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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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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7일 00시 49분 등록

끝자락의 달음질. 한해의 또 다름이 다가온다. 한때는 그 빠름을 재촉하고 싶어 하던 철없는 시기가 있었다.

“어무이. 진짜 이거 먹으면 한 살 더 들 수 있는 겨.”

“그려.”

설이 되면 반기는 음식중 하나인 떡국. 쫀득쫀득 씹히는 맛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설레는 점은 이것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건지. 그 말에 혹해 몇 차례나 그릇을 뚝딱 비웠었다. 새로운 물건을 갖고 싶어 하던 유혹과도 같은. 안경이란 것이 귀했던 시절. 몇몇 아이들의 쓴 모습이 부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TV를 가까이 보고 눈이 나빠져 빨리 착용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드디어 그날. 두근대었다. 근사해 보였다. 나를 바라다보는 시선. 우쭐대었다. 그런데 그 좋음은 얼마나 갔을까. 나이가 듦이 점차 버거워지는 것처럼 안경이란 것이 무거운 짐과 같이 다가왔다. 겨울. 추운 아침 버스를 탐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앞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여름. 찜통 같은 지하철. 빽빽한 대나무 대열 속 키 작은 나무 하나 호흡 달래며 서있는데, 비 같은 땀 흘러내려 유리알을 적신다. 젠장. 세월의 경주 가운데 머리빛깔, 피부, 근육 하나둘 푸른 청춘의 그것과는 다름의 실감이 두터워 오는 날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연극 제목도 있었는데, 당신은 그 나이에 들어서서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가까운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됨은 이젠 멀리서 인생을 조망하라는 철학적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지. 노년이 되어간다는 것은 쌓아온 지혜의 열매들을 하나둘 거두어들이는 시기. 그럼에 나는 거기에 해당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오늘 나는 달력 한 장을 다시 새로이 넘긴다. 거기엔 당신을 빼다 박은 중년의 사내가 지켜 서있다.

 

부끄러운 사례 하나. 집에서 느지막한 토요일 오후 여유를 한껏 즐기고 있던 중. 생리현상인 방구가 나오려고 할 때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니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물컹하며 무언가 묻어나온다. 어쩐다. 창피한 마음에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배가 아파서.”

무어라고 둘러댄담. 자취경력을 살려 오랜만에 빨래비누를 들고 빨래판에 속옷을 박박 비빈다. 나 참, 어이가 없다. 누구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가면 괄약근에 힘이 없어진다고 하더니 내가 벌써 그런 경우가 되었는지. 늙어간다는 것. 일명 노화. 어떤 이는 이를 성숙의 과정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절망의 순간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고픈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었고, 조금이라도 젊어지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안간힘을 쓴다. 나에게도 예외는 없는 법. 신체적 증상이 서서히 일어난다. 기억이 깜빡거리는 것은 애교이고, 최근 들어 부쩍 상품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질 않는다. 왜 이렇지. 뿌옇게 보이기도 하는 등 당황해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덕분에 애꿎은 제조회사에게 책망을 늘어놓았다. 글씨를 좀 크게 키울 것이지. 문득 드는 생각. 어르신 분들은 가까운 사물을 볼 때 안경을 벗었었지. 혹시나 싶어 나도 그렇게 해보았다. 이럴 수가. 보이지 않던 글씨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걸 서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대열에 합류함을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치과엘 들르니 이를 새로 씌어 넣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헐. 가격도 만만찮다. 고민이 된다. 오복 중 하나라는 치아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지만 한두 개도 아닌 입장이라.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은 더욱 생길 것인데.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녀석은 반가움 보다는 머리카락부터 관심이 가나보다. 싸라기눈이 벌써 내리기 시작한 나의 머리 숲. 아버지 쪽을 닮아서 그렇다고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씁쓰레함이 느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터. 염색을 권하는 직장 상사의 압박은 더욱 거세진다. 벌써 이런데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변할지. 오랜만의 산행. 무리했는지 무릎이 아파 쩔뚝이며 하산하고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기운차게 뛰어 내려온다. 한때는 나도 저랬었는데. 그래. 내 나이 되어봐라. 그때도 그러할지. 피부 좋다는 말을 들어왔었다. 동안의 피부. 자랑할 만했다. 그런데 팔뚝 쪽을 보니 어느새 검은 물결이 조금씩 밀려온다. 술을 마셨다. 멋모르고 깡으로 밤새 마셨다. 다음날 일어나도 거뜬했기에. 지금은 찔끔찔끔 중년 남자의 쳐지는 거시기처럼 한입에 털어 넣기가 부쩍 부담이 된다. 인생 뭐있냐를 호기 있게 외친지가 언제였을까. 현실은 고단한 늙음의 쳇바퀴만 끝없이 돌아간다.

 

노년의 가장 큰 모델링인 어머니. 희뿌연 머리에 거동의 불편. 침을 맞고 오랫동안 뜸뜬 무릎은 구공탄의 형상을 닮았다. 뻥뻥 뚫린 참상이 퇴행성관절염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지팡이를 힘겹게 짚는다. 눈 오는 길은 나가기가 두렵다. 무릎수술. 한쪽에 이어서 다른 한쪽. 양쪽 오백만원. 눈이 침침. 백내장 수술. 주름살. 그 증상들에 당신은 평생 약으로 혹은 불평으로 견뎌 나갔다. 병원생활. 노환의 징후는 훨씬 심해진다. 병상에 누워서 절망의 늪을 보냄에 우울증은 필수. 하루 종일 잠에 취하거나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 TV 뉴스에서 개그 프로를 하고, 옆 환자분들의 화사한 수다에도 얼굴 표정이나 느낌은 변함이 없다. 그냥 온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다. 혼자 식사가 힘들어진다. 손이 떨리는 중풍이 찾아왔기에. 어쩌나. 누군가가 옆에서 수발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심상치 않은 조짐에 간호사실을 찾았다.

“어머니 손톱 색깔이 까만데 다른 곳 편찮으신 데가 있나요?”

간호사는 자리를 옮기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치매가 찾아오신 것 같아요.”

치매? 웃긴다. 연세가 얼마나 되셨다고 벌써.

“무슨 소리예요. 자식들도 잘 알아보는데 잘못 보신 것 아니에요.”

“손톱 색깔이 그런 이유를 아시나요. 손으로 항문 속을 집어넣어 주물럭거리신답니다. 증상이 며칠 되셨어요.”

남의 일이라고 여기던 현상이 드디어 나타났다. 눈물을 훔치다가 당신 앞에서 고개를 돌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나.

“엄마. 손톱이 왜 그래요.”

오진일거라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모른다는 답변. 노년은 나에게 두려움이다. 나이 듦의 지혜, 여유와 경륜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처지라 그것은 아픔이요 고통이요 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장애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얼마 있으면 나에게도 닥쳐올 그때가 되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 마흔을 맡기 전처럼 갱년기가 일찍이 찾아올지. 미래라는 부재의 허덕임에 다시금 갈 곳 몰라 하고 있을지. 실업수당 혹은 연금 혜택 받기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있을지. 여행을 만끽하며 어느 곳 어느 시간 즐기고 있을지. 늙는다는 것. 솔직히 나는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하루를 살면서도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고통이 아닌 승화로, 짜증이 아닌 유쾌함으로. 신체의 아픔이 아닌 받아들임, 거친 세상의 극복이 아닌 순수하게 동화되는 자연의 섭리로. 그렇기 위해 그렇게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실상은 늘 제자리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내용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에게 다가오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픈 데 진정 마음으로만 남을 뿐인지.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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