야 한다.

진화론이 등장한 해이다.

 

진화론은 1858년 다윈에 의해 주장되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진화론을 정말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진화론을 진짜로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진화론 이전의 세계는 창조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이 자신의 몸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이제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사람들은 원숭이라는 용어에 경악하였다. 그 충격이 조금 가신 후 세상은 그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의 입지가 조금 더 후퇴하였을 뿐이다. 인간이 세포로부터 진화하긴 하였으되 세포를 창조한 것은 결국 신이며, 신은 인간의 진화에 관여하였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신을 옹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이 마치 십자군 전쟁에 출전한 적장 쯤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한 위협이긴 했지만 신성한 신의 군대는 아직 건재하며 사지에 몰린 신을 숭고하게 옹호하고 있다.

 

이것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진화의 과정에는 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림자를 지닌 신은 없다. 최소한 인격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면서 과학자들은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어쩌면 신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이진법의 조합들이다. 존재한다(=1), 존재하지 않는다(=0). 사실 의학 연구에서 사망사건은 event이므로 주로 1로 상정되지만,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서 존재를 1로 두고 존재하지 않음을 0으로 두자.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선택 가지에는 아무런 의지가 없다. 우리 인간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의지, 존재 유/무의 이진법을 거치면서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는 결과론에 비추어 볼 때, “존재하는 쪽으로 진화해오면서 획득된 성질이다. 생존의 의지. 생존의 의지의 전형(prototype)이 없었던 존재들은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당신이 현재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당신을 기꺼이 여겨 만들었거나 진화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의지라는 것은 모든 일관된 경향성의 총합으로 얼핏 위대한(신적인) 영혼의 증거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불을 피하고자 하고 숨쉬기를 좋아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행위 하나 하나는 존재의 이진법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당신의 탄생과 존재에 대해 창조주는 전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인격신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격신이란, 인간처럼 인격을 가진 신으로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여하고 자신의 뜻을 발현한다고 여겨지는 신을 의미한다. 많은 종교가 인격신으로서의 신을 믿고 있다. “빌면 들어주고” “우리를 굽어보며” “아버지와 어머니같이 돌보아주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S. 루이스와 같은 훌륭한 기독교 변증학자의 말을 빌린다 하더라도 신이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돌보아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카를 융은 신을 절대적으로 믿은 정신의학자이다. 그는 나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신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융의 신도 인격신은 아니었다. 융은 신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의 의지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 왜 이해할 수 없는가? 신이 인격신이라고 생각할 때 기대하는 바를 신이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인격신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당신의 인생은 달라지는 바가 없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신에 대한 믿음이 당신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의 결과이다. 아인슈타인은 <등가원리>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등가원리란, 쉽게 말하여 지구의 중력과 가속도는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둘은 등가라는 것이다.

 

 

산타 클로스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산타 클로스가 선물을 안 준다(Non-function Santa).

 

산타는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론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된다.

 

 

인류와 신의 진화방향은, 기원 전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 기원 후 유일신의 세계, 그리고 현재 종교가 취향인 세계로 진행되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인격에 대해 개의치 않게 될 것이다.

 

진화론은 철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사람들은 신의 부재 가능성에 당황하였다. 그리고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진화론 1858

WWW I 1914-1919

WWW II 1939 – 1945

히틀러 1889 – 1945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해왔지만 세계대전은 인간이 신 없이 벌인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이 신의 부재 속에서 인간들이 겪은 아노미의 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존주의가 탄생하였다. 실존주의의 기본은 죽음의 직시이다. 왜 갑자기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는가? 이제 신이 없으므로 사후 세계를 보장할 수 없다. 당신이 죽은 후 천국이 열릴 것인가? 이제 천국은 없다. 죽으면 정말로 죽는 것이다.

 

원자론에 대한 이해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돌턴의 경우가 달랐듯이,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진화론의 전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신은 당신의 사후를 보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죽고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느냐이다.

 

실존주의의 정의는 이러하다.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기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으로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실존주의는 돌고 도는 유행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취향이 될 수 없다. 거스를 수 없는 깨달음이다. 이미 당신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부모 세대처럼 살지 않는다. 당신이 이전 세대들과 다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몰랐을 수 있으나, 항상 사상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당신은 실존주의의 영향권 내에 있다.

 

다음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괴테 1749-1832

니체 1844-1890 (1858 14)

알베르 카뮈 1913~1960

 

 

이들 중 괴테는 실존주의자는 아니며 진화론 이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괴테는 세기의 대문호로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무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런 단서들이 보인다.

 

 

기록하여 가로되, “태초에 이 있었느니라”

경솔하게 붓을 휘둘지 않기 위하여

첫 구절을 신중하게 생각해야겠다.

만물을 창조하고 움직이는 것이 과연 뜻일까?

 

이렇게 적어야 할 것이다. “태초에 이 있었느니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써 내려가는 동안에

벌써 그것으로도 안 되겠다고 깨우쳐 주는 것이 있다.

영의 도움이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쓴다. “태초에 ____이 있었느니라.

 

괴테 파우스트

 

 

내가 생각하기에 괴테는 최고의 천재이다. 그는 <파우스트>를 거의 일생을 바쳐 집필하였다. 파우스트에는 위의 대목이 나온다. “태초의 뜻이 있었느니라.” 여기에서 뜻은 (신의)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괴테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왜인가? 괴테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의 근원은 신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다.

 

괴테는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힘의 의미는 자명하다. Force. , 물리적 힘을 의미한다. 괴테는 신의 의지가 배제된 물리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중력,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 뉴튼의 <프린키피아> 1687년에 출판되었으므로 괴테는 만유인력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괴테를 진정한 천재로 인정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세 번째 부분이다. 괴테는 말하였다.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쓴다. 태초에 ____이 있었느니라.” 도대체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행동

 

 

우리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행동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을 안다. 우리는 행동이 있은 후에 힘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동이 태초의 근원이다. 실존주의는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임을 아는 것이다. 괴테는 실존주의의 실마리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태초의 시작이므로 우리가 바로 태초의 주인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러한 말도 했다.

 

 

황금의 영도 저주한다.

포도의 영액도 나는 저주한다.

지고의 사랑의 은총도 저주한다.

희망도 저주한다! 신앙도 저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_____.

 

 

이 부분은 파우스트의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굉장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황금은 아폴로를 상징한다.

포도의 영액은 포도주로서 디오니소스를 상징한다.

괴테는 마치 둘을 의식한 것처럼 순서대로 나열할 바를 정했다.

 

사랑의 은총과 신앙은 신을 의미한다.

괴테는 왜 희망을 저주하였는가? 희망이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괴테가 무엇보다도 저주한 것은 인내. 괴테는 왜 인내를 저주하였는가? 인내는 무엇을 위해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 무엇이 무엇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엇이 정말로 가치가 있을 것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이 가치가 없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현재를 보상할 수 있는가?

 

알다시피,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천재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파우스트가 누구인지는 뻔하다. 파우스트는 괴테 자신이다. 괴테가 평생에 걸쳐 경험한 고뇌와 삶에 대한 갈망, 열정을 파우스트는 가지고 있었다. 악마와 영혼을 거래한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든 가치체계를 re-set한다는 의미이다. 악마적 근성을 모두 동원하여 전자아가 원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가? *** 천사와 악마를 모두 아우르는 전지적 관점에 대한 옹호는 괴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신 아브락삭스를 기억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 1877-1962)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하는 불에 심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와 연결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모두 어떤 깨달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파우스트의 거래 조건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어느 순간을 보고, “섰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하고 말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대로 나는 망해도 좋다.

 

(내가 발음을 구리게 하자, 앞에서 독일어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파우스트는 어느 순간을 의미했는데,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의 영혼(=전 인생)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괴테는 어떤 경지를 원했다. 깨달음의 경지. 그것은 순간에 해당한다. 괴테에게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의 부정된 상황에서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다.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괴테가 선택한 방법은 대단히 탁월하였다. 그는 순간 속의 영원을 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시간의 종적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순간은 영원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상통한다(물리적 시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결코 조크로 던진 말은 아니다).

 

파우스트의 교훈은 무엇일까? 지식의 최정점에서 신이 없다는 것을 안 파우스트(괴테), 삶의 무료함에 절망하여 자살하기 직전에 악마와 계약을 한다. 신이 없다면 자신이 신이 되어(=악마성을 포함한 전지전능함을 스스로 가져)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본다. 그 결과 어떤 것은 파멸적이고 어떤 것은 허무하다. 그러나 해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훈이다.

 

 

파우스트

나의 일체의 지각이 추구하고 있는

인류의 영광을 끝내 손에 넣지 못한다면,

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이냐?

 

메피스토 (악마)

당신은 결국 여전히 당신일 테지요.

 

 

괴테는 천재에게 주어진 사회적 압력, 즉 인류의 영광을 위한 공헌을 결과로 내놓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메피스토(악마)는 말한다. “당신은 결국 여전히 당신이다.” , 당신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어떠한 실패와 좌절과 망신을 당한다 하더라도 당신의 인생 앞에 전지전능한, 유일무이한 바로 당신 그 자체는 손상 당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깨달은 자에게 신적인 자신감과 자유를 부여한다. 당신은 신만큼 자유롭다.

 

 

 

이제 니체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진화론이 발표되던 당시 니체는 15살이었다. 모두 니체의 명언을 알고 있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오직 육체가 진리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세상은 대지로 내려왔다. 육체와 대지의 중요성에 대해 니체가 역설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 영혼과 천상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새로운 세상의 구도에 눈을 떴다. 니체는 알았다. “정말로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니체는 이 죽음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니체는 영혼회귀사상을 주창하였다. 동양적 사상과 매우 흡사하다. , 한 번 흐른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흐르는 강물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진정한 죽음이 야기하는) 허무주의를 영원회귀사상으로 초극해낸 사람이다. 초인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이 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며 신이 존재해야 한다면그 신의 권좌는 바로 자신의 것임을 이해한 사람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me7DMpMaKI0

 

 

이 노래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청년 혁명군이 부른 노래이다(“Red & Black”). 이 노래에서 혁명군은 지도자로 따르던 라마르크 장군이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혁명군은 전열을 다지고 왕정군대와 싸울 것을 다짐한다. 이 혁명군은 마리우스를 제외하고 모두 전사한다. 이들은 노래 끝에 우리가 부르면 (민중이) 따르리라!”라고 소리 높이지만, 이 노래를 듣는 모두는 알고 있다. 아무도 이들을 따라 일어서지 않았다.

( *** 사부님이 돌아가신 이후, 나는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라마르크 장군이 서거한 후, 혁명군은 절망하여 그저 그를 따라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모두가 죽은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마리우스는 빈 테이블과 빈 책상으로 다시 돌아와 울부짖는다. “나에게 묻지 마라. 너희의 죽음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는 친구들의 허망한 죽음 앞에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일어났다. 청년 혁명군은 흐르는 강물이 되어 짧은 생을 마감하였으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이어졌다. 혁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면 이들의 삶은 허무한 것이 되었을까? 상관없다. 어차피 이들은 죽었는데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며 원하는 방향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반론이 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신이라면, 신의 속성은 전지전능한 것이데 나에게 과연 그런 힘이 있는가? 이 세상은 온통 제약과 어찌하지 못하는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세상에 나의 의지란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니체는 <초인의 냄비>로 설명한다. 우리는 우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 우연들을 초인의 냄비에 넣고 요리를 끓여 내는 사람은 초인 자신이다. 이 요리(=인생)은 바로 초인의 의지이다. 신 없는 하늘 아래, 모두가 우연 속에 있다는 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모두 무작위로 태어나 무작위의 우연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물컵 속에서 브라운 운동을 하고 있는 꽃가루처럼 우연 속을 부유하고 있다. 우연히 주어진 조건부 확률들을 비교하면서 불평등하다거나 나는 타인에 비해 전지전능함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 없다.

 

*** 초인의 냄비는 인간의 탄생 과정의 탁월한 비유이다. 여자와 남자가 관계를 하여 아이를 만든다. 이 아이를 만드는 난자는 우연이다. 정자는 더더욱 우연이다. 어떤 난자와 정자가 만나 누가 탄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가 관계를 한 것은 둘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아이가 생기는 것은 거의 필연이다. 당신의 부모가 아이를 낳은 것은 거의 필연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당신이 된 것은 우연이다. 당신은 N번째 난자와 N번째 정자의 결합인데, 다른 N+1번째 난자와 N+1번째 정자의 결합을 당신의 부모는 더욱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어떠한 결합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를 당신의 부모는 당신 대신 사랑했을 것이다.

 

*** 사부님은 예전에 주어진 환경에 대해 불평하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오이디푸스를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패륜을 깨달은 후 두 눈을 멀게 하여 장님이 되었다. 그런 인생의 고난을 겪은 후, 그는 죽어서 신이 되었다.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된 것이다. 만약 인생을 하나의 연극이라고 한다면 너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나는 인생이 연극이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 예전에 루쉰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루쉰은 나와 같은 의학도였다가 중국의 대문호가 된 사람이다. 루쉰의 어린 시절, 그가 경험한 혹독한 인생 경험을 나는 지극히 부러워하였다. 어째서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 삶의 조건이 극적일수록, 당신은 더욱 위대해진다.

 

<죽은 시인의 사회>로 돌아가면, 키팅 선생은 학생들의 럭비 연습에서 종이 쪽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그리고 공을 차기 전에 그 쪽지들을 펼쳐서 읽어보게 한다. 그 중 매우 인상깊었던 구절이 하나 있다.

 

최고의 신이 되기 위하여!”

 

 

 

이제 알베르 카뮈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앞서 거론하였듯이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쓴 사람이다. 그도 역시 실존주의자이다. 내가 아는 선에서 카뮈는 신의 부재 이후 가장 큰 혼란을 겪은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실험적 작품들은 매우 충격적이며 혁명적이다. 예전에 과학 저술가 정재승이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카뮈의 <이방인>을 꼽았던 것이 기억난다. 이방인은 엄청난 수작이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볼레로>를 알 것이다. 이 음악은 매우 단순한 춤곡의 선율로 시작하여 시종 일관 이 선율 하나만을 들려준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여러 악기가 편성되고 종국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현란한 곡이 된다. <이방인>은 바로 그와 같은 구성을 보인다. 소설에서 주인공 <이방인>은 시종 일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라는 입장을 보인다. 그에게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죽은 이후, 모든 가치와 기준이 re-set prototype 0.0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였다. 그가 바로 이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는 볼레로의 클라이맥스처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상황 판단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람을 쏘아 죽인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목사에게 절대 설득당하지 않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성장한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의 해가 뜨고 그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구조이다. 그는 신이 되어 형장에서 사라진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을 남겨 두고 있다.

 

그 사람은 조셉 캠벨이다. 그는 신화학자이다.

 

조셉 캠벨의 80세 생일에 천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그가 쓴 <영웅의 여정>은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의 원형이다. 조지 루카스는 평생 조셉 캠벨을 존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셉 캠벨이 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역사적 사상가로 존경 받을 가치가 있다.

 

그의 어록은 실존주의의 집대성이다.

 

그는 신은 상징이라고 말하였다. 괴테도 말하였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즉 캠벨도 실존주의의 바탕에서 사상을 개진한다.

 

이제 그의 어록을 토대로 궁극적 질문에 답해보도록 하겠다.

 

#1. 왜 살아야 하는가? Why?

 

 

Life is without meaning.

You bring the meaning to it. The meaning of life is whatever you ascribe it to be.

Being alive is the meaning.

 

 

삶은 의미가 없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당신이다. 당신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면그것이 당신 삶의 의미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이다.

 

앞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궁극적 해답을 찾길 원했다. 이제 정답을 들려주겠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당신은 죽어도 된다.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만들어보라(다들 만든다). 그 버튼은 당신의 자살 버튼이다(이렇게 말하자 다들 표정이 안좋다;;;). 당신의 목숨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죽어도 되고 죽지 않아도 된다.

 

그 선택의 수준은 다음과 비슷하다. “내일 파티가 있는데 갈래?” 가고 싶다면 가고 싫다면 싫다고 하면 된다. “나에게 쿠바산 시가가 있는데 같이 필래?” 피고 싶다면 피고 피고 싶지 않다면 피지 않으면 된다. 당신의 선택할 수 있다. , “왜 파티에 가야 하는가?” 또는 왜 쿠바산 시가를 피워야 하는가?”란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듯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역시 잘못된 질문이다. 당신은 당신 삶의 결정권자다. “난 삶이(파티가)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면 당신은 삶을 사는 것(파티에 가는 것)이다.

 

*** 이 말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대답이 참이라는 뜻과는 다르다. 질문과 답의 관계가 아니라,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이 의미다. 이 말 역시 굉장히 탁월하다! 당신이 살아서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태초에 당신의 행동이 있었고 제1의 날부터 제7의 날까지 당신이 당신 삶의 신이 되어 역사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How?

 

 

Follow your Bliss.

 

 

위의 말는 조셉 캠벨의 대표적 어록이다. 당신의 천복을 따르라는 의미이다. Bliss란 단순한 말초적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을 의미한다.

 

 

Bliss is a stage which is above any emotional state that is characterized as peace or happiness (feelings of enjoyment, pleasure, and satisfaction).

Wikipedia

 

결국 네 멋대로 하라는 말이다. 당신이 순수하게 자유롭다면 살았을 법한 삶을 살라는 뜻이다. 당신이 바로 신이므로.

 

이 말은 오프라 윈프리의 “Follow your GPS(Feeling)”이라는 말로 변형을 거쳐 가벼운 삶의 스킬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상적 고뇌와 치열한 탐구가 있었던가? 니체는 말머리를 잡고 울며 정신병원에 끌려갔다(채찍질 당하는 말에 감정 이입된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연극을 하고 싶어하던 닐은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슬퍼하며 자살한다. 오늘날 사회적 인식은 천복을 따르는 데에훨씬 호의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Bliss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3. 인생이 무엇일까?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보려면,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신의 사후, 지식인들은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는 다양한 방안을 구상해냈다. 앞서 말한 니체는 영원회귀사상을 주장하였다. 자크 모노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이자 사상가로 그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우리의 존재는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자크 모노가 필연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고 생각한다(필연적인 것은 결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에 필연의 가치에 맞먹는 의의를 부여하자는 것. 그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나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극복 방안은 순간 속에 영원을 심는 것이다. 신의 예비해 둔 사후의 천국도 지옥도 없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종적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프리쳐드의 그래프를 찢으라고 했다. 그 그래프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두 축을 의미하는 매우 효율적인 그래프였다. 그러나 키팅 선생은 더욱 진화된 가르침을 들고 나왔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했었다. 복도로 모여든 학생들에게 키팅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Carpe Diem

 

 

키팅의 그래프는 선으로 그릴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영원으로 수렴하는 점들로 구성된 점묘화다. 기다리던 미래는 오지 않는다. 오로지 순간만이 존재한다. 카르페 디엠은 말초적 쾌락을 즐기자는 디오니소스적 미덕이 아니다. 괴테를 떠올려 보라. 영혼을 걸고 구하고자 했던 그 순간의 가치를! “멈추어라, 시간아! 너 참 아름답구나!”

 

최근에 교회에서 순간 순간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가르침은 교의의 흐름을 무시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순간 속의 영원을 가르칠 수 없다. 교회는 사후 천국을 위한 믿음을 가르쳐야 한다. 신도들은 죽음의 침대에서 천국에서 보자고 말하며 웃으며 죽을 것이다. 신의 부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음을 맨 가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죽음은 이벤트가 될 수 없다. 그들에게 삶의 순간들은 충분히 영원하다.

 

*** 사부님을 보내는 주간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였다. 위의 강연회를 한 직후였으나 나로서는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 힘들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사부님 자신이겠지만 스승을 잃는 나로서도 인생을 도난 당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무엇인가 업을 쌓아 칭찬 받으러 돌아갈 곳이 없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나는 사부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었다. 그런 그가 죽어 가고 있었다. 그 주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 수 없다. 사무적으로 일하고 돌아와 집에서 몸져 누워 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음이 왔다. 죽음이란 이벤트가 아니다. 죽음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다. 사부님과 나는 함께였고 그 순간은 영원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내 인생을 통해 영원하다. 시간의 종적 흐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므로 어쨌단 말인가?

 

당신은 당신의 신이다. You are THE HIM of you.

그러므로 마음대로 살아라.

삶이란

 

What : 종적 시간이 아니라 영원에 해당하는 순간들의 총합이며

Why : 의미가 없고

How : 네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다.

 

*** Why?는 왜 생각보다 중용하지 않은가? 정신분석은 그닥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이유는 몰라도 방법(How)을 안다면 Why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살다 보면 의미가 생긴다. Being alive is the meaning.

 

그러므로 가볍게 살아라. Light Touch로 인생의 점묘화를 그리자.

 

신은

전지전능하며

입법자이자

심판자이자

기준이다.

 

당신은 다른 곳에서 기준을 찾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신이라면 내가 이 세계를 제대로 창조했는가?”로 고민하겠는가? 당신이 신이라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겠는가?

 

인간은 추구하는 한 헤맨다(괴테). 우리는 헤매게 되어 있다.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승냥이처럼 사막을 헤매자. 영웅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러면 당신은 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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