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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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라깡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복잡한 말은 무슨 뜻일까 ? 생각 속의 나와 실재의 나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나와 생각 속의 나는 인생을 함께 살아간다. 그러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고 분노하고 혹은 기뻐한다. 반대로 일어난 일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제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 버리기도 한다. 실재와 가상, 이것이 섞인 이야기가 바로 인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사건(역사)과 느낌(문학) 그리고 생각(철학)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이야기가 시시하다면 그건 잘 못 살았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박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면 그게 바로 미래가 밝다는 뜻이다. 삶은 크고 작은 사건과 그것에 대한 생각과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건과 사건에 대한 주관적 해석으로 만들어 진 것이 인생인 것이다
나를 탐구한다는 것은 매일 만나는 사건과 느낌과 생각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 하나,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큰일도 있지만, 너무도 사소한 일이 수 십 년간 또렷한 기억으로 살아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어 나는 아직도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역사 선생이 '실마리'라는 말에 대하여 설명하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분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데 그 표정은 잊혀지지 않는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매일 만나는 작고 우스운 사건 속에서 삶을 건져 올리지 않는다면 제대로 산 것이 아니다. 오늘부터 나에 대한 관찰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고안해 보았다.
먼저 다섯줄 미만으로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특별한 일 하나를 기술한다. 그 특별함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사소한 일상 속의 사건, 그것을 찾아내 적어둔다. 말 그대로 기술이다. 주관성을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다. 예를들어 이렇게 해보는 것이다.
"오늘 남산 소월길에 있는 한식집에서 12시 점심 약속이 있었다. 집에서 30분 쯤 걸리는 곳이다. 나는 10분전 쯤 도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11시 20분에 집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31분 쯤에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가는 동안 차가 막히는 구간을 지날 때 마다 조금 일찍 나왔어야 한다고 조급해했다. 나는 이 조급함이 싫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주 반복된다"
그 다음에 그 사건을 지배했던 내 생각이나 느낌의 원인을 찾아 내는 것이다. 역시 길게 쓸 것 없다. 열줄 미만으로 가장 그럴 듯한 이유를 2-3 개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위에 예를 들은 사건에 대하여 가장 그럴듯한 원인을 나는 다음과 같이 찾아내 보았다.
"미리 작정한 11시 20분에 집을 나서는 것을 막는 장애는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해야할 급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냥 20분에 나오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꾸물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
* 거리 상황에서 오는 조급함을 없애기 위해서 10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한 것인데 나는
떠나기 전에 집에서 이 여유분을 이미 느긋하게 써먹고 있다
*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는 동안의 무료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내심 가능하면 정확하게 도착하려 한다.
* 상황에 따라 조금 늦을 수도 있다. 상대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살아가면서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나는 10분 정도 늦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나도 늦을 수 있고 상대방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느슨하게 만든다.
그 다음은 이 사건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놓아둘 것인지 아니면 개선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그 선택을 존중하고 거기에 맞게 처신한다. 다시 위의 사건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해 보자.
"나는 시간에 꼭 맞추어 나가 교통 상황이 좋으면 제 시간에 도착하고, 상황이 나쁘면 조금 늦게 되는 습관을 바꿔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가는 동안 교통의 흐름에 따라 조급해 지고, 신호등 하나마다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 일찍 출발하여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서 '창조적 기다림'의 방식을 고안했다. "
* 내가 좀 일찍 도착하고 상대가 조금 늦는다면 어쩌면 30분 정도의 기다림이 있게 될 수 있다. 이 정도는 불쾌감 없이 기다리도록 하자. 종종 일찍 도착한 사람은 상대의 지각에 민감해 질 수 있는 데, 그것은 혼자의 기다림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 30분 정도를 훌륭히 보낼 수 있는 방법을 3가지쯤 가지고 있자.
- '기다림의 설레임'을 즐겨보자. 내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이 사람의 좋은 점, 이 사람의 장점, 둘 사이에 있었든 좋은 추억,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연결되는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등을 자연스럽게 즐겨보자.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간단히 메모해 두자. 그러면 허겁지겁 나타난 그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 만나는 곳이 좋은 곳이면 그곳을 즐겨보자. 창문 넘어 꽃, 혹은 무성한 잎, 오후의 느긋함, 흐르는 음악,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 혹은 가지고 간 책의 책갈피가 끼어져 있는 대목을 펼치고 분위기가 다른 장소에서의 책 맛에 풍덩 빠져보자.
- 만일 비즈니스 미팅이라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사전에 확실하게 정리해 두자. 나는 이 일의 핵심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 나와 상대는 어떤 면에서 서로 도울 수 있을까 ? 나는 이 일에 집착하고 있는가 ? 만일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달래 마음의 평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나를 탐구한다. 나는 매일의 사건들을 애지중지한다. 그래서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면서 나와 나의 삶을 탐구한다. 나를 내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재미있다. 제 3의 관찰자가 되어 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슬픔과 고독조차도 풍요로운 은총으로 선물처럼 내 생활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불쾌한 일과 황당한 사건조차 웃음의 소스가 된다.
유머란 나와 나에게 닥친 사건을 분리시켜 인지함으로 웃어 줄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야 말로 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삶에 대하여 웃어주자. 웃음으로 나를 탐구하자
(혁신경영, 기고문 2010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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