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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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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4일 11시 59분 등록
 

 

칼럼6. 내 안의 영웅

--- 나만의 빛깔과 향기 품는 꽃송이, 안녕?

 


1. 하늘에서 내려온 파라슈트 찾기; 나는 누구인가

2.  인생의 갈림길, 전환의 경험; 삶이 요동칠 때

3.

4.



‘전환’ 이란 무엇인가를 놓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것을 잡게 되는 그 중간의 먹먹한 상태이다. 두 손에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들고 이쪽 한번 저쪽 한번 쳐다보며 과거의 무엇을 동정하기도 하고 찾아오는 현재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딱 중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며 요동치는 상태라고나 할까? 나도 그런 ‘전환’을 경험한 적이 있다.  



***

세상은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의 ‘어떤 성취’를 헌신짝 취급하듯 무가치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나는 내 일을 통해 성취라는 열매를 계속 따고 싶었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성취’란 어떠해야 하는 지 혼란이 왔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다. 사학과에 진학했고 여대를 다니면서 여성의 삶과 역사, 분단과 역사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여성사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알리고 싶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방송 구성 작가가 되었고, 대학 4년 시절 우연한 기회에 발을 담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NGO를 통해 피해자에 대한 증언 채록과 영상작업을 15년 동안 틈틈이 해 오고 있었다. 나에게는 방송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일 이 두 가지는 내 삶의 전부인 양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할머니들을 만난다. 할머니는 손녀 나이의 나에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웠던 옛 일을 털어놓으신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함께 울었고 할머니가 당한 그 일이 마치 내가 당한 치욕인 양 느껴졌다. 방송 일이 없는 틈틈이 전국으로 할머니들을 인터뷰 하려 다녔다. 증언채록 작업이 많을 때는 방송 일을 쉬었다. 합천의 ***할머니는 손녀딸처럼 옆 집 밭에서 수박을 따다가 챙겨주신다. 경기도 사는 ***할머니는 동네 슈퍼에서 받은 플라스틱 바가지와 세수대아를 챙겨주신다. 나는 할머니들과 정이 쌓여갔고 이 일에 끊임없이 빠져들었다.  나의 주된 일은 방송일이었지만, 주와 부가 바뀔만큼 NGO 일은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이리로 저리로 시공간을 뛰어넘고 생략과 비약이 기본인 ‘할머니식’ 이야기 스타일은 참으로 많은 짜 맞춤과 재 인터뷰가 필요했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 자료를 살피며 할머니 증언의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장소도 찾아야 했다. 일본 우익들은 할머니 증언의 세세한 하나 하나까지 들추어내어 참과 거짓을 따졌다. 나는 내 손에 역사의 진실이 달렸다는 소명감을 느끼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속한 NGO에서 국내 거주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이 나왔다. 그리고 곧 이어 본격적인 해외 거주 군위안부 피해자 발굴 작업에 나섰다.  모두 20여 차례에 걸쳐 중국과 일본, 동남아, 태평양 지역 답사에 나섰다. 나는 주로 중국 동북성 지역과 호북성, 그리고 상해 지역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10 여 년 간, 중국지역에서 모두 33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만났다. 


증언채록 작업을 할 때 마다 할머니들이 내 손을 붙잡고 말하는 ‘마지막 바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고향의 가족을 찾아 달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중국의 최하층 계급으로 지내고 있었으며 어떤 분은 무국적 상태로 중국 땅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중국국적이거나 북한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제적 지원이 시급했다. 고향 가기 원하는 할머니들의 국적회복도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나가는 NGO는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심 모임이라서 국적회복과 가족상봉까지 추진하는 데는 역부족 이었다. 또다른 관련 단체, 정대협은 일본을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었으며 국내 할머니들 챙기고 세계여성 네트워크 활동으로 이 문제를 알리는 데 손이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증언 기록도 중요하지만 나는 할머니들의 눈물을 닦는 것이 과거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진짜 역사라고 생각했다. 2003년 우리 모임은 여성부의 NGO 지원금을 따냈고 나는 NGO 연구원들을 설득해서 중국 거주 할머니들의 실태를 알리는 다큐멘터리 [귀향] 제작에 들어갔다. 나는 직접 기획을 하며 대본을 썼다. 경제적 지원, 국적회복, 가족상봉 등 시급한 문제를 할머니들의 생생한 영상과 증언을 통해 다루었다.

 

할머니들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미친 듯이 발로 뛰었다.  그 당시 나는 반 미쳐서 중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길이 안 보이면 길을 만들어서 나간다고 생각했다. 거짓과 무관심에 가려진 엄청난 두께의 덤풀을 잘라내고 역사의 진실 한 조각을 찾아내는 것이 너무도 소중하고 절실하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끼리 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군위안부 문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적이 달라도 뜻을 같이 하면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나는 군위안부 문제에 진정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가진 일본인 신문기자 출신의 사진작가와 함께 중국거주 피해자를 알리는 소책자 형태의 [포토에세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구소에 전해지는 할머니 돕기 후원금을 들고 여비 절약을 위해 가이드 없이 할머니들의 중국인 가족들, 그 지역에 사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중국 상해로 호북성 무한으로 돌아다녔다. 중국에서는 허가받지 않고 카메라를 찍는 것이 금지돼 있다. 절차가 복잡한 취재비자 없이 혼자 다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조심해서 할머니들의 현재 건강 상태와 생활을 캠코더에 담았다.  


그렇게 찍은 필름은 후원금을 모으고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방송 뉴스에 제보하였다. 그 결과 MBC pd수첩에서 취재협조 연락이 왔고 중국에 남은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MBC 느낌표라는 퓨전형태의 오락&교양의 주말 인기 1순위 프로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아이러니하게 방송작가로서가 아니라, 중국 거주 군위안부할머니 전문가로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파를 타고 할머니들의 소식은 전국에 알려졌고 중국 안휘성 거주 곽예남 할머니의 한국 가족을 찾아내어 상봉이 추진되었다. 온 국민이 할머니의 가족 상봉에 눈물을 흘렸고 나는 방송의 힘에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2005년 3월 30일 수요일, 청와대에서 전화 한통이 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관련 부처가 관련 시민단체와 연석회의를 하여 중국에 버려진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국가가 적극 나서서 노력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나에게 [군위안부 전반에 관련 개요와 현재의 현황]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 왔다.

 

정부가 관심을 갖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턱 높았던 법무부, 외교부, 여성부가 적극 업무에 나섰고 중국 거주 할머니 현황 파악과 지원, 국적회복 위한 예산을 편성하였다.

15년의 노력과 성과, 나는 짜릿했다.

 


하지만, 큰 성취 뒤에는 힘든 그늘이 붙어있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였고 3살 난 딸아이에게 스트레스성 틱 장애가 온 것이다. 아이는 온 몸으로 엄마를 원했다. 나는 역사적 소명이라는 내 성취에 함몰되어 내 아이를 보지 못했다. 군위안부 관련 일을 계속 하면서, 나는 남편에게도 늘 죄인이 되었다. 남편은 내 일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일과 아이 육아는 전적으로 내 일이었다. 그 일을 한 것도 나의 선택이었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한 선택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역할 부여했고 그 선택과 역할들이 서로 뒤엉켜 충돌하였다. 나는 또다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군위안부 관련 일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나는 달리기를 하고 있다가 내 스스로 나의 무릎을 꺾고 주저 앉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일과 아이, 모두를 양 손에 쥐고 세상을 뛰기에는 내게는 지원군이 아무도 없었다. 발 동동 구르며 오후 6시, 종일반 유치원에 미친년처럼 달려가서 아이를 인수받는 일도,  매번 남편에게 정상퇴근을  부탁하는 일도 모두 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 출장을 위해 몇 일을 빼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졌고 나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었다.  나는 못된 년(?)이 되어있었다. 나는 나쁜 엄마가 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이기적인 아내가 되어 있었다.

 

이제 정부 예산이 편성되었으니 누가 되었던 중국할머니를 돕는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거라고 믿었다. 내가 계속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가슴이 쓰라렸다. 열심히 이룬 성취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잘 마무리 하고 싶었고, 또한 가족에게 박수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늘 살아있게 만들었던 이 일은 이제는 멈춰야 하는 일, 이해 받지 못할 일이 되어 내게는  돌아왔다. 그 이유는 내가 미쳐서 잠시 잊고 있었던, '나는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다. 

    


***

생명을 품고 생명을 키우고 생명과 교감 하는 일만큼 멋지고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물론 있다....하지만.....-.-!) 

힘든 때도 많지만 조물조물 커가는 딸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발산하는 생명력에 엄마인 내가 치유 받고 성장한다.

 

딸아이와 함께 집에 있고, 딸아이와 함께 놀고, 딸아이와 함께 책을 본다. 나는 집에 사는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집이다. 생명을 품은 집이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르는 집이다..

방송일, 군위안부 관련 일을 모두 접고 아이의 등하교를 책임진다. 간식을 만들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하루 종일 집안을 돌본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빠르게 달리는 KTX 열차는 바깥경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증기기관차는 기차 길에 핀 작은 들꽃도 보고  작은 역사 의자에 앉아 꼬박 꼬박 졸고 있는 시골 할아버지의 단잠도 엿 본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세세한 풍경을 보며 만끽하는 과정이다. 아이와 하루 온종일 보내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 보는 경험, 사회적 존재에서 내가 없어져 보는 경험, 그냥 누구 엄마가 되어보는 경험은 단단하고 완강했던 내 자의식을 흔들어 다시 나를 원점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무슨 일을 바쁘게 성취해 내기 보다는, 아이의 옆에서 조용조용히 지켜보고 웃어주고 기다려 주고 돌봐주는 늘 포근하고 안전한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틱 장애는 내가 전적으로 육아에 전념하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는 일하는 엄마보다 집에서 자기랑 놀아주고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 삶의 모든 중심이 아이 우선이 되었다. 그렇게 또 10 여 년이 흘러가고 있다.  

 

여전히 나 가슴 속에는 내 일에 대한 열정이 끓고 있다.

밖으로 향하여 일을 하고 사람들과 연대하며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나란 존재가

지난 10년 동안은 집이 되어 그 자리에 앉아 늘 그대로 있는 존재로 살았다.  일명, 10년 수도승으로 도를 닦는 과정이었다. 

 

밖으로 향하는 삶도 안으로 향하는 삶도 나의 선택이었다.

'엄마'라는 자각과 함께 '내가 집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뒤 한 동안은  내 안에 요동치는 나의 열정 에너지를 다루기에 지치기도 했다.  

매일 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눈물 흘리며 서글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밥을 짓듯이 내 인생을 위해서도

단단하고 두꺼운 곱돌솥에 돌솥밥을 맛있게 지어 내고 싶었다.

 

돌솥받은 밥 짓는 내내, 가스 불을 줄렸다 늘렸다 불조절을 잘 해야 맛있는 밥이 지어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열정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맛있는 삶이 지어진다.  

자신의 소명과  역할의 조화를 일구어내기!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뛰기도 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숨 죽여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해야 한다.

 

 

***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였다.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아마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음식도 각각의 맛이 다르듯이

삶의 지점들도 직접 건너보지 않고는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이제 육아에도 여유가 생겼고 남편도 10 여 년을 곧장 달려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삶의 열매를 일궈냈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호기심으로 바깥세상을 탐색하며 세상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나...

지난 10년은 나와 어울리지 않게 내면을 탐색하고 조용히 견디며 책을 통해 여행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그 여행은 어떤 격정을 나에게 선사할 지

조금은 떨린다.

 

                                                                                       2013년 10월14일  서은경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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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11:10:25 *.108.69.102

대단한 일을 해냈네요.

당진 수업에서 김구선생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며 눈물짓던 은경씨의 모습이 좀 더 가깝게 다가 옵니다.

그토록 소중한 결정의 10년 뒤에 또 한 번의 전환을 위해 우리 연구소를 택한 것이었군요.

비록 선생님은 안 계시지만

선생님의 훈김을 쬐며 성장한 연구원들이 은경씨의 재도약에 든든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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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12:36:41 *.58.97.140

에고고 선배님....  그 모습을 기억하시다니 부끄럽네요.

감정이 자제가 안 되어서 눈물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강점으로 앉고 있습니다. 

요 부분은 선배님이랑 비슷하죠?^^*

 

늘 챙겨서 댓글 남겨주시는 관심과 정성....

고맙습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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