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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3일 22시 42분 등록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나의 이 시에는 두 남자가 들어 있다. 이 시를 찾기 위해 책꽂이를 앞을 서성이는 목소리 좋은 한 남자와 그 모습을 보고 시집을 들고 오겠노라고 말한 훌륭한 준마 같은 또 한 남자. 나도 덩달아 책들을 노려보며 느리게 책장을 뒤졌었다. 한 편의 시로 각기 다른 곳에서 똑같은 슬로모션으로 시집을 찾는 모습이 들어있는 시. 그립고 그립다, 7년 전 봄날.

 

요즘같이 쨍쨍한 겨울이면 쌓인 눈 사이로 겨우 나뭇가지만 손 내민 세상에 갇히고 싶다. 눈 한 바가지 떠다가 눈밥 해먹고 뜨끈한 아랫목에 갇혀 있고 싶다. 사평역에 갇혀 낯선 이들 속에 딩글딩글 겉돌고 싶다. 모두들 불꽃을 향해 그리움을 던질 때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 덜그럭거리는 그리운 가슴 눈 속에 처박고 뒹구르르 굴러 내려오고 싶다.

 

그대, 별 가득한 하늘과 푹푹 쌓인 눈 속에 갇혀 이 시 한 편 낭송하지 않으려오? 그러고 있다 보면 아름다운 나타샤를 태운 당나귀도 당도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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