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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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늦가을
오프수업 2주 전, 11월 오프의 과제가 올라왔습니다. 10월 오프 수업이 추석으로 한 주 밀리는 바람에 11월 오프 수업은 부쩍 금방 돌아왔습니다. 담담한 문체로 올라온 과제는 제법 생소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 커다란 물줄기 중 내가 관심 있는 트렌드 세 개를 골라 거기에 걸맞는 나의 미래 풍광 다섯 가지를 적고, 구체적으로 내 미래 직업을 써보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고민 했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었지요.
오프 수업 과제와는 별개로 우리는 여전히 한 주에 한 권씩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달은 부쩍 자신의 강점과 적성에 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중에서 필살기로 벼려야 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활동들도 많이 했는데, 이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시각을 많이 바꾸어놓았습니다.
한번도 관심 가져본 적 없던 낯선 분야의 회사에 입사해 일하면서 이 일을 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업무를 잘게 쪼개고 각각의 일과 나의 적성을 맞춰보는 작업을 하고 나자, 이 분야가 낯설기 때문에 일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하고 외우면 싫어질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실마리를 얻고 나자 오프 과제가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단숨에 초안을 쓰고 조금씩 보태어갔습니다. 그 동안은 오프 수업이 조금 두려웠는데 이번 오프 수업은 상당히 기대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엔 포항이라는 낯선 곳으로 1박 2일간 여행을 갑니다. 조금은 여유롭게 마음을 가져가도 괜찮을 겁니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설렁설렁 1박짜리 짐을 싸서 커다란 보스턴 백에 집어넣었습니다. 바닷가로 간다고 들어 날이 추울까봐 스웨터에 코트를 가져갔습니다. 집을 나서면서 시계를 확인하니 10시반 차인데 벌써 10시 10분 전입니다. 10분 빨리 맞춰놓은 뻐꾸기 시계가 뻐꾹뻐꾹 열 번을 웁니다. 버스를 타자니 애매해서 집 앞 삼거리를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서울역에 가니 사람들이 벌써 모여있습니다. 내려갈 때는 혼자 앉아 갑니다. 매일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지나가는 서울역-용산-가산 구간을 단 몇 분 만에 통과합니다. 오늘은 출근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늘은 저 멀리 호랑이 꼬리 모양의 항구 도시. 포항으로 갑니다. 미생을 벗어난듯한 묘한 쾌감이 듭니다. 읽으려고 가져온 600페이지짜리 과제 책을 펼치니 잠이 쏟아집니다. 에라이, 며칠 고생하지 뭐. 잠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갑니다.
동대구역에서 잠이 깼습니다. 10분 남짓이면 신경주역으로 갑니다. 머리를 다시 묶는데 참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려서 바로 포항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고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라고 합니다. 알람겸 전화한 모양입니다. 똑 부러지는 싹싹한 총무입니다.
다시 내려 만난 사람들이 반갑습니다. 미리 신경주역에 와있던 일행들을 만났습니다. 여기 없는 분들은 모두 포항에 미리 가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학여행가는 일진들처럼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나와 찰나횽님, 미경선배는 중간쯤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전날 식당에 딸려있던 점집이 있길래 호기심에 사주를 봤다고 하니, 미경선배가 본인도 한번 봐주겠다고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이리저리 말해주는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구절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찰나 언니 것도 봐주었습니다. 우리 둘이 서로 상승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인연이라고 합니다. 언니와 공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항에 내리니 오옥균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직원들과 함께… ㅠ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영남권 모임을 꼭 가겠다고 약속만하고 못 간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서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포항에 오니 무척 기분이 홀가분합니다. 오옥균 선배를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영화배우 같이 멋있음이 흐르는 분이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는 곧 아구탕을 하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너댓개의 커다란 냄비에서 빨간 아구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습니다. 국자로 뿌듯하게 퍼서 먹는데 야들야들한 살이며 짜지 않은 양념이 일품입니다. 밥 한 그릇을 금새 뚝딱 비웠습니다. 옆에서 같이 상을 받은 희동 오빠 보다도 많이 먹었습니다…
이제 다시 별장으로 이동하려는데, 어쩐지 장을 보는 팀에 조인해서 같이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울, 참치, 녕이 언니와 함께 근처 마트로 가서 이것저것 카트에 잔뜩 담았습니다.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하나씩 나누어 먹고 영일만 오도별장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에 칠포해수욕장을 지나는데 망망대해를 향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칠포해수욕장이 나타났습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그 곳에 잠시 사륜구동차를 멈추고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느닷없는 해방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바다까지 마구 달려나갔습니다. 참치도 오고 녕이도 와서 심장을 이지러놓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남은 우연한 발견입니다. 이 곳을 만난 것만으로 포항은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5분간의 땡땡이였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오늘 묵을 오도별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도별장은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그리로 내려가는 해안도로가 영화 같습니다. 오도별장에 차인표도 왔었던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착해서 장봐온 것들을 제자리에 풀어놓고 곧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과제를 올린 순서대로 시작했습니다. 카페에 올릴 때 구달님과 피울님이 먼저 과제를 올린 줄 알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예전 과제입니다. 하 왜 중요한 건 꼭 이렇게 제대로 못 볼까. 그래서 결국 일빠로 과제를 읊었습니다. 발표를 끝내고 생각하니 일빠가 가장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여러 질문들을 받으면서 좀더 생각이 구체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번 과제에 적은 꿈을 향한 내 마음이 제법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명의 과제를 더 듣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모퉁이 돌아 조금만 더 가면 있는 횟집입니다. 몇 번이고 술잔이 돌고 회접시가 비워졌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취해있습니다. 다시 바다를 걸어 숙소로 돌아와 수업을 마저 재개했습니다. 녕이언니가 빼빼로 데이라며 빼뺴로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뒤에 손편지를 하나하나 정성들여 썼습니다. 바쁜 와중에 정성스런 깜짝 선물까지 준비하다니, 마음이 따뜻한 언니입니다.
드디어 수업이 끝났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좋아하는데, 한 가지 나의 안 좋은 술버릇이 있다면 술을 마시고 밤이 깊어지면 마음이 한없이 외로워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푹신한 곳으로가 잠들어버립니다. 수업이 끝나고 바닷가로 걸어나가 혼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몇 명 더 밤바다를 향해 나옵니다. 비가 오려고 그런지 포항은 날이 아주 포근했습니다. 낄낄거리며 크게 웃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누군가가 일어나 바다 쪽으로 걸어갑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다로 뛰어들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물이 찬지 소리가 절실합니다. 구하러 가야하나?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곧 그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입니다. 표정이 밝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12시반 즈음까지 술자리에 앉아있다가 안쪽으로 숨어있는 방들로 가 열어보았습니다. 콩두언니가 자고 있는 침대가 있길래 조금 눈을 붙였다 일어나려고 누웠습니다.
눈이 부시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습니다.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직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좀더 누워있었습니다. 옆에 갈색으로 염색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진 아가씨가 등지고 누워있습니다. 앨리스인가? 아님 녕이언니? 앨리스였습니다.
정돈을 하고 약간 미적거릴 시간이 있었습니다. 잠시 거실에 나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오니 콩두 선배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습니다. 앨리스, 콩두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뭔가 아웃사이더 같지만 할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올라와 밥을 먹으라는 참총무의 독촉에, 가서 밥먹고 또 이야기를 한참 합니다. 종종언니가 새벽에 왔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차를 나눠타고 호미곶으로 갔습니다. 일전에 종종언니가 칼럼으로 썼던 모리국수를 먹으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까꾸네 모리국수집은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손칼국수를 끓여낸다는 그 근처 다른 모리국수집을 갔습니다. 커다란 냄비에 끓여져 나오는 국수는 맛있었습니다. 생선이 몇 없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이제 각자 갈 길을 갑니다. 우리는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중간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왔더니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있습니다! 어떻게 신경주역까지 가는 거지? 남은 차는 한 대인데, 사람은 여섯 명입니다. 더욱이 운전자가 20년만에 스틱을 몰아본다고 합니다. 불안한 차를 무서워하는 종종 언니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가기로 결정합니다. 우리는 택시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었습니다. 나는 메가톤 바를, 종종언니는 돼지바를 골랐습니다. 검은색이지만 모범은 아닌 택시를 타고 가는데, 아저씨가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혼자 말을 크게 합니다. 질세라 종종언니와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습니다.
포항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일행이 전부 오지는않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일행이 버스에 모두 오르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버스가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차창 밖을 바라보니 옥균선배가 넉넉한 미소로 버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같이 엄청 크게 손을 흔들었더니, 한참만에 오른손으로 살짝 답인사를 합니다. 영화배우 같아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포항을같이 택시를 타고 온 인연으로 종종과 버스에서 같이 앉았는데, 무언가 대화를 하다가 둘다 소르르 잠에 빠졌습니다. 신경주역에 도착했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을만큼 잘 잤습니다.
신경주역에 도착해 종종언니의 짧은 과제 발표를 듣고 그녀를 배웅한 뒤, 우리는 역내 롯데리아에서 커피를 한잔씩 마셨습니다. 경주빵을 손에손에 들고 있길래 나도 사러 갔더니 품절이랍니다. 대신 찰보리빵을 샀습니다. 올라가는 KTX는 같이 가족석에 타고 갑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니 금새 서울입니다. 또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는구나. 그래도 이 가을,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한 좋은 사람들, 현재 속에 들어박힌 미래의 예감 등이 버무려져 살맛 나는 주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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