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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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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6일 00시 16분 등록

두 아이들의 이야기

 


엄마 바꾸고 싶어?!

 

엄마 바꾸고 싶어!”

 

일곱 살 큰 아이가 외쳤다. 그 말이 내 귀에 꽂힌 건 순전히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엄마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나는 그 말을 그냥 흘려 보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바꾸고 싶다는 큰 아이의 말은 내게 당장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로 다가왔다. 워킹맘에서 전업 주부로, 태어나 7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보내는 느긋한 일상이 아이에겐 구조요청이 필요한 위기 상황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랑 더 이상은 못 살아!’ 최후통첩 같기도 했다.

 

이제 막 직장을 그만 둔 나는 한 차례 몸살을 앓았다. 십 년 이상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 낳았고, 일과 육아를 같이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사도 다섯 번이나 했다. 고급 프로그래머가 되면서 지방으로 해외로 출장 다니느라 아파도 병원 갈 겨를이 없었다. 프로그래머 십 년 차, 직업병 목 디스크의 통증으로 양 손가락을 못 쓰게 되니 프로그래머로서 수명을 다 한 셈이었다. 일단은 쉬면서 여기 저기 병 난 몸을 추스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 아직 직장에서 폐기 처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얘들아, 이 엄마를 조금만 기다려 줄 순 없겠니?’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부모와 자식 사이엔 끈끈한 혈육의 정이 뜨겁게 흐르고 있다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봐도 비운의 운명으로 태어나자마자 헤어져 부모인지 자식인지도 모르며 살아왔던 모자가 정체 모를 이끌림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안고 눈물을 철철 흘리는 장면을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봐도 혈육의 정은 뗄래야 뗄 수 없이 끈끈하고도 절절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태어나자마자 떨어져 지낸 아이들이지만, 내 아이들과 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큰 아이의 예상 밖의 반응에 나는 무척 놀랐다.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나쁜 거야.”

 

아이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아이가 내게 꼬깃꼬깃 접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내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엄마, 미안해라 적혀 있을 거라 짐작했고 그랬다면 이산가족 상봉의 한 장면처럼 우리 모녀도 부둥켜 안으며 엄마가 앞으로 더 잘해볼게라 말할 참이었다. 상황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피의 당김, 끈끈한 정은 없는 듯 했다. 엄마로서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란 걸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엄마를 바꾸고 싶어하는 어린 딸과 그 말에 상처 받은 엄마. 거기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할 말을 잃은 나는 머리가 아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이의 이런 반응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의 오랜 부재로 인한 아이의 상처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게 자리 잡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곱 살, 아이의 일생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자란 아이들의 서울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곱 살 큰 아이에겐 벌써 세 번째 시도였다. 큰 아이가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는 바로 아이가 두 돌 되었을 때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바쁜 며느리를 대신해 아이를 봐주셨던 시어머니는 아이가 두 돌이 되자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며 아이를 서울로 보내셨다. 한창 프로젝트와 자격증 따기로 바빴던 중급 프로그래머 시절, 나는 늘 지하철 막차를 탔고 주말 출근도 일상다반사였다. 두 돌을 갓 넘긴 아이는 엄마의 바쁜 일정에 맞춰 새벽에 어린이집에 맡겨졌다가 어린이집이 마칠 시간이 되면 옆집 아주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그러니까 한 밤중에 잠든 아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엄마로서 내가 한 일의 전부다. 그나마도 석 달을 못 넘기고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큰 아이는 다시 시댁이 아닌 친정으로 보내졌다. 아이가 좀 더 커서 바쁜 엄마와 함께 살아도 무탈할 때까지 친정 엄마가 아이를 봐 주시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해가 지면 캄캄해지는, 기차를 타고 또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아이가 시골로 가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 번 보던 우리의 만남이 한 달에 한 번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또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을 매주 오가는 것은 엄마인 나에게 무리였다. 아이는 다섯 살이 되자 무작정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다짐한 아이는 똘똘하고 당찬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새벽에 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유치원에 일등으로 등원해서 종일반까지 마치면 또 피아노학원으로 직행했다. 나는 피아노 학원이 문닫기 전까지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모녀가 늦은 시간에 만나 늦은 저녁을 먹고 또 자정까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곤 했다. 아이는 그렇게라도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에 많은 것들을 하고 싶어 했다. 어른인 나에게도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아이는 결심했던 대로 잘 이겨냈다. 감기는 달고 살았지만 이번엔 입원까지 가진 않았다. 하지만 큰 아이의 두 번째 노력도 6개월 이상 가진 못했다.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동생이 태어나 내가 몸조리를 하는 동안 아이는 다시 시댁으로 보내졌다. 이제 막 엄마와 함께 지내는 기쁨을 맛본 아이는 또 다시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일이라는 할머니 말씀을 아이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엄마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큰 아이의 바램과는 달리, 엄마는 동생이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나자 미국 장기 출장 길에 올랐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엄마는 오지 않았고, 동생만 왔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 때 아이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가 혹시 날 버린 게 아닐까?’

 

한번 출장간 사람을 또 보낸다는 출장의 법칙, 나는 미국 장기 출장을 다녀와서 또 중국 출장 길에 올랐다. 아이가 둘이 되자, 시댁에도 친정에도 아이들을 더 이상 맡길 수는 없었다. 나는 상주하여 아이들을 봐주시는 중국인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셨다. 그 분께 두 아이들을 맡기고 나는 출장을 다녔다. 그러고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되고, 분노로 폭발할 때쯤, 나는 병든 몸으로 돌아왔다. 일곱 살 아이의 눈에, 다시 만나게 된 엄마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아이가 배가 고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밥도 챙겨주지 않았고, 동생이 울어도 안아주지 않았다. 양쪽 팔의 통증 때문에 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일곱 살 아이의 눈에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좋은 엄마로 바꿀래!”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기대가 컸다. 평소에 억눌러왔던 엄마와 함께 하고 싶었던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같이 살게 된 엄마는 아이들의 기대에 못 미쳐도 한 참을 못 미쳤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거나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만 우두커니 앉아있는 사람, 꿈에도 그리워했던 엄마의 모습에 실망한 아이들은 그렇게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전문가를 만나야 할 시간

 

큰 아이의 외침에도 여전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던 나는 침대에 누워 두 아이들을 관찰하기만 했다. 작은 아이는 언니인 큰 아이를 엄마로 여기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는 큰 아이가 하는 대로 뭐든 다 따라 했고 큰 아이는 작은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식사 때가 되면 큰 아이는 전기밥솥에서 밥을 뜨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한 상 차려 동생에게 밥을 떠 먹이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세 돌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 ‘엄마’, ‘아빠는 고사하고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언니를 물어댔다.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난 후 쭉 엄마와 떨어져 지낸 아이, 중국인 아주머니가 돌 본 아이라 엄마’, ‘아빠를 부를 이유가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생후 5개월에 옹알이를 시작하여 한 단어 단계, 두 단어 단계 등을 거처 20개월 전후에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고 한다. 아이의 발달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성장과정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섯 살까지 언어 습득이 되지 않은 아이는 안타깝게도 이후에도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개월이 훨씬 지나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작은 아이와 여섯 살을 넘어 일곱 살이 되어도 가족에 대한 개념이 전혀 잡혀 있지 않은 큰 아이가 내 눈앞에 있었다. 침대에 누워 이제 막 백수가 된 신세를 한탄할 시간이 없었다. 벌떡 일어나 육아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워킹맘을 둔 다른 아이들의 사례를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 문제를 꼭 짚어 조언해 줄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였다. 엄마란 도대체 어떤 존재여야 한단 말인가? 풀타임으로 일하셨던 엄마를 둔 덕에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전쟁에 내보내는 전사를 키우듯 스파르타식 훈육으로 키워진 남편에게도, 안타깝게도 바람직한 모성상에 대한 기억은 없는 셈이었다.

 

세 돌이 되도록 엄마, 아빠를 말하지 못하는 아이, 일곱 살이 되도록 가족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이에게 부모로서 우리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는데도 적절한 시기가 있듯, 가족이라는 개념이 형성하는 데도 적절한 시기가 있을 것 같았다. 여섯 살 이후 언어 습득이 어렵다면, 가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듣고 싶어졌다.

 

우리 부부는 소아정신과의 문을 두드렸다. 먼저, 우리가 과연 좋은 부모로서 자질이 있는지 확인 받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소아정신과 의사의 지시대로 인성검사와 심리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시도했다. 다행히 남편도 나도 좋은 부모가 될 만한 조건을 충족했다. 의사는 우리 부부에게 따로 부모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겪은 오랜 기간의 부모의 부재는 아이들의 정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아이들도 검사 받기를 권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둘째 아이는 검사를 받을 수 없었고 큰 아이만 지능검사, 정서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큰 아이도 다행히 아직 문제 행동으로 포착된 건 없었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 애착 상태가 제로로 문제가 심각했다. 큰 아이에게 부모의 존재는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가족을 그려보라는 미술심리치료사의 말에 일곱 살 큰 아이는 자신과 동생만 그렸다고 했다. ‘더 그릴 사람 없어?’라 했더니 없어요라 했단다. 당시 모 방송사의 ‘OO분 부모에 패널로 출연했던 소아정신과 의사가 주말부부를 비유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말부부란 말은 존재하지만 실제로 주말부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함께 살아야 부부지, 떨어져 살면 그건 이미 부부가 아니란 말이다. 성인은 주말부부도 부부라 규정한다. 하지만 주말에만 보는 것으로 부부의 정이 쌓인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경우, 한 달에 한두 번 보는 사람들을 부모로 받아들일까? 그럴 경우, 아이들은 부모로 받아들일 수 없고, 부모로 규정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 큰 아이는 동생 한 명을 자신의 가족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이는 엄마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 애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사랑하지만 항상 자신을 기다리게 만들고 그래서 실망시키는 존재로서의 애인말이다. ‘엄마 바꾸고 싶어란 말은 곧 사랑했던 성인 남녀가 할 법한 우리 헤어져와 같은 말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아정신과 의사는 고민하는 나를 격려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들이 보내는 구조요청 신호에 너무나 둔감하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어 문제 행동을 보여야 소아정신과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부모가 직접 방문한 경우엔 의사가 고마워해야 할 정도다. 주로 가해자가 되어 학교에서 아이를 병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에도 부모는 자녀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아이와 함께 고민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은 잘 자랄 것이라 의사는 확신했다.

 

애착형성 프로젝트

 

부모와의 애착 형성은 이후 맺게 되는 모든 관계 형성의 기초가 된다. 부모와 애착 형성이 안 된 아이는 이후 친구와의 관계 맺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어려움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가정을 꾸린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생 전반에 걸쳐 인간 관계 맺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또한 어떤 형태로든 가족의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이후 학교 생활이나 직장 생활 등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최소단위에서 사회성을 충분히 경험해 보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린 시절 부모자녀 간 관계 형성은 이후 모든 관계 형성을 위한 바탕이 된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비지시적 카운슬링의 창시자, 로저스는 초기 관계형성을 위한 주요 태도로 진정성, 공감,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의 3가지를 든다. 진정성이란, 솔직함과 다른 개념으로 자신의 민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공감은 분화된 감정으로 상대방의 내적 준거에 공감하는 것을 말한다. 초보 엄마로서 내가 내 아이들과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무조건적인 긍정의 자세로 아이들을 포용해야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항상 그 자리에 늘 같은 사람으로 존재해야 되는 것이다.

 

부모로서 무언가를 가르치기에 앞서, 보듬고 수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해를 부모와 함께 하지 못한 아이가 부모와의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일곱 해가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다가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면 또 한번 아이들에게 실망감만 남기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래 지속하기 위해 짧은 시간 집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중요한 것은 일정한 요일의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아이들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그 자리에 늘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해도 예를 들어 월요일 3시부터 5시까지는 반드시 놀아주는 사람은 되어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엔 먹지도, 화장실 가지도, 전화 받지도 않을 정도로 아이와 노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의 주도권을 오롯이 아이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놀이에서, 아이가 감독, 엄마는 배우여야 한다. 칭얼대는 갓난아이가 모자 관계의 주도권을 쥐듯, 아이와의 초기 관계형성에 있어 아이에게 주도권 넘기기가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 짧은 시간이지만 온몸으로 놀아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이를 위한 일이라지만 주도권을 완전히 아이에게 넘긴다는 것이 특히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효과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아이들은 엄마와 하는 놀이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고 게임의 룰을 지키는 것도 아이들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놀이가 아이들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내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다란 말은 맞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아이들과 이 힘든 과정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일년쯤 지나자 나와 아이들 사이에 애착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도 나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끈끈하고 절절한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

 

애착 형성이 되었다면, 이젠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차례다. 부모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줄줄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관동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감현수 교수는, ‘부모는 진정한 어른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모로서 금기해야 할 목소리로 하라, 하지 마라의 명령의 목소리,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의 소망의 목소리, 나에게 이렇게 해달라의 부담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모라면 자녀와 진정한 어른의 목소리로 대화하여야 한다. 엄마의 따뜻함과, 아빠의 자상함,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족의 최소한의 규칙이 있을 때, 자녀는 용기 있고 자신감 있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가 진정한 어른일 때, 자녀는 잘 성장할 수 있다. 나를 진정한 어른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질문이다. 난 진정한 어른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나? 아이들에게 말하기 앞서 내 목소리를 들어 본다. ‘하라, 하지 마라’,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온통 부담의 목소리 일색이다. 난 내가 진정한 어른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덜 자란 어른이란 걸 인정해야만 했다.

 

부모로서 성숙하지 못한 목소리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삶을 이끌어줄 가치는 더욱 절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위대한 가치를 배울 것인가.  <아이를 읽는다는 것>의 저자 한미화는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두렵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힘,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배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설혹 거짓을 말했더라도 잘못임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삶의 주인은 나라는 진리를 우리는 책을 통해 만나고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책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런 가치를 배울 수 있다. 부모로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을 고르는 선택권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각자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고르면 나는 읽어준다. 그렇게 아이들 뒤에서 아이들이 직접 고르는 책을 보다 보면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의 책을 여러 권 읽어줬다면 아이들이 선택한 책들과 연계하여 엄마가 고른 책을 두세 권 정도 더 읽어준다. 그런 다음엔 아빠가 더 생각할 거리들을 일러주는 방식으로 함께 읽기를 진행했다. 매일 저녁 아이들이 잠잘 준비가 되면 엄마인 나는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준다. 상대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아빠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나누기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집의 최소한의 규칙이다.

 

부모로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과 어른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골라 온 책들을 읽어주며 좋은 책을 통해 작가나 책 속 등장인물의 목소리로 내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과 같았다. 애착 형성 프로젝트 이후 함께 읽기를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흐뭇한 경험이었지만 나도 남편도 좋은 책들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통해 배운 것이 더 많았다. 그렇게 온 가족이 다 함께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는 경험은 내가 했던 어떤 일보다 높은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열한 살, 일곱 살 아이들

 

일곱 살 큰 아이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고, 세 살 작은 아이는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 지도 만 4년이 다 되간다. 작은 아이는 언제 말을 못했나 싶을 정도로 말을 잘 하는 아이가 되었고, 가족 구성원 모두 언제 떨어져 지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단란한 가족이 되었다.

 

엄마, 내가 진짜 그랬단 말이야? 엄마 상처 많이 받았겠다. 지금은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그 말은 이제 잊어줘.”

 

큰 아이는 엄마를 바꾸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인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건 절대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꽁꽁 묻어두지 말고 끄집어 내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포착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가족이 고민하고 다 함께 행동해야 한다. 부모도 아이들도 모두 미숙한 존재다. 서로 존중하며 서로로부터 배우고 알아가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그 길엔 좋은 책들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꿈 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 꿈꾸지 않으면 (한국 동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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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7:23:37 *.70.27.42
우와~~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샘이 터지니 이제 걷잡을 수 없네^^
어찌 이리 기나긴 이야기를 한달음에...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이 실감나는 성숙한 큰 딸 함 보고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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