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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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박성제의 사례에 접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속도였다. MBC에서 해고된 지 2년 만에 ‘쿠르베’라는 스피커로 브랜드를 확보하다니, 그건 중년의 전환에 고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 방에 엿 먹이는 것 아닌가! 게다가 스피커, 요즘 들어 자꾸 음악이 땡기던 차라 그의 특강에까지 가 보았다. 엉덩이가 무거운 나로서는 좀처럼 드문 일이다.
상암동의 골목서점 ‘북바이북’에 그가 들어서는데 “어이쿠, 뭘 해도 잘 했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180센티미터가 넘어 보이는 키에 위풍당당한 풍채에 살짝 수염을 기른 모습이 전시의 장군을 방불케 했다. 서울대 국문과 졸업, MBC 기자노릇과 노조활동, 저돌적인 대시로 성공한 결혼, 해직 후에 빛의 속도로 전환에 성공한 것까지 그는 무얼 해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너 같은 부르주아가 무슨 노조활동이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골프를 좋아하던 한량기자가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 때문에 노조위원장을 하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해고까지 당한 것을 봐도 그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온 몸을 던지면 우주도 함께 움직인다”는 해묵은 말은 여전히 사실이었다. 그는 오디오 마니아 모임인 “DVD 프라임”의 열성회원이었다. 중2 때부터 음악에 빠져 살았으니 목공에 입문하여 식탁과 와인장을 만든 다음에 스피커를 만들 생각을 한 것은 당연했다. 바로 여기, 혼자 어찌어찌 하나를 만들어 본 다음에 혼자 하기가 꾀가 나서 동호회에서 같이 스피커 만들 사람을 모으는데 진짜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구경꾼”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K박사는 대기업 오디오 연구팀 책임자였다. 스피커는 앰프로부터 전해지는 전기신호를 음성으로 바꿔주는 ‘유닛’과, 유닛들 사이의 소리를 나눠주는 ‘크로스오버 네트워크’, 그리고 유닛의 진동을 증폭시켜 주는 울림통인 ‘인클로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그는 바로 크로스오버 네트워크의 최고 기술자였던 것. K박사를 만나기 전까지 박성제는 아직 인클로저나 뚝딱뚝딱 만드는 처지였다. 기술에 문외한인 그를 보고 K박사가 황당해 했을 정도라니 알 만하다. 그런 그에게 최고급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K박사를 움직인 것은 동호회에 스피커를 같이 만들자고 건넨 제안 하나였다. 살다보면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고,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대단해 보여서 아득할 때도 있는데, 우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것은 딱 한 걸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구경꾼”을 “전폭적인 조력자”로 바꾼 것은 박성제 특유의 에너지요 친화력이겠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한 것은 제안 하나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한 걸음이 열 걸음이고, 전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딱 한 걸음을 내딛는 자세가 우리를 원하는 곳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는 쿠르베가 해직기자가 만든 스피커라는 소문을 넘어 소리 자체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 이런 그의 소망은 벌써 절반은 이루어진 듯하다. 여중고시절 음악시간이 제일 괴로웠던, 진정한 음치인 나 같은 사람도 음악이 듣고 싶어지는 시절인 때문이다. 막 읽은 김 경의 <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온갖 새로운 트렌드가 난무해도 진짜 안목 있는 사람들은 결국 클래식으로 돌아온다. 클래식에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불멸에 가까운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할 것이다. 명품 스피커에 몰려있던 마니아 시장이 빠르게 확장되며 보통 사람들도 취향을 발굴하는 시대에, 정성을 기울여 만든 합리적인 가격의 스피커가 외면 받을 리가 없다. 해고되었다고 얼굴이 팔려서 지하철에서도 위로를 받다 보니 부아가 나더란다. 자신은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막 출간한 책의 제목을 <나를 위로하지 마, 내가 위로할게>로 하려고 했는데, 출판사에 밀려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가 되었다지만, 그는 쿠르베를 통해서나 명쾌한 전환의 사례를 통해서나 여러 사람을 위로하게 될 것 같다. 나도 그의 스피커 중에서 쿠르베 스노우맨을 찍었다. 하루 빨리 나만의 음악리스트를 정비한 후에 질러야지.
*** 2015년 1월 매주 수요일에 <삼성레포츠센터 문화센터>에서 글쓰기입문강좌를 엽니다.
교대역 쪽이 편한 분은 이 때 오시면 좋겠네요.^^ http://cafe.naver.com/writingsu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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