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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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먼저 가혹한 괴로움이다" 15세기를 살았던 르네상스인이며 플라톤 주해자였던 피치노 (M. Ficino)의 고백이다. 사랑이 시작되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진다. 끊임없이 갈망하며, 함께 있어도 그립다. 끊임없이 소유해도 갈증과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의 방식이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사랑을 권한다.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지만 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론적 허망함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가여움임을 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살고 있는 소혹성에 작은 씨가 날아와 꽃을 피우게 된다. 왕자는 꽃을 사랑하고 정성스럽게 돌봐준다. 그러나 꽃은 거만하고 까다롭다. 어린왕자는 꽃의 심술을 참지 못하고 꽃을 떠나온다. 꽃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행동으로 꽃을 이해하고, 꽃이 주는 향기와 광채로 그 심술 속에 깃든 사랑을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만 어린 왕자는 너무도 어렸기에 그 꽃을 떠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구에 오게 되지만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쓸쓸한 사막이다. 외로운 사막, 그게 뭘까 ? 오르텅스 불루는 그 사막의 쓸쓸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제발자국을 보려고
그러나 이 처절한 외로움은 아무도 없는 외로움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사람들 속의 고독을 뜻한다. 진정한 관계의 부재 속의 고독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바로 그 고독의 진짜 얼굴이다. 여우에게서 길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 어린왕자는 다시 꽃에게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그 장미꽃 하나가 수백만송이의 다른 장미들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직접 물을 주고, 유리덮개를 씌워주고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그 꽃이 다치지 않도록 벌레를 죽여주었으니까. 그 한 송이의 꽃이 그렇게 소중해진 것은 그 장미를 위해 정성을 들인 그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왕자는 기쁨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어린왕자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사랑이 그를 변화시켜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내'가 존재함으로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가끔 '우리' 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없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와 나'라는 관계가 만들어 낸 '우리' 속에서만 사람들은 사막을 벗어날 수 있다. 그 한 사람에게 쏟은 정성과 시간만이 진정한 너와 나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사랑은 달콤함에 기뻐하듯 그 소태 같은 쓴 맛도 견뎌야한다.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이 보아야 한다. 그러니 사랑은 시련일 수 밖에 없다. 피치노가 말한 '가혹함'이란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
꽃과 꽃 사이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벌처럼 나도 여전히 나의 이기심과 우리의 사랑 사이를 오간다. 벌이 그 분주함으로 꿀을 모으듯, 나도 나와 우리 사이를 오가며 삶을 채취한다. 삶이란 관계의 조각들이다. 각 조각들마다 특정한 사람과 공유되어 있고, 그 조각들이 모두 모여 내 삶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함께한 특별한 날들이 모여 삶을 만들어 내 듯, 누구의 인생이든 사람으로 짜여질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 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새가 우는 이유는 슬픈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원자력 연구원 기고문, 2011년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