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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4일 12시 19분 등록
MeStory(12) : 내게 영향을 준사람들 _2
 
5. 쌀집오빠
사람에 중독된다면 어떤 사람에 중독될까? 신일숙의 만화<1999년생>에서 사랑은 어떻게 발전되나를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초능력자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을 짜는데, 그것은 사랑에 빠졌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정신이 붕괴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외계인이 설명하는 대로 내 경험에서 사랑의 단계를 밟아 나간 것을 찾아본다면 그건 쌀집오빠가 가장 근접할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서야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실제로 존재하는 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태진 선배는 한 해를 재수를 해서 같은 학번이었다. 교회에서 같이 청년부 예배를 드리고, 청년부 활동을 같이 하고, 때때로 학습을 같이 했다. 
 
그때 마다 본 선배의 모습은 좀 어리숙하다는 것이었다. 훨씬 윗 학번의 선배들이 태진 선배에게 심부름을 자주 시켰고, 그걸 다 열심히 했다. 거기에다가 부지런하기 까지 해서  일을 마구 찾아서 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사람을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 멍게, 똑게로 구분한다면 태진선배는 멍부쪽이어서 선배들이나 동기들, 때때로는 후배들까지 말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제발 일 좀 저지르지 말라고. 회의를 할 때는 회의의 주요 내용을 제때에 캐치를 하지 못해 결정이 다 되고 실천사항까지 논의 한 후에 '~했으면 좋겠다'라는 같은 의견을 내 놓아서 뒷북을 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를 우습게 알고 뭐라고 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대학생이다하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 잘 났소'라고 하는 곳에서 태진 선배의 뒷북은 곱지않게 취급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배는 몸은 어찌나 빨랐던지 별명이 빨치산이었다. 산을 걸어서 넘는 것이 아니라 뛰어서 넘었다. 그러니 소풍 때마다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짐 옮기고 뒤 쳐지는 사람 다시 데리러 산을 내려가서 올라오곤 했다. 등산을 같이하면 같은 산을 3번 정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가 밥을 엄청 먹었는데 그것도 여자 동기들의 핀잔거리였다. 무식해 보인다며 제발 천천히고봉밥으로 쌓아서 몽땅 말아먹지 말고 천천히 곱게 먹으라고.
 
모든 일에 열심이었는데, 그건 체력이 받쳐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거다 싶으면 그걸 그대로 실천하는 면이 있었다. 정도 무지 많았다. 그래서 중고등부 아이들과 가장 오래까지 함께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선배)이 되어 있었다. 무거운 거 가지고 가는 어른들의 짐을 다 들어드렸다. 쌀집 오빠에게 어른과 후배들이란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이었다. 
 
난 좀 머리 좋고 차림새 좋은 사람을 좋아했는데, 태진선배는 그와는 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춥다고 외출할 때 어머니가 내어준 아줌마 도꼬리를 입고 외출하는 사람이었다. 4년 넘게 보다보니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고 다른 점도 보였다. 부지런함과 정 많은 것, 좀 느리게 판단하는 것이 매력이구나 싶었다. 느려도 그가 하는 판단은 우리가 평소에 책으로 보고 입으로 떠들었던 이상에 가까웠고, 또 옳았다. 그의 판단은 그의 실제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1997년도에 막 취직을 하고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집에 다른 일도 많았지만, 졸업했으니 취직해야지 하는 그 걱정 하나는 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성인남자들이 다 괜찮아보였다. 그중에서 태진 선배는 내게 4년 내내 변함없이 친절했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느껴져서 점점 더 좋아졌다. 태진 선배가 내게만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또 그 사람의 진짜 좋은 점이다. 정 많고 주변 사람을 아낀다는 것. 좀 무식하고, 판단은 좀 느리고, 외모는 별로라는 점이 초반에 보였던 점이고, 오래 알다보니 주변 사람들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사람들에게 모두 정있게 대하고 부지런하다는 것이 눈에 더 들어왔다. 
 
한번은 회사일로 너무 힘이 들어서 같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상황이었다. 몸이 약해졌고 야근을 한 뒤라 소화력이 너무 딸려서 밥 한그릇을 제대로 못 먹었다. 그런 내가 그 밥을 다 먹으면 체한다고 그만 먹겠다고 했다가 소화제 사줄테니 다 먹으라고 해서 속으로 '이 무식한 양반아!!!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모두 밥을 많이 먹는 것은 아니야!' 했던 적이 있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은 계속 마르고, 짜증은 계속 났었다. 상사는 계속 자신에게 굽히지 않은 직원들 길들이기를 하고 있을 때여서 나는 당시에 짜증이 넘쳐났다.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하면 상사 흉보기가 저절로 나왔다. 어느 날은 태진 선배 앞에서 상사 이야기를 꺼냈다가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 내가 마구 상사 흉을 볼 때였다. 선배가 말을 끊고 '너 좀 혼나야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순간 머리가 띵했고 '아,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알았다. 그리고는 뭐라고 야단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멍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던 건지 하여간 그때 무슨 말을 들었는데, 주변에 소리가 모두 멈춘듯이, 아니 내 기능이 잠시동안 모두 멈춘듯이 기억이 전혀 없다. 야단맞는다는 말에 이미 혼구녁이 나서 혼이 달아났었나 보다.
 
그 후로 광주로 근무지가 바뀌고, 다른 사람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태진 선배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잘 안보고 지냈고,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아서 그저 그냥 멀리 있는 사람이었었는데, 그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 사이에 삼각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은 좀 좋아하고, 또 하나는 엄청 재수없고 좀 미워도 그게 나중에는 어찌될지 모르니까, 그것들이 풀어질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냥 살아만 있어 달라'고 전화를 했다. 
 
그 후로 어둠이 무서워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한동안 또 장편소설에 빠져 지냈다. 영웅문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쌀집오빠를 닮았다. 요령없고 무식한 사람. 밤에 잠도 안오고, 불 끄면 무섭고 해서 영웅문을 계속 읽었다. 소설도 다 끝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근무지는 또 바뀌어서 대전에서 동호회동기에게 고백 비슷한 것을 받고는 가슴이 싸하게 춥고 허탈해서 쌀집오빠를 생각했다. 사람들 오해 사게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얼른 고백해야지 했었다. 그런데 그날밤은 너무 늦었고 다음날로 전화를 미루었다. 한가한 시간에 휴대폰을 들고 건물 밖에 나서서야 알아차렸다. 쌀집 오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좀 잊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정들면 무섭다. 특히나 미운정이 고운정이 되면 끔찍하다. 싫어하고 거부하던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면 그때부터는 대책이 없어진다. 다른 많은 것들이 거기에 말려들고, 흔들리게 된다. 거부하던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많은 것들이 재편된다.   
 
신일숙의 만화 <1999년생>에서는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짝으로 엄청 매력적인 남성이 나온다. 능력이 뛰어나고 처음엔 좀 차갑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그와 같이 일을 하고,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고 하는 마음이 커져한다. 그리고 그에게 고백을 받는다. 그 고백을 받아들이는데 그 시점이 바로 여자에게는 시험의 순간이다. 여자 주인공이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그 남자가 다가온다. 여자는 아버지의 외도로 오래도록 외로운 어머니를 봐왔기에 바람피는 남자를 혐오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상대가 그런 남자라는 것을 알게된다.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가장 싫어하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싫어하는 것조차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 사랑은 더 커진다. 신일숙의 만화가 여기까지 였다면 그냥 사랑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있다. 이 모든 연애사건은 외계인 과학자가 주인공 여자의 멘탈 붕괴를 위해 계획한 것이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남자는 외계인에게 잡혀서 외계인의 프로그램이 내장되었고, 외계인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여자는 외계인 과학자의 손에 놀아난 것이고, 여자는 그 사실을 알게된 충격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외계인이 사랑에 빠지는 단계를 설명할 때, 상대에게 좋아하는 것으로 접근하여, 혐오하는 것으로 시험하여, 그 혐오하는 것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 완전히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 쌀집오빠가 이 사례에 근접한다. 뭔가에 빠져든다, 중독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벽이 깨지것인 듯 하다. 중독이 되면 더이상 이성적 판단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 그것을 막아주는 벽들은 이미 깨져버렸다. 새로운 것이 작동하고 있다. 다른 것으로 대치되기 전에는 그것은 제어가 불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첫인상이 싫은 사람을 조심한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자주 만날 것 같고, 어쨌건 오래도록 인연이 계속 될 것 같은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어떤 특징을 가졌다면 난 그에게 중독될 가능성이 많다. 미운정이 나중에 무엇으로 바뀔지 나도 모른다. 싫어하고 미워하던 것과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나는 그것을, 그 사람을 받아들이 것이고, 그 사이에 나는 바뀔 것이다. 나를 바꿔준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해도 머리에 불이 켜질 것이다.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신다. 쓴맛을 싫어하고,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자는 내가 커피에 중독되었다. 좋아하는 것들만의 조합으로는 중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지금은 '소화제 사줄테니 다 먹으라'라는 그 말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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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4:04:41 *.104.9.216
신은 항상 안타까운 사람들을 먼저 데려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젤 똑똑한 사람이 바보랍디다. 소크라테스 할배는 그래서 "암 것도 몰라유~~" 했었나봐요.

사람에게 '연'이란 가린다고 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싶어요. 가는 사람 안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

그분 참 고맙습니다.
글이 되어 주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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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23:16:13 *.39.145.123

가린다고 조심한다고 어찌할 수 없다. 그거 참 멋지네요. 그래서 제 뜻대로가 아니라서 제가 선물같은 인연을 만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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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7 17:57:50 *.113.77.122

'소화제 사줄테니 다 먹으라'라는 말.

되게 느낌 좋은데요. 

좋은 인연 소중히 간직하시고, 이런 감사함을 많은 분들과 나누시길 ^^ 



선배님 '제가 소화제 사줄테니 다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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