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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1일 09시 59분 등록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가 페르구스 호수 근처에서 제비꽃과 백합을 꺾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지하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납치해간다.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헤매다가 지하의 신이 그 납치범인 것을 알고 하늘에 탄원을 올렸다. 제우스는 딸을 되찾을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그들을 갈라놓기를 그대가 그토록 바란다면 페르세포네는 하늘로 돌아올 것이나, 저승에서 어떤 음식도 입에 댄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렇게 운명의 여신들이 정해놓았음이오.”

 

 데메테르는 지하에서 딸을 끌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운명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니, 소녀가 끝까지 금식하지 못하고 잘 손질된 정원들을 거닐다가 휘어진 가지에서 순진하게도 석류를 하나 따서 노르스름한 껍질을 벗기고는 그 씨 일곱 알을 입에 넣고 씹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하의 여왕으로 남게 되었다.

- P255, 변신이야기, 오비디우스, 숲 출판사

 

 신화의 독법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글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특히 신화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파악해 내면을 탐색하는 지도로 활용하려면, 이야기가 갖는 은유를 잘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남의 집 귀한 딸을 납치해가다니, 하데스는 절차가 없는 신이구나라고 생각하며 혀를 차면 신화는 그냥 아주 흥미로운 막장 옛이야기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삶을 앗아가는지, 한번 손에 들어온 혼백을 뒤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말을 달려 지하로 데려가 버리는지를 상기시켜보면 신화에서도 우리네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여왕이 되는 과정도, 먹음으로써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인간과 닮아있다. 우리는 연구원 과제 순서에 따라, 지난주에 읽었던 신화의 힘을 나침반 삼아 이번주에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가지고 해석 실습을 해본 셈이다.

 

 석류는 나에게도 참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글의 은유적 기법을 처음 제대로 해석해 냈던 것이 석류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철학 선생님과 책을 읽고 하는 논술 토론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미셸 깽이라는 프랑스 작가의 처절한 정원이라는 얇은 책을 읽어와 토론을 했었다. 그 책은 세계 제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프랑스인이었던 아버지를 구해준 한 독일 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책의 맨 앞 페이지에는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 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라는 아뽈리네르의 시집 칼리그람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있었는데, 우리는 작가가 왜 이 싯구를 맨 처음에 넣었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렵고 두껍고 유명한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을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는 문학소녀 지망생이었지만 은유를 해석할만한 단계의 독서를 전혀 하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 독서에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토론 수업은 은유의 안개에 갇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이 책의 핵심,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독일 병사가 프랑스 포로들을 구해주고, 기차역의 엔지니어가 레지스탕스들을 구해주던 모습들에 생각을 집중해보았다. , 어쩌면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장소가 처절하다고 말하는 건 잿더미가 된 유럽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혹은 최소한의 인간성 마저 지킬 수 없는 전시 상황을 말하려 한 건 아닐까. 그 안에 매달린 석류가 가엾고 불쌍하여 마음이 슬프다는 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인간성.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시대의 인간들을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는 석류로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토론으로 구체화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것들로만 이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나는 석류를 처음 먹어본 것이다.

 

 석류의 추억은 강렬했지만 내가 남들 안 읽는 케케묵은 책들을 들춰본다고 해서 동기동창들과 삶이 엄청나게 달라지진 않았다. 책을 읽으면 무엇이 좋은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독서가 체질에 맞지 않으면 억지로 읽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채로운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책들의 가치를 삶에 적용했던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아 약간 뜬구름 잡는다는 자격지심이 사로잡혀 내가 본 것조차 믿지 못하고 오랫동안 흔들렸던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설프게나마 책 속에서 그리워할만한 아름다운 삶을 퍼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구체적인 현실이 내 존재의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열하는 태양에 흐물거리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늘과 시냇물 같은 책들을 만나게 되어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슬픈 것, 괴로운 것 너머의 기쁜 축제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숯불 같은 힘을 찾아낸 것이 내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이제는 나는 누군가 독서의 필요성을 묻는다면 어떤 책으로 시작하면 좋은지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며, 함께 나누고 싶은 짜릿함이다. 

 

 첫 석류를 먹은지 10년 뒤, 나는 지금 페르세포네와 저승의 정원에 서있다. 석류를 발견한 그녀는 그 빨갛게 빛나는 열매를 입에 넣고 씹는다. 신의 딸로서 먹지 않아도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그녀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죽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석류를 통해 이전에 대지의 여신의 딸에서 지하의 왕비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남은 석류를 내게도 내민다. 새콤하고 맑고 투명한 붉은 열매가 유혹하듯이 가깝게 다가온다. 잠시 눈을 감고 여러 가지 감정과 깨달음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보이는 것 너머의 삶, 한 살 한 살 먹은 밥그릇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그 동안 읽었으나 잠자고 있던 상징과 은유들을 건드리는 경험들을 조금씩 조금씩 더 쌓아왔다. 미로 같은 인생을 뒤덮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나는 이 붉은 석류 몇 알로 간신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석류를 받아들고 유난히 크고 붉은 씨를 몇 개 덜어 입에 넣었다. 아, 이것 참 달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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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0:09:08 *.104.9.186
석류는 참 관능적입니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이야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신화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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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0:10:48 *.50.21.20

저도 그래서 이번에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 취향이 닮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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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2:33:27 *.94.164.18

그녀는 석류를 통해 이전에 대지의 여신의 딸에서 지하의 왕비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남은 석류를 내게도 내민다.


자의든 타의든 누구나 이 석류를 맛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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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4:17:02 *.50.21.20

연구원을 통해서도 석류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공될 것 같습니다!

때로는 석류를 입에 막 넣어주기까지 하는데 내가 제때 못먹는 기분이 들때도 많이 있죠..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지겠죠 그래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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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1:21:55 *.23.235.60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상징과 은유에 대한 해석은 굳이 정답을 따질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내 맘에 와 닿는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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