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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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지적 레이스: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1. 저자 구본형에 대하여
인생 2막을 시작하기 까지
구본형은 195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 우리 아버지와 나이가 같으셔서 왠지 더 정감이 가기도 하고 너무 일찍 이 세상과의 결별을 하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애잔한 느낌이다. 그간 저자를 언론 매체에서만 뵈어 왔지 한 번도 실제로 뵙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는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이후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1980년 12월 한국 IBM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구본형은 2000년까지 20년 동안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담당했다. 그는 성공을 위한 경력관리를 위해 영업부서 등 다른 부서들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변화경영 분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 뼛속 깊이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직장생활 8년 차인 나는 경영인 track을 밟기 위해 다양한 부서를 경험하는 우리 회사의 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전문가로 입지를 굳히고 싶어 입사 후 소비자/시장 분석 업무만을 맡아왔다. 그간 나름대로는 열심히 보람과 재미를 느끼며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이 업무가 내가 정말 잘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인지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해 방황 중이다. 그렇기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고 실제 그것을 잘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본받고 싶기도 하다.
직장에 있던20년의 세월 동안 때로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아 속상해하기도 하는 등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핍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기업들의 변화성공사례를 연구하였고, 새벽 시간을 투자하여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으로 개발하며 변화 경영전문가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떠날 때가 되었음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는 1998년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쓰면서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IMF 시대, 방황하고 있던 많은 직장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작 성격의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1999년에 쓰고 2000년에 <월드클래스를 향하여>의 출간에 맞춰 회사를 나왔다.
그는 회사에서 나오기 전 앞으로 5년 정도 더 근무를 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최상의 시나리오를 그려봤다고 한다. 그러나 명확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고,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 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이라는 지금까지의 커리어에 무엇을 조금 더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던 그는 변화경영 전문가가 만들기로 결심한다. 경영 컨설턴트는 많지만 ‘변화경영’ 전문은 적다는 점, 그리고 이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더 적다는 점, 자신은 이미 16년 동안 변화경영을 담당한 전문성이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결심의 근거가 되었다. 요즘 특히 젊은 사람들은 흔히들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 또한 회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때면 회사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남달랐다. 변화경영+인문학 이라는 본인만의 고유한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 최고가 되기 위해 준비하였고, 내가 스스로 이끄는 주도적인 삶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를 토대로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열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그는 자기 자신과의 세 가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 내용이 명확한 저자의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오롯이 지킨 저자의 3가지 약속은 아래와 같다. 1) 앞으로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말자. 2)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리자 3) 직업을 통해 누군가를 돕자
변화 경영 시인으로서의 삶
1인 기업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저자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운영함과 동시에 개인대학을 열어 평범한 인물들의 위대한 잠재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전이었다. 사실 ‘변화’라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때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 또한 단순히 주변에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나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변화’를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가 지금까지 쓴 책들은 젊은이들과 직장인 사이에서 항상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삶의 분기점을 찾는 직장인들을 위한 변화지침서인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직장인의 자기혁명 비전을 제시한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 등 많은 책들이 절실한 변화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하였고 이 땅의 많은 대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혁신의 길을 열었다.
이후에도 기업의 내적 혁명을 요구한 『월드클래스를 향하여』, 변화의 키워드로 '하루의 법칙 9가지'를 제시한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변화를 꿈꾸는 저자의 게으른 남도 여행을 담은 『떠남과 만남』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으로는 저자의 명문들을 모아놓은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와 저자의 고전특강을 대집성 해놓은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도 있다.
인문학과 경영학을 조화롭게 접목시키는 그의 비전은 기존의 다른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단순히 변화를 하게끔 ~~하게 해라! 라는 매뉴얼을 제시하지도,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변화의 욕구를 일으킨다.
그의 책은 그의 인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본형은 내가 처해있는 고민을 이야기 하고, 그의 어려웠던 시간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해쳐 나왔는지,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도전하고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면서 감동을 준다. 지금은 위대해 보이는 그 또한 우리네와 같이 평범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읽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용기를 주며 그렇기에 더 많은 변화를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 중에 그의 인생을 오롯이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글을 공유한다.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고, 그가 추구하던 시인 같은 삶을 진정으로 살고 떠난 것 같다.
“시처럼 살고 싶다. 삶이 맑은 물 속의 작은 고기떼처럼 그 유쾌한 활력으로 가득 차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삶이라는 대지 위를 내 인생은 여러 개의 시로 여울져 흐른다. 날쌘 고기처럼 도약하고, 깊고 푸른 물빛으로 잠복하고, 햇빛 쏟아지는 황홀로 새처럼 지저귀며 흐른다. 때로는 봄 꽃을 실어 나르고, 때로는 폭우 뒤의 격동으로 몸부림친다. 이내 거울 같은 평화 위에 하늘과 나무 그림자를 실어 나르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 들어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 삶은 작은 강처럼 기쁨으로 흐르리라.”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p18
젊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젊음을 쓰고 나이 들어서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인생의 역설인 것을.
우리는 언제 젊어지는가. 배움을 시작할 때다. 나이가 몇 살이든 배움을 시작할 때 우리는 더듬거리고, 뒤뚱거리고, 두려워하고, 떤다. 바로 이것이 젊음이다. 이때 우리는 어려지고 젊어지고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무엇이 젊은 것인가? 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늘 새로운 모험으로 자신을 내모는 사람들, 그들이 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젊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젊음이랑 배움을 시작할 때다. 그리고 자아를 재발견하면서 늘 새로운 모험으로 나를 내몰아야 한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도 마음은 젊은 내가 되고 싶다. 새로운 길로의 변화는 좋은 것이다. 그 변화에 나를 내맡기자.
p21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강력하고 확고하게 ‘써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이라도 이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북소리에 발 맞춰가지 말고 자기 내면의 북소리에 맞춰 자신의 길을 가라는 릴케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더욱더 내 에너지를 나의 내면으로 집중 시켜야 한다. 나의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내 갈 길을 걸어가자. 내 삶을 더욱 주도적으로 이끌어보자.
p23
먼저 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 책이 마음을 울리면 그 사람의 또 다른 책을 읽어라. 그리고 그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에는 그 사람이 인용한 다른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라. 이는 고전을 읽는 가장 훌륭한 독법인 것 같다.
오직 사랑만이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으며 그 부당함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설명이나 서평이나 소개의 글은 무시하십시오. 당신 자신과 당신의 느낌이 옳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르십시오. 설사 당신이 틀렸더라도 당신은 내적인 삶이 지닌 자연스러운 성장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독자적이고 은밀하게 발전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런 발전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강요되거나 재촉 당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만삭이 될 때까지 잉태되었다가 태어납니다. 모든 인상과 감정의 싹이 가슴속, 어둠 속, 무의식 속, 이성으로는 닿지 못할 어떤 불가사의 속에서 완성되게 하고 겸허한 마음과 인내심으로 새로운 명징성이 태어날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직접 창작할 때도 그렇습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거나 헤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무처럼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여름은 마치 영원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근심 없이 조용히 참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저는 그것을 매일 고통 속에서 배웁니다. 나는 그 고통들이 고맙습니다. 인내만이 전부입니다.
“인내만이 전부입니다.” 인내와 열정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뭔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내 길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나만의 시각을 열고 외부의 시선에 예민해지지 않는 것이 비결이다.
p25
“나는 무엇인가를 창조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내는 건 창조물이 아니다. 나는 그저 자연을 발견할 뿐이다.” 바꿔 말하면 예술은 자연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사실 로댕은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표출해내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는 언제나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됐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작업을 하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는 한 방울, 한 방울 돌로 파고드는 물같이 느리고 조용한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카푸스에게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의문 자체를 즐기라고 충고한다. 지금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를 답에 집착하는 대신 계속 의문을 품고 있으면 먼 어느 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 안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질문을 품고 살다 보면 경험을 통해 자기의 해답을 갖게 되리라는 이 말은 성급하게 정답을 찾아 빠르게 인생을 질주하고 싶어하는 젊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고다.
언제쯤 나는 나의 길을 알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어렷을 적부터 재능을 잘도 발견하는데 왜 아직 나는 방황하고 있을까…이렇게 나는 그간 조급했고 또 조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을 품고 계속 현실에 충실하면 어느 순간 꼭 이에 대한 답변을 받게 될 것이다.
p26
‘남자의 내면에도 모성이 들어 있다.’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해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릴케는 시를 잉태해 분만하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낸 고통을 즐기다 보면 고통이 아름다운 비탄의 소리를 내게 되고 그 소리가 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까운 사람이 멀어져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도 멀어진 것이니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기뻐하고 축하하라는 것이다.
p27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한 시간 말이다. 고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니까 홀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릴케의 생각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아직 보이지 않을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 일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릴케가 생각하는 신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신, 그러니까 예술가의 내면에 이미 현시되어 있는 신, 완벽한 전체로서의 신을 뜻한다. 릴케가 비서로 일하던 로댕의 집은 겨우 이슬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초라했다. 그럼에도 로댕은 마치 자기 집의 지붕이 하늘인 것처럼 유유자적한다. 그는 마치 자신의 일 속에서 창조주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았다.
p29
헌신하고 전념하며 제2의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것은 개개인이 성숙해지고 자기 내부에서 그 무언가가 되고 세계가 되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젊은이들은 단지 그런 의미에서, 즉 자신을 갈고닦는 일로써만 사랑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는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왠지 모순된 말에 덧붙여 “어린 시절 당신에게 주어졌던 그 위대한 사랑은 아직도 당신의 추억 속에 강하고 힘 있게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릴케의 사랑에서 핵심은 각자에게 끔찍하게 따라붙는 고독을 서로 인정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는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 다름을 서로 보호해주어야 우리는 창조적일 수 있다.
p30
스위스 역사학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거가 아무리 친절해도 그다음 세대가 읽을 때는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고.
p31
릴케는 슬픔을 일컬어 무언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픔과 고독은 우리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행복도를 조사할 때마다 상위권에 오르는 국가의 국민들을 보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즐기고 느끼고 감탄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으면 삶은 아주 행복해지는 것 같다. 경제적인 풍요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릴케도 늘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 바로 여기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
p32
어째서 당신은 어떤 불안감이나 고통이나 우울함을 당신의 삶에서 쫓아내려 합니까? 그런 것들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언젠가 시간이 돼서 산달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질문을 가져라. 질문을 품고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해답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다’라는 릴케의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하면 스스로 얘기하면서 정리하는 경우가 참 많기 때문이다.
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현재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자.” 가슴에 별을 품은 리얼리스트, 이런 모순적 상황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조건이다. 가슴속의 별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리얼리스트가 되어 현실 속에서 분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이니 젊음의 조건이다.
p35
다산이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었었던 이유, 그것은 붓과 책이었다. 나는 그것이 다산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늘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p38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동과 정,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이치를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운수를 헤아린다.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살면서 더욱 많이 느끼게 된다. 괴로운 일도 보는 관점을 달리해 항상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p41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며 세상으로부터 잊혀가는 다산. 책을 쓰고, 제자를 기르고, 차를 다리는 행위들이 외로움을 이기고 자신을 잊어버린 세상과 화해하기 위한 처절한 수련이었을 것이다.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해서 처음의 가문보다 더 온전히 아름답게 만든다면 이 또한 기특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 뿐이다.
p43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독서는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 마음가짐의 핵심은 효도와 공경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바탕을 먼저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두려면 반드시 바탕을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효도와 공경이 바로 그것이다. 모름지기 효도와 공경에 먼저 힘써 바탕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학문이 몸에 배면 독서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하나하나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구슬로 꿰듯이 체계를 잡아야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지혜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p45
다산은 양계를 시작한 아들에게 ‘계경’을 써보라고 권했다. 아들에게 문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닭을 치게 되었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아주 잘해보라는 격려였다. 닭에 대한 책을 읽고, 연구하고, 홰와 먹이도 바꿔가면서 실험하다 보면 멋진 사육법을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을 적어두라는 뜻이었다. 부족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한 분야를 파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고 격려해주었다. 얼마나 간단하고 핵심적인 조언인가!
p46
“다 완전하다 해도 구멍 하나만 새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모든 말을 미덥게 하다가도 한마디만 거짓말을 하면 도깨비처럼 되니 말을 늘 조심하거라”라는 말과 “근과 검.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으니 일생 동안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p49
수오재는 큰 형님이 자기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이름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사물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아도 어디로 가겠는가.
p50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지 않는 일은 그만둘 수가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언제나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그만두었다. 아주 부득이한 일이더라도 남이 모르게 하려던 일은 그만두었다. 참으로 이렇게 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다산의 당호인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함이여, 겨울 시냇물을 건널 때처럼 조심하고, 유함이여, 사방에 다 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경계라라”에서 앞 글자를 따 ‘겨울 냇물을 건널 여’에 ‘사방을 두려워할 유’를 붙여 스스로 근신하고 경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p56
선비는 평생을 배우는 학인이다. 그러면 이렇게 배워서 무엇을 할까? 지행합일 또는 학행일치, 즉 삶 속에서 실천한다. 그래서 선비에게 또 다른 중요한 덕목은 수기, 즉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다. 요컨대 선비란 학문을 익혀서 자기를 다스림으로써 이득이 되지 않아도 마땅히 지킬 것을 지키고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다 같은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처럼 아울러 가져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그래서 토지를 계량하여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 그 질서를 바로잡으니 이것이 바로 정이다.
다산이 보기에 차별과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은 결국 정치였다.
p59
충신과 효자의 입장에서는 원망이 바로 자기의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기에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격을 설명할 수 있다.
선비이자 인간으로서 다산의 이중성이 잘 드러난다. 아무리 뜻이 있어도 선비 역시 인간이므로 충성을 받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60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아무리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원망이라도 하는 것이 인간답지 않느냐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산은 명분론에 붙잡힌 허명뿐인 선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선비의 본질에는 의리를 지키되 인정을 잃지 않고, 명분을 내세우되 실리를 버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아량과 포용력이라는 것이다.
p61
도전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도전하는 인생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도전하면 피곤하다. 그렇다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면 삶이 가치 없어진다.
왜 우리는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 가장 그럴듯한 답은 세계와 진정한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서다. 지정한 의미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화적 문맥을 읽어내는 것이다. 자기 것만 읽으면 독선과 독단에 갇히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것을 읽으면 메시지와 통찰을 얻게 된다.
여행이 멋진 이유는 그동안 보지 못한 풍광과 세속을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여행이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문법을 많이 접할수록 삶은 풍부해진다. 책의 꽃은 고전이다. 그리고 고전의 시작은 신화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를 읽는다. 내가 여행한 곳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단 곳은 그리스였다.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찾았지만, 그곳엔 돌기둥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거대한 신전은 사라져도 이야기는 남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스의 위대함은 이야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62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즐거운 상상이었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느끼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의인화시켜 신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의 행적은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몸을 입고 나타난 자연과 우주의 힘’이었던 것이다.
p63
에로스는 화살을 쏜 적이 없고, 에리니에스는 핏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증오하지도 않고, 보복하기 위하여 내 뒤를 쫓지 않는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분노와 증오와 보복은 지금 여기에서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강남역 사거리와 광화문 앞에서 요동치며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죽은 옛것이 아니라 살아서 진행되는 지금의 날것인 것이다.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로서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들려준다.
p63~64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끊임없는 고민과 좌절. 그것은 인간이 무언가에 도전하기 때문에 맛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왜, 무엇에 도전하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 물음에 생각을 주는 책이다. 인간이 왜 도전하고, 성공과 좌절의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다. 대개 신화 속의 도전에는 패턴이 있다. 아주 평범한 인간, 그것도 아주 불운할 가능성이 높은 인간이 주인공이 된다. 그는 어느 순간 모험에 초대받고 고행을 시작한다.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그는 스스로 영웅이 되고 자기가 떠났던 초라한 곳으로 돌아와 그곳을 변화시킨다. 또 다른 도전의 패턴은 뛰어난 인간이 무모하게 신에게 도전했다가 예정된 패배를 맞고 철저하게 파멸하는 것이다.
p66~67
예술가들은 마르시아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엄청난 갈망을 품기 때문이다. 단테도 ‘신곡’에서 “아폴론이여, 내 가슴속에 들어와서 마치 마르시아스를 사지부터 껍질을 벗겨놓은 것처럼 내게도 영감을 주십시오”라고 갈구한다.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과 반인반수의 결말은 비참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신의 권력과 재능을 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만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오만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오만이다. 그 끝은 파멸이다. 모든 성공한 것들의 파멸 속에는 우상화된 오만이 숨어 있다. 이때 오만은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인 악덕이다. 또 하나의 오만은 신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당하더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이다. 이는 껍질이 벗겨지는 극한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창조적 진보를 계속하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인들이 품은 야생의 사유는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대목에서 피리의 절대 고수가 되기까지 몇 번이고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마르시아스의 예술 혼과 만나게 된다.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다 바쳐 그것이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고통을 딛고 창조적인 진보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도전임을 신화는 이야기한다.
p67
영웅들은 처음부터 위대한 영웅이 아니었다. 평범한, 어쩌면 평범하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왕이나 신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편모 슬하에서 자라거나 나라에서 쫓겨나 불운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영웅의 모험에 초대받는다. 그들은 기꺼이 또는 강제적으로 모험에 참여해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가 떠났던 비극적 배경으로 돌아와 대중의 지도자가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영웅은 나보다 큰 것에 나를 바친 사람들이다.
p73
이렇게 영웅들은 불운함에서 위대함으로 도약한 사람들이다. 이 도약의 순간이 중요하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나를 모험으로 초대하면, 내 마음이 그 모험에 응하면 두려워하지 말고 따라나서라. 조지프 캠벨은 그런 얘기를 한다. 내 마음속에 울리는 무엇인가가 생겨나면, 정말 그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마음으로 시작해라. 칼날 같은 길을 따라가라. 그 위험한 길이 네 길이다.
나에게도 내 마음을 울리는. 그래서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넣는 각오로 시작하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p74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사라지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손 끝에 닿는 것은 바람뿐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공허함이야말로 예술가들의 한계를 의미한다.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 그려낸 무언가는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그의 가슴을 울렸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뭔가 잡을 듯했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안타까움, 이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타고난 비극인 수밖에 없다.
p75
삶은 에우리디케처럼 사라질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p77
사랑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늘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진다. 사소한 오해로 위대한 사랑도 깨져버리는 것이다.
p78
피그말리온 효과의 대표적인 인물이 루 잘로메가 아닌가 생각한다. 니체, 릴케, 프로이트 등에게 연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당시 지식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 그런데 루 잘로메는 자기가 만난 모든 남자들로부터 지식과 예술을 배움으로써 자기 인생을 조각했던 여인이다. 우리에게는 삶이라는 재료가 주어졌고 이 재료를 토대로 꿈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p79
이것 역시 ‘왜?’라고 묻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쓰이는지, 아니면 인류의 불행과 파멸에 쓰이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죄였던 것이다. 진정 존경받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고 싶다면 나의 능력과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를 생각하는 사유하는 다이달로스가 되길 바란다.
p81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 바위를 밀어 올리며 느꼈을 절망은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직장인의 절망과 비슷할 것 같다. 시시포스에 대해서는 알베르 카뮈의 해석이 가장 철학적이다. 그의 처방은 이렇다. “반항하라. 쉽게 평화를 갈구하지 마라. 나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 굴복하지 말고 대립하라. 자유로워져라.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 속에서 순수한 불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해라. 이것이 자유의 원리다. 열정을 가져라. 열정이란 주어진 모든 것을 소진하는 것이다.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고 최대한 많이 살아라. 이것이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전장, 도전의 원칙이다.”
p82
삶은 무자비하게 당신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을 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지구에 온 이유니까. 가슴이 모험을 하게 하라. 통째로 삼켜지는 듯한 짜릿함을 느껴라. 사랑이 깊을수록 그 끝은 더욱더 비극적인 수밖에 없으니.
p83
괴테는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한 줄도 내가 체험한 그대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베르테르의 이야기 역시 괴테의 이야기이되, 베르테르는 괴테가 아니다 괴테의 체험이 그의 안에서 순화 되고 편집 되고 재창조 되어 베르테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p86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폭발한다. 이 굉장한 사건이 나와 다른 사람을 섞어버리면서 나와 그 사람의 경계가 없어지고 그의 눈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를 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우리를 영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에 접근해간다.
p87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친근한 사람까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은 당연히 악덕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각자 마음속에 간직할 기쁨마저 빼앗아야 겠습니까? 불쾌한 기분에 젖었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불쾌감을 감추고 홀로 참아내는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오히려 불쾌한 기분이란 자신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속의 불만이 아닙니까? 자기혐오 아닙니까? 그런 자기 불만은 한심한 허영심이 일으키는 질투심과 언제나 결합되어 있죠. 자기가 행복하게 해준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을 견뎌내지 못하지요.
p90
당신들은 어떤 행위의 밑바닥을 모두 파헤쳐보셨습니까? 어때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명확히 밝혀보았던가요? 그랬더라면 그토록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겠지요.
이 글을 읽으며 약간 찔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나 혼자만의 성급한 판단으로 오해를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91
청춘은 쉽게 위로를 원치 않는다 청춘은 격정과 고뇌를 거쳐서 성숙 된다.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시도했다는 의미니까. 원하는 것, 가슴의 언어를 좇다 보면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삶이다.
많은 실패는 시도의 산물…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숙해져간다.
p96
러셀은 이 세상의 모든 조심성 중에서 사랑에 조심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포기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 그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포기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원 받을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정말 중요한 건 사랑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라.
p101
그리고 죽을 만큼 우리의 오늘에 푹 빠져 보라. 아파하기 이전에 죽을 결심으로 오늘이라는 이름의 방아쇠를 나에게 당겨보라. 우리 인생은 길고 언젠가는 그 꿈이 아니면 또 다른 꿈이 이루어져 있을 테니까. 대신 지금은 사랑하기 좋은 지금은 미친 듯이 사랑하고 미친 듯이 이별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사랑에도 때가 있는 법 이니까.
지금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p102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 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p106
노예들이 탈출하듯 헉도 자유를 찾아 탈출을 계획한다. 절박함이 삶을 이끄는 것이다.
p109
자네가 그렇게 심술을 부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최대한 활용한다. 이게 내 좌우명이지.
p115
사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괴리는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헉은 짐은 내 친구야. 내가 도와줘야돼. 맞서 싸워야 해. 지옥이라도 가겠어. 라고 각성하게 된다.
p121
마크 트웨인이 말했듯이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학교가 아닌 미시시피강가에서 세상을 배운 헉은 기성세대에 안주하는 대신 물음을 끊임없이 캐묻고 자신의 답을 찾아 간다 자신의 길을 가려는 그 열정과 도전정신, 이것이 삶을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p124
어느 날 조르바는 살구나무 묘묙을 심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가 왜 묘묙을 심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그러자 조르바가 말했다. 나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삽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에 충실한 삶…조르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렇기에 조르바는 더욱더 열정적일 수 있었고 또 온 마음을 다해 춤을 출 수 있었구나…
p126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라 정신적 이고 영적인 자유다. 요리사, 도공, 광부, 잡화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조르바는 이미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크레타의 독립군으로 터키와의 전투에 가담했던 조르바에게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왜 씨앗은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뜨거운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하는지. 왜 진창에서 피투성이로 굴러보지 못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는지. 그래서 조르바는 60에도 여전히 혼자 떠돌아 다닌다. 삶 속에서 괴로워하며 더듬더듬 자기 길을 찾아가기 위해. 그렇게 구원을 찾기 위해
인생은 괴로움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 인생에서 자기 길을 찾아나가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p127
나는 자기가 읽었던 책에 갇히고 자기가 쓰는 언어에 매여서 누군가에게 배운 삶을 살고 있다.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삶이고 나는 조르바에게서 그것을 본다 삶의 진창 속에서 뒹굴고 있는 조르바. 가식, 허위, 억압 등에서 벗어나 진짜 삶을 살고 싶다는 절실한 갈망이 있었던 나는 여기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조르바처럼 진짜 삶을 살고 싶어 진다.
p129
특별한 안무 없이 자기 멋대로 뛰고 구르는 춤. 지금 조르바는 갈탄 사업을 성공 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내게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우리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고 춤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조르바가 나에게 기운을 주는 듯 해서 나까지 마음이 가벼워졌던 문장이다. 스트레스 보다는 인생을 즐기자!!
p130
조르바에게 춤은 유희나 놀이 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저 가장 진실한 자기 표현의 수단 일 뿐이다. 그래서 슬퍼도 춤을 추고 기뻐도 춤을 춘다.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슬픈 순간의 춤은 일종의 살풀이인 것이다.
p130
조르바는 산투르를 연주할 때는 산투르가 되고 광산에서 일할 때는 곡괭이가 되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다. 갈탄 광에 있으면 갈탄이 되고, 갱도에 있으면 갱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은 절대 듣지 못하는 위기를 듣는 사람, 그가 바로 조르바다. 그래서 그는 광산이 무너지는 순간 누구보다 먼저 위험을 감지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p132
번데기에서 나와 태양아래서 천천히 날개를 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내 입김 때문에 나비가 때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선 것이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에 내 손바닥 위에서 죽었다. 나비의 연약한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없었다. 오늘의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하지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바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 나타나 날개를 움직이며 내 갈 길을 일러준다면 좋을 텐데.
삶의 리듬에 내 몸을 맡기고 주어진 순리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P133
두 사람은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삶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p135
자신은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란 생각하는데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 라고 묻는다. 사실 조르바는 남자든 여자든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정말 시시콜콜 궁금한 것이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둘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왜죠? 왜 그러죠? 라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왜, 어째서라고 묻는 조르바. 그는 책에 적힌 지식이 딱딱한 죽은 지식이라고 말하고 나는 바로 그 조르바에게서 살아 있는 지식과 지혜를 배운다.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조르바다. 그러니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것 들을 체득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벌거벗은 원시의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나만의 시선, 나만의 생각이 중요하다. 그리고 책에서 읽은 간접 지식보다는 내가 겪어보고 아는 직접적인 지식이 결국 나의 자산이 될 것이다. 끝없는 호기심 또한 삶을 생기있게 사는 묘미이기도 하겠지
p136
사랑의 핵심에는 서로가 better person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왠지 이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내 맘속에 사랑이 가득 차고 인류의 사랑이 가득 차고 기쁨이 가득 차는 것. 근데 오르탕스 부인에게 삶을 제공한 사람이 조르바이니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p137
조르바는 자신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말 뿐이다라고 일갈한다. 이 말을 하는 동안 네 심장이 뛰고 있느냐, 네 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느냐? 네 몸이 네 말에 반응하고 공조 하느냐? 말로 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해라. 몸으로 하면 모든 것이 따른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실 리더십은 모범이다. 모범이 곧 리더십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거룩한 십자가나 낡은 기둥에서 떼어낸 나무조각이나 다를 것이 없다.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슴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p138
인류는 언젠가부터 이 거대한 우주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위대한 질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었다. 사실 조르바는 주어진 삶에서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질문한다. 이 질문이 바로 그럴듯한 답을 이끌어내는 위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답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질문에 익숙한 사회, 질문이 더 위대한 사회로 옮겨갔으면 한다.
흔히들 좋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나만의 질문을 통해 나만의 답을 이끌어내는 사고가 필요하다.
p141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이렇게 구분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요새는 이 사람은 좋은 놈이냐, 나쁜 놈이냐. 이렇게 구분하지요. 아직 해탈이라는 것은 멀리 있지만 좀 더 인간으로서 성숙해진 것이다.
p146
나는 이제 자유로워, 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조르바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 당신을 묶어놓은 줄이 다른 사람의 줄보다 좀 길 뿐이야. 라고 말한다. 그러자 나는 이 끈을 언젠가 끊을 거야. 라고 말하고 조르바는 어려울 걸. 바보가 돼야 돼. 바보가 되지 않고는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 라고 한다.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삶에 진창에서 뒹굴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뒹굴고 잃어야 깨끗하게 비워져 자유로울 수 있다.
p148~149
어떤 삶에 던져지든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르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뭔가를 깨달아 가며 생의 도약을 하던 사람. 나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 생각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생각한다. 아마도 뇌와 심장이 누구보다 더 가까운 사람. 마초 중에 마초고 고집도 세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사람. 마냥 불사신 같은 조르바가 죽었다. 생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 본 조르바는 죽음의 순간 아직 자기가 해보지 못한 것이 많다고 아쉬워한다. 그럼에도 그에게 죽음은 환희였을 것이다.
조르바가 남긴 산투르는 왠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선물 같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살아봤자 결국 모든 것은 밥을 위한 싸움이다. 과연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가?
나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치열하고 바쁜 듯 살지만 정말 행복한 순간은 거의 없는 나의 일상. 나는 무엇을 위하여 치열하게 일하고 고생스럽게 싸우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가?
p150
그로인해 나는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p151
인간들은 공격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등하게 인간이 그런 공격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인간의 진화는 육체적인 것에서 문화, 도덕, 정신적인 것으로 진행되어왔다.
p157
형, 나는 지금 기운을 잃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 살던 그것 역시 삶이고 삶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떤 재난이 몰아닥친다 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바로 거기에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스토옙스키는 어둡고 음산한 가운데도 기대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디에 있던지 삶은 우리 안에 있는 것.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삶이라는 부분이 다시 한 번 뼈져리게 와 닿는다.
p164
집주인은 자기 집에서 시체가 나갈까 봐 당장 병원으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아내는 남편이 죽어 가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가난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인간성의 경계로까지 몰아붙인다.
p180
결국 잔인한 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법을 대신할 기준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죄와벌을 통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나는 정의가 지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의미다. 그동안 정의는 법을 통해 집행되어왔지만 사실 법은 부자와 권력자에게는 늘 유리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하층민들에게는 늘 불리하게 작동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현실을 묵인해왔던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정의가 집행되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p184
제가 한참 괴로워할 때 친구들은 세상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더 없는 위안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p197
데카메론 속의 여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100% 충족시키려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보카치오는 사람들 옭아맨 윤리나 도덕의 사슬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함께 일종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p199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직 관계 만을 원할 뿐, 관계를 통해 다른 것을 원치 않을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집착으로 이어진다. 사랑이 집착으로 흐르지 않게 막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되 집착하지 않는 것. 이 어려운 삶의 존재 방식이 인간 삶의 과제가 아닐까? 주어진 본성 속에서 개인에게 남겨져 있는 그 선택에 따라 우리는 성자도 악한도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 그 스펙트럼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것 같다.
p203
보티첼리는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검은 말을 탄 기사가 여인을 죽이는 장면, 여인의 등을 갈라 심장을 꺼내는 장면, 다시 그 여인이 살아나는 장면, 결혼식을 하는 장면 등 네 점의 그림을 그린다. 이 잔혹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우리는 누군가의 진심을 무시하고 격멸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게 된다.
p205
농담이 성공할 때 친교는 두터워진다.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웃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소중한 일이다. 우리가 같이 웃는 그 순간 우리 깊은 인간적 갈망이 충족 된다. 같이 느끼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 것이 바로 농담인 것이다. 여기서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사람들을 웃겼던 농담들을 통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가 될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농담은 관계의 촉매제가 되는 것 같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나이길. 간절히 바래본다. 웃기만 해도 부족한 시간..서로에게 웃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내가 되자
p213~214
데카메론 한마디로 인곡이다. 그 속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낯뜨거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선악 판단을 초월한 이야기를 말이다. 이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복제되고 모방된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또한 데카메론에는 낙천성이 살아 숨쉰다. 보카치오는 페스트로 피렌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우리 인간이 뿌리내린 현실이라 생각하고 절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세상이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바로 보카치오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 것이다.
다시 한 번 환경 탓을 하는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p215
재능이란 사랑만큼 신비한 것이다. 그것은 돌연 그것이 아닌 것들을 버리게 하고 아무 보상 없이도 온몸을 바치게 한다. 또한 욕망처럼 커다란 자기 격려는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우리는 유일한 자기가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다짐이 없이도 우리를 늦게까지 깨어 있게 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다른 일을 포기 하게 만든다. 그것은 떠나있으면 그리워지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p224
에로스는 아버지가 풍요의 신인 포로스이고 어머니가 가난의 신인 페니아이기 때문에 풍요와 결핍을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욕망은 충족 보다 늘 한걸음 앞서 간다고 말했다. 욕망이 충족 되는 순간에 결핍이 일어나고 그 결핍이 다시 욕망으로 바뀌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학의 저주다.
p226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일반적으로 좋은 것과 행복에 대한 욕구가 모두 강력하고 교활한 사랑이지요. 하지만 축제든 운동경기든 철학이든 다른 길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반면 여러 가지 사랑 가운데 한가지 것을 추구하고 여기 전념하는 사람만이 사랑이란 이름을 독차지 해서 사랑하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지요.
p227
철학은 사유다. 그리고 사유의 목적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생각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게 불이익이 생기고 내가 위험해져도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용기 만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다. 철학은 사유를 통해 신념화 하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이었다.
철학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신념을 가진 체계적인 생각을 일상생활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인 삶이다.
p230
중요한 것은 사랑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디오티마는 단순히 자식만이 아니라 지식도 낳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정신적 임신, 이것이 바로 지혜와 절제와 정의다. 지식에 대한 열정도 근본은 에로스에서 비롯된다.
p231
가장 중요한 사랑의 원형은 사랑 그 자체다. 사랑에 대한 이데아를 가져야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성장시켜 의미 있는 사랑을 나눌 수 있다.
p233
우리는 향연을 읽으면서 극과 극인 육체와 영혼, 지혜와 지식 그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어디를 향해야 할지, 그 지향점을 찾게 된다. 이는 고전의 아주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사랑이 어떻게 냉정할 수 있느냐고, 쿨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랑 그 자체와 통할 만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도 있다. 우리 사랑이 새로워질 때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자라고 그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처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면 우리 사랑도 무한대로 커질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멈추면 안 된다.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멈추면 안 된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경지에 어떻게 하면 이를 수 있는 것일까 .
P238
위험한 일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불행한 일을 만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오디세이아에 흐르는 기조가 바로 이것이다. 10년간 방랑하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축약판 이다.
p239
당시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은 전쟁이었다. 일리아스 와 오디세이아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통해 우리와 닮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즉 인간의 고뇌와 도전, 좌절과 꿈을 통해 인간 통찰의 정수를 담아 냈다. 그것이 바로 이 두 작품의 매력이자 경쟁력이다.
p242
앞서 말했듯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인생을 상징한다. 그래서 목적지는 아내 페넬로페이아가 기다리는 이타카지만 사실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 인생이듯 그의 항해에도 결국 궁극의 목적지는 없다. 어디엔가 안주하고 주저앉는다면 삶은 한없이 보잘것없어지니 말이다. 바다로 나가 풍랑 속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체험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p243 콘스타틴 카바피의 시 ‘이타카’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 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 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 하지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하지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는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p252
최고의 모험은 저승으로의 모험이고 최고의 시련은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 근처에 가봐야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아니, 삶과 죽음은 그렇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는 파도와 풍랑을 헤치는 모험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뇌까지 파고드는 내적 모험까지 담고 있다.
p255
스스로 자초하지 않은 것이라도 신이 내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피하지 않겠다. 자신이 예기한 것이든 예기치 않은 것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리라.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 삶의 태도였다. 그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발가벗겨져도 자기 운명에 최선을 다해 맞서며 지혜로운 해답을 만들어낸다.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역시 영웅답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이라고 외치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도록 노력하자.
p260
결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만남이다. 자기로 인해 맺어진 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관계란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시련 말이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남녀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p265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지닌 중요한 부정적 감정으로 복수를 다룬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그 시대 전사들에게는 게임의 룰이었다. 플라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을 위한 교과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전사의 갑옷을 벗고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와 나그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나그네의 초라한 복장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p267
하지만 바다는 두려운 곳, 미지의 세상이었다. 오디세우스에 등장하는 수 많은 괴물은 결국 그런 두려움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두려움들을 모두 정복 함으로써 바다에 대한 안내도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이아를 읽고 용기를 내어 바다로 나갔다. 오디세이아는 한때 그리스인들은 민족 시였고 지금은 인류의 고전이 되었다.
오디세이아는 모험과 바다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정리가 된다. 오디세우스의 삶에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배운다. 삶은 각본이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모험이다. 바닥에 처박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런 추락은 미래에 벌어질 아주 좋은 일의 전조일 수도 있다.
p269
사람의 눈에는 검은 부분과 흰부분이 있는데 검은 부분보다 흰 부분이 더 많다. 그러나 사람은 희고 밝은 부분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검고 어두운 부분을 통해서 본다. 결국 유대인이 이렇게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낸 이유는 남다른 고통과 시련, 그 속에서 생겨난 지혜 덕분이다.
p271
율법은 삶을 제한하는 명령이나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목소리이자 실천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유대인에게는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인간의 지적 활동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인문서다. 또한 탈무드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실제적 삶에서 거론되어 온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역경을 극복하는 지혜를 담은 실용적인 인문서다. .
그렇다면 탈무드의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수천 년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본성과 고뇌의 대한 물음, 문제의 근원과 해결 방법에 대한 물음, 등을 논쟁 하면서 얻은 지혜의 책이란 뜻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계속 질문하라 고 말한다. 질문이 답보다 위대하다는 의미다.
탈무드는 진자의 추처럼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라고 말한다. 바로 중용이 탈무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p273
그런데 돈은 스스로 벌어 봐야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 현자에게 돈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예쁜 옷을 입혀 주는 용도 밖에 없다. 돈은 선도 악도 만능도 아니다. 선악 판단은 돈의 주인인 인간의 몫이다. 유대인 역시 중용, 즉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돈을 버는 것은 싶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은화는 둥글어서 이쪽으로 굴러올 듯 하다가 저쪽으로 굴러가 버린다. 우리는 매일 돈을 좇지만 인생에는 그것 말고도 추구해야 할 것이 많다.
돈은 단지 도구 일뿐이다. 인간에게 돈은 수단 일뿐 목적이 아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돈에 지배 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 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다.
p275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해 돈에 대해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돈에 방해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배우라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에 방해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고 싶은 곳, 입고 싶은 옷,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만 있다면 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
p276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선물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선물을 준다 예를 들어 수십억 원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라도 대부분 불행해진다 심지어 복권에 당첨 되기 전보다 더 불행해진다 돈을 가질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돈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돈은 불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돈을 좇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돈을 모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돈을 벌 준비가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사람이 되자. 돈에 걸 맞는 돈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
p278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친위대의 중령으로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루고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가 저지른 대학살을 떠올리며 그가 악마처럼 생겼으리라 상상한다. 하지만 그녀가 만난 아이히만은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생겼다. 그런데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죽일 의사도 없었고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든지 악의 평범성이 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악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에 무능력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 죄를 용서하라,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을 실천하려면 생각의 힘이 따라야 한다. 사유하는 사람은 우선 잘못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고 만약 잘못하더라도 뉘우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자들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그토록 극악한 일을 저질러놓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니 인간의 도리도 모르는 자인 것 같다. 나 또한 사유하는 법을 언제부터인가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 같다. 계속 사유하자. 그리고 깨어 있자.
p280
아이에게는 아이의 운명이 있다. 너 자신이 되라고 얘기 해라. 탈무드는 또 말한다. 아이가 이야기나 예화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게 해라. 그래서 탈무드 속에는 지혜로운 예화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보다.
탈무드는 게속 말한다.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그대신 좋은 질문을 해라.
또한 탈무드는 친구를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누구와 함께 인생을 살지를 선택하라. 그리고 남을 초월하기 전에 자신부터 초월하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경쟁 상대는 어제의 자신이다. 배려를 통하여 삶을 가르치라.
앞으로 아가가 태어난다면 나는 유태인의 교육 방식을 실천해보고 싶다. 항상 너 자신이 되렴. 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그리고 오늘 무슨 질문을 했니? 라고 물어볼 수 있는 현명한 엄마가 될 수 있기를..그리고 나 또한 본을 보이기 위해 내 자신의 삶을 잘살고 있는지 늘 물어보며 한걸음씩 걸어갈 것이다.
p282
우리에게 나쁜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정신적 근육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하다. 정신적 근육을 키워 주는 가장 훌륭한 운동기구가 바로 유머다. 눈물을 웃음으로 닦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p286
운이 좋아지는데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이유 없이 즐겁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꼭 이루고 만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셋이야말로 행운을 불러 들이는 열쇠다. 늘 즐거워하고 무엇인가로 바쁘고 목표를 향해서 애를 쓰면 당연히 운이 따르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마라. 그러면 언젠가 그 사람으로부터 예기치 않는 도움을 받을 때 ‘오, 내가 운이 좋네’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주고 잊어라.
운은 당신이 뿌린 씨앗이다.
그저 저 사람은 운이 왜 이렇게 좋을까? 하며 운이 좋은 사람은 하늘이 내린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운이 좋아지기 위함에도 반드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운이 좋아지기 위해 내가 먼저 씨를 뿌린다고 생각하며 좀 더 양보하고 좀 더 배려하고 사랑해야겠다.
p289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다른 짐승과 비교해보니 신통치 않다. 발톱도 많지 않고 이빨도 크지 않고 네 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냐고 따지자 하나님이 날개를 턱 달아준다. 용도는 말해주지 않은 채. 새는 날개로 이것저것 시도해 보지만 무엇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는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서 왜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까 짐만 될 뿐 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어요 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했다. 내가 그걸 왜 짐처럼 달아 주었겠느냐? 너 스스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우리는 모두 저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 날개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저 짐이라고 생각했던 날개를 펼치는 날,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 것.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나에게도 아마 반드시 나만이 쓸 수 있는 도구가 있을 것이다. 나를 잘 알고 내가 가장 쓰임새 있도록 만드는 것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다.
p294
미성숙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는 그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프롬은 우리가 사랑을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류는 우리가 사랑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 받는 법을 먼저 배우려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자신이 사랑을 오래 못하게 되면 환경을 탓한다는 것이다.
p295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다른 사람과 융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융합은 무조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더욱더 자기의 개성을 유지한 채로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좋은 점을 닮아가며, 그렇다고 각자의 개성을 희생시키지는 않으며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p296
흔히 표현하듯이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간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삶은 결국 성장이고 우리는 성장을 통해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간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도 능력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오늘 더 , 내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301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즉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끝으로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맹목적 기대일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지식이 중요하다. 이런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대하여 상대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p308
살아가며 평생 연마해야 한다. 훈련의 요건으로 우선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 내가 오직 이 일을 위해 존재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잠깐 푹 빠졌다가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다. 집중하는 매 순간을 계속해서 인내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랑의 기술 도 마찬가지다. 집중하고 인내하고 관심을 쏟아라. 그러면 사랑할 힘을 키워갈 수 있다.
p309
그렇게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너와 나 두 사람만 사랑하는 2인용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둘만 사랑하고 나머지 사람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든 사랑의 종류는 다르겠지만 형제는 형제애로, 동료는 동료애로, 인류는 일류애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한다.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보편성이 자기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애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고 좀 더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프롬은 말한다.
좀 더 나를 사랑할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은 진리인 것 같다. 비록 부족하고 조금 모자란 나이지만 더욱더 믿어주고 또 사랑해주자.
p310~311
자기가 흔들리고 있으면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믿고 사랑하기 어렵다. 신앙은 결국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고 지키려면 자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약속을 지키면 자기에 대한 신뢰는 점점 상승하게 된다.
자기를 꽉 잡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관찰하는 것 말이다. 에리히 프롬도 우리에게 각자의 정신적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해야 된다고 말한다. 우울해지면 그 우울이 어디서 비롯 되는지 물어보고 분노가 생기면 분노하는 정신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라고 말한다. 분노가 타당한 것인지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과거에 어떤 상황이 증폭된 것인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 봄으로써,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고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성인이 될 것이다.
결국은 나와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며,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을 통해 내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329
지나고 나면 인생은 꿈 같은 것이다. 삶에는 정해진 아무런 목표도 없다. 삶의 유일한 목표가 있다면 삶 자체다. 여행의 목적이 목적지에 닿는 것이 아니라 여행 자체인 것과 같다. 하지만 인생이 현실만으로 만들어 졌다고 여기지 말자. 현실에 갇히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 가는 것이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살면서 얻은 것, 현실과 꿈, 사실과 허구, 지금과 미래가 실처럼 얽힌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점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힘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때가 우리 안에서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가 된다. 시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예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신의 길을 따라 걷다가 혹시 새똥이 옷깃에 떨어 지더라도 너무 화를 내지도 말고 그걸 닦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길. 현재 처한 상황을 웃음으로 바라보면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될 테니까.
p350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의 눈이 아니라 현재의 눈으로 보아야 역사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담긴 수 많은 이야기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p355
토크빌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두려운 점으로 다수의 횡포를 꼽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가 자유롭기 때문에 무질서로 흐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해악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는 노예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물처럼 촘촘한 규칙들 속에서 사람들이 창조력을 잃어가며 소시민화 된다는 것이다.
p362
아무리 시시한 견해라도 다수의 의견이고 다수가 동의한 의견이라면 거기 따라야 한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규칙이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내면 정신적인 박해를 받게 된다. 다수는 소수를 억압해도 되고, 소수의 의견은 가치 없는 것인가? 민주 사회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질문이다.
p367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홀로 지낸다는 생각을 습관화하고 있으며 그들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조상을 잊게 하고 후손에 무관심하게 하며 동시대인에게서 고립되게 한다.
p377
민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 없이는 운영될 수 없다. 그래서 장점만큼 위험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민주주의 시대가 안고 있는 해악 중 대표적인 것은 물신주의와 세속주의다. 새로운 정치 체제 였던 민주주의 하에서 기존의 종교, 철학, 문학 등 풍요로운 지적 자산은 힘을 잃고 미국인들은 돈과 성공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세습적인 신분이 돈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신분으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p378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겨우 한 페이지를 읽을 뿐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우주의 일부임을 느꼈다.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됨을 느꼈다. 방랑이야 말로 삶의 본질이며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꼈다. 편견과 편협과 고집스러움이 여행을 통해 치유되었다.
여행을 가면 나 또한 영혼이 조금 더 자유로워 짐을 느낀다. 내 본연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리라.. 내 삶도 한 권의 여행책과 같다고 생각하며 좀 더 나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삶의 여행을 지속해야겠다.
p403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 해라. 이런 가르침을 유언으로 남기고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었다.
p404
마르코 폴로는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해 어떤 편견도 없이 항상 열린 시각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그의 관점은 지배자의 관점도 아니었고 침략자의 관점도 아니었다.
마크 트웨인이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 말했듯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지나쳐 갔더라면 더 멋졌을 것이다.
p418
비극은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모르 파티, 바로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위대한 장정이 바로 인간의 길이라고 그리스인은 생각했다.
p420
쓰라린 고통으로 다져진 오이디푸스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나라는 전쟁의 승리와 대지의 번영을 약속 받으리라는 신탁이었다. 이제 그의 더럽혀진 육체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 신성한 성물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존재 자체가 잘못이었던 오이디푸스는 고통을 통해 끝내 신들에게서 구원 받았고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었다.
p422
자기 경영은 자신의 미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격앙되어 싸울 때는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적의와 증오를 갈무리하여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짐과 결별하고 피와 화해하는 신성한 의식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 단명함으로 인하여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인생이니 내 품에 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P436
너무도 늦게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은 후회, 앞서 찾아오는 깨달음은 통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후회와 회한 속에서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통찰도 얻지 않을까? 고전들을 뒤져보면 무수한 슬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만이 언젠가 구원을 받게 된다.
원래 모든 일이 다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나에게 왜 그러한 통찰력이 없었지? 라는 후회가 밀려오기 마련인 것 같다. 이러한 생각보다는 후회 속에서 교훈을 얻어 그것을 내 삶의 통찰화 한다는 역발상을 하며 후회하게 될 순간조차 두려워하지 말고 삶 속으로 열정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내 모습을 기대해본다.
p437
그런 파국으로 가기 전에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다르다는 것이 열등하거나 악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배려다. 배려를 통해 다름을 껴안는다면 나의 지평이 넓어지고 나는 하나의 완결된 인간을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다.
p440
너는 현명 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너무 진지할 것 없다. 지나친 진지함은 너를 괴롭힐 것이다. 삶은 즐거운 활동이다. 그 가치가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기쁨으로 해야 한다. 황홀 하지 않은데 몰입할 수 있겠느냐?
황홀한 몰입! 그래 이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가진 많은 고민들을 다 잘 해결해보고 싶어 이리저리 고민을 하던 나는 왜 이렇게 삶은 어려울까 하며 진지하게 삶의 무게만 고찰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과 그 순간을 즐기는 기쁨의 마음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었음을 왜 몰랐을까? 지금 이순간이 어렵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대신 황홀한 몰입을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어려움 조차도 나에게는 황홀이다..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을 꽉 채우자.
3.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라는 첫 번째 파트와 ‘거침없이 모험을 선동하라’ 라는 두 번째 파트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 Part 아래 젊음, 배움, 도전, 고뇌, 성장, 자유, 정의, 욕망, 이데아(Part 1), 인생, 지혜, 사랑, 전통, 선택, 여행, 운명, 화해와 공존(Part2)의 17개의 챕터로 구성이 되어 있다. 17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각 책의 중심이 되는 화두를 주제로 구성하고 있어 책의 내용을 한 눈에 담을 수가 있으며 내가 관심 있는 분야들을 먼저 골라 읽어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고전 한 권씩을 소개하면서 원문 중 가장 마음을 울리는 장절을 인용하며 저자의 해석을 곁들여 놓았고 이를 통해 주옥 같은 고전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원문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내용들을 저자의 해석을 통해서 쉽고 재미있게, 또 마음을 울리며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저자의 가이드를 받으며 각 챕터별 말미에는 결국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부분도 값지게 다가온다.
또한 이 책의 구성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챕터를 시작하며 챕터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인용문을 배열해 놓은 것이다. 더불어 각각의 문단 마다 주제를 요약하여 소제목으로 보여주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중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공감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제목 또한 핵심 중의 핵심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 그것만 읽어봐도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배운 듯한 느낌이 들었고 따로 정리해 두고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을 붙잡는 장절
흔히 고전=어렵다 라는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다. 나 또한 학창시절 나름대로는 친구들보다 책을 많이 읽는 문학소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책은 읽어도 읽어도 어렵게 느껴지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나 또한 다시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애정이 샘솟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고, 어렵게 느껴지는 고전들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고전 자체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기에 고전을 통해 배우고 싶고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또한 고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 결국은 삶을 살아가며 희망을 잃지 않고 비극이 닥치더라도 내가 온전히 부딪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심기일전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책의 많은 내용들이 주옥 같은 삶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동과 정,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이치를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운수를 헤아린다.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살면서 더욱 많이 느끼게 된다. 괴로운 일도 보는 관점을 달리해 항상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늘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의 어려움도 다 즐거운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즐길 수 있기를...
그는 젊은 카푸스에게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의문 자체를 즐기라고 충고한다. 지금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를 답에 집착하는 대신 계속 의문을 품고 있으면 먼 어느 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 안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질문을 품고 살다 보면 경험을 통해 자기의 해답을 갖게 되리라는 이 말은 성급하게 정답을 찾아 빠르게 인생을 질주하고 싶어하는 젊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고다.
언제쯤 나는 나의 길을 알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어렷을 적부터 재능을 잘도 발견하는데 왜 아직 나는 방황하고 있을까…이렇게 나는 그간 조급했고 또 조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을 품고 계속 현실에 충실한다면 릴케의 말처럼 어느 순간 꼭 이에 대한 답변을 받게 될 수 있겠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마크 트웨인이 말했듯이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학교가 아닌 미시시피강가에서 세상을 배운 헉은 기성세대에 안주하는 대신 물음을 끊임없이 캐묻고 자신의 답을 찾아 간다 자신의 길을 가려는 그 열정과 도전정신, 이것이 삶을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자신의 답을 찾아 가는 헉의 열정과 도전 정신. 나 또한 나만의 답을 찾아 가고 싶다. 그래서 먼 훗날. 내 삶을 이렇게 살아 냈노라 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이 여정에 도육도 충실하자.
조르바는 정말 시시콜콜 궁금한 것이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둘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왜죠? 왜 그러죠? 라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왜, 어째서라고 묻는 조르바. 그는 책에 적힌 지식이 딱딱한 죽은 지식이라고 말하고 나는 바로 그 조르바에게서 살아 있는 지식과 지혜를 배운다.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조르바다. 그러니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것 들을 체득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벌거벗은 원시의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정말 꼭 한 번 읽고싶어진 책이다. 조르바에 대해서 나 또한 닮고 싶고 또 그래서 더욱 푹 빠지게 되었다. 조르바 처럼 나만의 시선, 나만의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검색한 지식,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이 아니라 내가 삽질을 해서라도 나만의 느낌을 갖는 연습을 지금부터라도 시도하려고 한다. 내가 발로 뛰고 겪어보고 아는 직접적인 지식이 결국 나만의 차별화된 자산이 될 것이다. 늘 호기심을 가지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며 뚜벅뚜벅 걸어가자.
조르바는 자신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말 뿐이다라고 일갈한다. 이 말을 하는 동안 네 심장이 뛰고 있느냐, 네 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느냐? 네 몸이 네 말에 반응하고 공조 하느냐? 말로 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해라. 몸으로 하면 모든 것이 따른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실 리더십은 모범이다. 모범이 곧 리더십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거룩한 십자가나 낡은 기둥에서 떼어낸 나무조각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며 왠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아 뜨끔했다. 가볍게 알고 있으면서 아는 척 한 적은 없었는지, 현학적 허세를 부린 적은 없었는지....하고 잠시나마 반성해보았다. 내 가슴으로 온 마음을 내던져 이해하고 또 행동할 수 있는 내가 되길.... 열과 성을 다해 그래서 후회가 없도록...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 바위를 밀어 올리며 느꼈을 절망은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직장인의 절망과 비슷한 것 같다. 시시포스에 대해서는 알베르 까뮈의 해석이 가장 철학적이다. 그의 처방은 이렇다. "자유로워 져라.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 속에서 순수한 불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 해라” 이것이 자유의 원리다 열정을 가져라 열정이란 주어진 모든 것은 소진하는 것이다.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고 최대한 많이 살아라. 이것이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전장, 도전의 원칙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시시포스에 다름없구나..라는 생각에 머리가 쿵 울리면서 자조적인 웃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내가 이러한 시시포스의 굴레 안에서 나의 자유 의지를 최대화 하여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 하루도 바쁘게 지냈지만 대체 뭐 했는지 모르겠어~ 라는 하루하루가 없도록 필사적으로 삶을 불태우며 최대한 많이 살아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이 순간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붙들어보자.
그래서 새는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서 왜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까 짐만 될 뿐 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어요 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했다. 내가 그걸 왜 짐처럼 달아 주었겠느냐? 너 스스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우리는 모두 저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 날개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저 짐이라고 생각했던 날개를 펼치는 날,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 것.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새의 날개는 새만이 가진 특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인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쓸모가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다니...아마 나에게도 아마 반드시 나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인데 아직 발견을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못 활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새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잘 알고 내가 가장 쓰임새 있도록 만드는 것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다.
너무도 늦게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은 후회, 앞서 찾아오는 깨달음은 통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후회와 회한 속에서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통찰도 얻지 않을까? 고전들을 뒤져보면 무수한 슬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만이 언젠가 구원을 받게 된다.
원래 모든 일이 다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나에게 왜 그러한 통찰력이 없었지? 라는 후회가 밀려오기 마련인 것 같다. 이러한 생각보다는 후회 속에서 교훈을 얻어 그것을 내 삶의 통찰화 한다는 역발상을 하며 후회하게 될 순간조차 두려워하지 말고 삶 속으로 열정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내 모습을 기대해본다.
너는 현명 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너무 진지할 것 없다. 지나친 진지함은 너를 괴롭힐 것이다. 삶은 즐거운 활동이다. 그 가치가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기쁨으로 해야 한다. 황홀 하지 않은데 몰입할 수 있겠느냐?
황홀한 몰입! 그래 이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가진 많은 고민들을 다 잘 해결해보고 싶어 이리저리 고민을 하던 나는 왜 이렇게 삶은 어려울까 하며 진지하게 삶의 무게만 고찰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과 그 순간을 즐기는 기쁨의 마음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었음을 왜 몰랐을까? 지금 이순간이 어렵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대신 황홀한 몰입을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어려움 조차도 나에게는 황홀이다..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을 꽉 채우자.
보완점
고전 초보들을 위해!
이 책에 실려있는 책 중 내가 어린 시절 읽어봤던 고전들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내용을 일깨울 수 있었고 덤으로 어렸을 적 책과 관련한 추억들도 떠올릴 수가 있어 좋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책 안에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 경우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경험까지 할 수가 있었다. 더불어 이 책이 이런 의미도 갖고 있었나! 라며 저자의 도움을 빌어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되는 경이로움도 느꼈다.
물론 개중에는 읽어봤음에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아 마치 새로 책을 읽는 듯한 경험을 하는 책이 있었고 그런 경우 그나마 나중에 이 책은 꼭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저자의 요약과 전해주고자 하는 교훈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읽어 보지 않은 책들에 대한 내용의 경우 저자의 설명 및 요약된 내용만으로는 왠지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온전히 상상되지 않았고 읽고 난 후에도 고전의 감동이 내 가슴 속을 다소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몇몇 책은 ‘꼭 한번 읽어 봐야겠다’ 라는 매력을 느낄 수조차 없어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이에 고전을 많이 접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책에 대해 좀 더 많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책의 저자, 주요 내용, 이 책이 특별한 이유 등을 간단히 설명하는 부분이 더 많이 추가되었으면 한다. 현재도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일부 들어가 있긴 하나 불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책을 2권짜리로 만드는 한이 있어도 한 권의 고전에 대한 지면을 더 많이 할애하고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그 고전 만의 고유적인 매력을 마음껏 뽐내도록 구성되면 좋을 것 같다.
예전에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라는 책을 읽으며 이 책에 나온 곳들을 꼭 가봐야겠다 라는 생각에 책 읽는 내내 두근두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역사가 더욱 쉽게 이해가 되고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국사 공부 또한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은 꼭 내가 다시 읽어보면서 저자와 같이 느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도록 고전을 쉽게 설명하고 또 고전만의 매력을 어필하는 부분을 더욱 강화하면 어떨지!
아마 내 스스로가 고전과 친숙하지 않고, 이런 류의 인문학 책을 매우 간만에 읽어보기에 더더욱 어렵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초보독자들을 위한 배려도 필요할 듯 하다.
고전여행의 한 배를 탄 듯한 느낌으로~
다음으로 아쉬운 한가지는 챕터간의 연계성이다. 17권의 책 각각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탁월하나 개인적으로 파트별 주제에 부합되도록 챕터간의 연계성을 보여주었다면 좀 더 책 한권을 읽으며 인생에 대한 항해를 한 듯한 느낌이 남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책을 읽고나
서 각 주제가 왜 이런 순서로 구성되어 있을까? 혹시 인간에게 중요한 내용 위주인가? 아니면 먼
저 알아야 될 내용 순서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어떠한 패턴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저자라면 예를 들어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라는 주제가 각 챕터 별로 어떻게 관통되고 있는
지를 설명해주는 페이지를 따로 구성하여 독자로 하여금 Part1을 들어가며 어떤 인생에 대한 여
행을 하게 될까! 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던지, 아니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보여주는 내용
들을 중심적으로 배열한다던지 했다면 더욱더 다음 챕터를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었을 듯 하다.
주중에 한 권의 책을 읽고 주말에 북리뷰하시느라 고생많으셨지요? 게다가 칼럼까지... 타이핑 된 글들이 오자 하나 없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주관적인 맥락에 빠지지 않고 덤덤하게 저자 소개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툭툭, 던지지만 결국엔 애정이 배어있어보여서 읽는이도 즐겁습니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께요. 혹시 '내가 저자라면' 부분은 Yes24나 인터넷 교보문고에 계정이 있으시면 북리뷰에 올려주실 수 있을런지요..? 그러면 더 많은 분들과 더 많이 이 책에 대해서 교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