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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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웅은 길을 떠난다. 그리고 되돌아 왔을 때, 과거의 그는 사라지고 새로운 그가 나타난다. 떠나기 전에는 평범했으나 귀환한 그는 영웅이 되어 있다. 여행은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문지방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여행을 로망으로 안고 사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모든 신화 속에는 인간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안고 있듯이 우리는 여행을 통해 되살아 나고 싶어 한다. 지겨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지칠대로 지친 영혼을 구제해 주고 싶어서, 그저 우연한 기적을 바라며 우리는 짐을 싼다. 그리고 떠나기 전부터 흥분한다. 어린 시절 하루짜리 소풍조차 얼마나 기쁘기에 잠을 설쳤는가를 돌이켜 보면 여행의 힘을 되느낄 수 있다.
사랑을 할 때는 함께 여행을 떠나고, 헤어진 다음에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입사를 하고 며칠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짐을 싸 마지막 여유를 여행으로 누리고, 퇴사를 한 후에도 여행을 떠나 그동안의 일을 정리한다. 모든 단절에는, 그리고 모든 도약에는 여행이 통과 의례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인류의 마음 속에 각인된 여행의 모습은 다른 세상으로의 탐험이고 모험이다. 여행은 단순한 놀이나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상이다. 직장인들이 여행으로 휴가를 쓰지 못하는 것은 그저 약간의 휴식의 상실이 아니다. 현실에 묶인 것이고, 두려움에 묶인 것이다. 빠듯한 돈에 대한 두려움, 콘베어벨트 위를 구르는 연속성을 따라 잡아야 하는 종종걸음의 두려움, 바쁨의 고리에서 빗겨져 나온 다음의 불협화음에 대한 두려움, 휴가의 반납을 열정의 증거로 보는 상사의 눈초리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과의 보조를 다시 맞추어야하는 두려움이 삶을 지배한다. 꿈 따위는 두려움에 가려 힘을 쓰지 못한다. 그들은 삶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직 중요한 인물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다.
직장을 다닐 때 나는 한 번도 여행다운 여행을 해 보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들과 며칠 아수라장을 뜷고 어딘가를 다녀오면 의무 방어전을 마친 것이다. 그것은 휴식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전투였던 것 같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는 직장 생활 내내 여행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쳐갔다. 16년이 되던 해, 참지 못하고 한 달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한 달간 포도단식을 했다. 그것은 나의 내면 여행이었고, 그때 나는 작가의 길을 찾게 되었다. 넋나간 듯 매일 글을 썼고, 지리산에서 돌아 온 다음 매일 새벽 계속 글을 써나갔다. 새벽은 매일의 신성한 성소가 되었고, 이른 새벽에 나는 하루를 글로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 동료가 한 말을 기억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글을 쓰기 전에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책을 쓴 다음에는 그의 말이 모두 옳게 들린다." 우리들은 웃었다. 그리고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책이 나온 후, 나는 매년 책을 출간했고, 3년 뒤 회사를 떠났다.
회사를 나온 후 내가 한 첫 번 째 일은 여행이었다. 아내에게 10년 근무에 한 달의 휴가씩 모두 두 달 간의 휴가를 달라 했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배낭을 메고 남도를 쏘다녔다. 그때 나는 자유를 찾아 길로 나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두 달을 다 쓰지 못했다. 매일 이 삼십 키로 씩 걸으며, 50일 정도를 거리의 밥을 먹고, 발길 끝나는 곳에서 아무 여관이나 민박을 찾아들어 잔다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조금만 더 일찍 그 여행을 시작했다면 두 달을 다 즐길 수 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가 즐길 수 있을 때까지만 길 위에 머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수염을 깎았다. 길을 떠난 후, 한 번도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염은 길고 부드러워져 있었으나 일상으로 돌아 왔기에 일상의 질서로 복귀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길을 떠나기 전의 나는 아니었다. 월급쟁이에서 1인 기업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두 번의 긴 여행이 없었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1인 기업가로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여행이다. 생명이 시작할 때 죽음도 같이 시작된다.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 생명의 양과 죽음의 양은 절반씩 인생을 양분한다. 마치 낮과 밤처럼. 하루가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 지고, 삶이 생명과 죽음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은 재미있다. 나는 빛과 그림자 사이를 걷는다. 뜨거우면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추우면 햇빛 쪽으로 나온다. 여행은 질서에 지친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길로 나서는 것이며, 길 위의 나그네로 지내는 자유에 지치면 다시 일상의 질서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 속에서 나를 보고, 내 속에서 다른 사람을 본다. 그리하여 여러 모습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므로 여러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한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한 번도 다른 배역을 맡아 보지 못하고 한 곳에서 하나의 배역에 그치고 말 때, 그것은 아마 비유컨대 항구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배와 같다. 그것을 배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우연히 열어젖힌 책 속에 이런 귀절들이 나온다. '집에서 기르는 소처럼 1년을 살기 보다는 하루라도 들소가 되라' 이윽고 ' 가장 많은 바다와 가장 많은 대륙을 본 자는 행복할 지니' 라는 글도 뒤따라 나온다. 어찌 이 순간에 이런 절묘한 글이 나타났단 말이야 ! 이제 알았다 ! 여행이란 이렇게 세계의 아무 곳이나를 펼치는 것이고, 그때 꼭 맞게 나를 위한 장면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장면으로 인해 나의 가슴이 열리는 것이고 이윽고 세상도 더 넓어진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다.
('혁신경영' 기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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