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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일 11시 5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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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김정은

 

 

스스로 거듭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하던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하던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피터 드러커, <프로페셔널의 조건> 352

 

 

나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침대에 누워 지낼 무렵의 내 생활은 그랬다. 함께 출근을 준비했던 새벽 시간 혼자 출근 준비를 하게 된 남편에게도, 할머니의 손 맛 가득했던 건강한 밥상 대신 엄마가 준비한 엉성한 식탁을 마주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나는 그저 쥐구멍이 있다면 그리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성 들여 음식을 해도 겨우 먹어야 하는 수준이었고, 공들여 집안 청소를 해도 티가 안 나는 상황, 육체노동자로서 쓸모가 없어진 나는 나의 생산성 없음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바닥을 치닫는 우울감 속 한 가닥 희망의 지푸라기는 바로 이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마음의 강렬한 외침이었다. 그 외침을 따라 동사무소에서 실시하는 무료 집단 상담 과정을 신청했다. 특이하게도 남자 상담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상담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직장을 그만두고 상담사가 되기까지 남자로서 그는 내가 겪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고민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상담사로서 또 같은 경험을 겪은 선배로서 그는 내게 딱 맞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상담사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내 현실에 적용해 보았다.

 

각자의 현실에서 서로 다른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열 명의 내담자들은 권정생의 <강아지똥>과 우쓰기 미호의 <치킨마스크>를 함께 읽었다. 그 두 권의 그림책은 자신감 없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를 담아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들이었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함으로써 내가 기쁘고 또 가족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나에게 취약한 일들은 과감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집안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음식 장만은 최대한 도움을 받고 집안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정했다.

 

스스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그림책을 펼치는 이유는 두 딸들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림책이 담는 단순하지만 진지한 삶의 이야기가 내 삶에 큰 울림과 위로를 전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다른 엄마들이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집안을 쾌적하게 하여 가족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림책은 가족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 둔 여성으로서 스스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우울감과 수치심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나도 공헌이란 것을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육체노동자로서 육체는 더 이상 생산적으로 가동하지 않고 지식노동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지식이 부족한 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이라는 소박하면서도 근사한 도구를 통해 다시 한번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인근 초등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초등학교에서 책 읽어주는 엄마가 되었다. 책 읽어주기 첫 해, 담임교사의 권유로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 해 책 읽어주기의 목적이 이젠 초등학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사람)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이 영어에 관심을 갖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공허함 또한 크게 자리잡았다. 이유는 영어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이 공교육에서 그 흥미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영어 사교육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결과 때문이었다.


책 읽어주기 3년 차, 또 다른 공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이나 게임 등으로 친구를 사귀는 시간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아야 할 시기에 혼자 게임만 하는 아이들을 우려한 한 교사가 내게 우정 그림책 읽어주기커리큘럼을 만들어 볼 것을 부탁했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은 실생활도 게임으로 인식하여 승자가 옳다고 믿으며 힘이 센 친구만 사귀려고 하고 힘이 센 친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문제가 있는 반에서 우정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한지 한 학기가 지나자 아이들은 슬슬 친구를 사귀는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이른 아이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나는 책 읽어주기에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요즘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못 보게 되어 친구와 대화가 통하지 않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친구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어 친구 사귀는 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 아이들이 책만 읽으면 사회성 형성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책만 읽는 것은 재미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함께 읽기를 생각했다. 먼저 온 가족이 함께 읽기다. 책을 한 시간 읽었다면 한 시간 대화를 나누며 공감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친구들과 함께 읽기다. 친구들과 함께 읽으며 건강하게 우정을 키워나갈 수 있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게임기 등 끊기 어려운 족쇄들에게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자유를 맛 볼 수도 있다.


함께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가족과 친구, 즉 누구누구와 함께 읽기도 좋다. 영화와 책 읽기, 명화와 책 읽기 등 무엇무엇과 함께 읽기도 가능하다. 그리고 철학과 시 함께 읽기, 고전과 그림책 함께 읽기 등 책 속에서의 연결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에 지푸라기 잡듯 집어 들었던 책은 이제 내게 좀 더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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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14:50:28 *.37.122.79

제 아내의 고민과도 많이 맞닿아 있어서 곰곰히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육아를 통한 경력단절을 이어갈 길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함께 읽기>를 이끌어가시며 여러 변화를 만나고 계시는군요.

요즘 낭독, 암송에 대한 추천도 듣고 있는데 함께 읽기에 적용해 보아도 좋을듯합니다.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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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22:10:52 *.65.152.233

양갱 선배님~~ 응원의 박수 감사드립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저와 같은 시련을 겪는 여성들이 많은 줄 압니다.

함께 읽으며 잘 헤쳐나가야겠지요~~^^


선배님의 책처럼 저도 따뜻한 책을 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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