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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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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04시 04분 등록


얼마 전, 일본의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챕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미타는 말했다.

"기노 씨는 제 스스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잘 알아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도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런 공백을 샛길처럼 이용한 자도 있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기노는 이해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가미타는 기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길게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답은 그리 간단히 나오지 않겠지만."

 "가미타 씨 말은, 내가 뭔가 옳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가요?"

 가미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기노 씨 한 사람만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도 미리 눈치챘어야 했어요. 내가 방심한 탓도 있습니다. 분명 여기는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거하기 좋은 장소였던 것이지요."

 "내가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되죠?" 기노가 물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_기노 편 중에서

 

뒷이야기를 하자면, 나쁜 징조들이 보이던 터라 주인공 기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손님 가미타의 권유를 받아들여 운영하던 카페를 떠납니다. 기노가 왜 떠나야 했는지, 가미타는 무엇을 알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랬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이해를 못해 뭔 일이야? 하고 말았지요.

홈페이지에 올라온 연구원 지원자의 심정과 우리 변화경영연구소를 걱정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에 앞서 연구원 11기 모집 철회 글이 있었지요. 개인적으로 11기 모집이 놀랍긴 했지만 이왕 결정한 것 잘 진행되길 바랬는데 안타까웠습니다. 밴드에 올라온 인건님의 안타까운 심정의 글을 읽고 나서 위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뭔가 생각을 해보게 하고 양심에 찔려 한 번 더 읽었던 부분이지요.

 옳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화 내용처럼 답이 간단히 나오지 않는, 길게 생각해 볼 내용이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준수하게 잘 지내면 괜찮은 사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옳은 일을 하지 않은 것도 나쁜 일이라니요. 변화경영연구소의 저의 자세를 되돌아 보게 되더군요. 나 아니어도 누군가 잘 이끌어줄 것이라는 기대, 방관자적 자세, 나는 한 발 뺐다가 기회가 되면 두발 올려 타려고 하진 않았나, 이런 저런 생각을 소설과 현실을 오가며 하다 보니 작가가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주인공이 옳은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도 유추해 낼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기노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집을 나와 돌아가지 않았지요. 바로 사표를 내고 가게를 맡아 달라던 이모에게 가서 카페를 차려 운영합니다. 그 사이 이혼합니다. 카페의 분위기는 동네와 잘 어울려 단골로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겼지요. 가미타도 말없이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던 단골손님입니다. 둘 다 말이 없었기에 개인적인 것은 아는게 없었지요. 그런 가미타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난 기노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여행을 합니다. 떠나기 전 며칠 동안 불길한 일들이 엄습한 분위기 였기에 바로 떠났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말 것, 도시를 상징하는 엽서에 어떤 글도 쓰지 말고 이모에게 보낼 것이라는 여행 규칙도 명심하여 잘 지킵니다. 숨은 듯이, 엽서에 조차 아무 말도 못하며 여행 하던 중 오열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나는데, 그 괴로움과 좌절, 원망은 진작 겪어야 했던 분노였던 거지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음에도 분노와 실망, 상처를 표출하지 않았고 그런 감각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아니 철저히 눌러 놓은 채 무감각하게 일상을 이어 갔던 것이지요. 기노는 그때서야 압니다.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 받지 않았으며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결정적인 감정을 억눌러버렸다는 것을요.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였으며 그로 인해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모의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상처를 대면하게 한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기노가 누군가에 쫓기고 있나 싶어 긴장했는데 그런 치유의 여정이었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기노는 분명 깊은 내면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누구나 머물기 좋아하는 카페를 오래오래 운영했을 겁니다. 

물론 이 소설은 감정을 직시하지 않고 방치한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우리 변화경영연구소를 생각할 때 다시 떠올랐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아니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게 맞겠네요.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은 방관하기, 잘 놀 수는 있으니 누군가 기획하고 유지해 주길 바라는 마음, 내가 뭐라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나서주길 바라기 등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자신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그닥 크게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지요. 그것을 나쁘게 이용하지 않고 옳지 않을 일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잘 하고 있다고 여기지요. 그러나 변화경영연구소 지속성에 대한 문제 앞에서는 그것이 옳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변화경영연구소 활성화를 위해서는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영위하기가 힘든 공간이기 때문이죠.

주인공이 분노과 절망에 대해 직시하지 않고 지나간 것이 문제가 된 것처럼 우리의 침묵이, 나서지 않음이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아니 나는 변경연에 대한 마음이 애틋합니다. 스승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뿐 아니라 변경연의 가족들, 연구원과 꿈벗, 변화경연연구소 홈페이지 이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내가 눈을 감을 때 스승님을, 변화경영연구소를 떠올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간디에게 삶의 깨우침을 준 것이 마리츠버그 역이었다면 저는 이곳, 변화경영연구소와의 만남입니다. 세상에 사람 많고 많지만 변경연 사람들만이 꿈을 이야기 하지요. 나에게 변화경영연구소는 그나마 영혼이 돌아오는 공간입니다. 나는 스승님처럼 깊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 깊은 인생이라는 것이 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루어야 할 목표도 아님을 압니다. 깊이라는 게 끝이 없으니 그 과정이 즐거워야 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겠지요. 그 여정에 변화경영연구소가 없다면 무슨 기쁨이 있을까요? 오직 변경연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인걸요.

얼마 전 나는 스승님은 왜 연구원 과정에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과연 스승님이 돈을 받았어도 이렇게 존경하였을까?

스승님은 늘 공헌력을 강조하셨지요. 가진 것이 없는 나로서는 그 공헌력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공헌력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니 스승님의 깊은 뜻은 알 까닭이 없었지요. 재능을 기부하고 사람을 얻고자 하셨으며 스승님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연구원을 지도 해주고 돈이 아니라 재능과 지식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사회에 공헌하시는데 그 가치를 두셨던 것이지요. 또한 변화경영이든 공헌력이든 그 베이스는 언제나 자발성이었죠. 변화경영연구소라는 간이역에서 묵묵히 자발성을 기다리셨지요.

지금 우리는, 아니 나는 스승님 흉내를 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자발성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공헌력을.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지요.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가 아름답게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구소 발전을 위해 공헌하겠습니다.

 

5기 연구원 류춘희

IP *.1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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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13:48:21 *.131.89.251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제목 자체가 눈에 띄었습니다. '기노'편은 팟캐스트로 들었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는 자신에게 닥치는 악을 막아낼 수 없다라고 생각했지요. 가미타라는 이름을 들을 때, 소설 속에 나온 조용하게 가끔씩 와서 밥을 먹고 졸고가는 고양이를 생각했습니다. 그 고양이가 있는 동안에는 카페에 무슨 말썽이 없었으니까요. 가게를 지켜주는 수호 고양이가 현신한 것이 가미타라는 인물이라고 여겼지요. 가미(카미=神)으로 알아들었거든요. 가미타가 도와준다고


아참, '여자 없는 남자'는 우리 변경연의 모습 같기도 해요. 소설과는 상관없이.... 여자 없이 남자 혼자 새 생명을 낳지는 못하니까.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남자 없이 여자 혼자 생명을 낳지 못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변경연엔  여성적인 면이 좀 부족하다 싶어요. 

큰 일을 도모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자질구레하고 삶이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많아져야 하는 데, 이런 것들은 여성적인 것들이 많다고 봐요. 


죽음과 생성은 삶에서 같이 일어나야 하는데, 스러지는 것은 있는데, 새 생명은 태어나질 않고, 어린 것은 잘 자라도록 먹이고 따뜻한 손길로 ..... 그게 좀 부족했던가 싶네요.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 불러 모으고, 같이 놀고 싶은 사람 여기 붙어라 하고 모아서 놀고,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그거 같이 하고 그랬으면 합니다. 자발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일지는 몰라도, 이게 공헌이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자기가 놀고 싶어서 여기서 판을 깔아서 노는 것이라면 딱 그거면 좋겠습니다. 만나고, 밥먹고, 놀고,.... 참여하는 것 자체가 공헌이라면, 그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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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9 19:07:05 *.70.14.224
처음에는 제목때문에 무슨 서평인줄 알았는데...변경연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있네요. 저도 많이 공감합니다. 그래도
4월에는 선생님 추모제와 전체총회가 있으니, 많은 나눔과 선택이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얼굴 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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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01:45:07 *.70.59.158
춘희야 오랜만이다^^

이 글을 이제서야 읽게되다니 나 역시 내 삶의 고민때문에 간이역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에 미안해지는구나

춘희가 마니 깊어졌음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고 동시에 우리 변경연 사람들 모두가 깊이 새기고 곱씹을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느꼈다

너와 같은 마음과 사랑을 간직한 이들이 변경연에 많음을 알기에 난 걱정하지 않는단다

언제 올만에 회포를 풀며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꾸나 사랑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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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23:48:27 *.12.30.103

기찬오빠, 반가워~

변견연에 좋은 사람 가득하고 이 공간에 대한 마음은 누구나 애틋하기에 잘 되리라 믿어.


먼저 손 내밀어 주어 고맙고.....

그래요..언제 함 만나.  술은 내가 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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