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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5일 11시 41분 등록

핫케익뎐

2015 1 5

 

탑을 쌓는다.

다보탑을 조각하는 심정으로, 휘영청 달 밝은 밤 탑돌이를 하는 심정으로, 핫케익을 한 장씩 구워 쌓아 올린다. 식구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 빛 들어오는 어슴프레한 방안에 눈을 비벼가며 쳐다본 시계는 어이없게도 9 43. 나의 혈족들은 임상적으로 유전적으로 확인된 저혈압으로, 대를 이어 차도가 없는 아침회피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 출근, 아침 일찍 등교가 나의 천성에 어긋나는 행위로서 평생 익숙해지지 않는 고행이었음은 두말 함 잔소리다. 그러나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는 이런 인간적인 본능마저 왜곡시켜 새벽밥을 하고 밤새워 사골국을 끓이고 급한 PT를 준비한답시고 새벽 기상을 하는 인간 개조를 감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온 식구가 10시에 부시시 일어나는 친정집에 와서도 어쩌지 못하고 너무 일찍, 무려 7 58분에 일어나 블라인드 친 시꺼먼 방안에 애처로운 램프 하나를 밝히고 책을 들여다 보다가, 간신히 남은 분량을 해치우고 결연히 일어나 식탁으로 향한다.


일어나면 졸립다. 졸리면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보면 다시 졸린다. 책갈피를 끼우고 욕실로 가 치카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머리까지 감고 나면 도저히 다시 이부자리로 파고들지는 못할 것이다. 젖은 머리를 이고 지고 가서 냉장고를 뒤진다. 오늘 아침은 며칠 째 새벽잠을 설치는 엄마 대신 아침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버터 입맛 아버지가 좋아라 하는 핫케익 믹스가 조리대 한구석에 뒹구는 걸 어제 봐두었다. 둥근 플라스틱 그릇에 계란 한 알을 깨어 넣고 거품기로 휘젓는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리드미컬한 동작으로 재빨리 거품을 만들어내야 푹신하게 부푼 먹음직한 핫케익을 완성할 수 있다. 거품이 잔뜩 일어난 계란물에 핫케익 가루를 넣고 우유를 섞어 걸쭉한 반죽을 만들어야 하건만 노인 두 양반이 사는 집의 냉장고에는 우유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유통기한이 언제 지났는지 모를 생크림 요거트를 한 통 붓고 물을 넣어 반죽을 완성한다. 약한 불에 덥혀둔 프라이펜에 나직한 치직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진다. 농도 짙은 반죽이 달궈진 팬과 뜨겁게 만나 갈색의 바삭한 표면으로 경계를 짓고 둥그런 핫케익의 모양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핫케익, 양인(洋人)들은 본래 팬케익이라 부른다는 이것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빵이었고, 국수라는 변화무쌍한 음식의 먼 조상이었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정말 그 진원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 했다던가? 그 유명한 문구가 주는 착각이 있다. 빵이 먼저인가? 케익이 먼저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화려하고 달콤한 케익의 외관이 주는 착각은 이것이 빵보다 기원에 있어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럭셔리한 그녀의 자태!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케익의 조리법은 빵의 그것보다 단순하다. 곡물로 만든 걸쭉한 죽을 팬에 구워 익혀내는 것. 이 기본적인 케익의 조리법은 치대고 기다리고 숙성시키는 훨씬 더 발전된 화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빵의 조리법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고, 근원적이다.


'먹거리의 역사'나 '빵의 역사'와 같은 책을 뒤지다 보면, 곡물의 생산과 그 조리법의 변천이 인류에 미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이 어마 무지하다는 데 감탄하게 된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발전은 더 많은 음식을 확보하고 더 풍족한 식생활을 누리기 위한 몸부림이자 생존의 조건인 섭식을 유희로 승화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팬케익은, 곡물을 재배하여 그것을 단순히 불에 구워 익혀먹는 과정에서 두발 짝, 물에 넣고 끓여 죽을 만들어 먹는 과정에서 딱 한발 짝 더 나아간 단계다. 걸쭉하고 된 죽이 어느 날 불에 달군 돌에 쏟아져 눌러 붙어 익은 것을 버리지 않고 맛본 누군가가, 케이크의 발견자, 아니 발명자다. 그 걸쭉한 죽 또는 반죽이 밀가루 같은 곡물이든, 고기든, 야채를 섞은 것이든 상관은 없다. 비싼 양요리(洋料理) 중 크랩 케익이란 것은 게살을 발라내 이런 저런 향신료와 섞어 부침개처럼 두텁게 지져낸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마도 지금도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서민의 곡식, 메밀로 만든 팬케이크를 빵 대신 주식으로 먹어 왔다. 우리 버전의 팬케익은 부침개, , 부꾸미 계열일거다. 밀가루에 대충 부추와 당근 같은 야채를 썰어넣고 기름에 부쳐내거나, 녹두를 어렵게 까불려 갈아낸 반죽에 고기와 김치와 고사리와 각종 좋은 것을 올려 녹두전을 부쳐먹거나, 찹쌀을 둥글게 반죽해 꽃 한 송이를 따다 얹고는 지긋이 눌러 기름에 부쳐낸 꽃다운화전을 먹었다.


이 유서 깊은 팬케익의 기원과 그들의 맛나는 친척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 아침 핫케익을 굽는다. 핫케익은 반죽을 만드는 데는 오 분도 안 걸리지만, 약한 불에 천천히 익혀야만 하는 과정 때문에 시간이 제법 걸리는 메뉴다. 막 구워낸 핫케익의 달콤한 냄새와 메이플 시럽의 달디단 향이 방안을 채우자 아버지는 일어난다. 무슨 맛있는 냄새가 난다야. 이제 막 깨어난 아버지와, 간만에 단잠을 자고 난 엄마가 아이고, 오늘은 이걸로 아침 해결이라며 반색을 하는 사이, 핫케익탑은 완성되어 수북이 쌓였다. 접시에 하나씩 덜어 시럽을 뿌려 한 접시씩 차지하고 실은 매우 원시적인 서양식 아침을 맛본다. 매일 매일 아침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느라 힘들었던 엄마는 딸내미가 차린 아침이 몹시 흡족한 눈치다. 초딩입맛 아버지는 핫케익이 맛나다며 단 시럽에 핫케익 두 장을 금새 해치웠다. 여기에 계란후라이와 삶은 소시지를 곁들여 아이들까지 순식간에 아침이 해결됐다. , 고마운 녀석. 나는 오늘 할 효도와 명상을 핫케익으로 다했다. 골드버그의 뼛 속까지 쓰라는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나는 위장 가득 핫케익의 의미를 채운다. 감사하다, 너 핫케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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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28:18 *.70.47.227
다음 책도 어째 계속 음식 야기가 될거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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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30:27 *.53.209.142

나도 이러다 미생의 점심 메뉴를 다루는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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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8 06:36:27 *.253.70.122
어째 종종 글만 보면 그 음식 함 맛보고싶은 생각이 드네, 근데 계란 거품 낼 때 흰자만 아님 노란자도 같이 쓰는지? ㅋ ㅋ 요리 배워야 살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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