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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5일 00시 13분 등록

내방 책상 위에는 아직도 반디앤루니스 서점의 종이봉투 안에 크리스마스 카드가 잔뜩 담겨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스무 장은 넘을 것이다. 모두 새 것이다. 지지난해까지는 매년 한해 동안 있었던 큼직한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감사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 목록을 작성하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고, 한 명 한 명에게 카드를 쓰는 사랑스러운 시간을 꼭 갖곤 했었다. 새벽까지 잠을 잘 자지 못하더라도 받을 사람의 기쁨을 볼 생각에 즐거운 준비 기간이다. 그러나 이번 2014 12월에는 연말 느낌이 전혀 없었다. 업무가 몰아쳐서 정말 바빴기 때문이었다. 시간적인 바쁨에 정신적 여유가 잘려나갔고, 나는 닥쳐있는 현재 이외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지쳐버렸다. 오히려 카드를 돌리는 일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을 느낄 수 없는데, 한해 참 고마웠다는 말을 카드에 적는 것이 실례되는 행동 같았다.

 

 그러다 감기에 걸렸다. 지금까지 걸렸던 감기와는 양상이 다르다. 목감기가 베이스인데 네 가지 증상이 독특하다. 기침이 심하게 나고,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며, 밤이 되면 매우 심해지고, 왼쪽 눈 실핏줄이 전부 터져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반면, 열이 나거나 편도선이 붓지 않고, 콧물도 없었다. 좀 차도가 있을까 싶어 내과며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다. 그런데 병원에 가도 시원한 처방을 주지 못한다. 열이 나지 않는다며 주사도 감기약도 처방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기침에 좋다는 시럽을 주었는데, 전혀 듣지를 않는다. 몸은 아픈데 알아주질 않으니 의사선생님이 야속하다. 밤에 기침이 심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밤에 기침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가슴이 뻐근해오고 내장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기침이 심해서 저녁식사를 전부 게워냈다. 기침들은 평야전투의 돌격대처럼 튀어나왔다.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 옆 탁자를 돌아보면 가래를 묻어둔 휴지뭉치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 세탁실 찬장에 처박아 두었던 가습기가 깨끗이 씻겨져 허연 입김을 내고 만들고, 부엌에 있던 전기 주전자는 물을 가득 채워져 있으며, 뚜껑 달린 보온병과 유리잔이 놓여있다. 약간 뜨거운 온도의 물을 언제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만든 나만의 공정을 위한 것이다. 탁자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진다. 조금만 탁자를 움직여도 연약하고 긴 네 다리가 휘청거린다. 회사를 결근해야 했고, 집밖으로 누굴 만나러 나갈 수도 없었다. 물론 새해 카운트 다운도 사치였다. 찬바람을 쐬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이 거세졌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시작된 돌격기침으로 잠이 깨버렸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네 시였다. 다시 잘까 하다가 어제 자기 전에 먹고 싶었던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가 생각났다. 침대에 누워 머릿속에 아침 식사를 만드는 과정을 상상해보았다.

 

그래, 깜깜한 부엌 전등을 밝히고, 맨 먼저 오븐을 예열하는 거야. 냉동실에 있는 식빵을 오븐 접시에 올리는 거지. 어젯밤에 확인했을 때 네 쪽이 있었으니까, 두 개면 되겠군. 3분 정도 바삭 하게 굽는거야. 빵이 익는 동안 올리브유를 두른 프라이팬을 달궈 계란 한 알을 까서 넣지. 노른자를 터트리지 않는 게 중요해. 타닥거리는 멋진 소리를 내며 한쪽 면이 완전히 익으면 살짝 뒤집어서 노른자를 뜨겁게 익히지. 노른자가 차가운 것은 정말 최악이니까. 하지만 완전히 익히지 않는 게 포인트야. 후추와 소금으로 마무리 간을 한 계란 후라이가 완성될 때쯤, 오븐에서 사랑스런 완료 알림음이 세 번 날거야. 황금색으로 가장자리 빛나는 빵 두 쪽을 꺼내고, 같은 접시에 빵과 계란을 담는거야. 그래, 접시는 꼭 하얗고 네모난 것이어야 해. 우리가 손님이 올 때만 쓰는 중간 크기의 것으로 말이지. 이 메뉴는 어제 아침 메뉴였는데 오늘 아침으로 또 먹고 싶었다. 엄마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엄마는 아침으로 다른 것이 먹고 싶을 수도 있으니 내가 부엌으로 가야지만 원하는 걸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침대를 빠져 나와 밤새 마셔서 텅 빈 전기주전자와 빈 컵, 휴지 더미를 양손에 나눠 들었다. 휴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빈 컵은 개수대에 넣어두고, 캐틀에는 생수를 채워두었다. 그리고 아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침대 속에서 상상하던 그대로 냉동실에 든 식빵봉지를 꺼내 거기서 두 조각을 꺼내 오븐에 넣고 프라이팬을 달궈 계란 프라이를 만들었다. 오븐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세 번이나 시도한 끝에 불이 붙었다. 컵에 온수를 따라 곁들였다.

 

먹고 싶었던 따끈한 아침식사를 먹고 아직 어둠에 싸여있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몇 달간 느끼지 못했던 여유 같은 것이 마음 속에 뭉게뭉게 퍼져 나왔다. 얼마나 내가 피폐하게 살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 왜 내가 크리스마스 카드들을 잔뜩 사놓고 몇 장 쓰지 못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마 감기로 며칠간 아무 것도 안하고 쉬었던 시간이 축적되었다가 오늘, 이 고요한 새벽에 빽빽하게 묵힌 일상들이 완전히 씻겨져 나간 듯 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감탄의 감정이 이렇게 쉽게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정신 없이 바쁘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잊혀졌다. 이 상실감은 나도 모르게 시작되어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먹는 식사,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 김서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조용한 거리와 새벽잠에 취해있는 불빛들, 오븐이 돌아가고 난 따뜻한 부엌의 온도,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서 하고 싶다고 일어나는 사랑스럽고 사소한 바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특별해진다. 그렇다. 인생은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사치스럽다 여겨진다 해도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시간표나 계획표 위에는 드러나지 않는 맥락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양식,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사치로 여기지 않는 삶의 경계를 지켜주는 것이 진정으로 건강하게 사는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아파서 쉬는 것은 정말 경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새해의 건강법으로 3개월에 한 번씩은 일주일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쉴 수 있는 휴가를 나에게 주어야 한다는 언약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오늘 오후에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그녀는 내가 재작년 겨울에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읽어주었다. ‘어따 카드 한번 따끈하게 잘 썼구마잉.’ 애틋한 마음이 올해의 나에게 다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가 종이봉투를 열고 크리스마스 카드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잘 써지는 펜을 들고 카드를 적었다.

 

‘Late Happy Christmas & Happy New Year!, 일요일 오후에 전화를 받고 나서, 늦었다는 사실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못 쓰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나 우리처럼 꽤 각별한 사이에는 말이죠… ’

 

새해에는 스스로의 건강법을 잘 세워 실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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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39:26 *.53.209.142

새벽에 맛보는 토스트, 오늘 어니언과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아. 나는 핫케익으로 명상하였다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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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7:25:34 *.50.21.20

언니야, 맞다 ㅎㅎ 

다 먹는걸로.. 그렇게 ㅎㅎ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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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48:39 *.70.47.227
2014년을 보내기가 아쉬웠나보다 이리 몸이 서운함을 말해주는 것을 보니....이제는 아프면 서러운 나이가 되었으니 새해에는 몸관리 더 잘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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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7:24:02 *.50.21.20

이제 아프면 서러운나이져.. 음.. 흑흑..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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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50:31 *.70.47.227
ㅍㅎㅎ 희동 글인줄 알고 댓글을 달았네 어쩐지 엄마가 등장하고 이상터라. 고놈 오래도 간다 얄미운 놈 뚝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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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7:25:01 *.50.21.20

으하하하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아 언니 웃기당 ㅋㅋㅋㅋㅋㅋㅋ

웨버가 썼다고 생각하고 읽으니까 진짜 웃긴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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